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설교에 관한 특강.'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23.10.28 대구 베델교회 성서 특강. 1
  2. 2020.04.13 6. 신대원생들을 위한 예배 특강.
  3. 2020.04.13 5. 바른 예배, 바른 신앙.
  4. 2020.04.12 4. 예배와 봉사자들.
  5. 2020.04.12 3. 예배와 상징.
  6. 2020.04.12 2. 예배와 의식.
  7. 2020.04.12 1. 주제 : 벅찬 감격으로 설교하라.

성서 특강. : 2023. 10. 22. 13:00~15:00. 장소 : 대구베델장로교회. 강사 : 박성완박사.

 

첫 시간 강의목적 : 현대 크리스천의 심각한 문제와 성경을 어떻게 읽고 이해할까를 구체적으로 연구한다.

 

1. 인사 : 잘 오셨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큰 기쁨을 나누자.

 

2. 서론 우리는 왜 성경을 읽고 공부해야 하는가? 질문해야 한다.

 

3. 개신교회의 특징

    개신교회의 특징은 성경 중심의 신앙생활을 가르친다는 점이다. 개혁자들의 슬로건을 다시 들어야 한다. “성경으로 돌아가자!/Return to the Bible!” 또는 성경으로 하여금 성경이 되게 하라/Let the Bible be the Bible!” 이라고. 이것이 종교개혁의 정신이었다.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4. 성경이 무엇인가?

    기독교인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무슨 말인가? 성경에는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고 믿는다. 다시 말하면, 성경에서 삶의 의미, 기쁨, 가치, 그리고 행복과 구원을 말씀하고 있다고 믿는다.

 

5. 그렇다면 성경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야 한다.

    성경은 절대적인 규범이라는 말이다. 라틴어로-Norma Normans(Ruling Rule) 이다.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에 비해서 훨씬 더 낮은 차선의 규범이란 게 있다. 곧 신앙고백, 교리, 제도 등이다. 이를 라틴어로 Norma Normata(Ruled Rule) 라고 부른다.

 

6. 무엇보다도 성경을 먼저 잘 배워야 한다.

    교리보다, 제도보다 성경을 배워야 한다. 일찍부터 유대인들은 가정에 서 성경을 배우고 가르쳤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쉐마교리를 지킨다. 6:4-9은 우리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니, 너희는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부모가 자기 자녀들에게 집에서 뿐 아니라, 여행길에서도, 누워있을 때도 가르쳤다.

 

A. 현실은 전혀 다르다.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공부하지 않는다. <베델성서>라는 성서연구 학습서를 쓴 할레이 스위감은 자기 교인들에게서 이 사실을 확인했다.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거나 체계적으로 성경을 공부하는지 여부를 조사했는데, 1%미만 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어떨 것 같은가?

 

B. 심각한 모순이다.

    성경의 중요성은 알지만, 성경을 읽지도 않고, 또는 성경을 알고 있다 해도 성경말씀대로 살 지 않는다는 말이다. 심각하고 엄청난 모순이다. 우리나라 교회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C. 성경공부를 하고 있지만, 많이 다른 성경공부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두 가지 성경 공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성경 자체가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를 배우는 것인데, 연역법-Deduce)이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의 관심사를 성경에서 찾아보는 방법인데 이를 귀납법적인(Induce) 공부라고 한다.

여기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들어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들이 가진 관심사를 듣고 싶어 한다는 차이가 있다. 교회에 와서 가장 먼저 기도해야 할 것은, 무슨 기도를 드려야 할까?

하나님 말씀하옵소서! 종이 귀담아 듣겠나이다. 라고 해야 한다. 우리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 이다. 하나님 우리 목사님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하는 일꾼으로 사용하시옵소서. 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말이다. 하나님 제 마음에 쏙 드는 말씀을 들려주옵소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다음에, 우리의 관심사도 찾아볼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들을 다음에, 자신들의 관심사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연역법적인 성경을 공부한 후에, 귀납법적인 성경공부를 해야 옳다는 말이다.

 

7. 그러면 어떻게 성경을 읽고 공부해야 할까?

   가. 첫째는 성경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공부를 하자는 것이다.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성경의 전체적인 흐름을 살피는 공부다. 나무를 자세히 살피는 것이 아니라 숲을 먼저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전체 내용이 의도하는 바를 살핀다. 그 결과 통전적이며(integrity)

구속사적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성경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된다. 단락마다

그 중심점을 적어두는 훈련을 하자.

   나. 두 번째로는 히브리적 사고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점이다.

성경은 히브리인이라는 특별한 사람들과 깊은 관계가 있다. 삶의 무대와 내용들이 그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낯선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사고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헬라사고방식인데, 관념-추상, 논리-과학-방법에 관심을 가지는데, 이론적인 특징이 있다.

둘째, 히브리사고방식은 직관-구체, 종교적-목적-근거에 관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하나님은 누구신가를 물을 때, 헬라 사고방식은 완전, 전지전능, 자비 등등 끝없는 개념들이 등장한다. 매우 추상적이고 설명이 가능한 사고를 한다. 그러나 히브리 사고방식은 목자, 반석, 산성, 방패라고 설명한다.

그것으로 족하다. 한 마디로 근원과 본질에 관심을 두는 사고방식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수혈에 대해서 철저하게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다. 그 이유를 성경에서 들고 있다. 레위기 17장에 <생명이 피 가운데 있다>고 말씀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히브리인들의 독특한 사고방식을 뒷받침한다. 히브리인들은 소위 직관적인(Intuition) 사고를 했다. 직관이란 사물의 핵심을 들여다보는 통찰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피를 계속 흘리는 사람이 죽게 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생명이란 핏속에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런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상적인 사람의 피는 재생산된다.

혈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히브리적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성경을 바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이다.

   라. 세 번째 특징은 역사적 배경을 이해한다.

성경은 자신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이해이다. 현대인들이 자신의 정황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처럼,

경을 이해하려고 하면, 성경의 삶의 자리를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성경은 모순덩어리일 뿐이다.

성경에는 <일부 다처제>가 통용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의 삶의 무대가 아랍문화권이기 때문이다. 이집트는 10명의 아내를 둘 권리가 있다고 한다. 단 선임 아내들의 허락이 필요하다. 그러나 제도적으로 사인하도록 되어있다.

이것을 수혼법(Levite Law,25:5-10)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유대인의 한 종파인 사두개파들은 부활과 천국을 부정하는데(12:18-27), 그 이유는 천국에서 일곱 형제가 첫 형수를 만나게 된다면 누구의 아내가 될지 싸움이 벌

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성경에는 유대인은 주변 세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을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7:9-14에는 <고르반>이라는 전통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고르반이란 하나님께 드림이 되다.”는 뜻인데, 하나님께 드리려고 미리 떼어 놓은 재물을 일컫는 말이다. 참 좋은 전통이다. 수입이 생겨서 감사헌금이나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데, 살다보면 다 쓰고 나중에 드리려다 보면 남은 게 없어서 낭패를 볼 때가 있다. 그래서 고르반으로 따로 구별해 놓은 재물을 두기로 했다. 그런데 이런 좋은 전통이 오용되었다. 형제나 부모가 돈을 요구할 때, 주고 싶지 않으면 고르반 밖에 없습니다.”고 빠져나가는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알고 있다고 하면 성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둘째 시간 구체적인 적용 A. 구약 / 창조 신앙(1).

 

1.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려운 고비를 넘기면 즐거운 시간이 온다. 이제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항상

    넘어지기 잘하는 문제가 두 가지인데, 그 하나는 창조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생활이다. 실전에 임해보자.

2. 창세기 1:1-31 :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의 주인이 되신다 란 주제를 가지고 있다.

   a.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1:1).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라, 신앙의 책이다 는 점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그러니까 과학적 접근이 옳지 못하다는 말이다. 신앙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말은 분명히 고백적인 말이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태초에 관한 창조와 타락]이란 책에서 사탄이든 하나님이시든 둘 중 누군가가 한 말이다. 태초에 있던 분이 아니고서는 태초에 대하여 말할 수가 없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에 관한 자유로운 긍정이요, 자유로운 시인이요, 자유로운 계시이다.” 고 말한다. 중요한 점은 창조기사는 종교적인 언어이고, 기독교 유산이 되었다.

   b. 하나님은 만물을 선하게(보시기에 참 좋았더라) 창조하셨다(1:4, 10, 12, 18, 21, 25, 31).

좋다, 혹은 선하다는 말은 도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선하다는 말은 제 구실을 하는 것 말한다. 빛이 선한 역할을 하려면 말아래 두어서는 안 된다. 높은 곳 등경 위에 있어야 한다.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하면 악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선생이 알아들을 수 있게 가르치지 못하면, 그는 악한 선생이다. 학생이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열심히 배우지 않으면 악한 학생이 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선하다는 뜻은 만물이 모두 다

우량품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c. 하나님은 지구를 선물로 인간에게 맡겨 주셨다(1:28).

세상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라는 점이다. 선물과 뇌물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선물은 조건 없는 사랑의 표현이다. 부담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뇌물은 조건이 붙어 있는 낚싯밥과 같은 것이다. 김영란 법은 모든 공

직자가 10만 원 이상의 돈을 받는 것을 뇌물로 규정했다.

   d. 하나님은 그 자신을 그의 피조물에 연결시키신다(1:26-27).

이 주제는 하나님은 이 세상에 대해 책임적인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의미이다. 무신론자들은 이 세상이 문제투성이라며, 그래서 하나님의 부재를 주장한다. 그래서 하나님 없는 세상, 인간이 외로운 주인처럼 두려움과 절망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도 있다. 혼자처럼 보이지만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돌보시고 지키시는하나님께서 계심을 믿고 살아가는 신앙의 사람들이다. 누가 삶을 긍정하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일까?

   e. 하나님은 자신이 지은 만물의 주인이시다(1:1-31).

이 주제는 이 세상에 대해서 이것은 내 것이다.”는 하나님의 주장을 말한다. 이 하나님의 주장은 우리 인간의 태도에 중대한 영향을 준다. 대부분 사람들은 모든 것이 변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소유권은 불안정하다고 생각한다. 가령 가나안 땅의 주인이 누구냐? 하는 문제는 그 대표적이다. 유대민족은 약 2,000년 동안 유랑민족으로 (AD. 70-1948) 지금 그들은 이곳은 우리 땅이다.”고 주장한다. 보통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맡겨주신 땅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는 말이다.

인간 역시 하나님의 소유이다. 진지한 토의가 필요하다. 공동체 의식이 강했던 옛날에는 자신의 머리털 한 오락도 부모님이 주신 것이니 함부로 깎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오늘처럼, “내 인생이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개인주의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데 성경의 하나님은 너희는 내 것이다.”고 분명히 밝힌다. 바울은 너희 몸이 거룩한 하나님의 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였다. 내가 가진 재능, 시간, 소유는 그 참된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f. 하나님은 인간에게 사명을 주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까닭이다(1:26).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이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라틴어로 가면(mask)을 뜻하는 persona를 사용한다. 이 말은 어떤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인격을 말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와 교제를 원하셨고, 그 유일한 대상이 인간이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이란 지성과 감성 그리고 의지를 가진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말이다. 이 주제는 인간이 만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걸작(masterpiece)이라는 의미이다. 시편 8은 인간을 하나님 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일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말이

.

   가. 인간은 땅에 충만하도록 부름받았다.

이 주제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사람들로 가득 채우라는 말이다. 성경은 자식을 여호와의 기업이며 상급이라고 말씀한다. 병든 인간이 문제이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들로 가득 채울 때, 세상은 더욱 행복한 낙원이

될 것이다.

   나. 인간은 땅을 정복하도록 부름받았다.

종종 오해받는 주제이다. 환경오염과 자연파괴가 인간 중심사상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한 정복자가 아니라, 충실한 관리자가 되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만물이 제 자리에 있도록 관리하는 청지기가 되라는

말이다.

   다. 인간은 땅을 입히고 갈고 보존하도록 부름받았다.

세상에 대한 충실한 청지기 상을 강조하는 말이다. 청지기 정신을 강조해야 한다.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맡아서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언제나 주인의 뜻대로 살림하도록 관심과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 인간은 땅을 다스리도록 부름 받았다. 인간은 세상을 관리할 경영자로 위임되었다. 인간만이 아니라, 전체 세상을 위해서 생각하고 결정하고 치리해야 한다는 말이다. 역시 청지기로써 역할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다.

 

   g. 인간은 제한된 범위에서만 자유를 누린다(1:29-30).

우리 시대의 가장 뜨거운 화두가 자유라는 말이다. 도덕적, 종교적, 철학적, 정치적, 경제적인 면에서 자유의 개념이 분명하지 않으면 혼란이 올 수밖에 없다. 2장에는 인간의 조상들이 자유를 어떻게 행사했는지 웅변적으로 말한다. 저주와 파멸로 가는 자유는 참된 자유가 아니다. 4세기에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사이에 자유논쟁이 있었다. 이 논쟁은 다시 16세기에 루터와 에라스무스 사이에 또 다시 불거졌다.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물들지 않은 영아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방정환, 어린이 예찬). 탕자가 타락의 길에서 아버지를 향한 것은 자유였다고 루터는 죄와 죽음을 택할 자유는 있을지 모르지만, 생명과 구원을 택할 자유는 인간에게 없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은혜아래서는 제한된 범위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말했다. 5살짜리 아이가 엄마의 손을 뿌리치고 차도로 뛰어갔다고 하자. 어머니는 달려가 아이의 손을 더욱 꽉 쥐었다. 어머니의 손 아래서 만이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셋째 시간 : B. 신약 / 교회 생활(고전 1:1-15:49). 하나님의 백성들도 세상 한 복판에서 살고 있다.

 

   1. 성경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진 문서이다.

성경은 글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매우 다양한 내용들이 소개되고 있다. 까닭은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인 때문이다. 다양한 삶을 살고 있는 인생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인 때문이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진

공 속에서가 아니라, 인간들의 삶 속에서 말씀하신다.

   2. 미국 시카코 대학의 Adler 교수는 [어떻게 책을 읽을 것인가? How to read a book?] 이란 책에서, 책을 읽 는 3가지지 목적을 말했다.

   첫째는 즐거움을 위해서 인데, 만화나 소설 등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는 삶에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신문이나 잡지 그리고 각종 정보지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셋째는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로, 성경이나 교과서 그리고 인격훈련서 등이 해당된다고 했다.

모든 독서는 중심점이 있다. 우리는 단락마다 중심점이 무엇인지를 요약하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

   3. 고린도 교회는 모든 지상의 교회를 대변한다. 고린도교회를 잘 공부하면 많은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다.

   4.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신학자로, 고린도서를 통해서 목회자로 이해하게 되었다.

   5. 고린도라는 도시는 그리스의 펠레폰네소스섬에 위치하는 고대 신석기 도시로, 주전 146년에 로마에 망했다가,

다시 100년 후 로마의 제대군인을 위해 재건되었는데, 문화적, 사회적, 종교적 다양성. 약점/문제투성이 가능.

아리스토파네스라는 시인은 고린인처럼 산다.” 로마속담 아들 낳아 고린도로 보내지 마라.” 고린도 비하발언.

   6. 고린도서는 당시의 교회가 문제 많았음을 말한다. 현실적 현상, 그러나 대처능력이 있다면 큰 문제 아니다.

    가. 교회내의 분파(1:11-13) : 고린도교회는 세례자 누구냐로 분파되었던 것. 성경해석과 다양성의 산물이다.

    나. 인간지혜강조(1:20) : 철학의 본산지의 특성. 합리성 강조.

    다. 부도덕한 일(5:1-13) : 어느 시대나 있었다. 교회가 자정능력을 필요하다. 미국교회는 동성연애자.

    라. 형제간의 소송(6:1-7) : 옳고 그른 것 세상법정으로 가져간다. 같은 교회에서 싸움. 경찰 누구 잡아갈까?

    마. 결혼과 이혼충고(7:1-15) : 독신문제, 이혼문제는 주의 필요. 삶의 자리를 이해해야 한다.

    바. 기독자의 자유(8:1-12) : 우상의 제물 등 먹고 마시는 문제들. Adiaphora “무관심, 치우치지 않음을 의미.

