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학 특강 : 21세기 목회연구원(2017. 4. 28. 11:00-12:30, 13:30-15:00).

청주시 옥산교회당.

성경 : 딤후 2:15.

 

1. 들어가는 말.

   부활절 인사를 나누자.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기독교회가 전래된지 100년이 넘었다. 기독교인 다운 인사가 참 아쉽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당신과도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든든한 인사인가?

   금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종교개혁은 3대 원리를 내세웠는데, <은총만>, <믿음만>, <성서만>이다. 루터교회에서는 여기에 <그리스도만>을 더해서 4대 원리를 가르친다. 그리고 <성서만>이 맨 처음에 나와야 한다는 것이 저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성서만>에서 다른 모든 원리가 타당성을 가지는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성서만>이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벌써 40년 전에 하인리히 오토는 하나님은 계시는가? 어디에 계시는가? 인간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를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기독교 국가도 아니면서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지 조차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나라에서, 이런 질문에 대해 한 순간도 고민없이 설교하는 한국의 강단이 참 대단하다. 그래서 설교 비평서를 쓴 정용섭박사는 조직신학적 접근이 없는 설교, 교회력을 참고하지 않은 설교를 비판하면서, 온갖 폭탄선언을 퍼 부었다. 여러분 가운데는 이런 마음을 품고 있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설교단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참새처럼 가벼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매번 설교할 때마다 감격에 벅찬 설교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제쯤이면 설교의 공포에서 자유할 수 있을까? 평생 설교자로 살아야 할 텐데 어떤 비결은 없을까? 아마도 여러분은 많은 질문을 품고 이 자리에 왔을지 모른다. 이런 질문에는 분명히 정답은 몰라도 타당한 대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의 결론은 이렇다. 벅찬 감격으로 설교할 수 있다고. 그런 설교는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을 때라고 말이다.

   그래서 오늘 강의는 오전에는 설교가 무엇인가? 현대 설교의 문제점들, 설교의 내용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다. 설교의 기본에 대해서 신학교식 강의를 하게 될지 모르겠다. 그리고 오후 강의에서는 어떻게 설교할까? 이른바 감격에 이르게 하는 설교문 작성법을 말씀드리려고 한다. 시간 관계상 어쩌면 주마간산 식의 강의가 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설교를 흔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하겠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씀이 딤후 2:15로 목사 안수식에서 항상 후배들에게 전해 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드려지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먼저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그것은 저의 한계에 대한 말씀이다. 저는 루터교회의 신학자요 목사로 살아왔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루터교의 신학적 배경을 풍길 수 있다. 그것이 여러분들에게는 낯설 수 있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새로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2. 설교란 무엇인가?

   성경에서 설교라는 용어를 찾을 수 없다. 우리가 영어로 쓰는 낱말, preaching, sermon, homily중에서 homily가 헬라어 μολογα-능동적으로 고백, 수동적으로 시인, μολογω 고백하다, 약속한다, 공포하다가 가장 근접한 말이다.

그러나 설교와 동의어로 사용되는 성서언어가 있다. 선포라는 의미를 가진 케류그마(κρυγμα), “기쁜 소식이라는 εαγγλιον, “증거라는 의미를 가진 μαρτυρα가 그것들이다. 성구집(Bible Concordance)는 항상 책상위에 비치해야 한다.

   먼저 κρυγμακηρσσω에서 온 말인데, 의미는 선포하다로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언을 뜻한다. 가령 예배학에서 축도에 관해서 선언형식과 기원형식이 있다고 말한다. 아론의 축도(6:24-26)와 사도의 축도(고후 13:13)이 있다. 선언형 식은 그 말미가 원하노라.” “할 지어다.” 이다. 그런데 한국개신교회는 축원하옵나이다.” 혹은 기원하옵나이다.” 고 기원형식을 사용한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언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런 오해를 줄이기 위해서 그 용어도 고쳐야 하는데, 축도가 아니라 축복선언이라고 해야 옳다.

   다음으로 εαγγλιον이란 말은 εαγγελζομαι에서 왔는데, 기쁜 소식을 전하다, 또는 복음을 전하다는 뜻이다. 성경이 말 씀하는 복음은 단순히 인간의 곤경을 해결하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행동 전반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이다. 가령, 대표적인 복음을 성경의 요약문구인 요 3:16을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μαρτυρα증거하다, 선언하다는 의미의 μαρτυρω에서 왔다. 특히 요한복음서에 이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설교를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1:32, 34). 또한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를 증거한다(4:44, 5:33).

 

. 설교에 대한 성서적 의미.

. 설교자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순수한 심부름꾼으로 자처하였다.

. 그들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만 관심을 가졌다.

. 구약 선지자들의 설교에서는 하나님이 주체였지 설교의 대상이 아니었다.

. 신약에서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사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 예수 그리스도가 설교의 주체였고, 설교의 대상이 아니었다.

.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선포될 때, 그리스도 사건이 재현되고 있다고 믿었다.

 

. 설교에 대한 명사들의 정의.

. 루터 :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율법으로 시작해서 그리스도를 들어내는 복음으로 끝나야 한다.

. 칼빈 : 하나님은 하늘에서 누구나 다 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지 않고, 그의 도구로써 인간을 선택하여 말씀하신다.

. 칼바르트 : 설교는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의 선한 뜻을 따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인간을 선      택 하고 성경의 말씀을 방편으로 하여 인간들에게 증거하게 하신다.

. 틸리케 : 성경을 해석하고 현재화하는 일이다. 설교자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궁극적인 메시지를 전할 의무가 있      다(현대교회의 고민과 설교, pp.140-141).

 

3. 현대 설교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 정장복(설교학 서설, pp.46-49), 라이드(설교의 위기, pp.17-29), 루울 하우(설교의 파트너, pp.29-36).

. 깨달아야 할 성경 언어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고, 이해하기 힘든 신학적인 용어를 많이 사용한다.

가령 구원, 심판, 은혜, 신앙 같은 용어는 성경적인 심오하고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설명이 없이 세속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구속사관, 신인동형론, 이원론과 같이 설명이 따라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용되고 있다. 결국 설교가 사람들이 마음에 닿지 못하고 지겹고 재미가 없다. 설교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어른들도 종종 어린이 설교처럼 듣고 싶어한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는 단순 명확해야 한다.

