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323호 (2013. 3. 18. 월요일).
시편 시 78:26-29.
찬송 410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한 여자가 말했습니다. “어떤 남자의 경우에는 자신이 왜 사랑받지 못하는지 영원히 알지 못할 거라고.” 그 말을 들으면서 오래 전에 봤던 드라마속의 한 장면이 떠올랐어요. 일제 강점기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서울로 유학을 간 남편이 여름 방학을 맞아서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마중을 나온 아내를 보자마자, 짐 가방부터 들리고 휘적휘적 앞으로 걸어 나갑니다. 무거운 가방을 든 아내는 말없이 남편 뒤를 따라갑니다. 남편은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평소의 제 걷던 속도대로 걸어가고, 아내는 무거운 가방을 힘겹게 들고 겨우겨우 쫓아가지만,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집니다. 두 사람은 분명히 같은 곳을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초여름 싱싱한 초록으로 무성한 플라타너스 길은 참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과연 같은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내라는 이름으로 들어야 하는 무거운 가방 속에는 여러 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생계와 가사, 육아가 들어있고, 친정과 시댁도 들어있고, 이루고 싶은 꿈과 희망도 들어 있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가방은 점점 더 무거워집니다. 이렇게나 무거운데, 함께 들어주지 않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무거운데 함께 들어주지 않는 걸 보면,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같습니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는 일도 뜸해지고, 대화가 단절되기 시작합니다. 남편은 아내가 힘들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 이유에 대해선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아요. 자신은 가정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으며, 예전 같지는 않아도 아내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답답하기는 남자도 마찬가지예요. 지금까지 사랑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은 필요한 남자가 되는 법이었고, 오로지 그것을 위해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글쎄요. 아직도 더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의외로 많은 남자들이 여자에게 사랑받는 법을 알지 못한 채 쓸쓸해합니다. 이럴 때 로맹 롤랑의 소설 [장 크리스토프]에 나오는 대목은 정곡을 날카롭게 찌릅니다. 크리스토프가 사랑하는 여인이 그에게 말하지요. “당신은 좋은 분입니다. 하지만 남자예요.
아무리 부드러워도 모든 남성들처럼 고집이 있어요. 자기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전연 이해를 못합니다. 남자들은 자기 옆에 있는 여자들의 일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아요. 남자들은 여자들을 자기 나름대로 사랑해요. 하지만 그녀들을 이해하려 들지는 않아요. 간단하게 자기만족을 취하고 있어요. 남자들은 여자들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아, 우리 여자들이 이따금 몹시 고민하는 원인은, 남자들에게 조금도 사랑을 받고 있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남성들이 어떻게 사랑하느냐? 가장 여성들을 사랑해 주는 남성들에 있어서, 도대체 우리가 무엇인가 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신다면, 문제는 없을 거예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3년 2월 12일 방송>
2. 토기장이 비유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을 만든 토기장이에게, 왜 나는 천한 그릇으로 만들었느냐고 따져볼 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찌하겠습니까? 크고 작은 그릇과 귀하게 쓸 그릇과 천하게 쓸 그릇이 필요한 이상, 그 필요에 따라서 만드는 것은 토기장이의 뜻이며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우리 자신이 어떤 그릇으로 만들어졌고, 그래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자기 발견보다는, 왜 나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고, 술주정뱅이를 아버지로 두었는지에 대해, 부화를 끓이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우리 운명에 대한 궁금증은 이 토기장이 비유로 끝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놀라운 진리에 눈을 뜨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 구실하지 못하는 그릇들을 깨트려버릴 수도 있는 권리가 토기장이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깨트리려고 마음먹은 그릇들을 깨트리지 않고 오래 참으실 뿐 아니라, 오히려 자비의 그릇으로 삼아 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토기장이로써 마음에 들지 않으면 깨트려버리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깨트림의 대상인 그릇을 오히려 사랑의 그릇으로 삼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우리들이 그 자비의 그릇이 되었다고 하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가지시겠습니까? 갑자기 “왜 날 사랑하나?” 라는 찬송이 떠오릅니다. 사랑받을 아무런 자격도 모습도 아닌데 말입니다. 오늘 찬송이 저의 마음이고 여러분의 마음이기를 간절히 바래 봅니다.
3. 태백 황지교회 목사님은 좋은 목사님이셨습니다. 배운 대로 실천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숙제와 시험은 물론 독서보고서 뿐 아니라, 규칙을 잘 적용하셨습니다. 즐거운 졸업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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