구원과 무관한 문제를 다루는 것을 의미. 덕스럽게 하라.

    사. 모든 유혹을 물리치라(10:13) : 성도의 삶에는 마귀 유혹 있다. 매 순간 유혹은 찾아온다.

    아. 성만찬의 남용(11:20-27) : 애찬과 성만찬의 구별필요. 고린도 교회는 부자와 빈자가 친교 달리했다. 미리 애

찬을 먹는 습관 있음. 결과 성찬과 애찬을 분별 못하는 사례가 생겨났다. 이것은 주님의 몸이다.

    자. 많은 지체를 가진 몸(12:12-28) : 교회의 성격, 다양성. 다양한 은사, 서로 존중. 풍성한 공동체 기대가능

    차. 사랑은 최고의 은사(13:1-13) : 은사는 하나님의 선물. 그중에서 사랑은 모든 은사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

    카. 부활한 몸에 대한 질문(15:1-49) : 영지주의자들은 이원론. 육과 영을 구별, 바울은 몸의 부활을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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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성완
,

루터신학대학원생 특강(2011.6.24).

옥수동루터교회당.

박성완목사.

 

예배하는 교회(고전11:17-34)

 

1. 교회의 기능

첫째/예배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례전에 참여하는 일이며, 찬송과 기도 그리고 감사로 응답한다.

둘째/섬김이다. 섬김의 기쁨을 배우고 삶 속에서 실천한다.

셋째/사귐이다. 성도의 교제로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넷째/증거이다. 깨달은 복음을 증거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섭리를 알리는 일이다.

 

2. 교회의 정체성

최초의 교회인 초대 교회는 예배하기 위해모인 것이 아니라, “떡을 떼려고모였다(20:7).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주님을 기억하기 위한 <주의 만찬>을 나누기 위한 모임이었다. <주의 만찬>이란 말은 초대 교회 때부터 사용된 특별한 용어이다(고전11:20).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기념하듯,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기념하려고 했다. 그것이 신앙을 지탱하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3. 예배하는 교회의 구체적 표현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일이다.

성경말씀 듣기, 설교 그리고 축복 선언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둘째 주님의 명령을 행하는 일이다.

성례전에 참여하는 일이다. 곧 세례와 성만찬을 의미한다.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는 7성례를 제정하여 지키도록 하 였으나, 교회가 반드시 지킬 성례는 세례와 성만찬뿐이다. 성례의 기준은 세 가지인데, 주님이 제정하신 것 (Mandatum Dei)과 복음의 약속(Promissio Evangelicae), 그리고 보고 느낄(Visible sign of Grace) 수 있어야 한다.

셋째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반응으로 찬송과 기도 그리고 감사가 있어야 한다.

예배자의 자세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대한 반응이다. 아멘과 할렐루야는 이런 표현의 좋은 예이며, 잘 준비된 찬양과 진솔한 기도는 아름다운 반응이다. 그리고 감사는 반드시 예물이 따라야 하는데, 그것은 마음 과 뜻과 정성이 담긴 전인적인 제물이어야 한다.

넷째 성도들 사이의 사귐이 있어야 한다.

함께 예배에 참여하는 일들(찬송, 기도, 감사, 성찬 등)이며, 인사와 평화의 입맞춤(악수) 등이 있어야 한다.

다섯째 세상으로 나가서 신앙을 실천하는 일이다.

예배는 반드시 파송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제는 평안히 가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섬기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훈련과 격려를 받기 위해서 교회에 와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 는 성도들이 세상으로 나가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목적과 방법을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훈련해야 한다.

 

4. 예배 공동체로서 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한다.

첫째 주일 예배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안식일은 의무적이나, 주일은 주님의 부활 기념일로 즐거움이 있는 자발적인 억매임이 필요하다.

둘째 예배의 의미와 목적을 늘 기억하도록 해야 한다.

예배 인도자 뿐 아니라(인도자도 예배자의 일원), 모든 예배자들이 가질 기본적인 마음 자세가 필요하다.

셋째 예배의 공간과 시간이 전통과 현대를 조화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력의 현대적 의미를 일깨우고, 장엄한 예배 분위기를 만드는 공간과 의식이 뒤따라야 한다.

모든 상징들은 사전에 철저하고 구체적인 교육이 수반되어야 한다.

넷째 예배가 방해받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유아들에게 정숙한 예배 자세를 보고 배우게 해야 한다. 예배자들이 함께 아이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5. 질문 받기

 

 

 

루터신학대학원생 특강(2012.11.16.)

루터대 신학대학원 강당.

강사 : 박성완목사.

한국 가락에 의한 예배의식 웍샵.

1. 들어가는 말.

. 한국 루터교회 예배의식과 한국 가락의 역사.

의식교회와 무의식교회를 바르게 구분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의식 하나 하나에 대한 충분히 이해가 없다면 형식에 그칠 뿐이다.

예배 내용에 대한 충실한 이해와 진지함 참여는 예배를 풍부하게 만드는 장점이 있다.

1960년에 지원용 박사에 의해서 소개되었고, 1974년에 가락 있는 의식을 사용하게 되었고,

1983년 서의선 목사에 의해서 우리 가락으로 된 의식 문이 소개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 예배의식에서 우리 가락의 중요성과 실천.

 

2. 예배의식과 가락.

. 집중력을 강화한다.

. 예배의식에 대한 철저한 교육이 선행되어야 한다. 옥수동교회 첫 예배는 의식문 해설이었다.

. 예배내용의 성격을 확인해야 한다 : 하나님의 오심과 예배자의 나아감(Sacramental & Sacrificial elements).

 

3. 한국 가락에 따른 예배진행 웍샵.

. 우리 가락의 장점 : 모든 힘을 다 쏟아 표현할 수 있다. 예배의 정신을 잘 반영한다. / 옥수동루터교회가.

. 한국 가락에 따른 영창들(canticles) 소개.

. 웍샵.

 

4. 시편 송을 위한 제안.

. 교독에서 가락으로 : / 팔복.

. 10가지 선율(tune)과 실제 연습(23).

: 여호와는 나의 목시니,

: 내게 부족함이 없으로다.

: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시며,

: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 도다.

: 내 영혼을 소생시시며,

: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 도다.

: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 것은,

: 주께서 나와 함께 하이라.

: 주의 지팡이와 막기가,

: 나를 안위하시이다.

: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으니,

: 내 잔이 넘치이다.

: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리니,

: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로다.

 

5. 질의응답.

 

 

 

 

6. 나가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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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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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예배, 바른 신앙

1: 예배의 의미와 목적(29:2)

2005. 2. 6. 14:00, 옥수동루터교회.

 

1. 신앙생활은 예배로부터 시작된다. 예배가 모든 신앙생활의 기초가 된다는 말이다. 예배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올바 른 예배가 무엇인가? 예배는 어떻게 드려야 올바른가? 혼자 깨닫기 어렵다. 배우자.

 

2. 잘못된 예배이해 : 보편적인 인식/ 자신의 소원을 기도하는 일, 혹은 인간이 복 받기 위해서 하는 일. 일부분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예배를 잘못 드리게 되는 출발점이다. 함정이 있다. 이런 예배는 언제나 인간 중심적인 예배가 될 수밖에 없다. 헛수고에 불과한 예배가 된다.

 

3. 올바른 예배이해 :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듣고, 찬양하기 위해서 하는 일체의 일이다.

예배의 주인은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만이 예배의 중심에 계셔야 한다. 예배의 내용이 무엇이든 지 반드시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찬송을 부를 때도 하나님이 중심이 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기도를 드릴 때도 하나님이 중심이 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설교를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가 그 설교에서 하나님이 중심이 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봉헌을 하는 사람도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봉헌인지를 살펴야 한다. 이것이 참된 예배이다.

 

4. 성경이 가르치는 예배라는 말

. 레이뚜르기아(λειτουργια) : 사람의 일이라는 말, 사람이 해야 할 일, 사람이 하는 가장 귀한 일이라는 뜻이다. 예 배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일이다.

.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εω) : 엎드려 절하다는 말, 하나님 앞에 엎드려 절하는 일이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고 복종한다는 말이다. 예배는 자신의 생각, 계획, 능력을 다 내려놓고 복종하는 일이다.

. 라트레이아(λατρεια) : 섬긴다는 말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을 기억하 며 섬기는 일이다.

. 워십(Worship) :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는 말이다. 예배는 이 세상에서 우리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예배에 참석하는 일반고 다른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이를 요약하면, 예배는 사람이 해야 할 가장 가치 있는 일에 참여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오직 그 분만에게 복종하는 일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복종해야 할 분이 한 사람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미국의 대통령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5.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

. 성경적 예배 모범 : 초대 교회 예배를 소개함(사도행전 2:46-47, 저스틴의 변증서)

하나님과의 교제였다.

. 하나님께서 오심 : 성경 말씀을 읽었고, 설교를 들었다. 그리고 성찬을 행하였다.

. 하나님께 나아감 : 찬송, 기도, 봉헌을 하였다.

. 기독교 역사의 모범 : 2천년동안 기독교회는 바른 예배에 깊은 관심 가졌다.

. 예배의 내용 발전 : 신약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성경에 예배내용 첨가했다.

주기도(마태), 축복선언(고린도후서), 세례문구(에베소서).

. 예배 순서 발전 : 영창을 넣었다. 성경의 중요한 말씀들(그로리아, 쌍투스, 눈크디미티스).

. 예배의 예절 발전 : 앉고 일어섬, 행진해서 나아감.

. 예배드리는 장소와 기물들 발전 :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마구잡이로 생각하면 곤란.

.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4:24) : 신령(하나님의 영), 진정(올바르게) 예배하라.

예배자가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느냐? 중요한 일이다.

예배 순서 하나하나를 제대로 참여하는 것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찬송 부를 때에 찬송에 집중해야 한다. 설교 들을 때 설교말씀에 집중하라. 봉헌할 때 예물을

감사함으로 드린다. 이것은 중요한 일이다. 모든 예배자는 항상 성경 찬송은 물론 예물을 준비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른 예배를 드리게 해 달라고 일심으로 기도하자.

 

6. 우리의 예배를 돕는 이는 성령 하나님이시다.

 

 

 

바른 예배, 바른 신앙

2: 예배하는 교회(고전11:17-34)

2005. 2. 13. 14:00, 옥수동루터교회.

 

1. 교회의 사명

첫째/예배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례전에 참여하는 일이며, 찬송과 감사로 응답한다.

둘째/섬김이다. 섬김을 배우고 삶 속에서 실천한다.

셋째/사귐이다. 성도의 교제로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넷째/증거이다. 깨달은 복음을 증거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섭리를 알리는 일이다.

 

2. 교회의 정체성

최초의 교회인 초대 교회는 예배하기 위해모인 것이 아니라, “떡을 떼려고모였다(20:7).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주님을 기억하기 위한 <주의 만찬>을 나누기 위한 모임이었다. <주의 만찬>이란 말은 초대 교회 때부터 사용된 특별한 용어이다(고전11:20).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기념하듯,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기념하려고 했다. 그것이 신앙을 지탱하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3. 예배하는 교회의 구체적 표현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다.

성경말씀 듣기, 설교, 그리고 축복 선언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둘째 주님의 명령을 행하는 일이다.

성례전에 참여하는 일이다. 곧 세례와 성만찬을 의미한다.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는 7성례를 제정하여 지키도록 하였으나, 교회가 반드시 지킬 성례는 세례와 성만찬뿐이다. 성례의 기준은 세 가지인데, 주님이 제정하신 것 (Mandatum Dei)과 복음의 약속(Promissio Evangelicae)과 보고 느낄(Visible sign of Grace)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찬송과 기도가 있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대한 반응이 필요하다. 아멘과 할렐루야는 이런 표현의 좋은 예이며, 잘 준비된 찬양 과 진솔한 기도는 아름다운 반응이다.

넷째 감사가 있어야 한다.

감사는 반드시 예물과 함께 표현되어야 한다. 초대 교회 이래로 모든 예배에서는 감사 예물을 드렸다. 그것은 마 음과 뜻과 정성이 담긴 전인적인 제물이어야 한다.

다섯째 하나님 안에서 성도들의 사귐이 있다.

함께 예배에 참여하는 일들(찬송, 기도, 감사, 성찬 등)이며, 인사와 평화의 입맞춤(악수) 등이 있어야 한다.

여섯째 세상으로 나가서 신앙을 실천하는 일이다.

예배는 반드시 파송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제는 평안히 가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섬기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 교회에 와야 한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목적과 방법을 구체적으로 교회에서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

 

4. 예배 공동체로서 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한다.

첫째 주일 예배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안식일은 의무적이나, 주일은 주님의 부활 기념일로 즐거움의 억매임이 필요하다.

둘째 예배의 의미와 목적을 늘 기억하도록 해야 한다.

예배 인도자 뿐 아니라, 모든 예배자들이 가질 기본적인 마음 자세가 필요하다.

셋째 예배의 공간과 시간이 전통과 현대를 조화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력의 현대적 의미를 일깨우고, 장엄한 예배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상징들은 사전에 철저한 교육이 수반되어야 한다.

넷째 예배가 방해받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유아들에게 정숙한 예배 자세를 보고 배우게 해야 한다. 함께 아이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5. 질문 받기

 

 

 

 

바른 예배, 바른 신앙

3: 예배의 역사(고전11:17-26)

2005. 3. 6. 14:00, 옥수동루터교회.

 

1. 예배의 기원

일반 종교와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다. 생로병사의 인생행로에서 사람들은 신의 노여움을 피하고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예배(제사)형식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기독교회는 사람들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예배가 시작되었다. 그 근거가 고전 11:24, 22:19가 된다. 이것은 구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2:1-28에 유월절 혹은 무교절 예배에 대한 명령이 나온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출발하였다.

 

2. 예배의 역사

. 초대교회 / 기독교가 공인되기까지(313)를 말한다. 이 당시의 예배의 첫 모습은 떡을 떼는 일에 중점을 두었다.

사도행전 교회는 매 주일 떡을 떼기 위해서, 그리고 주님의 구원행동을 기억하기 위해서 모였다고 기 록하고 있다. 그리고 순교자 저스틴이 기록한 변증서 1을 보면, 예배의 두 가지 형식이 2세기에 이미 정착하고 있었 다. 하나는 말씀의 예배라는 것인데 모든 사람들이 다 참석할 수 있는 설교 중심으로 예배였다. 여기에는 오늘날처 럼 성경읽기도 있고, 기도, 설교가 있었다. 그리고 주기도로 끝난 후에, 성찬의 예배 소위 다락방의 예전이 시작되었 다. 여기에는 세례받은 사람들만이 참석할 수가 있어서, 세례 받지 않은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게 하였다.

순서를 보면, 말씀의 예배에서는 성경봉독(예언서, 서신서, 복음서), 설교 혹은 권면, 연도(함께 드리는 기도), 시 편 송과 찬송이 있었다. 두 번째 예배인 성찬의 예배에서는 평화의 인사(입맞춤), 봉헌, 성찬기도와 성물봉헌, 이웃 을 위한 기도, 아멘, 성체 분할, 배찬, 폐회의 순서였다.

이미 초대 교회 예배에서 예배의 중요한 골격이 갖추어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중세교회 / 지하 교회에서 지상으로 나온 교회로 예배가 공개적으로 적극적으로 드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기독교회가 세상 종교와 야합하는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신비적 요소와 미신적인 요소들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예배에서 지나친 꾸밈들이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인위적인 기도들, 주님의 성찬을 신비현상으로 이해함으 로 마치 제사제도로 돌아가는 느낌들, 마리아를 비롯한 성자와 유물들을 숭배하는 일들이 예배에 들어오게 된 것이 다. 마침내 1054년에는 동방교회(콘스탄티노플)와 서방 교회(로마)로 분열되기에 이르렀는데, 동방교회는 신비주의 를 극대화하고 있었다.

