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602호(2024. 12. 4. 수요일).
시편 95:9-10.
찬송 40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변증법의 대가인 철학자 게오르규 헤겔(1770.8-1831.11)은 “변화 자체만큼 영속적인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쉬지 않고 생겨나는 변화에 우리는 늘 피곤해 하고 또 흔들리기도 하지만, 이런 변화가 없다면 우리 인생은 지루하고 답답해서 견딜 수 없을지 모른다. 변화에 적응하기도 하고 때로는 거부하기도 하면서, 새로운 삶을 흥미롭게 맞이하듯, 익숙한 것과 낯선 것들 사이를 지나갈 때 두려워하지 말고, 전혀 새로운 희망을 기대해 볼 일이 아닐까 싶다.
2. “바울의 데살로니가 전도2(13-16절)”과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다시 가기를 원하다(17-20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제가 은퇴를 하면서 세운 계획 중에는 장애인을 위한 설교자가 되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델성서 강습회에서 만난 장애인 지도 목사님들과 상의를 했는데, 다행히 시각장애인 교회 목사님 한 분과 청각장애인 교회 목사님 한 분이 손을 드셔서, 그분들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앞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을 수 없는 그래서 말까지 할 수 없게 된 장애인 교우들에 대해서 한없는 안타까움과 연민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하자고 다짐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또는 소위 감동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가운데, 제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산재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시각장애인일 경우는 사물이나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정상인과는 너무 다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가령 어느 봄 소풍 때 “깊고도 넓도다 깊고 넓은 하나님 사랑”이란 소창을 하게 되었는데, 깊다는 것과 넓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노래는 깊고도 라고 할 때는 오른 팔을 위로 왼팔을 아래로 쫘악 벌려야 하고, 넓도다 는 두 팔을 서로 양쪽으로 좍 벌리는 동작을 하는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는 저를 찾아온 대학생과 함께 식당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저에게 오래 전에 가르쳐 준 명곡을 다시 한 번 배우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나 조르는 통에 식당에 있는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식당에서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살아온 세상이 우리와 얼마나 다른 가를 새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제가 하는 말이 얼마나 이해가 될까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 같은 정상인들이 흔히 잘못하는 일들이 아닐까 하는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말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도의 말을 사람의 말로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 주었다는 점을 든 것입니다. 우리 정상인들은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다는 그 장점이 때로는 장벽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우들은 그런 장벽을 거뜬히 뛰어넘어서,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제가 중국 소주라는 곳에서 한 주간 성경을 지도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집회 시간이 저녁이었는데, 한가한 낮 시간에는 교우들의 초청으로 그룹으로 식사를 하기도 하고, 가정 방문을 하기도 하였는데, 참으로 놀라운 장면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그곳 교우들은 주로 소망교회와 광림교회 출신들이 많이 있었는데, 목사를 농담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고, 성경을 해석하는 전문가라는 수준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대사라는 존경심을 찾을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목사의 학교 배경에 대해서 따지는 것이 많았고, 키가 크고 몸이 부대하다는 등 신체적인 흠결도 대화의 소재가 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사도가 지적하는 것은, 유대 안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같은 동족을 박해한 것처럼, 유대 나라 밖 이방인 크리스천들 역시 자신들의 동족에게서 예수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는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방인 크리스천들이 개인적으로 어떤 흠결이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라는 인물을 믿음의 주로 믿는다는 것 때문에 고난의 삶을 당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방인에게도 전해지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는 순서일 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우주적이었던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묵상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앙생활은 도덕주의를 반드시 넘어서야 한다. / 살전 4:1-12. (3) | 2024.12.06 |
---|---|
참기 힘든 그리움이 있습니까? / 살전 3:1-13. (0) | 2024.12.05 |
사도를 통해서 선교의 의미를 묵상해 보자. / 살전 2:1-12. (3) | 2024.12.03 |
우리가 듣고 싶은 칭찬. / 살전 1:1-10. (3) | 2024.12.02 |
겸손은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 / 빌 2:1-11. (1) | 2024.1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