묵상자료 42(2000.11.19, 일요일)
성경말씀 : 창 17:1-8.
찬송 : 408장.
제목 :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길 기도드립니다.
2. 제가 대학에 입학하였을 때, 교수님 한 분이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는 말씀을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유명한 책이었던 E. H. Carr가 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가 이제 30년이 지나서 다시 역사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역사가 무엇입니까? 제 자신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사전에서는 “과거에 있었던 일과 그 기록”이라고 말합니다만, 일반적으로는 역사란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역사란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며, 계속해서 역사는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역사를 가지게 되며, 동시에 자기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간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원하든 원치 않든 모든 사람들은 역사 만들기에 참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역사에는 자랑스럽고 빛나는 역사가 있는가 하면, 부끄럽고 어리석은 역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어떤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일까를 생각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난 봄에 지원용 박사님께서 저에게 큰 제안을 하셨습니다. 아마도 제가 쓴 [옥수동루터교회 30주년 기념 사료집]을 재미있게 읽으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자료들을 다 제공할 테니까 한국 루터교회의 역사적인 자료들을 정리해 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완곡하게 거절하였습니다. 제가 그런 일을 하기에는 문제가 많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우선 역사를 제대로 공부한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이 제일 먼저 손을 들고 막아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객관적인 자료들을 수집하기 위해서는 시간도 필요하고 많은 사람들의 협력도 받아야 공정한 역사 자료를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인데, 현실적으로 벅차다는 뜻을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그 때 우리의 교단 역사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누군가는 그 일을 반드시 하게 될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우리들의 오늘의 삶에 대해서 얘기할 사람이 나올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3. 오늘 본문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언약을 맺는 역사적인 사건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우리들로 하여금 중요한 깨달음을 주고 있습니다. 아흔 아홉 살된 아브라함과 전능하신 하나님 사이에 미래 지향적인 언약을 맺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요약하면, “너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나와 내 후손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면도 동시에 나의 후손들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어제뿐 아니라 오늘과 내일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런 약속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맺어졌는데, 오늘 본문 바로 다음 구절들, 곧 할례의 제도가 이런 약속의 구체적인 후속조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할례 받은 자국을 바라볼 때마다 우리에게는 야훼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으로 계시다는 것과, 우리는 더 이상 작은 무명의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엄청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부를 때,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구체적으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으며, ‘엘리야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모세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이 믿었던 하나님은 개인적인 하나님이 아니고, 과거의 역사 속에 일하셨던 하나님이며 동시에 오늘 우리들과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우리 인류가 죄악 가운데서 살면서도 파국으로 가지 않고 위기를 헤치면서 오늘까지 삶을 지탱하고 있는 이면에는, 역사의식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에 죄인이 되지 않도록, 역사에 오점을 남기지 않도록 하겠다는 그래도 작은 양심이 살아 있었다는 말입니다.