 

. 로마예전 / 5-7세기에 로마에는 세 종류의 미사가 행하여졌는데, 하나는 주교가 전 신도들과 함께 대성당에서 드리 는 미사로 High Mass라고 불렀다. 둘째는 본당 신부가 지역의 주민들과 함께 드리는 본당 미사로 Low Mass라고 불렀다. 그리고 세 번째는 사제가 자기 자신의 신앙을 고양하기 위해서 혼자가 드리는 개인 미사가 있었다. 그 결과 많은 사제가 필요해졌고, 본당 안에서도 개인들을 위한 간편한 예배처소가 필요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본당 안에 도 이곳저곳에 개인이나 소 그룹을 위한 예배처소(Chapel)을 만들어 두어야 했다.

 

. 정착된 로마교회의 예전 / 말씀의 예전과 성찬(다락방)의 예전으로 확고하게 구별하였다.

말씀의 예전의 순서를 보면, 입당송(인트로이트), 자비송(키리에 엘레이손), 사제입장, 기원, 시편교송, 참회(죄의 고 백)과 사죄선언, 대영광송, 인사와 그날의 기도, 서신서 봉독, 층계송, 성가대 영창, 복음서 봉독, 설교, 니케야 신조, 마치는 인사였다.

성찬의 예전의 순서를 보면, 봉헌과 인사, 성찬을 위한 기도, 주기도, 평화의 인사, 하나님의 어린 양, 성찬에 관한 말씀, 성찬 분배 후의 기도, 인사와 기도, 축복 선언으로 끝이 났다.

 

3. 중세 교회 예배의 의미

예배의식에 대한 비중이 높아지면서, 일반 종교들이 갖고 있는 신비현상들이 기독교 예배에 영향을 주었다. 여러 가지 성물숭배들을 삽입함으로 예배를 신비현상으로 생각하도록 만들었고, 특히 성찬의 예배에서 예수님의 몸과 피를 화체설이라는 신학을 정립함으로 감사의 성찬이 아니라, 희생과 제사의 성찬으로 의미를 오도한 것은 큰 잘못이 아닐 수 없었다.

 

4. 질문받기

 

 

 

바른 예배 바른 신앙

4: 예배 개혁의 역사(고전11:17-26)

2005. 3.13. 14:00, 옥수동루터교회.

 

1. 종교 개혁은 예배의 개혁에서 출발

중세 교회는 신비현상과 성물숭배를 비롯해서 화체설과 같은 그릇된 성경 이해 뿐 아니라,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 성경봉독, 사제들의 타락과 부패, 삶과 단절된 설교, 의식주의에 빠진 예배 등으로 생기를 잃고 말았다. 예배에서 감격과 기쁨, 위로와 소망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율법주의로 기울고 있는 신앙이 팽배하였다. 성경이 깊이 잠들어 있는 예배에서 교회 개혁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2. 루터의 예배 개혁

. 성경의 권위 회복/ 성경으로 돌아가자. 성경을 성경으로 말하게 하라. 라틴어 성경을 자국어(독일어)로 번역 출판하 여 모든 교인들로 읽게 하였고, 예배에서 자국어 성경을 사용하였다. 구텐베르크의 활자발명은 값싼 성경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 사본 성경은 집 2채값에 해당.

 

. 예배의식 정화/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을 구별, 개혁하였다. 큰 틀에서는 교회의 전통을 인정하였다. 말씀의 예배 와 성찬의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구체적인 면에서는 큰 변화를 가져왔다. 찬송에서 찬양대 중심의 찬송을 회중 중심으로 바꾸었고, 회중가 코랄을 채택하였다. 코랄은 보통 사람들에게 익숙한 민요나 유행가에 성시를 옮긴 것으로 크게 호응을 받았다. 성찬에서 화체설을 부정하고 실재설(Real Presence)을 가르쳤다.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성인 숭배와 마리아 중보 기도를 제거하였다. 예배에서 구경하는 요소를 배제하고 직접 참여하는 예배로 전환하였다. 사제중심의 예배에서 회중 중심으로 바꾼 것이다. 설교를 동시대의 사람들을 위한 말씀으로 적극적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미신적인 모든 요소들을 다 없애버렸다.

 

. 율법과 복음의 균형/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과 복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율법은 사람이 해야 할 일과 해선 안 될

일을 말씀하는 것이고,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지, 그리고 하고 계신지, 앞으로 하실 것인지를 말씀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율법에 매달린 생활을 하고 있었다. 무엇이든지 사람이 주인공이 되어 보려고 한다. 물론 무엇인가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언제나 참담한 것이었다. 그래서 절망하고 아파한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게는 복음이 필요하다. 어쩌면 율법의 마지막 역할은 우리를 복음으로 인도하는 몽학선생(παιδαγωγος/주인의 아들을 선생님에게 데려다 주는 일을 하는 종)의 역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복음만이 우리를 사람답게 살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설교에서 율법과 복음의 균형을 특별히 중요한 것이었다.

 

3. 종교 개혁 이후의 예배

. 17세기 계몽주의 이후/ 예배는 교육과 전도라는 측면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신대륙의 발견과 산업화는

복음 전파와 교육이라는 새바람을 몰고 왔다. 그 결과 예배보다는 전도와 교육을 중시하는 말씀 위주의 신앙생활이 발전하게 되었다. 곧 예배 문화가 아니라, 집회 문화가 태동하게 된 것이다. 이에는 웨슬레와 같은 부흥운동의 선구자들의 역할이 컸다.

 

. 18, 19세기의 대 각성운동/ 과학의 발전과 합리주의에 맞서는 영적 각성운동이 일어나면서 영국에서 는 청교도주의

등으로 교회는 예배보다는 말씀 중심의 신앙형태로 바뀌어 가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는 설교가 중심인 예배가 되었고, 개혁교회나 감리교회 등이 이에 앞장섰다.

 

. 20세기의 성령운동/ 오순절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성령운동은 대형 집회를 가능하게 했고, 영적 부흥을 기대하게

하였다. 특히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는 수백만 명이 모이는 집회가 가능했고, 수십만 명의 대형 교회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특히 한국은 세계 10대 대형 교회 중 7개를 가지고 있는 교회로 화려하게 등장하였다.

 

4. 나가는 말

교회는 예배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 예배는 말씀과 성례전이 균형 잡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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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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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준비-예배와 성소 봉사자

 

가. 예배의 풍경들 : 

    지난 2천년동안 매 주일이 되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교회에 모였다. 홀로 우리의 구주이시며, 창조주이신 영원한 아버지 하나님의 현존에서 영광과 찬송을 드리는 것이 예배이다. 이 예배야말로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정체성이며, 교회가 수행할 가장 주되고 독특한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이런 예배는 잘 준비된 상태에서 드려지지 않으면 안된다. 예배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거나, 오르간 이 예배전의 찬양을 연주하게 될 때, 교회당 이곳 저곳에서 친교하던 사람들이 예배당 안으로 들어와 앉는다. 프렐류드(prelude)가 끝나면, 예배 인도자가 다른 예배봉사 자들과 함께 제단을 향해서 찬송을 부르며 행진해 나아간다. 그 뒤를 찬양대가 뒤 따른다. 예배자들은 모두 일어서서 함께 찬송에 동참한다. 이렇게 예배는 시작된다. 예 배당의 모든 성물들은 제자리에 있다. 조명등은 다 밝게 빛을 내고 있고, 기온은 알맞게 맞춰져 있다. 스피커를 포함한 음향기기들도 모두 제 몫을 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상쾌한 예배당 방안 공기는 평온함을 주기에 충분하다. 잘 짜여진 순서에 따라서 예배는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있다. 예배자들의 얼굴에는 기쁨과 감사, 그리고 평 안과 소망의 확신이 역역히 보인다.

 

나. 예배를 섬기는 사람들 :

    “친애하는 기독교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제직 가운데서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이 무엇이며,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를 위 해서 하고 계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증거하기 위해서, 교회의 주되신 그리스도께 우리 자신을 헌신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습니다.”

    성소 봉사자(Altar Guild)의 임명식 내용에서 옮긴 이 말들은 성소 봉사자로서 섬겨 야 할 일들에 대한 동기가 무엇인지를 잘 지적하고 있다.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께 서 하신 일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치워버리기 위해서 죽으셨다. 그리고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정복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이 받은 세례 가운데서 우리를 그 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동참하게 하셨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계속 진행하고 계시는 일은 무엇인가? 그 분은 우리들 안 에서 용서의 능력을 새롭게 하신다. 또한 복음을 선포함으로 우리에게 소망과 기쁨을 주신다. 또한 그 분은 교회의 사귐 가운데서 우리에게 사랑을 주신다. 그 분은 거룩 한 성찬 가운데서 우리에게 축복의 잔과 생명의 떡을 주신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응답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다른 모든 전능하신 것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우리 자신을 드리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다. 성소 봉사자로 섬김을 위한 기본적인 동기는 감사하는 마음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제단 봉사자는 감사에서 울어 나와서 기쁘게 섬기는 종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종이며(2:10-11, 24:3-4), 하나님의 백성들의 종이고, 또한 예배의식의 종이며 동시에 예배 장소의 종 (28:17)이다.

 

다. 성소 봉사자의 구체적인 역할들 : 

    예배가 질서 정연하고 엄숙하게 진행되는데 있어서 선행할 일은 예배를 적절하게 준비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 성소 봉사자들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고 하겠다. 다음과 같은 역할들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첫째는 존경심이다.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예배 때마다 드린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 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이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존경심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존경심이란 우리의 진심에서 울어나오는 사랑과 숭배 그리고 경의 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그래서 제단 봉사자는 이 기도를 항상 드려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 뜰에서 두려움과 떨림, 거룩함과 놀라움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간 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천사들이 하늘에서 불렀던 노래와도 같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전, 하나님 안에서의 교제와 사역들은 하나님의 임재의 내용들이 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성단(sanctuary)을 섬기는 일이다.

성단에는 여러 가지 성물들이 있다. 제단, 설교대 그리고 세례대를 들 수 있으며, 그 리고 이런 성물들과 관계된 비품들을 말한다. 제단은 구약시대부터 있었는데, 첫 제단은 아주 단순한 돌들이었다(28:22). 차츰 다듬지 않은 돌을 세워두는 것으로 (27:4-8), 후에는 금이나 동으로 잎을 만들어 붙인 나무로 된 제단을 사용하게 되었 다(37:25-28, 왕하 16). 제단은 예배의 중심자리로, 성례전적인 성격과 제사적인 성 격 모두를 가지고 있다. 제단 위에 덮는 제단보, 제단 양쪽에 두는 촛대, 촛불 점화기, 교회력의 색깔을 알리는 드림천(frontal),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사용하도록 적절하게 준비된 세례대(깨끗한 물과 타올), 그리고 성찬에서 사용될 각종 기물들과 떡과 포도 주를 각별하게 살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제단에서 준비할 일은 제단꽃을 준비하는 일 이다. 꽃과 관련된 성경 말씀들이 여럿 있는데, 골짜기의 백합화며 샤론의 참 장미로 하나님이 묘사되었고(2:1), 하나님의 섭리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그림으로(35:1, 6:28-30), 그리고 인간의 덧없음과 짧은 삶에 대한 상징으로(1:11, 벧전1:24, 14:2) 그려지고 있다.

 

세 번째는 예배 봉사자들의 예복을 돌보는 일이다.

말씀과 성례전의 예배를 인도하는 모든 예배 봉사자들이 입는 옷을 예복(vestments) 라고 한다. 성경에서 최초의 예복은 구약 시대 제사장들이 입었던 에봇이었다(28, 29). 그리고 신약성경에서도 몇 차례 언급하고 있는데, 5:4010:10은 오늘날 알브 (alb)에 해당되는 것으로, 무릎까지 내려오는 낙낙한 까운인 듯 하다. 딤후 4:13에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예복은 추위와 더럽힘을 막으려는 외투처럼 보인다. 적어도 5 세기 까지는 성직자들이 오래되고 길며 흰 까운을 예복으로 입었던 것 같다. 제단 봉 사자들은 예복을 입게될 예배봉사자들을 위해서 항상 깨끗하고 적절하게 예복을 관 리하는 일을 해야 했다. 이 외에 예배당의 청결이나 음향기기, 그리고 조명과 같은 것들을 점검하는 일은 교 회 관리인이 책임지고 돌볼 몫이다. 물론 이런 관리인이 없을 경우는 그 교회 목회자들이 맡아서 해야 할 일임은 물론이다. 그는 모든 예배 준비 상태를 최종적으로 점검해야 하는 점에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라. 성소 봉사자의 목표 :

    결국 성소 봉사자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적합한 자리를 만들어야 할 목표를 가진 사람들이다. 최근 몇 십년동안 교회란 두 가지 이중적인 개념으로 이해되었다. 하나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개념인데, 야곱의 말을 빌자면,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 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28:17)는 구절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와는 대조적인 개념인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세례를 통하여 교회와 화해한 백성들의 집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교회란 하나님을 예배하 기 위한 백성들이 있는 자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 성소 봉사자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예배의 자리를 만 드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고 하겠다.

 

첫째는 예배당의 아름다움이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아름다움으로 생각하였다(29:2). 그러 므로 제단 봉사자들은 예배 장소를 아름답게 만들 중요한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제단 비품들의 아름다움에 관심을 기우려야 한다. 비품들의 재료들, 디 자인, 모양, 색깔과 재질들에서 아름다움을 찾아야 한다.

 

둘째는 예배당의 단순성이다.

 단순성 역시 아름다움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예배의 장소는 예배자들로 하여금 아주 자연스럽고 용이하게 제단, 세례대, 설교대 등, 예배의 중심된 것들을 바라볼 수 있도 록 고려되어야 한다. 가령 너무 많은 깃발이나, 화려한 꽃들, 그리고 다른 복잡한 것들 이 예배 장소를 채우고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말이다.

 

셋째는 예배당의 품위이다.

예배당의 품위란 그 진정성을 말하는데, 근거가 분명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당에는 모조품이 있을 자리가 없다. 가짜나 재생품 그리고 저질인 재료로 만든 것들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예를 들면 제단에 조화를 갖다 놓을 바에는 차라리 꽃을 두지 않 는 것이 백번 더 나은 일이다.

 

넷째는 예배당의 가치이다.

가치란 품질과 관계가 있다. 예배당의 모든 기물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릴만한 가장 가 치있는 것들이어야 한다. 더럽혀진 제단보나, 구겨진 예복은 하나님과 함께 예배자들 의 가치를 떨어트리는 일이다.

 

다섯째는 예배당의 타당성이다.

예배에서 사용되는 것들은 교회력의 시간이나 사용되고 있는 예배 모두에 적합해야만 한다. 예배드리는 장소가 대림절 주일에는 부활절 주일과는 확연히 다르게 보일 수 있 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저녁 기도회와 성만찬 예배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여야 한다. 그들이 예배를 드릴 때는 모든 것들은 예배에 적절한 것이어야 한다.

 

바. 성소 봉사자의 선발과 조직 그리고 훈련 :

 

첫째, 성소 봉사자의 선발

성소 봉사자의 자질을 분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현존앞에서 두려워하는 자세이다. 이런 자세를 가지고 있을 때, 그는 존경심을 가질 수 있으며, 제단 봉사의 직무를 수행할 기본적인 품성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예배를 준비하는 직무야말로 기독교인으로써 가장 높은 특권이 아닐 수 없으며, 그렇게 헌신된 사람만이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기쁨, 그리고 감사와 사랑으로 그 직무를 책임질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겸손이다. 겸손하지 않 고서는 이 직무를 바르게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배를 위해 헌신하는 다 른 많은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 예배 인도자, 보조자, 조수, 안내자, 예배 위원들인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을 잘하려면 반드시 겸손해야 한다.

 

둘째, 성소 봉사자의 조직

이들을 교회가 정식으로 교회앞에서 임명하고, 팀웍을 이루어 서로 격려하도록 조직해 야 한다. 제단 봉사자는 여자들로만 구성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예배를 섬기는 일은 남자와 여자가 함께 참여할 때 아름다운 모습이기 때문이다.