.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 곧 신언(神言)이어야 하는데 사람의 말 곧 인언(人言)이 되고 있다.

설교자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자신의 경험과 판단과 지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치하는 경우이다. 여기에는 설교 술 어(종결어)의 문제도 한몫을 한다. 가령 축원합니다”, “믿습니다”, “원합니다”, “바랍니다”, “생각합니다”, “느낍니 다.”, “기원합니다.” 등등은, 설교자 자신의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한국의 강단은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라는 한 개인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는 말이다.

이는 주석(What it meant?) 과 주해(What it means?)가 생략된 때문이며, 결국 누구나 설교할 수 있다는 생각이 편

만해서, 신학교육 부재현상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 청중의 삶의 형편과 무관한 설교를 한다.

외국인 설교자처럼 청주의 삶의 자리를 너무 모른다고 하면, 엉뚱한 주제로 흐르기 쉽다. 마치 낯선 나라에 와 있는 느낌을 주고 설교가 자신과는 거리감이 있다는 거부감마저 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설교가 청중의 삶에 절박성이나 구체성을 잃은 맹탕 설교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 설교가 잘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잘 들려지지 않는 설교를 말하는데, 소위 식자연하는 목사들에게서 흔히 범하는 실수다. 수백번 듣는 설교지만,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가령 어느 목사님은 설교때마다 소꼭지 젖꼭지를 얘기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60년대 70년대 설교에서 많이 사용한 소극적 적극적이라는 말에 대한 우스개 소리이다. 예 화도 적절하지 못할 때 이런 현상이 생긴다. 청중을 고린도 교회 교인으로 착각하고 고린도 교회를 예로 든다. 이럴 경우에는 고린도 교회의 형편을 자세히 이해시켜야 할 것이다.

. 설교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역사적 책임감이 없는 설교를 한다.

설교는 기독자의 삶을 변화시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삶에 변화가 없이는 세상의 빛과 소금은 강건너 불보기일 뿐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핏대를 세워가며 낯선 꿈 얘기처럼 한다면 낭패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거기에다 신문과 잡지 등 세상이 관심을 갖고 다루는 중요하고 긴박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다면 이 또한 큰 일이다. 인종차별, 이념문제, 성차별, 비정규직 문제, 남북통일의 난제들 심각하고 중요한 이슈들에 대해서 아무 문제의식이 없는 것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 정용섭(설교란 무엇인가? pp.33-170). 조금 자세하게 문제점을 소개하고 싶다.

. 나열식 설교로 가장 일반적인 한국 강단의 현상이다.

성경 본문에서 제목을 가져오고, 나머지는 설교자가 하고 싶은 말을 첫째, 둘째, 셋째와 같은식으로 나열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리고 성경 본문을 설교에 반영하는 나열식도 있다. 전자는 작은 신학지식으로 그 조잡성이 들통날 수 밖 에 없는 것에 반해서 후자는 쉽게 약점이 노출되지 않는 위험성이 있다. 가령 전자의 한 예로 롬 8:31-39을 본문으로 성도의 영원한 보장이란 제목으로, 첫째 영생의 보장, 둘째 사랑의 보장, 셋째 영원한 집의 보장이라고 설교하는 경우이다. 후자의 한 예로 마 6:25-34를 본문으로 지금은 우선 순위를 정할 때라고 제목을 붙였다. 첫째 염려에서 해방, 둘째 하나님을 신뢰할 것, 셋째 먼저 구할 것을 구하시오 라고 했다. 전자는 제목 이외에는 본문과는 전혀 무관 한 설교자 자신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후자는 본문에 들어 있는 내용이긴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최적의 말씀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청중을 하나님의 뜻인양 기만할 수 있다.

. 성경 본문이 침묵하는 경우로 가장 심각한 문제지만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성경이 말씀하려는 참된 뜻을 깨우치지 못한 설교로, 15:11-32절은 가장 대표적인 곡해를 하는 설교 본문이다. 이 본문으로 주로 청중의 개인적인 죄와 회심을 목표로 설교한다. 부분적으로는 옳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맥 락에서는 제목부터 틀린 설교다. 이 본문의 주인공은 집나간 둘째 아들이 아니라, 그를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의 얘기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주인공은 첫째 아들이다. 그는 둘째와는 대비되는 인물로 순종적이고 모범생이다. 당 시 율법주의자 혹은 바리새인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당연히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버 지의 사랑을 오해한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은 우주적 사랑을 가진 분이시다. 이런 성경의 세계로 들어가야 하는데, 변 죽만 울린 셈이 되었다. 성경 텍스트와는 전혀 다른 주제를 취급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결국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되 풀이 외친다. 그리고 큐티식 설교를 지적하는데, 이럴 경우 텍스트가 침묵할 수 밖에 없다. 가령 나사로와 부자의 비 유를 말씀하셨다(16:19-31). 엉뚱하게도 나사로는 하늘 나라에 야심을 가진 사람이어서 구원을 받았다고 설교한 다. 그러나 이 텍스트는 하나님의 구원행위는 우리들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 그리고 빈자를 향한 부자의 무책임을 경고하는 말씀으로 선포해야 한다.

. 주석과 주해 사이에 거쳐야 할 조직신학의 여과장치가 필요하다.

주석이란 본문을 그 시대적 배경과 문법적 이해, 청중의 삶의 자리 등 텍스트와 연관된 여러 내용을 파악하는 일련의 작업을 말한다. 이런 텍스트에 대한 연구는, 종종 청중의 컨텍스트와 직접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신학이 연결고리를 해야 한다. 가령 성경에는 하나님 아버지, 그의 외아들 그리고 성령에 관한 말씀들이 빈번하게 나온다. <삼위일체>라는 신학이론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유일한 하나님이 아니라 세 하나님으로 오해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 밖에도 기독교회의 중요한 교리들, <구속사관>, <기독론>, <교회론>, <종말론>을 모르고 있다면 성경은 수수께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한국의 대 교단 가운데 어느 교단은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는다. 놀 랄 노자이다. 그런 고백을 성경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신학교 교실에서 자주 들었던 질문이다. 진짜 종말 은 언제냐고 한다. 성경 시대부터 지금까지 종말타령을 하고 있다면서 말이다. 종말론에 대한 이해 부족현상이다. 종 말론이 복음서에 세 가지로 나온다. 임박한 종말론, 실현된 종말론, 그리고 미래적 종말론이다. 어느 것이 진짜냐? 신 학적 이해가 없으면 혼란스러울 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다. 모두가 진짜인 때문이다. 개인적 종말을 의미할 때, 임박 한 종말론과 실현된 종말론이 해당된다. 그러나 우주적 파국을 의미할 때 미래적 종말론이 해당된다. 신학적 이해가 성경의 절벽들을 이어줄 수 있다.

