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392호.
시편 시 93:1-5.
찬송 286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착한 사람의 걸음걸이는 배가 물에 흘러내리듯 하여, 몸은 신중하고 다리는 가벼우며, 소인의 걸음걸이는 불이 타오르는 듯하여, 몸은 경솔하고 다리는 무겁다.” 조선후기 실학자인 최항기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사람의 성품이 가장 잘 들어나는 부분이 바로 걸음걸이라는 건데요. 어떠세요? 공감하세요? 물이 흐르듯 걷는 사람하고, 불이 타오르듯 걷는 사람, 구체적으로는 뭔지 잘 모르겠지만, 대략 어떤 느낌을 말하는지는 알 것 같습니다. 그건 억지로 꾸미거나 숨길 수 없는 거라고 하는데요. 내 걸음걸이는 그럼 과연 물 같을까? 불같을까? 문득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KBS FM 1, 풍류마을, 2013년 2월 20일 방송>
2. 오늘은 성삼위일체 주일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주제 중의 하나가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신 세 위를 가진 분이나,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우리는 이 삼위일체 신앙을 가지는 것입니다. 삼위요 일체 이신 하나님을 잘 알고,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주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22-28절).
우주의 기원에 대한 대표적인 이론은 <창조론>과 <진화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창조론>을, 우연과 허무를 생각하는 이들은 <진화론>을 주장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우주에는 절대적인 존재가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분이 온 우주를 정교하게 지으실 뿐 아니라, 다스리고 계시다고 믿고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런 창조론이나 섭리론의 약점은, 증명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 기독자들은 그 절대자를 야훼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는 때문입니다. 세상이 우연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하는 것만큼, 큰 슬픔과 절망은 없을 것입니다. 계절의 변화나, 철새들의 이동행태, 밀물과 썰물 등, 예측 가능한 우주의 운행은 결코 우연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 보다, 절대자의 섭리로 믿는 것이 지혜로운 자세일 것입니다.
죄와 죽음에서 세상을 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요 3:16).
아름다운 세상, 조화로운 낙원 같은 세상이 어느 날 갑자기 지옥 같은 세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성경의 말씀입니다. 그것을 인간 조상들의 타락이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그 타락의 출발점을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라고 진단합니다. 온갖 좋은 것들을 누릴 수 있는 단 하나의 조건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은총을 포기할 만큼 불순종으로 향한 원인은 놀랍게도, 하나님과 대등해지려는 힘에의 의지(Will to Power)였던 것입니다. 피조물의 반란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죄와 죽음이 그 형벌로 씌워진 것입니다. 누구도 풀 수 없는 저주였습니다. 이런 단단한 사슬을 끊어버리기 위해서, 성자 예수님께서 구세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죄와 죽음 아래 신음하는 세상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의 형벌로 그 저주의 사슬을 끊어주신 것입니다.
성령의 지도를 받으며 사는 것이 참 신앙입니다(요 14:26-27).
요즘 멘토라는 말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누군가 자신의 삶을 하나하나 간섭하고 지도하는 스승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막막한 순간을 만날 때, 이게 바른 길이라고 가르쳐 줄 스승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는 때문일 지도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오래 전에 이런 멘토가 계셨습니다. 그것도 그 신원(身元)이 확실하게 보장된 분이라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할까요? 우리 주님이 추천하신 분, 바로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보혜사라는 헬라어 παρακλητος는 “남을 돕기 위해서 나타난 자”, 혹은 “돕는 자” 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님이 계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천군만마를 거느린 것보다 더 힘이 솟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님께 우리의 삶을 의탁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 보다 더 건강하고 자랑스러운 삶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3. 오랜 묵상식구를 정리하는 것은 마음이 아프지만, 네 분을 떠나 보냈습니다. 성실한 독자이기를 포기했으니까 제 탓은 아닙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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