 

셋째, 제단 봉사자의 훈련

일단 조직된 제단 봉사자들은 제단 봉사자의 자질을 갖추기 위한 훈련을 해야 하는 데,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만이 아니라, 왜 그런 일을 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 도 배워야 한다. 가령 해당된 날의 교회력에 따른 색깔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만이 아 니라, 그 날의 의미와 색깔의 의미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들은 최소한 다음과 같 은 주제들에 대해서 배워야 한다. 예배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누구시며, 우리는 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가? 예배의 자리, 교회력, 예배의식의 의미와 발전과 같은 역사 적이며 신학적인 내용들을 배우도록 해야 한다.

 

넷째, 정규적인 모임을 가져야 한다

성소 봉사자 모임은 예정된 시간표에 따르겠는데, 필요에 따라서는 회장이나 책임자에

의해서 소집될 수 있다. 모일 때마다 아래와 같은 순서로 진행 하면 좋을 것이다.

. 소집 경위에 대한 안내.

. 출석 확인.

. 헌신의 시간(기도회).

. 연구 수업.

. 공식적인 보고.

. 예배 위원회 보고.

. 해온 활동들.

. 앞으로의 활동 계획들.

. 기도.

 

성소 봉사자의 성소 봉사자를 위한 교육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될 수 있다.

교육 내용

예배의 목적과 정신

예배 각 순서의 의미

성찬의 의미.

세례의 의미

아침기도회의 의미 아침기도회의 내용

저녁기도회의 의미 저녁기도회의 내용

마감기도회의 의미 마감기도회의 내용

교회건축과 상징들

교회력의 발전과 구조

교회력의 색깔과 의미

절기와 축제일의 의미과 관습들

결혼예식의 준비

장례예식의 준비

예복의 발전과 의미

예배 비품들과 지정된 자리

예배당안의 촛대의 사용과 의미

성찬도구들의 내용과 그 관리법

예배음악

상징들의 목적과 의미

성호긋기의 의미

 

 

참고 도서

Gunnemann Louis H., Worship - a course book for adult , Philadelphia : United Church Press, 1966. pp.9-13, 24-27, 33-38, 50-59.

Lathrop Gordon W., Holy People, Minneapolis : Fortress Press, 1999. pp.19-48, 49-72, 159-228.

Klauser Theodor Dr. A Brief History of Liturgy, Collegeville, Minnesota : The Liturgical Press, 1953. p.12..

Price Charles P., Liturgy for Living, Yew York : The Seabury Press, 1979. pp.13-64, 295-299.

Ruoss, G. Martin, Altar Guild workbook, Philadelphia : Muhlenberg Press, 1955, pp.21-88.

Searle, Liturgy Made Simple, Collegeville : The Liturgical Press, 1981, pp. 75-95.

Stauffer, Altar Guild, Philadelphia : Fortress Press, 1985. pp.13-17, 17-19, 7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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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와 상징

 

가. 상징으로 가득 찬 예배 :

    우리가 예배드리는 자리에는 각 종 상징물들이 놓여져 있다. 십자가, 설교대, 성찬상, 세례대, 촛대와 헬라어 알파와 오메가(Α Ω) 혹은 키로() 등이 그것들이다. 예배 봉사자들은 회중과는 다른 복장(vestment)을 하고 있으며, 설교자는 설교대에 올라선다. 그러면 회중들은 선포될 하나님의 말씀을 기대하며 조용히 앉아서 귀를 기울인다. 함 께 신앙을 고백하고 주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찬송을 부를 때면 회중은 일어선다. 또 한 기도 인도자가 기도를 드릴 때면 마지막에 반드시 아멘!”이라는 화답을 하기도 한다. 이런 모든 예배의 내용과 행위들이 사실은 상징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상징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 하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종교적인 내 용과 행위들은 상징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상징이 아니고서는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상징은 우리 예배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 런데 불행스럽게도 이런 상징이 갖는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예배나 신앙생활에서 상징자체를 애써 외면하려고 한다. 그 리고는 상징이 우상처럼 될까 염려가 된다는 엉뚱한 해석을 한다. 상징과 우상을 구 별하지 못한다면, 거기엔 더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바로 교육이 부재하다는 현 실이다. 잘못 이해하고 잘못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상징 이외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해서 눈을 딱 감고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중요한 것은 상징의 의미를 제대로 배우는 일 밖에 없다고 하겠다.

 

나. 예수님과 성경 그리고 역사는 상징을 창조해 나갔다

    예수님은 상징적인 용어들을 많이 창조하셨다. 가령 자신을 <선한 목자>(10:11),  <양의 문>(10:7), <세상의 빛>(8:12)<포도나무>(15:1-5)로 말씀하셨다. 제자들에게 대부분 비유로 가르치셨음을 알 수 있다(4:34). 이런 비유들은 대체로 상징들로 가득 찬 내용들이었다. 천국에 관한 비유들은 상징어들이다. <밭에 숨겨진 보화>(13:44)<진주 장사꾼>(14:45-46), <씨 뿌리는 농부>(13:2-8), 그리고 <가만히 자라는 씨>(4:26-29)와 같은 이야기들이다. 천국을 일상의 말로 소개하거 나 설명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들이 땅에서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과도 다른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득불 땅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말씀하 셨던 것이다.

    역시 성경 안에는 상징 언어가 풍부하다. 역사의 여명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 들의 신앙을 상징을 창조해서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에게는 아직 성전도 없었 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도 없었다. 오직 그들은 상징 언어를 만들어 하나님을 만났 고 관계를 맺었다. 가령, 야곱은 하나님을 만난 후 거기에 돌단을 쌓았다. 그리고 거 기에 하나님의 집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였다(28:10-19). 가령 보통 일반인과 구별 되는 하나님의 사람을 일컫는 <나실인>이라는 사람을 세웠는데, 그들은 머리털을 깎 지않고, 독주를 마시지 않으며, 사체에 손을 대지 않음으로 <나실인>의 지위를 유지 하였다(6:1-21). 그렇게 함으로 누구든지 그를 보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두 려워하였다. 또한 예배를 섬기는 제사장들에게는 특별한 예복(에봇)을 입도록 규정하 였다(28:1-4).

   이런 상징의 발전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풍부하게 이루어졌다. 가장 오래된 예전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 교회의 성직 서품의식도 7세기 후반기에서야 나타나는데, 거기에 보면 특별한 예복(vestments)이나 목사의 목에 두르는 영대(stole) 같은 것이 없었다.

   이렇듯 상징은 우리로 영적인 것들에게로 눈을 돌리게 만드는데 크게 도움을 준다. 뿐만 아니라, 상징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이고,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들 의 관심사, 그리고 중요한 기독교의 가르침들을 기억나게 해 준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상징들은 예배드릴 마음을 갖도록 도와준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상징들은 예배 자들의 순례생활에 있어서 필수인 이정표와 같은 구실을 한다고 하겠다.

 

다. 상징에 대한 일반적인 의미 :

    일반적으로 상징이란 의사표현의 한 도구로, “추상적인 것을 구체화하거나 나타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그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를 전달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제한적이다. 이렇듯 언어는 무엇인가를 말하지만, 상징은 그것을 나타내 보여준다. 언어가 한계에 부딪히게 될 때, 상징은 말하기 시작한다. 상징이 말하기 시작하면 언어는 침묵을 지킬 수 있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을 흔들거나, 갑게 누군가를 포옹할 수 있다. 물론 이런 행동을 대신해서 언어로 전달한다고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마도 우리의 삶에서 많은 아름다움이나 색채를 잃게 될 것이다. 말보다는 이상과 같은 상징적인 행동들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존경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 하고 있는지를 생각할 때, 왠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느낄때가 있다. 그러나 만일 존경의 표시로 <큰 절>을 올려드릴 수 있다. 그 때 언어가 주는 의미보다 훨씬 더 분명하고 깊은 감동을 전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상징들이 신앙생활에 사용 될 때, 얼마나 풍부하고 심오한 신앙으로 이끄는 도구가 되는지 모른다. 우리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이란 무한하고 영원하신 절대자와의 관계맺기 이기 때문에 상징은 가 장 적절한 대화의 재료가 될 수 있다. 신앙적인 표현 가운데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 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며, 이런 경우에 상징보다도 더 적합한 도구가 없다고 하겠다.

   어느 예배당 제단 뒤 벽면에는 알파와 오메가란 희랍어 글자가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만일 그 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 교인이라고 한다면, 예배당에 들어섰을 때, 그는 처음이 되실 뿐 아니라, 끝이 되시는 하나님이 여전히 자 신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생각에(1:8), 그가 조금전까지 자신을 사로잡고 있었던 온 갖 근심과 걱정들이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라. 예배와 관계된 상징의 종류들 : 상징에는 다양한 종류들이 있다.

    첫째는 시간의 상징이 있다.

생활의 리듬을 암시해 주는 한 주간(23:3),

언제나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1:10),

작은 창조로써 아침(1:1-31),

활동과 구별되는 시간인 저녁(1:1-31),

수면과 침묵 그리고 죽음으로써 (9:4)이 그런 것들이다.

 

    둘째는 장소의 상징이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2:46-47),

세상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나그네의 집(119:54, 고후5:1-3, 벧전2:11),

주님의 살고 피를 겸격으로 나누는 제단(26:26-28),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설교단,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의 자리 찬양대석, 등이 그런 것들이다.

 

셋째는 상징적인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인 성도(고전1:2-3),

하나님의 사자(使者)목사(1:7-9),

천국 음악으로 섬기는 찬양대원(대하29:25-28),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서 직분자들(고전4:1-2),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돌보는 관리인(대상9:17-27), 등이 그런 사람들이다.

 

넷째는 거룩한 용어들의 상징이 있다.

하나님과 대화인 기도(6:5-15),

마음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8:29),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는 찬송(95:1-2),

말없는 기도인 묵상(19:14, 119:97),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30:5-6, 3:2, 벧전4:11),

하나님의 은총에 응답하는 봉헌(96:8),

하나님의 은총을 비는 인사(6:12, 1:28) 등이다.

 

다섯째는 거룩한 행동의 상징이 있다.

세례를 기억하는 십자성호,

화해와 용서로써 악수와 포옹(벧전5:14),

천국으로 향하는 순례로써 행진(95:2),

권위와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로서 안수(10:16),

하나님의 은총을 선포하는 강복의 손(6:22-26) 등이다.

 

여섯째는 예배를 돕기 위해 준비된 상징들이 있다.

두 개의 촛대와 촛불은 주님의 두 성품인 신성과 인성(16:16, 1:1-14),

촛불은 세상을 밝히는 빛이신 주님의 임재(27:1, 1:4-5),

생명의 근원인 세례대의 물(요한7:37, 8:38),

승리를 말하는 깃발(50:2),

예배를 섬기기 위해서 입는 예복(28:2-43, 삼상2:18),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돕는 오르간-악기(대하29:25-28),

주님의 사랑의 결정체인 십자가(고전1:18-24) 등이다.

 

일곱째는 경건한 자세들의 상징이 있다.

하나님을 높여 드리기 위한 일어 섬(7:10, 삼상9:26, 60:1),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기 위한 앉음(대상17:16-27, 3:34-35),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무릎꿇음(95:6, 3:15),

목적지를 향한 걸음(40:31, 3:6),

사람 사이의 교량으로서 인사(1:28) 등이다.

 

여덟째는 거룩한 의미를 전하는 글자의 상징이 있다.

신앙고백을 요약한 물고기란 글자(Ιχθυς는 물고기라는 희랍어인데, ‘예수 그리스도 는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란 신앙고백의 첫 글자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과 나중 되시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Α Ω(알파와 오메가).

우리의 구주가 되신 주님을 의미하는 (희랍어 크리스토스의 처음 두 글자),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의미하는 ΙΗΣ(희랍어 예수의 줄임말) 등이다.

 

마. 상징의 특징

    모든 상징은 본질적으로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과 관계하는 매체요, 그것이 바라보는 주체를 섬기는 매체이다. 그런데 이런 상징들은 외적이고 내 적인, 그리고 영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상징의 외적 특징이라함은, 십자가나 어떤 의식을 집례하면서 행동하는 동작과 같은 유형적인 실재를 말하며, 내적인 특징은 한 집단이 그 상징에 부여하는 해석을 말하며, 영적인 특징이란 개인이나 집단이 외적인 상징과 내적인 의미와의 관련 속에서 만들어내는 에너지를 말한다. 가령, 십자가는 고 난과 죽음을 외적으로 암시하는 외적 상징과,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해석하는 내적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이로써 십자가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확신과 기쁨을 주는 영적 에너지를 발산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상징은 이런 특징 외에도, 역설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상징은 어떤 사람들 에게는 의미를 분명히 드러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깊은 의미가 감추어진다는 것이다. 마치 예수님의 비유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진 의미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런 상징들에 대한 교육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바. 상징은 의미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이상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상징들 속에서 살고 있는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의 실제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상징은 폭 넓게 사용되고 있다. 이런저런 상징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고, 우리의 신앙이 자라날 수 있다. 어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영적 의미를 전달해 주는 상징이라는 점에서 더욱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상징은 이렇듯 간결하면서도 심오한 의미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수단이 아닐 수 없다(13:13-43).

    그런데 문제가 있다. 우리 교회가 가지고 있는 많은 상징들 중에는 잘 알려지고 이해 되는 것들이 있는 반면에 그렇지 못한 상징들이 많이 있다는 현실이다. 다시 말하면 상징이 갖는 본래적인 의미를 알지 못할 때 심각한 괴리 현상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상징은 공감대가 형성된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 처음 상징의 의미를 바르고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할 때, 자칫 우상을 섬긴다는 오해를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징에 대한 교육이 절실하 다. 그리고 그 상징들을 신앙과 삶에서 나눌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 신앙의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면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을 여행할때, 대부분의 교회당 지 붕에 큰 장닭 한 마리가 앉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옆에 앉은 아이가 물을 수 있다. “엄마, 저게 뭐야?” 그 때 저건 말야,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 했거든(26:69-75).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장닭이 세 번 울었지. 엄마는 저 장 닭을 볼때마다, 나는 지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자신을 돌아본단다.”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면, 그 아이는 그 장닭을 예사롭게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

 

사. 예배에서 말과 상징의 균형과 전망 :

     예배에서 말과 상징 사이에 균형이 깨지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예배에서 필요이상으로 말을 많이 하려고 하지만, 실제로 전달되는 의미는 그리 많지 못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모국어로 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에 상징이 서 있을 자리를 잃은 것이다. 그리스도인도 아니요, 종교인도 아닌 에리히 프롬은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상징적 언어를 우리 각자가 배워야 할 외국어라고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그 것을 배우면, 지혜의 의미심장한 출처 가운데 하나인 신화와의 관계에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실로 그것은 내용과 형식에서 전인류에게 공통적이기 때문에 특히 인간적이라고 하는 체험분야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다.” 악수와 인사말이 서로 상충되지 않으면서, 서로의 따스함과 의미를 강화시켜 주듯, 언어와 상징행위는 서로를 보완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현대 기독자들이 말의 홍수속에서 살지만 실제로 그들의 마음에 오랫토록 남아있는 말이란 과연 얼마나 될 까? 오히려 이와같은 우리의 빈약한 언어를 보완해 주기 위해서 상징언어를 사용한다고 하면서 함께 공유하고 익히도록 할 때, 지금보다 훨씬 더 풍성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상징의 의미는 마음속에서 잘 보존될 뿐 아니라, 말보다는 훨씬 더 용이하게 기억되는 장점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예배에서 말과 상징이 균형을 이룸으로 더욱 풍성한 신앙의 의미를 살려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오늘 교회 지도자들에게 달린 큰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참고 도서

 

박성완, 루터교 예배이해, 서울 : 컨콜디아출판사, 2000, pp.141-144.

웨버 로버트 E., 정장복역,예배의 역사와 신학, 서울 : 대한예수교 장로회 출판국, 1991.

pp.138-141.

카스파 P. , 허인역,전례와 표징, 서울 : 성바오로출판사, 1989. pp.149-152.

화이트 제임스 F., 정장복역, 기독교 예배학 입문, pp.166-196.

Aidan Kavanagh, Elements of rite, Collegeville : The Liturgical Press, 1990. p.103.

Davis H. 그래디, 박일영역,예배의 실제, 서울 : 컨콜디아출판사, 1983, pp.71ff.