. 성경의 세계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경을 해석하려 할 때 의문에 휩싸이기 쉽다. 성경의 문화가 전혀 다른 문화라는 점을 모르기 때문이다. 일부다처제 는 현대인들에게는 전혀 낯선 문화이고 전통이다. 성경의 삶의 자리가 독특했다는 말이다. 성경은 아랍이라는 문화를 배경에 깔고 있다. 그것을 이해한다면 성경을 부도덕한 시절이 있었다고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일화(22)과 사사 입다가 무남독녀를 제물로 바치는 일화(11)은 자칫 하나님을 인 간 제물을 원하시는 분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엔 거기에 하나님의 깊은 뜻을 찾을 수 있다. 그 리고 입다의 경우에는 문화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호수아로 하여금 여리고와 아이 성을 정복하는 과정이 너무도 끔찍하다. 어린 아이들까지도 다 죽이라는 명령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런 무자비한 분일까? 유대 광야 40년 동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체벌했다. 그것은 60만명이 광야에서 생활하는 배경을 살피게 해야 한다. 무질서 로 혼란에 빠지는 최악을 방지하려는 차선책이라고 말이다. 전쟁상황을 염두에 둘 수 있다. 즉결 재판이 필요하다. 에 이즈나 동성애를 비난하는 성경말씀이 구약과 신약에 있다(1:26-27). 그냥 나쁘다고만 말할 수 없고, 해결책을 강구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 해석이 없는 설교를 하려고 한다.

현대 한국 강단의 설교가 영적인 자극을 주지도, 더 나아가 무관심하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 2천년간 명맥을 유지한 기독교 설교는 보편적 진리를 향한 해석이다. 그동안 성경에서 제목은 택하고 내용은 설교자 마음대로 각색하 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강해설교라며 성경 구절과 단어들 접속사 등을 언급하지만,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방향으로 선 포하는 설교가 아니라는 말이다. 어느 유명 목사님의 강해 설교집을 읽은 적이 있다. “그 때에라는 제목으로 한 편의 설교를 하고 있었다. “헤롯 왕이 손을 들어라는 제목으로 또 한 편의 설교를 한다. 그리고 교회 중 몇 사람을로 한 편의 설교를 하고. 이런 식으로 몇 달째 설교를 한다. 그런데 청중은 이 많은 내용을 정리할 틈이 없다. 이런 것을 설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싶다. 왜 성경을 해석해야 하는가?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쉽게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남편 의 말도 해석이 필요하고, 아내의 말도 해석이 필요하다. 말 그 자체에 붙들려 있다면 나무나 돌대가리가 되기 쉽다. 말에는 맥이 있고 결이 있다.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에 해석이 없다니. 많은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은폐성이 있다고 말한다. 가령 십자가는 가장 대표적인 하나님의 은폐성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기독교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 하다. 예수 천당 하는 식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한국 교회 현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해석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이다. 일반 종교의 신 개념과 어떻게 다른지도 해석해야 한다.

. 설교와 성령에 대한 이해도 문제이다.

한국 교회는 성령충만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성령 충만이란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하고 있는 성도 들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목사 자신도 과연 제대로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성령 충만이라는 말을 자주 사 용하기만 한면 성령이 충만해 지는 줄로 착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성경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다. 그래서 성령의 조명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런데 성령의 조명을 비이성적인 차원으로 돌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다분하다. 그러니까 가슴이 뜨겁거나 환상과 환청이 있거나 방언을 말하는 것을 성령의 조명으로 오 해하는 식으로 말한다. 그리고 반대로 이성적으로 비판하고 해석하면 오히려 비신앙적 행위로 간주하는 경향성을 보 인다. 또 다른 현편으로는 성령의 조명을 확대해석함으로 설교자로 하여금 자의적 해석의 길을 열어놓는 문제도 있다. 여기에서 은혜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은혜를 끼쳐주려고 발버둥치는 목사들이 판을 치고 있다. “믿습니 까?” “할렐루야?” “아멘?” 하고 물음표 질문을 남발한다.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비판할 여지도 있을 것이 다. 그러나 한번 귀 기우려 들을 필요가 있다.

 

. 박성완 목사.

.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가 개인의 성공출세와 교회 성장의 수단으로 전락하였다.

한국 교회의 설교의 기조는 예수 믿으면 복받아서 잘 살게 된다를 바탕에 깔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교회 성장이 빼놓지 않은 기도의 제목이고, 설교의 목적처럼 되어 버렸다. 제가 중국 몽골 베트남 신학교에서 39차례 신학 세미나 를 인도했다. 그 때 많은 한국 선교사들이 가르친 말은 예수 믿고 복받은 나라가 미국이고 유럽 열강들인데 모두 예 수를 믿어서 그렇다고 한다. 많은 면에서 기독교회가 공헌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선교의 목표도 아니고 설교의 목적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가르쳐야 했다는 것을 뼈저리가 느꼈다.

. 교회력에 따른 설교 본문 선택이 필요하다.

설교의 편식현상이 두드러지는 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살피고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기 회는 설교본문을 다양하게 제공하는 경우이다. 전통적인 교회는 3년 성구집을 사용한다. 우리 한국 교회도 19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3년 성구집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런 성구집은 교회력이라는 배경이 뒷받침하 고 있다. 교회력의 정신은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안내하고 있다. 교회력에 따른 본문이 있다는 말이다. 이 성구집, 페리카피를 활용할 때, 설교 준비에도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 설교의 목적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어야 하는데 율법적 설교가 판을 치고 있다.

