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004(2020. 7. 20. 월요일).

시편 93:1-2.

찬송 50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보통 향기란 꽃이나 향에서 나는 좋은 냄새를 말하는데, 사람을 통해 전해지는 향기도 있지요. 고등학교 3학년 때 창업동아리 정식 법인 회사를 만든 어느 스무 살이 된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버는 만큼 나눔을 실천하고 사회적 약자가 없는 도시를 만드는 게 꿈이라는 그. 소비자가 유아복을 한 벌을 구입하면 고객의 이름으로 다른 한 벌의 유아복을 보육원 아이에게 선물하는 형태로 사회에 기부하고 있는데요. 덕분에 고객 입장에서는 자신이 필요한 옷을 사는 것만으로 기부에 참여하게 되니 기분 좋은 일이지요. 다른 상품 역시 제작 자체를 사회적 약자에게 맡겨 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판매 수익금을 다시 시설에 기부하는 형태로 진행됩니다. 중학교 시절 3년 동안 보육원 봉사활동을 하던 당시에, 보육원 아이들이 누구에게나 당연히 주어진 권리조차 침해받고 있는 걸 보며 마음이 아팠다고 하는데요. 아동인권 조례에 따르면, 모든 아이들은 자신의 옷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는데, 전해진 옷을 분배해 주는 대로 입는 아이들을 보면서, 계속 마음이 쓰였고, 크기도 맞지 않은 헤진 옷을 입고 있는 아이를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하고 끊임없이 의문을 갖게 됐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등학고 1학년 때부터 아는 분이 운영하는 중국 공장의 물건을 수입 판매하는 중개 무역으로 돈을 모으고, 어릴 때부터 받은 용돈과 세뱃돈 어머니에게 빌린 것 합쳐서 자본금을 만들고는, 창업 동아리 친구들을 설득해서 사업을 시작한 건데요. 여행도 가고 싶고 놀고 싶기도 한 스무 . 아이들의 행복한 얼굴을 볼 때마다 보람을 느끼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지가 생긴다니, 보는 이의 마음도 흐뭇해지지요. 지역의 많은 고등학교들도 공동구매를 통해 어린이 돕는 일에 동참한다고 하니, 사회적 약자가 없는 도시 그리고 그런 도시에 기여하는 기업을 만들겠다는 의지와 더불어, 이미 주변으로 조금씩 퍼져나가는 사람의 향기가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6816일 방송>

 

2. “정의의 종(16-23)”을 읽었습니다.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 가운데 아주 치명적인 것은 이분법적인 사고, 혹은 이원론적인 사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율법과 복음, 혹은 도덕과 은총을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대체로 이런 이해는 지나친 강조 때문에 생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율법을 티끌처럼 홀대하거나, 은총을 강조한 나머지 선행을 무시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 틀렸다는 식의 양비론(兩非論) 적 주장이나, 그 반대인 모두 옳다는 식의 양시론(兩是論)적 주장은 더욱 나쁜 강조라 하겠습니다. 저의 묵상을 가까운 친구들에게 전해주는 묵상식구들이 제법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어느 분의 블러그를 방문해 보았는데, 그 분은 제가 로마 가톨릭 교회나 불교의 일화 등을 소개할 때는 못 마땅한 듯 아예 그 부분만 쏙 빼 버리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종교를 아예 부정하듯 대하는 것은, 함께 살아갈 이웃에 대한 예의가 아닐 뿐 아니라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같은 다원주의 시대에 서로 다른 종교인과 서로 다른 인종이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서는 더욱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점에서 주의 깊게 읽어야 할 내용입니다. 율법과 복음 혹은 율법과 은총은 서로 대립적으로 이해할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상호보완적인 듯 해석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율법과 복음은 모두 그 뿌리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작되는 때문입니다. 믿음과 선행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선행은 아무 가치도 없는 듯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훌륭한 믿음에는 반드시 선한 삶을 살아야 하는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 개신교회가 비판을 받고 있는 점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입으로는 사랑을 외치는데 실제 생활은 미움과 증오로 가득 차 있는 삶을 살고 있다니 말입니다. 그 결과 믿음을 가지기 전보다 더 나쁜 인성과 덕성을 가진 사람으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아래서 살아가는 사람은, 좀 더 도덕적으로 고양된 삶을 살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올바른 삶 또는 정의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정의의 종이 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가령 성결을 강조하는 교회 지도자라면, 군사쿠테다로 정권을 잡기 위해 삼청교육대를 운영한 독재자를 영웅으로 칭송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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