Gunnemann Louis H., Worship - a course book for adult , Philadelphia : United Church Press, 1966. pp.58-59.

Klauser Theodor Dr. A Brief History of Liturgy, Collegeville, Minnesota : The Liturgical Press, 1953. pp.5-6.

Lathrop Gordon W., Holy Things, Minneapolis : Fortress Press, 1993, pp.87-115.

Schoedel Walter M., Worship is cerebrating as Lutheran, St. Louis : Concordia Publishing House, 1990, pp.25-37.

Stauffer S. Anita, Altar Guild, Philadelphia : Fortress Press, 1985. pp.30-34, 54-55, 102.

Zimmer R.. Allen, A Catechism of Christian Worship, St. Louis : Concordia Publishing House, 1961, pp.52-61.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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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배와 의식

 

가.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 :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회는 한 주일도 쉬지 않고 매 주일이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은 일정한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모였다. 처음 얼마동안은 제대로 된 건물이 아니라, 한적한 강변이나, 언덕에서도 모였고, 벽이 없는 그런 빈 집에서 도 모였다. 물론 예배를 드리러 오는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의 온갖 문제들을 가진 체 교회로 모인다. 비바람이 불고 냉기가 들 때마다, 더욱 시달리는 노인들의 관절 염, 지친 어머니의 팔에 안겨 짜증스럽게 울어대는 아기들의 울음소리와 그 어머니 의 난처함, 세상과 관계된 온갖 근심과 걱정들, 사업상의 문제들, 가족간의 불화들, 뒤엉켜있는 인간관계들, 그리고 지난밤에 다투다가 보류해 둔 문제들, 예배에 참석 한다고 해서 이런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아내를 잃은 홀아비의 외 로움이나, 아침 식사 때 부모들과 한바탕 다투고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뛰쳐나온 십대들의 흥분도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예배드리러 올 때마다 차 안에서 한바 탕 입씨름을 하고 온다는 40대 주부도 있다. 나름대로 힘든 문제들을 안고 있는 사 람들이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

 

나. 예배당에 들어설 때 :

    우리들이 어느 집에 들어갈 때는 먼저 노크를 한다. 하나님의 집에 들어설 때도 노크가 필요하다. 그것은 예의에 속하는 일이다. 이런 예의나 예절은 함께 사는 공 동체 생활에 있어서는 꼭 필요한 일이다. 지난 2천년 동안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배 당에 들어서서 제단을 향해서 머리를 약간 숙여 목례를 표하거나 십자성호를 그었 다. 그것은 하나님께 향한 가장 소박한 인사라고 생각했고, 십자성호는 자신들이 이 미 받았던 세례를 상기시키는 의미 있는 일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자녀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자신이 받은 세례를 기억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은 없을지 모른다. 우리는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 세례는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다시 살게 되었다는 것을 항상 새롭게 일깨워주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개신 교회 일각에서 십자성호를 잃어버린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다. 예배는 하나님의 활동이며 동시에 사람의 활동이다 :

    모든 예배는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된다. 곧 예배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랑으로 우리들에게 오시는 행동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고(43:1), 우리들이 하나님 자신과 함께 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손을 우리에게 펴시고, 예배가운데서 우리들을 하나님 자신에게로 더욱 가까이 끌어당기신다(요일 3:1,4:10, 51:16). 그리고 말씀과 성례전을 통해서 알게 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방법이다(요일 2:1-2, 4:9).

    또한 예배는 믿는 자들이 마음(12:30)과 뜻(130:1-2)과 정성(고전6:20)으로 동료, 믿는 자들과 함께(10:25) 그리스도를 통하여(14:6)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이다(95:6-7). 예배 안에서 모든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의 하늘 아버지께로 나아간다. 예배는 믿는자들이 서 있거나(134:1), 노래를 부르거나(100:2) 그들의 머리를 숙이거나, 무릎을 꿇는(45:23) 등의 구체적인 행동을 하면서 하나 님께 나아가는 활동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과 예배 자들 사이의 상호 교제이지, 어느 한 편에 의한 일 방적인 활동이 아니다. , 하나님은 그를 예배하는 자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16:19,18:21-22), 자신의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확신을 주시며(고후3:4), 믿는 자들의 삶의 길을 인도하시고 (23:1-6), 그들에게 말씀(8:47)과 성례전을(26:26-28) 통하여 성령을 부어 세상 으로 파송하시는 일(9:1-2)을 하신다.

 

또한 예배자들은 예배를 통하여,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높여드리고(고전6:20), 자신의 죄와 신앙을 고백하며(요일1:8-9, 5:16),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7:7-8, 12:12-19),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김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4:10). 그러므로 더 이상 예배를 본다.’던 지, ‘예배를 드린다.’는 말로 예배의 성격 을 설명하려고 해서는 안 되겠다. 예배는 하나님의 일이며, 동시에 예배자의 일이기

때문이다.

 

라. 개인적 헌신과 공적 예배의 차이 : 

    개인적 예배와 헌신은 순전히 개인의 의무와 특권이다. 자유로우며 꾸밈이 없는 특 징을 가진다. 그러나 공적인 예배는 교회의 특권이며 책임이다. 그래서 이런 공중 예배는 그 순서가 잘 갖춰져야 하며, 관리되어야 마땅하다. 공중 예배는 추상적이 아니 라 구체적이어야 한다. 예배자들이 이해하고 공감해야 하며 협력하면서 참여해야 하 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중 예배는 시간, 장소, 형식, 그리고 음악적인 것들이 준비되어 야 한다. 존경, 엄숙함, 아름다움, 효율성이 적절한 양식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이렇듯 공적인 예배가 교회의 책임이기 때문에, 지난 2천년동안 교회는 성경이 추천 하거나 혹은 제한하지 않는 범위에서 꾸준히 예배의 틀을 갱신해 왔다. 수 없는 작업 을 거친 끝에 마침내 오늘과 같은 기본적인 양식을 구성하게 되었다. 공적 예배가 되 려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소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마. 공적 예배의 삼요소 : 

    예배란 공적인 일혹은 사람의 일이란 헬라어 레이뚜르기아에서 왔다. 예배는 공적인 것이어야 한다. 여기에서 예배의식(Liturgy)이라는 말의 기원이 있다. 하나님의 일 꾼이 해야 할 마땅한 일이 있었다(1:23, 13:2, 고후9:12, 2:17,30, 9:21).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해야 할 많은 일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예배를 드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레이뚜르기아가 교회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라는 것으로 좁은 의미 를 갖게 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런 공중 예배가 되기 위해 서는 몇 가지 구성요건이 되어야 하는데, 첫째는 순서(Order)가 있어야(고전14:26) , 둘째는 의식(Rite)이 있어야(고후14:27-33) 하며, 셋째는 예식(Ceremony)이 있어 야(고후34-36) 한다는 점이다.

   먼저 순서라 함은 예배 내용의 배열 혹은 예배로의 접근을 의미하는데, 예배자들이 다 함께 이해할 수 있는 고정된 진행과정을 정리해 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공중 예배는 개인의 응답과는 달리, 공동의 표현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예배자는 무엇 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를 알아야 하고 기대할 수 있는 순서가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의식의 요소가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의식이란 음성으로 표현되는 일체의 예배 내용을 말한다. 찬송을 하거나 신앙을 고백하는 일 그리고 침묵하는 일 까지도 다 여기에 해당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지역 교회 형편에 따라서는 말로 표현되기도 하고 노래로 불려질 수도 있다.

   세 번째 의식의 요소인 예식이라 함은, 예배에서 음성으로 충분히 표현할 수 없기 때 문에, 동작과 행동에 관계된 내용들을 의미한다. 예배가 처음부터 끝까지 회중을 앉 은 자리에 붙박아 둔다고 한다면, 굉장히 지루하고 답답할 것이다. 그래서 의식예배 는 예절을 갖춘 여러 지시사항들을 고려하고 있다. 찬송을 부를 때 일어서게 한다던 지, 죄를 고백할 때는 무릎을 꿇게 하며,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자리에 앉도록 한다던 지하는 일이다. 전통으로는 촛불 점화자와 찬양대원들 그리고 예배인도자들은 제단 을 향해서 행진하는 관습도 있다. 또한 예배 봉사자들로 하여금 특별한 예복을 입도 록 한 것(28:1-43)도 예전적(의식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바. 예배의 구성 : 제사적이며 성례전적인 성격. 

    예배는 크게 두 가지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제사적인 내용들이고, 다른 하나는 성례전적인 내용들이다. 제사적인 내용이라 함은 우리 예배자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내용들인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써 기도와 찬송 그리고 봉헌과 같은 것들이다. 이런 내용들이 진행될 때 예배 인도자는 모든 인간을 대리하기 때문에, 그는 제단을 향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진행되는 내용이 제사적이라는 것을 예배자 들이 알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그리고 성례전적인 내용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과 성례전(고전11:26)을 통해서 우 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들을 말하는데, 사죄선언, 성경봉독, 설교, 성찬 그리고 축복 선언(강복-축도/6:22-26)과 같은 것들이다. 이 때는 예배인도자가 하나님을 대신하 기 때문에 그는 회중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이나 예배자 중 어느 한 편에 의한 일방적인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배자들 사이의 만남 혹은 교제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예배 가운데서 오셔서 말 씀과 성례전으로 임재하시고, 예배자들은 그 하나님을 향해서 영광과 찬양을 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가 극적인 성격을 가질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제사적인 내용 들과 성례전적인 내용들이 대화적으로 구성될 때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 시고 예배자들이 그에 대해서 응답하게 될 때, 이런 극적인 성격을 구현할 수 있으며, 또한 예배가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가지도록 구성할 때도 이런 극적인 성격을 이룩할 수 있다고 하겠다.

 

사. 역사를 통해서 배워야 할 유산들 :

     참된 기독교회란 무엇을 뜻하며, 그리스도의 교회가 어떻게 살며 일해야 하는지, 리고 한 영혼이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는지를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기독교회가 물려받은 세 가지 유산을 검토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첫째는 사도들과 순교자들(2:20) 그리고 교부들의 시대로 돌아가 살펴보는 일이다.

그리고 둘째는 종교 개혁자들의 메 시지를 깊이 생각해 보는 일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모든 장래 세대들이 배울 수 있도록 교회에게 큰 깨우침을 주면서 지난 수 세기동안 하나님께서 세워주셨던 은총 을 입은 영적 지도자들을 회상하는 일이다.

   예배의 유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의미 있고 장중한 것이 되려고 한다면, 하나님과 예배자들과의 만남이 의미있는 것이 되도록 어떻게 우리들 신앙의 선진들이 힘써왔는지를 살필 수 있을 때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기독교회가 지난 2 천년동안 예배에 들여온 공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예배란 모든 기독교인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할 과제가 있기 때문에(4:23), 초대 교회 이래로 기독교회 가 가장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우려왔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교회력의 출현에 관해서 과거의 역사를 연구하게 될 때, 바로 이와 같은 관심에서 출 발하였고, 발전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예전(의식)과 관계된 연구가 계속 진행되어 온 까닭이 여기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한국 기독교회의 일각에서는, 교회의 예전(의식)에 관한한 역사적인 단절현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 기독교회는 역사적 인 종교이다. 무시간적 초월적인 종교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 구주이신 예수님이 구체적인 역사의 한 복판에 오셨고,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역사적인 것(사 복음서)이 었다. 그리고 제자들은 역사 속에서 기독교의 신앙을 증거하면서(행전과 서신들) 오 늘에 이르렀다.

    기독교 예배 역시 이런 역사성을 가지고 오늘에 이르렀다. 기독교 신앙을 세상에 증 거하는 가장 중요한 활동으로써 예배는 역사 속에서 부단히 연구되었고 드려졌다. 차 제에 이런 예배의 역사성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더욱 깊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아. 예배의식의 갱신에 관한 관심 필요 :

    개인주의가 심화되어 가고, 대부분의 작은 공적 모임들이 폐지되고 있는 인터넷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여전히 전 세계를 통하여 기독교인들이 주일이 되면 예배드리기 위해서 일정한 장소에 모여, 찬송을 부르고 자신의 마음속에 담긴 고백을 하며, 거룩한 행동에 동참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이런 예배모임에서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참 평안과 기쁨 그리고 소망을 얻는다고 믿고 있다. 이런 예배 행위가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회는 지금까지 존속해 올 수 있었다고 말할 때 조금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는 항상 자기 변화를 시도해 왔다는 것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가령 예수님의 제자들도 역시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 적합한 예배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변화를 시도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유월절 만찬 해석이다 (고전11:34, 26:27-29). 우리가 아는 대로 유월절 만찬은 유대인의 전통(12:11, 21-28)이다. 하나님께서 유대민족을 어떻게 구원하셨는가를 보여주는 출애굽이란 역사적 사건에 터를 둔 민족적인 축제일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런 유대인의 명절 을, 자신들의 구세주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짊어지신 사건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유월절이 성만찬 제정일로 재해석된 것이다.

   또한 현재 우리가 가진 가장 오래된 예배관련 자료는 주후 220년에 기록된 순교자, 성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Apostolic Tradition)인데, 아마도 이 자료는 동서 기 독 교회를 통틀어 가장 정통성있고, 전통적인 최초의 예배 개요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자료에서 세례 예식이 소개되고 있는데,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삼위일체적 공식 문구(28:19)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적어도 그 때까지는 삼위일체 교리가 확립되지 않았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오늘의 세례예식에서 삼위적 공식문구는 빼놓을 수 없는 내용이 되었다. 이렇듯 예배의 내 용은 계속 새로워졌고, 그것은 지난 2천년동안 시대적인 요구에 응답하며 변천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모든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것들이 이 권위를 주는 것이 사실이 지만,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들이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변해야 할 것과 변해서는 안 될 것이 있어야 한다는 진리이다. 진리는 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진리를 전달하는 도구는 변해 야만 한다.

   우리 한국 민족은 예전적인 민족이다. 예로부터 유교적인 전통이 지배하는 문화 속 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예전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충분한 자질을 가진 민족이라고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적인 기독교회의 예배 의식을 배우는 일에 있어서 흥미를 가질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런 예전을 우리 문화에 잘 적용해 갈 수 있는 충분 한 능력도 있다고 하겠다. 작금과 같은 무질서와 무례하기까지 한 예배 행태에서, 장엄하고 경건한 의식 예배로 그래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관심과 노력이 절 실히 요구되는 것은 시대적인 과제라고 하겠다.

 

 

참고도서

박성완, 루터교 예배이해, 서울 : 컨콜디아사, 2000, pp.28-34.

최정오편, 세상의 미사, 서울 : 계성출판사, 1991. pp.7-8.

쯔찌야 요시마사, 최석우역, 미사, 서울 : 성바오로출판사, 1990, pp.169-177.

추풍코, 윤민구역, 전례의 토착화, 서울 : 카토릭출판사, 1990, p.20.

Brown Edgar S., Living The Liturgy, Philadelphia : Fortress Press, 1961, pp.6-8.

Giertz Bo, Liturgy and Spiritual Awakening, Rock Island : Augustana Book Concern, 1954. p.8.

Gunnemann Louis H., Worship - a course book for adult , Philadelphia : United Church Press, 1966. pp.56-59.

Klauser Theodor Dr. A Brief History of Liturgy, Collegeville, Minnesota : The Liturgical Press, 1953. pp.5-6.

Lathrop Gordon W., Holy Things, Minneapolis : Fortress Press, 1993, pp.1-2.

Reed Luther D., The Lutheran Liturgy, Philadelphia : Muhlenberg Press, 1985. p.1.

Schoedel Walter M., Worship is cerebrating as Lutheran, St. Louis : Concordia Publishing House, 1990, pp.1-4, 14..

Zimmer R.. Allen, A Catechism of Christian Worship, St. Louis : Concordia Publishing House, 1961, pp.12-15.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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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학 특강 : 21세기 목회연구원(2017. 4. 28. 11:00-12:30, 13:30-15:00).

청주시 옥산교회당.

성경 : 딤후 2:15.

 

1. 들어가는 말.