성경은 율법과 복음으로 구성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율법과 복음을 잘 구별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리 고 율법과 복음의 역할을 심화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역할과 하나님의 역할을 바르게 이해할 때, 바람직 인 삶을 살수 있고, 절망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이 점에 한국 교회는 매우 약한 부분이다. 그래서 율법종교처럼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기도 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강조하는 딴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 현대 교회의 예배가 가벼워지고 있는 것은 큰 문제이다.

예배가 하나님 앞에서 드려진다는 사실을 간과한 가볍고 유흥에 가까운 예배로 전락하고 있다. 제가 합동측 장로교 출신인데, 저의 어린 시절엔 교회에서 박수도 치지 못했다. 용문산이라도 갔다 온 어느 집사님이 찬송을 부르면서 박 수를 치다가 오순절 교회로 가라는 면박을 당하기도 했다. 엄숙해야 하고 두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1983년 쌘프란 치스코의 한 미국인 교회에서 열린예배에 참석했다. 그 당시에 막 유행하고 있었다. 상상도 못했던 파격적인 예배가 드려지고 있었다. 순서도 없고 질서도 없었다. 누군가 흐밍을 하니까 모두 따라한다. 누군가 기도를 하면 기도에 참여 하고, 누군가 찬송을 부르면 또 따라한다. 누군가 나와서 지난 주간에 경험한 얘기를 하면 듣는다. 그 다음에 뭐가 나 올지, 언제 예배는 끝날지 도무지 궁금해서 예배가 혼란스러웠다. 거기에 익숙한 사람들 같았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예배의 주인은 예배자들이었다는 점이다.

. 예화의 일반화가 설교의 품위를 떨어트리고 있다.

예화는 설교의 내용을 더 풍성하고 더 명확하게 돕는 방법 중 하나이다. 그런데 예화가 모든 사람들에게 다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베트남에서 만난 어느 목사님이 자신의 설교를 듣고 크리닉해 달라는 것이다. 망설였지만 하도 당당하게 요구해 와서 그렇게 하기로 하고 설교시간에 설교의 내용을 분석하고 비평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예화가 큰 문 제였다. 어느 목사님을 소개했다. 정확한 소개가 아니고 두루뭉술한 소개였는데, 그 분은 교회가 어려울 때마다 환상 을 본다고 한다. 그러면 산삼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런 일이 그 다음에도 두어 차례 있었다고 한 다. 그렇게 해서 교회 문제를 다 해결했다는 예화였다. 황당한 예화이다. 문제는 이런 예화는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특 정한 케이스일 뿐 누구에게나 본받거나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예화는 그 근거가 확실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설이 된다.  

. 역사성이 결여되어 있는 설교, 삶으로 연결짓는 설교가 되지 못하고 있다.

이세상에서 진공 속에서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저마다 특정한 삶의 자리가 있다. 그리고 그 자리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다. 거기다 성경 텍스트는 적어도 2천년 전에서 무려 4천년 전으로까지 멀고 먼 옛날에 전해졌던 말씀이다. 그래서 고대의 말씀을 현대인들에게 알아듣게 말씀하고 이해시키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삶의 자리와 현대인의 삶의 자리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말이다. 거기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만 듣게 하지 않고, 그 말씀을 가지고 삶에서 구체화 시키도록 위임받았다. 제가 97개월간 무의탁 노인 수용소에 가서 목욕봉사 를 하는 선한사마리아 회를 운영했다. 그 때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 한 봉사자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물 었다. 자신은 천주교인이고, 지난 주일 신부님이 설교를 하셨는데,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사랑을 본 으로 보이셨는데, 우리도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한 주간 자신이 짊어질 십자가를 짊어지고 반 드시 살아야 한다고 하셔서, 생각해 보니까 목용봉사하는 친구들 따라가서 내 십자가를 짊어지려고 한다고 대답했다. 우리 설교가 삶으로 연결되는지 묻고 싶다.

 

4. 설교의 내용 : 복음을 선포하는 분명한 목표를 가진 설교.

설교는 성경구절, 예화들, 시사들, 교훈들, 시와 노래들이 포함될 수 있다. 분명 이런 내용들은 설교를 구성하고 있는 내용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설교의 내용은 이런 것들을 적당히 엮어 놓은 것이 아니다.

 

. 설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증거하고 선포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의 내용은,

.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도록 해야 한다. 사람의 얘기로 채워서는 안 된다.

. 청중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우리게 해야 한다.

.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결단이 있도록 해야 한다.

 

.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율법과 복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 율법으로써 하나님의 말씀 : 사람에게 위탁된 하나님의 말씀들인데,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될 일 들을 규정한 말씀이다. 가령, 하나님을 섬기라, 부모를 공경하라. 자녀를 사랑하라. 십계명 등이 여기에 속한다. 요한 것은 신 구약 모두 율법을 가지고 있다. 이를 흔히 윤리 도덕적인 말씀이라고 부른다.

. 복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 :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셨고, 하고 계시며, 하실 것인 지를 선포하는 내 용의 말씀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약속을 맺은 일들(12:1-2, 17:1-14), 독생자를 주셔서 세상을 구하신 일들(3:16) . 마찬가지로 복음은 신약 안에서만이 아니라, 구약 안에도 있다는 점이다.

. 설교에서 율법과 복음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역할을 바르게 이해시키고, 깨닫게 해 줄 때,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

. 율법은 죄를 모르고 교만한 자를 깨우치기 위해서 선포해야 한다.

. 복음은 회개하고 낙심한 자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선포해야 한다.

. 좋은 내용을 잘못 적용하거나 잘못 전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 슬퍼하며 낙심한 사람에게, 계속 심판과 형벌을 얘기 한다면 자살할 지도 모른다.

동시에 부정축재자를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인양 축복해 주는 사람은, 지옥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로하여금 회개할 기회를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 율법과 복음의 차이.

. 성경적인 차이

. 하나님 이해 : 거룩하신 하나님(죄를 미워하심), 자비로우신 하나님(허물을 용서하심) / 양면성이 있다.

. 대조적인 점 : 신약 / 하나님은 구원하시는 위대한 일을 하셨다(3:16), 그러나 심판하신다(19).

    구약 / 하나님의 약속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고(17:7),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8).