4. 우리는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은 좋은 역사를 쓰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경주해야 합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우리가 짊어질 몫을 감당하였다고 하는 그런 최후
변론을 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소개 드렸던 역사학자 E. H. Carr는 좋은 역사를 쓰기 위해서는, 과거에만 매달리는 추억 속에 머무르게 하는 낭만적인 자세도 버려야 하고, 현재만을 강조하는 자세는 과거와 미래를 단절시키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과거가 무참히 깨트려져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는 현재 중심으로 되고 마니까, 가장 이기적인 자세로 인생을 살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카는 제안하기를 좋은 역사를 쓰려고 한다면, 다시 말하면 좋은 역사를 만들려고 한다면, 과거와 현재 사이에 끊임없이 대화해야 하고, 동시에 현재와 미래의 이상적인 목표 사이에도 대화가 부단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과거 없는 현재가 없습니다. 바람직한 현재를 만들려면 과거와의 냉철한 비판적인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부끄러운 과거를 얼버무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동시에 바람직한 미래를 생각하면서 오늘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요사이 세간(世間)에서는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놓고 뜨겁게 갑론을박(甲論乙駁)을 하고 있습니다. 한 편에서는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하는 분들이 건재하고 있습니다. 반만년 가난의 탈을 벗어 던지게 만든 근대화의 기수라고 추켜세웁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는 민주주의를 후퇴시켰을 뿐 아니라 인권을 유린한 비민주적인 독재자로 규정합니다. 이런 극단적인 평가는 역사에 대한 인식의 차이일 수 있습니다만, 자세히 따지고 보면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가 단절된 한 현상을 노출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굴절된 미래를 만드는 위험한 일을 만들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박정희씨에게는 공과(功過)가 있습니다. 그것을 분명하게 집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한쪽에서는 功만을 생각하고, 다른 쪽에서는 過만을 생각하니까 해답이 없는 끝없는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정부가 지원한다면 꼭 조건을 달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반드시 공과를 사실 그대로 명확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새마을 운동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고, 근대 공업국가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고속도로나 포철 등 기반시설을 어떻게 구축하게 되었는가를 전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어떻게 3선 개헌을 하였으며 유신헌법을 만들었는지, 그 결과 18년간이나 철의 정치를 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얼마나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는지를 소상하게 밝혀서 후세의 사람들이 그것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끄러운 것은 다 빼 버리고, 좋은 점만을 부각시키는 것은 역사를 오도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칭찬할 것은 다 감춰버리고 흠집만을 드러내는 것 역시 미래의 역사를 위해서 결코 옳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5. 우리는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과거가 자랑스럽든 부끄럽든 간에 굴절 없이, 또는 여과과정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오늘 우리들의 현실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관련지을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서, 바람직한 미래를 위해서 이제 부터라도 부끄러운 역사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오늘 우리의 삶을 적극적으로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오늘 우리들의 삶이 우유부단하다든지 아니면 신앙과 양심에 부끄럽게 살아간다면, 반드시 우리들 후배들 혹은 후손들에게 아픈 상처를 넘겨줄 수 있는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모두가 역사가 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특히 이제 42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루터교회는 여러분들에 의해서 쓰여진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눈앞에 있는 사소한 이해관계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좀 더 멀리 내다보고, 좀 더 큰 목표를 세우고 달음질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우리들 후손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조상들의 하나님이시면서 그리고 우리 후손들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현재와 미래를 함께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6. 항상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느냐를 얘기할 때마다 걸림돌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 그러므로 사람은 너무 나서는 것은 인본주의가 된다.”는 사람의 역할론에 대해서 오해가 없기를 바라면서 한 줄 더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관용구를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우리들 기독교인의 존재방식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성서학자들은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동시에 “은혜 아래서”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는데, 우리가 사람구실을 하며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전제하에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아무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들에게 넘치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말라”(고후6:1-2)고 하였으며,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거룩하라.”(고전3:16-17) 이런 구절들을 수도 없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고, 또한 우리들이 맡은 일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본캄이란 학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상호보완적(相互 補完的)인 것이 아니라, 상호 근거적(相互 根據的)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 사이에서는 서로 보충하는 관계를 맺는다고 하겠으나,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는 서로 서로에게서 근거를 제공하는 관계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이 할 모든 것을 하시니, 인간들도 자신이 해야 할 모든 것을 한다.”는 것입니다.([바울, 그의 생애와 사상], 허혁역, 이대출판부, pp.269-272)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하실 일을 하십니다. 구원을 위해서 일하실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에 일꾼으로 부름 받은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책임적으로 수행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7. 오늘 아침에 보내드리는 묵상자료는 어제 저녁(11월18일) 루터교회 장로 연합회 모임에서 한 설교문을 수정한 내용임을 밝힙니다. 오늘 저희 교회에서는 추수 감사절을 지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새천년의 첫 해를 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릴 제목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총을 오는 목요일에는 용미리에 있는 무의탁 노인들 110명과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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