   부활절 인사를 나누자.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기독교회가 전래된지 100년이 넘었다. 기독교인 다운 인사가 참 아쉽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당신과도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든든한 인사인가?

   금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종교개혁은 3대 원리를 내세웠는데, <은총만>, <믿음만>, <성서만>이다. 루터교회에서는 여기에 <그리스도만>을 더해서 4대 원리를 가르친다. 그리고 <성서만>이 맨 처음에 나와야 한다는 것이 저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성서만>에서 다른 모든 원리가 타당성을 가지는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성서만>이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벌써 40년 전에 하인리히 오토는 하나님은 계시는가? 어디에 계시는가? 인간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를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기독교 국가도 아니면서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지 조차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나라에서, 이런 질문에 대해 한 순간도 고민없이 설교하는 한국의 강단이 참 대단하다. 그래서 설교 비평서를 쓴 정용섭박사는 조직신학적 접근이 없는 설교, 교회력을 참고하지 않은 설교를 비판하면서, 온갖 폭탄선언을 퍼 부었다. 여러분 가운데는 이런 마음을 품고 있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설교단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참새처럼 가벼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매번 설교할 때마다 감격에 벅찬 설교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제쯤이면 설교의 공포에서 자유할 수 있을까? 평생 설교자로 살아야 할 텐데 어떤 비결은 없을까? 아마도 여러분은 많은 질문을 품고 이 자리에 왔을지 모른다. 이런 질문에는 분명히 정답은 몰라도 타당한 대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의 결론은 이렇다. 벅찬 감격으로 설교할 수 있다고. 그런 설교는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을 때라고 말이다.

   그래서 오늘 강의는 오전에는 설교가 무엇인가? 현대 설교의 문제점들, 설교의 내용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다. 설교의 기본에 대해서 신학교식 강의를 하게 될지 모르겠다. 그리고 오후 강의에서는 어떻게 설교할까? 이른바 감격에 이르게 하는 설교문 작성법을 말씀드리려고 한다. 시간 관계상 어쩌면 주마간산 식의 강의가 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설교를 흔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하겠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씀이 딤후 2:15로 목사 안수식에서 항상 후배들에게 전해 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드려지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먼저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그것은 저의 한계에 대한 말씀이다. 저는 루터교회의 신학자요 목사로 살아왔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루터교의 신학적 배경을 풍길 수 있다. 그것이 여러분들에게는 낯설 수 있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새로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2. 설교란 무엇인가?

   성경에서 설교라는 용어를 찾을 수 없다. 우리가 영어로 쓰는 낱말, preaching, sermon, homily중에서 homily가 헬라어 μολογα-능동적으로 고백, 수동적으로 시인, μολογω 고백하다, 약속한다, 공포하다가 가장 근접한 말이다.

그러나 설교와 동의어로 사용되는 성서언어가 있다. 선포라는 의미를 가진 케류그마(κρυγμα), “기쁜 소식이라는 εαγγλιον, “증거라는 의미를 가진 μαρτυρα가 그것들이다. 성구집(Bible Concordance)는 항상 책상위에 비치해야 한다.

   먼저 κρυγμακηρσσω에서 온 말인데, 의미는 선포하다로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언을 뜻한다. 가령 예배학에서 축도에 관해서 선언형식과 기원형식이 있다고 말한다. 아론의 축도(6:24-26)와 사도의 축도(고후 13:13)이 있다. 선언형 식은 그 말미가 원하노라.” “할 지어다.” 이다. 그런데 한국개신교회는 축원하옵나이다.” 혹은 기원하옵나이다.” 고 기원형식을 사용한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언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런 오해를 줄이기 위해서 그 용어도 고쳐야 하는데, 축도가 아니라 축복선언이라고 해야 옳다.

   다음으로 εαγγλιον이란 말은 εαγγελζομαι에서 왔는데, 기쁜 소식을 전하다, 또는 복음을 전하다는 뜻이다. 성경이 말 씀하는 복음은 단순히 인간의 곤경을 해결하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행동 전반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이다. 가령, 대표적인 복음을 성경의 요약문구인 요 3:16을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μαρτυρα증거하다, 선언하다는 의미의 μαρτυρω에서 왔다. 특히 요한복음서에 이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설교를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1:32, 34). 또한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를 증거한다(4:44, 5:33).

 

. 설교에 대한 성서적 의미.

. 설교자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순수한 심부름꾼으로 자처하였다.

. 그들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만 관심을 가졌다.

. 구약 선지자들의 설교에서는 하나님이 주체였지 설교의 대상이 아니었다.

. 신약에서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사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 예수 그리스도가 설교의 주체였고, 설교의 대상이 아니었다.

.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선포될 때, 그리스도 사건이 재현되고 있다고 믿었다.

 

. 설교에 대한 명사들의 정의.

. 루터 :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율법으로 시작해서 그리스도를 들어내는 복음으로 끝나야 한다.

. 칼빈 : 하나님은 하늘에서 누구나 다 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지 않고, 그의 도구로써 인간을 선택하여 말씀하신다.

. 칼바르트 : 설교는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의 선한 뜻을 따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인간을 선      택 하고 성경의 말씀을 방편으로 하여 인간들에게 증거하게 하신다.

. 틸리케 : 성경을 해석하고 현재화하는 일이다. 설교자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궁극적인 메시지를 전할 의무가 있      다(현대교회의 고민과 설교, pp.140-141).

 

3. 현대 설교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 정장복(설교학 서설, pp.46-49), 라이드(설교의 위기, pp.17-29), 루울 하우(설교의 파트너, pp.29-36).

. 깨달아야 할 성경 언어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고, 이해하기 힘든 신학적인 용어를 많이 사용한다.

가령 구원, 심판, 은혜, 신앙 같은 용어는 성경적인 심오하고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설명이 없이 세속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구속사관, 신인동형론, 이원론과 같이 설명이 따라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용되고 있다. 결국 설교가 사람들이 마음에 닿지 못하고 지겹고 재미가 없다. 설교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어른들도 종종 어린이 설교처럼 듣고 싶어한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는 단순 명확해야 한다.

.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 곧 신언(神言)이어야 하는데 사람의 말 곧 인언(人言)이 되고 있다.

설교자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자신의 경험과 판단과 지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치하는 경우이다. 여기에는 설교 술 어(종결어)의 문제도 한몫을 한다. 가령 축원합니다”, “믿습니다”, “원합니다”, “바랍니다”, “생각합니다”, “느낍니 다.”, “기원합니다.” 등등은, 설교자 자신의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한국의 강단은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라는 한 개인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는 말이다.

이는 주석(What it meant?) 과 주해(What it means?)가 생략된 때문이며, 결국 누구나 설교할 수 있다는 생각이 편

만해서, 신학교육 부재현상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 청중의 삶의 형편과 무관한 설교를 한다.

외국인 설교자처럼 청주의 삶의 자리를 너무 모른다고 하면, 엉뚱한 주제로 흐르기 쉽다. 마치 낯선 나라에 와 있는 느낌을 주고 설교가 자신과는 거리감이 있다는 거부감마저 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설교가 청중의 삶에 절박성이나 구체성을 잃은 맹탕 설교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 설교가 잘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잘 들려지지 않는 설교를 말하는데, 소위 식자연하는 목사들에게서 흔히 범하는 실수다. 수백번 듣는 설교지만,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가령 어느 목사님은 설교때마다 소꼭지 젖꼭지를 얘기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60년대 70년대 설교에서 많이 사용한 소극적 적극적이라는 말에 대한 우스개 소리이다. 예 화도 적절하지 못할 때 이런 현상이 생긴다. 청중을 고린도 교회 교인으로 착각하고 고린도 교회를 예로 든다. 이럴 경우에는 고린도 교회의 형편을 자세히 이해시켜야 할 것이다.

. 설교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역사적 책임감이 없는 설교를 한다.

설교는 기독자의 삶을 변화시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삶에 변화가 없이는 세상의 빛과 소금은 강건너 불보기일 뿐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핏대를 세워가며 낯선 꿈 얘기처럼 한다면 낭패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거기에다 신문과 잡지 등 세상이 관심을 갖고 다루는 중요하고 긴박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다면 이 또한 큰 일이다. 인종차별, 이념문제, 성차별, 비정규직 문제, 남북통일의 난제들 심각하고 중요한 이슈들에 대해서 아무 문제의식이 없는 것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 정용섭(설교란 무엇인가? pp.33-170). 조금 자세하게 문제점을 소개하고 싶다.

. 나열식 설교로 가장 일반적인 한국 강단의 현상이다.

성경 본문에서 제목을 가져오고, 나머지는 설교자가 하고 싶은 말을 첫째, 둘째, 셋째와 같은식으로 나열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리고 성경 본문을 설교에 반영하는 나열식도 있다. 전자는 작은 신학지식으로 그 조잡성이 들통날 수 밖 에 없는 것에 반해서 후자는 쉽게 약점이 노출되지 않는 위험성이 있다. 가령 전자의 한 예로 롬 8:31-39을 본문으로 성도의 영원한 보장이란 제목으로, 첫째 영생의 보장, 둘째 사랑의 보장, 셋째 영원한 집의 보장이라고 설교하는 경우이다. 후자의 한 예로 마 6:25-34를 본문으로 지금은 우선 순위를 정할 때라고 제목을 붙였다. 첫째 염려에서 해방, 둘째 하나님을 신뢰할 것, 셋째 먼저 구할 것을 구하시오 라고 했다. 전자는 제목 이외에는 본문과는 전혀 무관 한 설교자 자신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후자는 본문에 들어 있는 내용이긴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최적의 말씀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청중을 하나님의 뜻인양 기만할 수 있다.

. 성경 본문이 침묵하는 경우로 가장 심각한 문제지만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성경이 말씀하려는 참된 뜻을 깨우치지 못한 설교로, 15:11-32절은 가장 대표적인 곡해를 하는 설교 본문이다. 이 본문으로 주로 청중의 개인적인 죄와 회심을 목표로 설교한다. 부분적으로는 옳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맥 락에서는 제목부터 틀린 설교다. 이 본문의 주인공은 집나간 둘째 아들이 아니라, 그를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의 얘기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주인공은 첫째 아들이다. 그는 둘째와는 대비되는 인물로 순종적이고 모범생이다. 당 시 율법주의자 혹은 바리새인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당연히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버 지의 사랑을 오해한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은 우주적 사랑을 가진 분이시다. 이런 성경의 세계로 들어가야 하는데, 변 죽만 울린 셈이 되었다. 성경 텍스트와는 전혀 다른 주제를 취급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결국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되 풀이 외친다. 그리고 큐티식 설교를 지적하는데, 이럴 경우 텍스트가 침묵할 수 밖에 없다. 가령 나사로와 부자의 비 유를 말씀하셨다(16:19-31). 엉뚱하게도 나사로는 하늘 나라에 야심을 가진 사람이어서 구원을 받았다고 설교한 다. 그러나 이 텍스트는 하나님의 구원행위는 우리들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 그리고 빈자를 향한 부자의 무책임을 경고하는 말씀으로 선포해야 한다.

. 주석과 주해 사이에 거쳐야 할 조직신학의 여과장치가 필요하다.

주석이란 본문을 그 시대적 배경과 문법적 이해, 청중의 삶의 자리 등 텍스트와 연관된 여러 내용을 파악하는 일련의 작업을 말한다. 이런 텍스트에 대한 연구는, 종종 청중의 컨텍스트와 직접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신학이 연결고리를 해야 한다. 가령 성경에는 하나님 아버지, 그의 외아들 그리고 성령에 관한 말씀들이 빈번하게 나온다. <삼위일체>라는 신학이론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유일한 하나님이 아니라 세 하나님으로 오해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 밖에도 기독교회의 중요한 교리들, <구속사관>, <기독론>, <교회론>, <종말론>을 모르고 있다면 성경은 수수께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한국의 대 교단 가운데 어느 교단은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는다. 놀 랄 노자이다. 그런 고백을 성경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신학교 교실에서 자주 들었던 질문이다. 진짜 종말 은 언제냐고 한다. 성경 시대부터 지금까지 종말타령을 하고 있다면서 말이다. 종말론에 대한 이해 부족현상이다. 종 말론이 복음서에 세 가지로 나온다. 임박한 종말론, 실현된 종말론, 그리고 미래적 종말론이다. 어느 것이 진짜냐? 신 학적 이해가 없으면 혼란스러울 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다. 모두가 진짜인 때문이다. 개인적 종말을 의미할 때, 임박 한 종말론과 실현된 종말론이 해당된다. 그러나 우주적 파국을 의미할 때 미래적 종말론이 해당된다. 신학적 이해가 성경의 절벽들을 이어줄 수 있다.

. 성경의 세계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경을 해석하려 할 때 의문에 휩싸이기 쉽다. 성경의 문화가 전혀 다른 문화라는 점을 모르기 때문이다. 일부다처제 는 현대인들에게는 전혀 낯선 문화이고 전통이다. 성경의 삶의 자리가 독특했다는 말이다. 성경은 아랍이라는 문화를 배경에 깔고 있다. 그것을 이해한다면 성경을 부도덕한 시절이 있었다고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일화(22)과 사사 입다가 무남독녀를 제물로 바치는 일화(11)은 자칫 하나님을 인 간 제물을 원하시는 분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엔 거기에 하나님의 깊은 뜻을 찾을 수 있다. 그 리고 입다의 경우에는 문화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호수아로 하여금 여리고와 아이 성을 정복하는 과정이 너무도 끔찍하다. 어린 아이들까지도 다 죽이라는 명령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런 무자비한 분일까? 유대 광야 40년 동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체벌했다. 그것은 60만명이 광야에서 생활하는 배경을 살피게 해야 한다. 무질서 로 혼란에 빠지는 최악을 방지하려는 차선책이라고 말이다. 전쟁상황을 염두에 둘 수 있다. 즉결 재판이 필요하다. 에 이즈나 동성애를 비난하는 성경말씀이 구약과 신약에 있다(1:26-27). 그냥 나쁘다고만 말할 수 없고, 해결책을 강구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 해석이 없는 설교를 하려고 한다.

현대 한국 강단의 설교가 영적인 자극을 주지도, 더 나아가 무관심하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 2천년간 명맥을 유지한 기독교 설교는 보편적 진리를 향한 해석이다. 그동안 성경에서 제목은 택하고 내용은 설교자 마음대로 각색하 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강해설교라며 성경 구절과 단어들 접속사 등을 언급하지만,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방향으로 선 포하는 설교가 아니라는 말이다. 어느 유명 목사님의 강해 설교집을 읽은 적이 있다. “그 때에라는 제목으로 한 편의 설교를 하고 있었다. “헤롯 왕이 손을 들어라는 제목으로 또 한 편의 설교를 한다. 그리고 교회 중 몇 사람을로 한 편의 설교를 하고. 이런 식으로 몇 달째 설교를 한다. 그런데 청중은 이 많은 내용을 정리할 틈이 없다. 이런 것을 설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싶다. 왜 성경을 해석해야 하는가?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쉽게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남편 의 말도 해석이 필요하고, 아내의 말도 해석이 필요하다. 말 그 자체에 붙들려 있다면 나무나 돌대가리가 되기 쉽다. 말에는 맥이 있고 결이 있다.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에 해석이 없다니. 많은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은폐성이 있다고 말한다. 가령 십자가는 가장 대표적인 하나님의 은폐성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기독교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 하다. 예수 천당 하는 식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한국 교회 현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해석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이다. 일반 종교의 신 개념과 어떻게 다른지도 해석해야 한다.

. 설교와 성령에 대한 이해도 문제이다.

한국 교회는 성령충만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성령 충만이란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하고 있는 성도 들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목사 자신도 과연 제대로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성령 충만이라는 말을 자주 사 용하기만 한면 성령이 충만해 지는 줄로 착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성경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다. 그래서 성령의 조명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런데 성령의 조명을 비이성적인 차원으로 돌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다분하다. 그러니까 가슴이 뜨겁거나 환상과 환청이 있거나 방언을 말하는 것을 성령의 조명으로 오 해하는 식으로 말한다. 그리고 반대로 이성적으로 비판하고 해석하면 오히려 비신앙적 행위로 간주하는 경향성을 보 인다. 또 다른 현편으로는 성령의 조명을 확대해석함으로 설교자로 하여금 자의적 해석의 길을 열어놓는 문제도 있다. 여기에서 은혜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은혜를 끼쳐주려고 발버둥치는 목사들이 판을 치고 있다. “믿습니 까?” “할렐루야?” “아멘?” 하고 물음표 질문을 남발한다.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비판할 여지도 있을 것이 다. 그러나 한번 귀 기우려 들을 필요가 있다.