. 삼위 하나님 : 성부(창조와 구속주 / 분노와 심판주), 성자(구속, 치료, 사랑 / 재림주), 성령(위로와 중재 / 유죄 선언).

. 매일의 생활에서의 차이

. 인간 실존 : 율법적 요소들 / 긴장, 경쟁, 불의, 불안 등.

    복음적 요소들 / 사랑, 이해, 용서, 협력, 자비 등.

. 왜곡된 신앙 : 율법적 만족 추구(자기 불안 해소책 / 일천번제, 공덕 쌓음 등은 자기 최면).

    복음적 선포(하나님의 내주하심,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세, 하나님께 영광).

 

. 율법의 기능.

. 거울로써의 역할 : 있는 그대로를 투사하는 역할, 자기 자신을 고소한다(3:19, 7:7-12). 십계명은 우리의 실존을 고발 한다.

. 연석으로써 역할 : 경계석의 기능인데,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방지, 혹은 통제 역할을 한다.

결혼생활, 정부운영, 재산관리 등은 통제가 필요하다.

. 안내로써의 역할 :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르게 살아가도록 사는 법과 걷는 법을 일깨워 준다.

거듭난 사람들 역시 율법을 통해 새 순종을 배우게 된다. 율법의 소리에 응답할 때, 유익한 삶을 살게 된다.

선한 사마리아회란 그룹은 목욕봉사를 한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무관심한다. 자신들과는 먼 얘기처럼 생각한다.

, 일찍 일어나라, 건강하게 살수 있다. 병원 - 운동 열심히 하라.

 

. 복음의 기능.

. 위로의 역할 : 거울의 반대 역할인데,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 셨도다(5:8).”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한다.

. 재창조의 역할 : 위험을 방지하는 반대 역할로, 새로운 사람, 새로운 삶으로 인도한다. 삶의 질서와 스타일을 바꿀 때 새로운 삶이 창조된다(김익두, 마펫 선교사 이마를 깼다. 그러나 후에 그의 설교를 듣고 목사가 되었다.) 새로운 목표를 가지고 살게 한다.

. 자유케 하는 역할 : 복음이 안내하는 최종의 반응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의 종, 참 자유인이 되었다. 자유의 기쁨 은 노예가 알지 못한다. 루터의 노예 의지를 생각,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는 일은 행복, 참 자유는 무엇일까? 루터는 하나님 앞에서 누구나 자유인, 그러나 다른 사람을 섬기도록 종이 되는 자유인으로 부름받았다.

 

. 율법과 복음의 상호 관계.

. 하나님의 의로써 율법과 복음 이해 : 종교 개혁 전에는 하나님의 의를 율법의 근거로만 파악, 그 결과 하나님의 의 는 두려움과 절망의 상징처럼 이해되었다. 그러나 루터에 의해서 새로운 이해가 열렸다. 그것은 더 이상 정적인 개 념이 아니라, 동적인 개념 곧,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이다. 1:16-17은 이런 혁명적인 생각을 일깨워 준다.

. 하나님의 두 손으로 이해 : 하나님의 오른 손과 하나님의 왼손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 왼손 구실 : 사탄의 세력을 방어하고 공격함.

. 오른 손 구실 : 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격려하고 힘 주신다.

. 기쁨의 원천으로써 이해 : 율법이 부정적인 듯 하지만, 사실은 복음에로의 선행 조건이 된다.

율법이 당장은 고통이며 슬픔이지만, 그것이 없이는 복음에 눈뜨거나 귀를 열수 없다.

  설교자는 사람의 얘기를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다. 율법과 복음을 통해서 오늘의 청중에게 말씀을 선포하는 감격을 가지고 당당하게 외쳐야 할 것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새 힘을 허락하실 것을 믿어야 한다.

 

5. 설교의 첫 번째 준비는 성경의 중심 주제에서 설교의 중심 주제로 나아가기.

설교자는 성경에 근거를 두고서 설교해야 한다. 바로 이 점이 설교자의 힘이고 또 이 점이 설교자의 멍에이다. 성경이 설교자에게 힘이 되는 까닭은 설교자는 자신의 주장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장을 전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성경에서 벗어난 엉뚱한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 성경 본문의 중심점을 찾는 주석(Exegesis) 작업을 해야 한다.

은퇴후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을 기회가 많아졌다. 반절은 설교하고 반절은 듣는다. 아무튼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설교를 들으면서 마음이 편치 않다. 성경을 왜 읽는지 모르겠다싶은 설교들을 많이 듣고 있다. 루터교회 목사들의 설교 중 상당수가 그랬고, 다른 교파 목사님들 역시도 그랬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주제와 전혀 다른 설교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성경을 충실하게 읽고, 무엇을 말씀하는가를 깨달을 다음에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잘 해석한 설교를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실마리를 풀고 있다는 말이다.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그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본문 텍스트가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를 진지하게 묻고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주석을 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주석이란, 본문이 무엇을 말하였는가를 찾는 일체의 작업을 의미한다. 처음 성경의 독자들에게는 어떤 의미로 들려졌는가에 관심을 갖는 일을 말한다. 이를 위해서 가능한 과정은 다음과 같다.

. 원어 성경(Biblical Language)을 보아야 한다.

. 여러 가지 번역본들을 대조해야 한다.

. 문법적으로 분석한다.

. 자신의 말로 만들어 본다.

. 6가지 질문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한다(언제, 누가, 어디서, 무엇을, , 어떻게).

. 당시의 시대 상황을 연구한다.

. 결국 무슨 의미였는가?

 

여기에서 조심할 것은 설교자 자신의 느낌을 말하는 Eisegesis와는 달라야 한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연구 과정을 가지라는 말이다.

. 문법을 통해서 :

주어를 살피는 일이다. 8:7은 빌닷이 욥에게 한 비난의 말이다. 그는 비웃듯 말한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하나님이 하신 축복의 말이 아니라, 비아냥 거리는 빌닷의 말이다.

