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132호(2023. 8. 22. 화요일).
시편 시 14:1-3.
찬송 410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기억은 끝내 잊혀지지 않기도 합니다. 긴 시간과 남루한 일상이 선명했던 추억을 점점 빛 바라게 할지라도 말이지요. 이젠 얼굴마저도 기억 속에 흐릿해 졌지만, 언젠가 받았던 마음의 통증은 마치 어제일인 것처럼 생생히 떠오르곤 하지요. 몇 번의 꽃이 피고 또 그 수만큼 꽃이 지는 것을 보고 난 뒤에도 말이지요. 그렇기에 시인은 꽃이 지기는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라 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음의 시간이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늘 같은 속도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사랑을 뒤로 한 이들의 마음은 꽃이 지는 걸 바라보는 쓸쓸함과도 닮아 있습니다. 이 시는 1994년 발표된 최영미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시인은 한 인터뷰에서 이 시 <선운사에서>를 선운사에 가보지 않고서 썼다고 말을 합니다. 동백이 꽃 송이채 땅에 뚝뚝 덜어지는 그 모습을 보지 않고도, 이처럼 애상적이고 처연한 시구를 완성할 수 있음이 조금은 놀랍습니다. 어쩌면 시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를 쓰기 위해 조았던 언어가 아니라, 보지 않고도 그려낼 수 있는 하나의 생생한 이미지 같은 것 아닐까 합니다. 최영미 시 임준희 곡 <선운사에서>이었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년 8월 22일 방송>
2. “벳새다의 소경(22-26절)”과 “베드로의 고백(27-30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다양한 신앙적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또한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에 대해서 배우게 됩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을 때, 흥미를 기대하거나 과학적인 지식을 얻을 기회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더구나 성경을 기초로 하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거나 좋은 회사에 취직하기를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물론 신앙생활이 사람의 의지나 노력을 격려하고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성공을 위해서라면 교회 안과 밖에 있든 상관없이 누구나 자신의 노력과 인내와 의지로 그 목표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한번은 제가 지도하는 부산 YWCA 성경반에서 자녀교육에 대한 경험담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때 한 권사님의 교육방법이 많은 관심을 끌었습니다. 남매를 둔 분이셨는데, 아들은 서울대 의대에 그리고 따님은 이화대 의대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 권사님은 고3이 되었을 때, 공부하는 아이들과 함께 같은 방에서 지냈다 합니다. 뜨개질을 하면서 말입니다. 공부를 하던 아이가 피곤해서 책상 앞에 엎드리면 조용히 아이들의 방에서 나오는 것이 전부였다 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모두 공부를 잘 했다고 얘기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어머니의 그런 모습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공부 잘하라는 말은 안 해도, 어머니가 함께 고생을 하는 이유를 아이들은 잘 알게 된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권사님은 매일 아침 가정예배를 드리셨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벳새다에 이르셨을 때 이미 소경 한 사람이 여러 사람과 같이 와서 고쳐주시기를 청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매우 촌스러운 방법으로 그를 고치시는 장면이 연출됩니다. 그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나가셨고, 그의 두 눈에 당신의 침으로 이긴 흙을 바르시고,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어렴풋이 나무 같은 것이 보이고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다시 그의 눈에 손을 대시니, 그가 성한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저 마을로는 돌아가지 말라.” 말씀하신 후 집으로 보내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소경을 눈뜨게 하신 일은 천지가 개벽해도 안 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소경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일어난 이 엄청나 사건을 널리 알리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야 마땅하겠거늘, 주님은 어찌하여 그럴 기회를 원천 차단하고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게 하신 것일까요? 이런 질문이야말로 우리들의 신앙이 한 뼘씩 자라날 수 있는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자신의 눈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갔을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틀림없이 쏟아지는 질문들 중에는 어떻게 하셨느냐? 일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침을 뱉어 흙을 이겨 눈에 바른 일, 그리고 자신의 눈을 만져주신 일 등이 화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온통 치유과정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 채울 것입니다. 어쩌면 자신도 평범한 다른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게 되었다는 기쁨과 함께, 곧 바로 그 이웃들처럼 온갖 세상 걱정들에 파묻혀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달랐습니다. 누구보다 기뻐할 가족들을 만나게 하셨고, 그리고 조용한 시간을 갖도록 하신 것입니다. 삶을 대하는 자세를 바꾸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왜 그리 하셨을까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왜? 왜? 왜? 하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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