 

. 박성완 목사.

.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가 개인의 성공출세와 교회 성장의 수단으로 전락하였다.

한국 교회의 설교의 기조는 예수 믿으면 복받아서 잘 살게 된다를 바탕에 깔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교회 성장이 빼놓지 않은 기도의 제목이고, 설교의 목적처럼 되어 버렸다. 제가 중국 몽골 베트남 신학교에서 39차례 신학 세미나 를 인도했다. 그 때 많은 한국 선교사들이 가르친 말은 예수 믿고 복받은 나라가 미국이고 유럽 열강들인데 모두 예 수를 믿어서 그렇다고 한다. 많은 면에서 기독교회가 공헌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선교의 목표도 아니고 설교의 목적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가르쳐야 했다는 것을 뼈저리가 느꼈다.

. 교회력에 따른 설교 본문 선택이 필요하다.

설교의 편식현상이 두드러지는 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살피고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기 회는 설교본문을 다양하게 제공하는 경우이다. 전통적인 교회는 3년 성구집을 사용한다. 우리 한국 교회도 19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3년 성구집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런 성구집은 교회력이라는 배경이 뒷받침하 고 있다. 교회력의 정신은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안내하고 있다. 교회력에 따른 본문이 있다는 말이다. 이 성구집, 페리카피를 활용할 때, 설교 준비에도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 설교의 목적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어야 하는데 율법적 설교가 판을 치고 있다.

성경은 율법과 복음으로 구성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율법과 복음을 잘 구별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리 고 율법과 복음의 역할을 심화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역할과 하나님의 역할을 바르게 이해할 때, 바람직 인 삶을 살수 있고, 절망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이 점에 한국 교회는 매우 약한 부분이다. 그래서 율법종교처럼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기도 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강조하는 딴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 현대 교회의 예배가 가벼워지고 있는 것은 큰 문제이다.

예배가 하나님 앞에서 드려진다는 사실을 간과한 가볍고 유흥에 가까운 예배로 전락하고 있다. 제가 합동측 장로교 출신인데, 저의 어린 시절엔 교회에서 박수도 치지 못했다. 용문산이라도 갔다 온 어느 집사님이 찬송을 부르면서 박 수를 치다가 오순절 교회로 가라는 면박을 당하기도 했다. 엄숙해야 하고 두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1983년 쌘프란 치스코의 한 미국인 교회에서 열린예배에 참석했다. 그 당시에 막 유행하고 있었다. 상상도 못했던 파격적인 예배가 드려지고 있었다. 순서도 없고 질서도 없었다. 누군가 흐밍을 하니까 모두 따라한다. 누군가 기도를 하면 기도에 참여 하고, 누군가 찬송을 부르면 또 따라한다. 누군가 나와서 지난 주간에 경험한 얘기를 하면 듣는다. 그 다음에 뭐가 나 올지, 언제 예배는 끝날지 도무지 궁금해서 예배가 혼란스러웠다. 거기에 익숙한 사람들 같았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예배의 주인은 예배자들이었다는 점이다.

. 예화의 일반화가 설교의 품위를 떨어트리고 있다.

예화는 설교의 내용을 더 풍성하고 더 명확하게 돕는 방법 중 하나이다. 그런데 예화가 모든 사람들에게 다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베트남에서 만난 어느 목사님이 자신의 설교를 듣고 크리닉해 달라는 것이다. 망설였지만 하도 당당하게 요구해 와서 그렇게 하기로 하고 설교시간에 설교의 내용을 분석하고 비평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예화가 큰 문 제였다. 어느 목사님을 소개했다. 정확한 소개가 아니고 두루뭉술한 소개였는데, 그 분은 교회가 어려울 때마다 환상 을 본다고 한다. 그러면 산삼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런 일이 그 다음에도 두어 차례 있었다고 한 다. 그렇게 해서 교회 문제를 다 해결했다는 예화였다. 황당한 예화이다. 문제는 이런 예화는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특 정한 케이스일 뿐 누구에게나 본받거나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예화는 그 근거가 확실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설이 된다.  

. 역사성이 결여되어 있는 설교, 삶으로 연결짓는 설교가 되지 못하고 있다.

이세상에서 진공 속에서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저마다 특정한 삶의 자리가 있다. 그리고 그 자리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다. 거기다 성경 텍스트는 적어도 2천년 전에서 무려 4천년 전으로까지 멀고 먼 옛날에 전해졌던 말씀이다. 그래서 고대의 말씀을 현대인들에게 알아듣게 말씀하고 이해시키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삶의 자리와 현대인의 삶의 자리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말이다. 거기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만 듣게 하지 않고, 그 말씀을 가지고 삶에서 구체화 시키도록 위임받았다. 제가 97개월간 무의탁 노인 수용소에 가서 목욕봉사 를 하는 선한사마리아 회를 운영했다. 그 때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 한 봉사자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물 었다. 자신은 천주교인이고, 지난 주일 신부님이 설교를 하셨는데,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사랑을 본 으로 보이셨는데, 우리도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한 주간 자신이 짊어질 십자가를 짊어지고 반 드시 살아야 한다고 하셔서, 생각해 보니까 목용봉사하는 친구들 따라가서 내 십자가를 짊어지려고 한다고 대답했다. 우리 설교가 삶으로 연결되는지 묻고 싶다.

 

4. 설교의 내용 : 복음을 선포하는 분명한 목표를 가진 설교.

설교는 성경구절, 예화들, 시사들, 교훈들, 시와 노래들이 포함될 수 있다. 분명 이런 내용들은 설교를 구성하고 있는 내용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설교의 내용은 이런 것들을 적당히 엮어 놓은 것이 아니다.

 

. 설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증거하고 선포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의 내용은,

.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도록 해야 한다. 사람의 얘기로 채워서는 안 된다.

. 청중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우리게 해야 한다.

.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결단이 있도록 해야 한다.

 

.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율법과 복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 율법으로써 하나님의 말씀 : 사람에게 위탁된 하나님의 말씀들인데,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될 일 들을 규정한 말씀이다. 가령, 하나님을 섬기라, 부모를 공경하라. 자녀를 사랑하라. 십계명 등이 여기에 속한다. 요한 것은 신 구약 모두 율법을 가지고 있다. 이를 흔히 윤리 도덕적인 말씀이라고 부른다.

. 복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 :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셨고, 하고 계시며, 하실 것인 지를 선포하는 내 용의 말씀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약속을 맺은 일들(12:1-2, 17:1-14), 독생자를 주셔서 세상을 구하신 일들(3:16) . 마찬가지로 복음은 신약 안에서만이 아니라, 구약 안에도 있다는 점이다.

. 설교에서 율법과 복음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역할을 바르게 이해시키고, 깨닫게 해 줄 때,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

. 율법은 죄를 모르고 교만한 자를 깨우치기 위해서 선포해야 한다.

. 복음은 회개하고 낙심한 자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선포해야 한다.

. 좋은 내용을 잘못 적용하거나 잘못 전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 슬퍼하며 낙심한 사람에게, 계속 심판과 형벌을 얘기 한다면 자살할 지도 모른다.

동시에 부정축재자를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인양 축복해 주는 사람은, 지옥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로하여금 회개할 기회를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 율법과 복음의 차이.

. 성경적인 차이

. 하나님 이해 : 거룩하신 하나님(죄를 미워하심), 자비로우신 하나님(허물을 용서하심) / 양면성이 있다.

. 대조적인 점 : 신약 / 하나님은 구원하시는 위대한 일을 하셨다(3:16), 그러나 심판하신다(19).

    구약 / 하나님의 약속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고(17:7),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8).

. 삼위 하나님 : 성부(창조와 구속주 / 분노와 심판주), 성자(구속, 치료, 사랑 / 재림주), 성령(위로와 중재 / 유죄 선언).

. 매일의 생활에서의 차이

. 인간 실존 : 율법적 요소들 / 긴장, 경쟁, 불의, 불안 등.

    복음적 요소들 / 사랑, 이해, 용서, 협력, 자비 등.

. 왜곡된 신앙 : 율법적 만족 추구(자기 불안 해소책 / 일천번제, 공덕 쌓음 등은 자기 최면).

    복음적 선포(하나님의 내주하심,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세, 하나님께 영광).

 

. 율법의 기능.

. 거울로써의 역할 : 있는 그대로를 투사하는 역할, 자기 자신을 고소한다(3:19, 7:7-12). 십계명은 우리의 실존을 고발 한다.

. 연석으로써 역할 : 경계석의 기능인데,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방지, 혹은 통제 역할을 한다.

결혼생활, 정부운영, 재산관리 등은 통제가 필요하다.

. 안내로써의 역할 :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르게 살아가도록 사는 법과 걷는 법을 일깨워 준다.

거듭난 사람들 역시 율법을 통해 새 순종을 배우게 된다. 율법의 소리에 응답할 때, 유익한 삶을 살게 된다.

선한 사마리아회란 그룹은 목욕봉사를 한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무관심한다. 자신들과는 먼 얘기처럼 생각한다.

, 일찍 일어나라, 건강하게 살수 있다. 병원 - 운동 열심히 하라.

 

. 복음의 기능.

. 위로의 역할 : 거울의 반대 역할인데,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 셨도다(5:8).”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한다.

. 재창조의 역할 : 위험을 방지하는 반대 역할로, 새로운 사람, 새로운 삶으로 인도한다. 삶의 질서와 스타일을 바꿀 때 새로운 삶이 창조된다(김익두, 마펫 선교사 이마를 깼다. 그러나 후에 그의 설교를 듣고 목사가 되었다.) 새로운 목표를 가지고 살게 한다.

. 자유케 하는 역할 : 복음이 안내하는 최종의 반응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의 종, 참 자유인이 되었다. 자유의 기쁨 은 노예가 알지 못한다. 루터의 노예 의지를 생각,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는 일은 행복, 참 자유는 무엇일까? 루터는 하나님 앞에서 누구나 자유인, 그러나 다른 사람을 섬기도록 종이 되는 자유인으로 부름받았다.

 

. 율법과 복음의 상호 관계.

. 하나님의 의로써 율법과 복음 이해 : 종교 개혁 전에는 하나님의 의를 율법의 근거로만 파악, 그 결과 하나님의 의 는 두려움과 절망의 상징처럼 이해되었다. 그러나 루터에 의해서 새로운 이해가 열렸다. 그것은 더 이상 정적인 개 념이 아니라, 동적인 개념 곧,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이다. 1:16-17은 이런 혁명적인 생각을 일깨워 준다.

. 하나님의 두 손으로 이해 : 하나님의 오른 손과 하나님의 왼손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 왼손 구실 : 사탄의 세력을 방어하고 공격함.

. 오른 손 구실 : 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격려하고 힘 주신다.

. 기쁨의 원천으로써 이해 : 율법이 부정적인 듯 하지만, 사실은 복음에로의 선행 조건이 된다.

율법이 당장은 고통이며 슬픔이지만, 그것이 없이는 복음에 눈뜨거나 귀를 열수 없다.

  설교자는 사람의 얘기를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다. 율법과 복음을 통해서 오늘의 청중에게 말씀을 선포하는 감격을 가지고 당당하게 외쳐야 할 것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새 힘을 허락하실 것을 믿어야 한다.

 

5. 설교의 첫 번째 준비는 성경의 중심 주제에서 설교의 중심 주제로 나아가기.

설교자는 성경에 근거를 두고서 설교해야 한다. 바로 이 점이 설교자의 힘이고 또 이 점이 설교자의 멍에이다. 성경이 설교자에게 힘이 되는 까닭은 설교자는 자신의 주장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장을 전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성경에서 벗어난 엉뚱한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 성경 본문의 중심점을 찾는 주석(Exegesis) 작업을 해야 한다.

은퇴후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을 기회가 많아졌다. 반절은 설교하고 반절은 듣는다. 아무튼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설교를 들으면서 마음이 편치 않다. 성경을 왜 읽는지 모르겠다싶은 설교들을 많이 듣고 있다. 루터교회 목사들의 설교 중 상당수가 그랬고, 다른 교파 목사님들 역시도 그랬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주제와 전혀 다른 설교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성경을 충실하게 읽고, 무엇을 말씀하는가를 깨달을 다음에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잘 해석한 설교를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실마리를 풀고 있다는 말이다.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그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본문 텍스트가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를 진지하게 묻고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주석을 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주석이란, 본문이 무엇을 말하였는가를 찾는 일체의 작업을 의미한다. 처음 성경의 독자들에게는 어떤 의미로 들려졌는가에 관심을 갖는 일을 말한다. 이를 위해서 가능한 과정은 다음과 같다.

. 원어 성경(Biblical Language)을 보아야 한다.

. 여러 가지 번역본들을 대조해야 한다.

. 문법적으로 분석한다.

. 자신의 말로 만들어 본다.

. 6가지 질문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한다(언제, 누가, 어디서, 무엇을, , 어떻게).

. 당시의 시대 상황을 연구한다.

. 결국 무슨 의미였는가?

 

여기에서 조심할 것은 설교자 자신의 느낌을 말하는 Eisegesis와는 달라야 한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연구 과정을 가지라는 말이다.

. 문법을 통해서 :

주어를 살피는 일이다. 8:7은 빌닷이 욥에게 한 비난의 말이다. 그는 비웃듯 말한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하나님이 하신 축복의 말이 아니라, 비아냥 거리는 빌닷의 말이다.

단어를 연구하는 일이다. 성경적 언어를 공부해 두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가령 설교자가 흔히 사용하는 낱말들로 은총, 긍휼, 복음, 용서, 평화 같은 말이 있다. 이런 성경 용어들은 세속적인 의미와는 많이 다르다. 은총이란 넘 치고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함이 없는 사랑으로 비교할 말이 없다. 분에 넘치는 사랑이다. 긍휼이라는 말은 단순히 불쌍히 여긴다는 의미를 넘어서, 끝없이 기다리고 참아주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용서라는 말도 매우 깊은 의미를 가졌다. 기억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마치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버려서 전혀 기억할 수 없게 된 경우를 말

한다. 그러니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 인간의 용서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시제를 주목하는 일이다. 11:25-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현재 시제는 영원한 진리를 말할 때 사용한다.

두 번 되풀이 말하는 것은 비교급을(1:51, 3:5, 14:12), 세 번 되풀이 하는 말은 최상급을 의미한다.

 

. 역사적 배경을 통해서 :

사마리아인의 비유(10:29-37)의 역사적 배경을 실마리로 삼아야 한다. 이 비유는 자신의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한 율법사에게 하신 예수님이 지어낸 비유이다. 이 비유는 무엇을 중심주제로 삼고 있는가? 강도만난 사람을 이 웃처럼 도운 사마리아 사람처럼 너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아주 단순하다. 그러나 그 역사적 배경을 이해할 때 기 가막히게 위대한 말씀이다. 제가 33살 때 부산 YMCA에서 성경반을 지도했다. 그 때 학생 가운데 한 사람이 젊 은 감리교회 목사가 있었는데,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고 물어왔다. 그래서 되물었다. 어떻게 해석하느냐고.

대답은 기상천외한 것이었다. 고속도로를 내는 것이라고. 사회 시스템을 고쳐서 구조적인 모순을 없애는 일이라고 했다. 그래야 다시는 강도가 나타나지 않는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 이웃을 찾는 사람에게 예화에 함몰되어서 고속도로와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는 얘기로 발전한 것이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침략으로 정 복당했다. 이스라엘은 앗수르와 결혼동맹을 맺고 화친했다. 이를 두고 유다는 상종치 않기로 했다. 예수님 당시로 계산할 때 800년 전의 역사적 일이다. 조상대대로 원수지간이 되었다. 상종하지 않는 관게가 되었다. 이런 사람들 사이에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 사건이 사마리아 사람을 돕는 일이다. 그 사마리아인은 유다인 강도만난 사람을 이 웃으로 다가선 것이다.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가? 내게 도움을 줄 사람이 아니다.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 이 위대한 진리를 사마리아 인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이다.