단어를 연구하는 일이다. 성경적 언어를 공부해 두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가령 설교자가 흔히 사용하는 낱말들로 은총, 긍휼, 복음, 용서, 평화 같은 말이 있다. 이런 성경 용어들은 세속적인 의미와는 많이 다르다. 은총이란 넘 치고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함이 없는 사랑으로 비교할 말이 없다. 분에 넘치는 사랑이다. 긍휼이라는 말은 단순히 불쌍히 여긴다는 의미를 넘어서, 끝없이 기다리고 참아주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용서라는 말도 매우 깊은 의미를 가졌다. 기억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마치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버려서 전혀 기억할 수 없게 된 경우를 말

한다. 그러니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 인간의 용서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시제를 주목하는 일이다. 11:25-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현재 시제는 영원한 진리를 말할 때 사용한다.

두 번 되풀이 말하는 것은 비교급을(1:51, 3:5, 14:12), 세 번 되풀이 하는 말은 최상급을 의미한다.

 

. 역사적 배경을 통해서 :

사마리아인의 비유(10:29-37)의 역사적 배경을 실마리로 삼아야 한다. 이 비유는 자신의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한 율법사에게 하신 예수님이 지어낸 비유이다. 이 비유는 무엇을 중심주제로 삼고 있는가? 강도만난 사람을 이 웃처럼 도운 사마리아 사람처럼 너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아주 단순하다. 그러나 그 역사적 배경을 이해할 때 기 가막히게 위대한 말씀이다. 제가 33살 때 부산 YMCA에서 성경반을 지도했다. 그 때 학생 가운데 한 사람이 젊 은 감리교회 목사가 있었는데,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고 물어왔다. 그래서 되물었다. 어떻게 해석하느냐고.

대답은 기상천외한 것이었다. 고속도로를 내는 것이라고. 사회 시스템을 고쳐서 구조적인 모순을 없애는 일이라고 했다. 그래야 다시는 강도가 나타나지 않는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 이웃을 찾는 사람에게 예화에 함몰되어서 고속도로와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는 얘기로 발전한 것이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침략으로 정 복당했다. 이스라엘은 앗수르와 결혼동맹을 맺고 화친했다. 이를 두고 유다는 상종치 않기로 했다. 예수님 당시로 계산할 때 800년 전의 역사적 일이다. 조상대대로 원수지간이 되었다. 상종하지 않는 관게가 되었다. 이런 사람들 사이에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 사건이 사마리아 사람을 돕는 일이다. 그 사마리아인은 유다인 강도만난 사람을 이 웃으로 다가선 것이다.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가? 내게 도움을 줄 사람이 아니다.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 이 위대한 진리를 사마리아 인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이다.

고르반 전통의 악용사례(7:9-13) 하셨다. 고르반 전통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제도적으로 확립한 하나의 전통이었다. 경험상 수입이 있을 때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따로 떼어놓는 것이 좋다는 것을 깨닫고 실천한 것이 다. 제 동생은 장로교회 장로인데, 매달 마지막 주일에는 은행에 간다. 때로는 헌금을 하고 위해서 빚을 내기도 한다. 왜냐하면 헌금할 돈을 다 써 버린 것이다. 고르반은 이런 실수를 예방하는 구체적인 일이었고, 이것이 훗날 까지 전통으로 전해진 것이다. 문제는 이 좋은 전통이 시간이 지나가면서 악용되었다. 형제에게 돈을 꿔주기 싫으

면 고르반 밖에 없다고 말하면 되는 것이다. 실제일 수도 있지만 마가복음은 이런 악용하는 실례를 든 것이다.

. 삶의 자리를 통해서 :

이혼하지 말라는 본문 10:2-16 이다. 17년째 설교 연구서 <예배와 강단>을 쓰고 있다. 내년도 제게 맡겨진 주 제는 바로 이혼하지 말라는 본문이다. 그런데 모세의 이혼증서를 내 밀며 이혼의 합법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예 수께 찾아온 것이다. 왜 모세는 하나님의 이혼거부 의사를 무시하고 이혼증서를 쓰게 했을까,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신 24:1 등 구약에 많이 적용한 점을 고려(50:1, 3:8)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성경의 무 대가 아랍세계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아랍세계에서는 일부 다처 사회인데, 남자들의 횡포가 이만저만이 아니 었다. 그래서 부득불 남자들 편에 서서 유리한 최선의 방어책으로 이혼서를 쓰게 하는 특례를 둔 것이다. 결코 이

혼을 정당화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참고로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혼을 금하고 있다.

낯선 이야기에는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문화가 있다. 부활도 천국도 부정하는 사두개인이란 집단이 있다. 그들이 주 님께 제시한 문제는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그들은 수혼법을 들고 나와서 이런 주장을 했다. 7 형제가 한 여인을 두고 해괴한 짓을 했다(12:18-27). 이런 수혼법은 아들을 선호하는 나라에서는 종종 볼 수 있다고 한다. 그 여인의 진정한 남편은 누구냐는 것이다. 물론 아랍문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서 팁을 하나 얻을 수 있다. 천국은 지상생활의 연장선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 더 깊은 진리에 눈뜨게 하는 말씀도 있다 : 5:27-30간음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이다. 음욕을 품기만 해도 간 음죄에 해당한다는 주님의 해석이다. 참 뜻은 누구도 간음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들 인간은 그 누구도 나올 수 없는 죄의 수렁에 빠져 있음을 인정하고 고백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주님만 의

지하지 않으면 소망이 없다는 뜻이다.

   결국 성경을 수 차례 천천히 읽으면서 중심점을 찾는 훈련을 해야 한다.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일까? 이 본문의 중심점을 한 줄로 요약하는 것이 주제찾기의 구체적 목적이다.

 

. 오늘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가를 찾는 주해(Expository)의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

이른바 What it means?를 연구하는 일이다. 여기에서 주의할 일은 처음 독자들에게 혹은 처음 청중들에게서 선포되 었던 의미가 현대인들에게 잘 이해되도록 변용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대인들을 설득하는 내공이 필요하다. 적어도 현대인들은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이라는 인문학적 도구를 동원할 필요가 있다.

. 성경의 삶의 자리에서 청중의 삶의 자리로 연결하는 신학적 이해를 도입해야 한다.

현대인들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성경을 관통하는 신학 이론이 절대 필요하다.

. 설교자 자신이 깨닫고 배운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의 내공을 동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적어도 현대인은 문사철이라는 인문학적 도구를 동원할 필요가 있다. 문사철은 성경의 주제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데 현저한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어떤 분은 설교 말미에 적절한 시 한편을 소개한다.

. 오늘 우리들에게 주는 의미를 확정한다.

청중의 삶으로 인도하는 것이어야 한다.

 

설교자는 문사철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틈틈이 신문이나 세계 명작이나, 주요 철학서적 등을 읽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우선 <기독교 사상전집>이나, <기독교 명저 선집>, <세계 명작 대전집> 등에서 많은 자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삶에의 적용(Application : 삶에의 결단과 적용을 요청함).

. 삶으로 실천하는 결단을 요구한다.

. 암시적 제안을 할 수 있거나 구체적 제안을 할 수 있다.

. 그러나 실천이라는 차원에서 무리한 강조가 될 수 있다.

. 삶에 적용되지 않는 설교는 의미가 없다.

. 지난 주일 설교에 대한 Feed back을 습관화해서 교인들이 삶에 적용하도록 과제처럼 생각하게 한다.

 

6. 설교문 작성의 실제(브라이슨, pp.67-150).

설교 준비를 위한 방법은 다양할 수 있다. 헤롤드 T. 브라이슨의 [설교 작성법]이 제안하는 방법을 소개하려고 한다. 지난 신학교 교수시절과 15년 동안의 해외 신학교에서 브라이슨의 방법을 소개하고 웍샵을 가졌는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는 다음 몇 가지 단계로 설교를 준비할 것을 요구하며 훈련하도록 지도하고 있다.

. 본문 읽기 단계 : 가능한 한 오래 그리고 진지하게 정독한다.

. 단본중 찾기 단계 : 본문의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는 작업이다. 가장 중요한 단계이다.

. 단설중(명제) 찾기 단계 : 설교의 주제를 찾는 작업으로 단본중을 현대의 청중에게 전달하기 위한 주제를 한 줄로 요 약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의 말미에 설교의 목적을 분명히 제시한다.

. 질문제기 단계 : 누가 무엇을 왜 어떻게 등을 대입한다. 그 중 한 가지 질문을 주제에 대입하는 작업으로, 이를 통일 어구라고 한다.

. 주제를 전개하는 단계 : 이른바 주제를 발전시키는 작업으로 대지를 나누는 단계이다.

. 주제를 확장시키는 단계 : 예증 자료를 사용 내용을 풍부하게 하는 단계이다.

. 서론을 소개하는 단계 : 설교의 목적을 제시하거나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단계이다.

. 결론을 맺는 단계 : 설교의 목적을 마무리 하는 단계이다.

. 전이문장을 고려하는 단계 : 설교의 변화와 발전을 위해서 전이의 가치를 극대화 하는 단계이다.

 

실례1 : 1:1을 본문으로 브라이슨의 <설교 작성법>에 따라 설교 초안을 작성하라.

. 본문 : 1:1.

. 단본중 : 야고보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불렀다.

. 명 제 :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이웃의 종이어야 한다.

. 목 적 : 나의 목적은 청중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종으로 행동하며 살도록 선포하는 것이다.

. 질문제기 :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통일어구 : 의미들.

. 전이문장 :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의미들 몇 가지를 주목해 보자.

. 대지구분 : 1). 종이 된다는 것은 절대 소유권을 양도했다는 걸 의미한다.

2). 종이 된다는 것은 무조건적인 순종을 의미한다.

3). 종이 된다는 것은 무언중의 신뢰를 의미한다.

4). 종이 된다는 것은 한결같은 충성을 의미한다.

 

실례2 : 1:19-26을 본문으로 설교 초안을 작성하라.

. 본문 : 1:19-26.

. 단본중 : 바울은 현실로 다가온 자신의 죽음에 직면해 있다.

. 단설중 :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죽음에 직면한다.

. 목 적 : 나의 설교 목적은 청중으로 하여금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도록 하는데 있다.

. 질문제기 :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 직면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는가?

. 통일어구 : 관찰할 일들.

. 전이문장 : 죽음에 직면하는 그리스도인들에 관해 몇 가지 관찰할 일들을 살펴보자.

. 대지구분 : 1).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 대한 염려를 가지고 있다

2).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다.

3). 그리스도인들은 죽음 저 너머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

 

실례3 : 2:1-10을 본문으로 설교 초안을 작성하라.

. 본문 : 2:1-10.

. 단본중 :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작품으로 묘사하였다.

. 단설중 : 그리스도인들은 모두다 하나님의 걸작품들이다.

. 목 적 : 나의 설교 목적은 청중이 그들의 삶을 하나님께 의탁하도록 도와주는데 있다.

. 질문제기 : 본문은 하나님의 걸작품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 통일어구 : 말해 주는 것들.

. 전이문장 : 하나님의 걸작품에 대해 본문이 말해주는 것들에 대해 살펴보자.

. 대지구분 : 1). 하나남은 불가능한 인간과 함께 일하신다(1-3).

2). 하나님은 엄청난 능력으로 일하신다(4-6).

3). 하나님은 굽힐줄 모르는 목적을 가지고 일하신다(7-10).

 

7. 명사들의 설교준비 소개.

 

. 곽선희 목사(서울 소망교회 은퇴목사).

1). 설교에 대한 이해 :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재해석이다. 성경의 문맥을 바로 이해하고 나서, 가장 효과적인 언 어로 청중에게 전달해야 한다.

2). 성경적 설교 강조 : 설교가 성경에서 떠나지 말아야 한다.“목사가 성경을 떠나면 교인은 목사를 떠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설교의 생명력은 성경적일 때만 가능하다. 성경말씀을 바르게 전하면,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나타 난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3). 성경의 본뜻을 새롭게 해석 : 성경은 옛날 말씀이나, 여전히 현대에도 살아 움직이고 역사하는 말씀이 되도록 해야 한다.

4). 설교의 전달에 관심필요 : 설교는 연출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원고를 읽어서는 은혜를 전달하기 어렵다. 청중과 시선을 마주치고 생동감있는 연출이 필요하다.

5). 말씀 안에서 하나님 만남 : 비몽사몽간에 은혜를 체험할 수 없다. 졸지 말아야 하고, 재미있어야 하며, 마음에 결단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6). 예배의 차원에서 설교 : 어느 회당에서 예배 중에 종이를 내서 메모하니까 안내자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다. 연구 소가 아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라고 했다. 헬라어 히브리어 영어 등을 자주 사용하는 분들은 혹시 강의실로 착 각하는지 모르겠다.