고르반 전통의 악용사례(7:9-13) 하셨다. 고르반 전통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제도적으로 확립한 하나의 전통이었다. 경험상 수입이 있을 때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따로 떼어놓는 것이 좋다는 것을 깨닫고 실천한 것이 다. 제 동생은 장로교회 장로인데, 매달 마지막 주일에는 은행에 간다. 때로는 헌금을 하고 위해서 빚을 내기도 한다. 왜냐하면 헌금할 돈을 다 써 버린 것이다. 고르반은 이런 실수를 예방하는 구체적인 일이었고, 이것이 훗날 까지 전통으로 전해진 것이다. 문제는 이 좋은 전통이 시간이 지나가면서 악용되었다. 형제에게 돈을 꿔주기 싫으

면 고르반 밖에 없다고 말하면 되는 것이다. 실제일 수도 있지만 마가복음은 이런 악용하는 실례를 든 것이다.

. 삶의 자리를 통해서 :

이혼하지 말라는 본문 10:2-16 이다. 17년째 설교 연구서 <예배와 강단>을 쓰고 있다. 내년도 제게 맡겨진 주 제는 바로 이혼하지 말라는 본문이다. 그런데 모세의 이혼증서를 내 밀며 이혼의 합법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예 수께 찾아온 것이다. 왜 모세는 하나님의 이혼거부 의사를 무시하고 이혼증서를 쓰게 했을까,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신 24:1 등 구약에 많이 적용한 점을 고려(50:1, 3:8)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성경의 무 대가 아랍세계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아랍세계에서는 일부 다처 사회인데, 남자들의 횡포가 이만저만이 아니 었다. 그래서 부득불 남자들 편에 서서 유리한 최선의 방어책으로 이혼서를 쓰게 하는 특례를 둔 것이다. 결코 이

혼을 정당화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참고로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혼을 금하고 있다.

낯선 이야기에는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문화가 있다. 부활도 천국도 부정하는 사두개인이란 집단이 있다. 그들이 주 님께 제시한 문제는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그들은 수혼법을 들고 나와서 이런 주장을 했다. 7 형제가 한 여인을 두고 해괴한 짓을 했다(12:18-27). 이런 수혼법은 아들을 선호하는 나라에서는 종종 볼 수 있다고 한다. 그 여인의 진정한 남편은 누구냐는 것이다. 물론 아랍문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서 팁을 하나 얻을 수 있다. 천국은 지상생활의 연장선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 더 깊은 진리에 눈뜨게 하는 말씀도 있다 : 5:27-30간음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이다. 음욕을 품기만 해도 간 음죄에 해당한다는 주님의 해석이다. 참 뜻은 누구도 간음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들 인간은 그 누구도 나올 수 없는 죄의 수렁에 빠져 있음을 인정하고 고백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주님만 의

지하지 않으면 소망이 없다는 뜻이다.

   결국 성경을 수 차례 천천히 읽으면서 중심점을 찾는 훈련을 해야 한다.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일까? 이 본문의 중심점을 한 줄로 요약하는 것이 주제찾기의 구체적 목적이다.

 

. 오늘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가를 찾는 주해(Expository)의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

이른바 What it means?를 연구하는 일이다. 여기에서 주의할 일은 처음 독자들에게 혹은 처음 청중들에게서 선포되 었던 의미가 현대인들에게 잘 이해되도록 변용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대인들을 설득하는 내공이 필요하다. 적어도 현대인들은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이라는 인문학적 도구를 동원할 필요가 있다.

. 성경의 삶의 자리에서 청중의 삶의 자리로 연결하는 신학적 이해를 도입해야 한다.

현대인들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성경을 관통하는 신학 이론이 절대 필요하다.

. 설교자 자신이 깨닫고 배운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의 내공을 동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적어도 현대인은 문사철이라는 인문학적 도구를 동원할 필요가 있다. 문사철은 성경의 주제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데 현저한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어떤 분은 설교 말미에 적절한 시 한편을 소개한다.

. 오늘 우리들에게 주는 의미를 확정한다.

청중의 삶으로 인도하는 것이어야 한다.

 

설교자는 문사철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틈틈이 신문이나 세계 명작이나, 주요 철학서적 등을 읽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우선 <기독교 사상전집>이나, <기독교 명저 선집>, <세계 명작 대전집> 등에서 많은 자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삶에의 적용(Application : 삶에의 결단과 적용을 요청함).

. 삶으로 실천하는 결단을 요구한다.

. 암시적 제안을 할 수 있거나 구체적 제안을 할 수 있다.

. 그러나 실천이라는 차원에서 무리한 강조가 될 수 있다.

. 삶에 적용되지 않는 설교는 의미가 없다.

. 지난 주일 설교에 대한 Feed back을 습관화해서 교인들이 삶에 적용하도록 과제처럼 생각하게 한다.

 

6. 설교문 작성의 실제(브라이슨, pp.67-150).

설교 준비를 위한 방법은 다양할 수 있다. 헤롤드 T. 브라이슨의 [설교 작성법]이 제안하는 방법을 소개하려고 한다. 지난 신학교 교수시절과 15년 동안의 해외 신학교에서 브라이슨의 방법을 소개하고 웍샵을 가졌는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는 다음 몇 가지 단계로 설교를 준비할 것을 요구하며 훈련하도록 지도하고 있다.

. 본문 읽기 단계 : 가능한 한 오래 그리고 진지하게 정독한다.

. 단본중 찾기 단계 : 본문의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는 작업이다. 가장 중요한 단계이다.

. 단설중(명제) 찾기 단계 : 설교의 주제를 찾는 작업으로 단본중을 현대의 청중에게 전달하기 위한 주제를 한 줄로 요 약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의 말미에 설교의 목적을 분명히 제시한다.

. 질문제기 단계 : 누가 무엇을 왜 어떻게 등을 대입한다. 그 중 한 가지 질문을 주제에 대입하는 작업으로, 이를 통일 어구라고 한다.

. 주제를 전개하는 단계 : 이른바 주제를 발전시키는 작업으로 대지를 나누는 단계이다.

. 주제를 확장시키는 단계 : 예증 자료를 사용 내용을 풍부하게 하는 단계이다.

. 서론을 소개하는 단계 : 설교의 목적을 제시하거나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단계이다.

. 결론을 맺는 단계 : 설교의 목적을 마무리 하는 단계이다.

. 전이문장을 고려하는 단계 : 설교의 변화와 발전을 위해서 전이의 가치를 극대화 하는 단계이다.

 

실례1 : 1:1을 본문으로 브라이슨의 <설교 작성법>에 따라 설교 초안을 작성하라.

. 본문 : 1:1.

. 단본중 : 야고보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불렀다.

. 명 제 :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이웃의 종이어야 한다.

. 목 적 : 나의 목적은 청중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종으로 행동하며 살도록 선포하는 것이다.

. 질문제기 :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통일어구 : 의미들.

. 전이문장 :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의미들 몇 가지를 주목해 보자.

. 대지구분 : 1). 종이 된다는 것은 절대 소유권을 양도했다는 걸 의미한다.

2). 종이 된다는 것은 무조건적인 순종을 의미한다.

3). 종이 된다는 것은 무언중의 신뢰를 의미한다.

4). 종이 된다는 것은 한결같은 충성을 의미한다.

 

실례2 : 1:19-26을 본문으로 설교 초안을 작성하라.

. 본문 : 1:19-26.

. 단본중 : 바울은 현실로 다가온 자신의 죽음에 직면해 있다.

. 단설중 :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죽음에 직면한다.

. 목 적 : 나의 설교 목적은 청중으로 하여금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도록 하는데 있다.

. 질문제기 :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 직면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는가?

. 통일어구 : 관찰할 일들.

. 전이문장 : 죽음에 직면하는 그리스도인들에 관해 몇 가지 관찰할 일들을 살펴보자.

. 대지구분 : 1).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 대한 염려를 가지고 있다

2).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다.

3). 그리스도인들은 죽음 저 너머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

 

실례3 : 2:1-10을 본문으로 설교 초안을 작성하라.

. 본문 : 2:1-10.

. 단본중 :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작품으로 묘사하였다.

. 단설중 : 그리스도인들은 모두다 하나님의 걸작품들이다.

. 목 적 : 나의 설교 목적은 청중이 그들의 삶을 하나님께 의탁하도록 도와주는데 있다.

. 질문제기 : 본문은 하나님의 걸작품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 통일어구 : 말해 주는 것들.

. 전이문장 : 하나님의 걸작품에 대해 본문이 말해주는 것들에 대해 살펴보자.

. 대지구분 : 1). 하나남은 불가능한 인간과 함께 일하신다(1-3).

2). 하나님은 엄청난 능력으로 일하신다(4-6).

3). 하나님은 굽힐줄 모르는 목적을 가지고 일하신다(7-10).

 

7. 명사들의 설교준비 소개.

 

. 곽선희 목사(서울 소망교회 은퇴목사).

1). 설교에 대한 이해 :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재해석이다. 성경의 문맥을 바로 이해하고 나서, 가장 효과적인 언 어로 청중에게 전달해야 한다.

2). 성경적 설교 강조 : 설교가 성경에서 떠나지 말아야 한다.“목사가 성경을 떠나면 교인은 목사를 떠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설교의 생명력은 성경적일 때만 가능하다. 성경말씀을 바르게 전하면,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나타 난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3). 성경의 본뜻을 새롭게 해석 : 성경은 옛날 말씀이나, 여전히 현대에도 살아 움직이고 역사하는 말씀이 되도록 해야 한다.

4). 설교의 전달에 관심필요 : 설교는 연출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원고를 읽어서는 은혜를 전달하기 어렵다. 청중과 시선을 마주치고 생동감있는 연출이 필요하다.

5). 말씀 안에서 하나님 만남 : 비몽사몽간에 은혜를 체험할 수 없다. 졸지 말아야 하고, 재미있어야 하며, 마음에 결단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6). 예배의 차원에서 설교 : 어느 회당에서 예배 중에 종이를 내서 메모하니까 안내자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다. 연구 소가 아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라고 했다. 헬라어 히브리어 영어 등을 자주 사용하는 분들은 혹시 강의실로 착 각하는지 모르겠다.

7). 올바른 말씀 전달에 최우선 : 전달을 잘 하는 사람은 부흥사군이고, 신학자들은 전달에서 문제가 많다. 쉽고 친근하 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의 중심점이 올바른지 늘 확인해야 한다.

 

. 하용조 목사(서울 온누리교회 담임목사).

1). 설교의 목적 : 참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강해하여, 그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상황에 맞게 전 달함으로 천국 백성의 삶을 살게 한다.

2). 설교의 유형 : 주석 설교 /

본문 설교 /

주제 설교 /

인물 설교 /

강해 설교 /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본문을 하나님께서 의도한 그대로 강해하여 오늘 우리 시대에 사는 청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전달하는 설교이다.

3). 강해 설교의 축복들 : 하나님의 생각을 그대로 전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편견없이 전체적으로 전할 수 있다. 설 교자나 청중이 말씀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다. 설교자 자신이 성경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게 되며, 본문 연구를 많이 하게 된다. 설교 본문 선택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고 평생 반복되지 않는 설교를 할 수 있다. 구체적인 삶의 적용 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고, 난해한 구절을 쉽게 할 수 있다.

4). 어떻게 강해설교를 하는가 : 성경 본문 선택, 본문 연구와 이해, 성경해석과 적용, 설교의 구성.

5). 강해설교의 방법 : 성경 본문 중심이어야 한다. 알아듣기 쉬워야 한다. 일상용어로 표현해야 한다. 절심함과 긴박성이 있어야 한다. 성령이 기름 부으심이 있어야 한다.

6). 강해설교가 아닌 것 :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설교보다 자기 생각을 위해 본문을 사용한다.

본문과 상관없는 내용 전개. 본문에 대해서 말하지만, 청중의 삶과상관 없는 설교. 적용에 대한 결단이 없는 것.

 

. 임영수 목사(전 서울 영락교회 담임목사).

1). 설교의 준거로써 말씀 : 설교의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이 말씀이 선포되는 현장에서 제대로 들려 지 도록 하는 것이 설교자의 임무이다. 여기에는 시간적 차이, 문화의 차이, 언어의 차이 등을 해결해야 한다.

2). 성경 해석학의 문제 :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 루터가 한 말이다. 설교자가 구상한 틀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전체적인 흐름과 맥락에 맞도록 통일성과 일관성이 유지되어야 한다.

가장 권장할 만한 것으로 강해설교를 들 수 있는데, 강해 설교는 주어진 본문을 수십 번 숙독하고 그 본문에 나타난 언어의 뜻, 역사적 배경, 문장구조 등을 세밀하게 밝혀서 그 본문이 말씀하고자 하는 의도를 찾아 제목을 정하고 설 교를 작성해 가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3). 흥미 위주의 설교를 지양 : 설교는 흥미만을 위한 말씀이 아니다. 예화를 적절하게 삽입해서 청중의 인기를 끄는 경 우가 많은데, 설교라기보다는 시사 이야기, 신변잡기에 불과하다. 예화는 성경이해를 돕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4). 설교와 성령의 관계 :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성령과 함께 역사하신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은 언제나 말씀과 함께 우 리에게 찾아오신다. 성령의 도우심과 역사(役事)가 없이는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설교자는 항상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5). 설교와 커뮤니케이션 : 억양, 제스처, 시각적 표현, 방송, 영화, 상징 등으로 이해를 돕는 것의 필요가 제기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기능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전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은 좋으나, 절대적으로 의존해 서는 안 된다.

6). 설교와 영성 : 설교자는 기능공이 아니다. 또는 설교를 직업적인 수준에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임재를 깨 달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헌금을 많이 모으는 부흥사가 초대되곤 한다. 그것이 성령의 역사인가? 좋은 설교는 좋은 삶을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설교자는 말쟁이 꾼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는 먼저 하나님과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어야 한다.

7). 결론 : 교회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교인수의 감소를 말하는 게 아니다. 어떻게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기뻐 하시는 바른 길로 인도할 것인가에 대한 교회의 방향감각이 상실한 데 대한 위기이다. 절실한 의미와 목적도 없이, 최고가 되고자 하는 유명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경쟁심, 영웅심, 명예심에 교회가 한 몫을 하고 있는 점을 반성 해야 하겠다. 우리 교인들이 오늘 여러분의 설교에서, “오늘 하나님을 만나뵈었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 겠다.

  

8. 나가는 말.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大使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전달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본문을 연구하는 일에 충실해야 한다. 또한 성경의 중심점을 청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신학적인 다리를 놓는데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설교의 내용이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어야 한다. 설교의 목표가 복음을 전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설교는 그리스도를 들어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하며, 하나님께서 그런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설교자의 참된 기쁨과 감격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깨닫고 분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그런 신앙양심으로, 하나님앞에서 그리고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큰 소리로 선포할 때이다. 그렇게 준비가 되었을 때, 설교단으로 걸어가는 그 발걸음이 가볍고 경쾌할 것이다. 부디 하나님의 말씀이 온 누리에 강같이 흐르기를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

 

설교학 참고도서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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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두란노, 그 말씀19932월호, 서울 : 두란노, 1993.

8. 두란노, 그 말씀19934월호, 서울 : 두란노,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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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정용섭, 속빈 설교 꽉찬 설교, 서울 : 기독교서회, 2008.

38. 정용섭, 속빈 설교 꽉찬 설교, 서울 : 기독교서회, 2008.

39. 정용섭, 속빈 설교 꽉찬 설교, 서울 : 기독교서회, 2008.

40. 마트 데버,십자가를 설교하라, 이심주역, 서울 : 부흥과개혁사, 2009.

41. 도널드 맥컬로우, 내가 만든 하나님최규택역, 서울 : 그루터기하우스, 2007.

42. C. F. W. 월터, 율법과 복음지원용역, 서울 : 컨콜디아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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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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