7). 올바른 말씀 전달에 최우선 : 전달을 잘 하는 사람은 부흥사군이고, 신학자들은 전달에서 문제가 많다. 쉽고 친근하 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의 중심점이 올바른지 늘 확인해야 한다.

 

. 하용조 목사(서울 온누리교회 담임목사).

1). 설교의 목적 : 참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강해하여, 그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상황에 맞게 전 달함으로 천국 백성의 삶을 살게 한다.

2). 설교의 유형 : 주석 설교 /

본문 설교 /

주제 설교 /

인물 설교 /

강해 설교 /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본문을 하나님께서 의도한 그대로 강해하여 오늘 우리 시대에 사는 청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전달하는 설교이다.

3). 강해 설교의 축복들 : 하나님의 생각을 그대로 전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편견없이 전체적으로 전할 수 있다. 설 교자나 청중이 말씀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다. 설교자 자신이 성경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게 되며, 본문 연구를 많이 하게 된다. 설교 본문 선택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고 평생 반복되지 않는 설교를 할 수 있다. 구체적인 삶의 적용 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고, 난해한 구절을 쉽게 할 수 있다.

4). 어떻게 강해설교를 하는가 : 성경 본문 선택, 본문 연구와 이해, 성경해석과 적용, 설교의 구성.

5). 강해설교의 방법 : 성경 본문 중심이어야 한다. 알아듣기 쉬워야 한다. 일상용어로 표현해야 한다. 절심함과 긴박성이 있어야 한다. 성령이 기름 부으심이 있어야 한다.

6). 강해설교가 아닌 것 :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설교보다 자기 생각을 위해 본문을 사용한다.

본문과 상관없는 내용 전개. 본문에 대해서 말하지만, 청중의 삶과상관 없는 설교. 적용에 대한 결단이 없는 것.

 

. 임영수 목사(전 서울 영락교회 담임목사).

1). 설교의 준거로써 말씀 : 설교의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이 말씀이 선포되는 현장에서 제대로 들려 지 도록 하는 것이 설교자의 임무이다. 여기에는 시간적 차이, 문화의 차이, 언어의 차이 등을 해결해야 한다.

2). 성경 해석학의 문제 :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 루터가 한 말이다. 설교자가 구상한 틀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전체적인 흐름과 맥락에 맞도록 통일성과 일관성이 유지되어야 한다.

가장 권장할 만한 것으로 강해설교를 들 수 있는데, 강해 설교는 주어진 본문을 수십 번 숙독하고 그 본문에 나타난 언어의 뜻, 역사적 배경, 문장구조 등을 세밀하게 밝혀서 그 본문이 말씀하고자 하는 의도를 찾아 제목을 정하고 설 교를 작성해 가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3). 흥미 위주의 설교를 지양 : 설교는 흥미만을 위한 말씀이 아니다. 예화를 적절하게 삽입해서 청중의 인기를 끄는 경 우가 많은데, 설교라기보다는 시사 이야기, 신변잡기에 불과하다. 예화는 성경이해를 돕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4). 설교와 성령의 관계 :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성령과 함께 역사하신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은 언제나 말씀과 함께 우 리에게 찾아오신다. 성령의 도우심과 역사(役事)가 없이는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설교자는 항상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5). 설교와 커뮤니케이션 : 억양, 제스처, 시각적 표현, 방송, 영화, 상징 등으로 이해를 돕는 것의 필요가 제기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기능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전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은 좋으나, 절대적으로 의존해 서는 안 된다.

6). 설교와 영성 : 설교자는 기능공이 아니다. 또는 설교를 직업적인 수준에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임재를 깨 달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헌금을 많이 모으는 부흥사가 초대되곤 한다. 그것이 성령의 역사인가? 좋은 설교는 좋은 삶을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설교자는 말쟁이 꾼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는 먼저 하나님과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어야 한다.

7). 결론 : 교회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교인수의 감소를 말하는 게 아니다. 어떻게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기뻐 하시는 바른 길로 인도할 것인가에 대한 교회의 방향감각이 상실한 데 대한 위기이다. 절실한 의미와 목적도 없이, 최고가 되고자 하는 유명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경쟁심, 영웅심, 명예심에 교회가 한 몫을 하고 있는 점을 반성 해야 하겠다. 우리 교인들이 오늘 여러분의 설교에서, “오늘 하나님을 만나뵈었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 겠다.

  

8. 나가는 말.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大使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전달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본문을 연구하는 일에 충실해야 한다. 또한 성경의 중심점을 청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신학적인 다리를 놓는데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설교의 내용이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어야 한다. 설교의 목표가 복음을 전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설교는 그리스도를 들어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하며, 하나님께서 그런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설교자의 참된 기쁨과 감격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깨닫고 분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그런 신앙양심으로, 하나님앞에서 그리고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큰 소리로 선포할 때이다. 그렇게 준비가 되었을 때, 설교단으로 걸어가는 그 발걸음이 가볍고 경쾌할 것이다. 부디 하나님의 말씀이 온 누리에 강같이 흐르기를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

 

설교학 참고도서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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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크래독 F., 설교, 김영일역, 서울 : 컨콜디아사,1989.

4. 정장복, 설교학서설, 서울 : 엠마오,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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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동원, 청중을 깨우는 강해설교, 서울 : 요단출판사, 1990.

7. 두란노, 그 말씀19932월호, 서울 : 두란노,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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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홀란드 D. T., 설교의 전통, 홍성훈역, 서울 : 소망사, 1991.

11. 반클리브 N. M., 설교 핸드북, 이일호역, 서울 : 엠마오, 1994.

12. 엥겔 제임스 F., 당신의 메시지는 전달되고 있는가?, 정진환역, 서울 : 죠이출판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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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정용섭, 속빈 설교 꽉찬 설교, 서울 : 기독교서회, 2008.

38. 정용섭, 속빈 설교 꽉찬 설교, 서울 : 기독교서회, 2008.

39. 정용섭, 속빈 설교 꽉찬 설교, 서울 : 기독교서회, 2008.

40. 마트 데버,십자가를 설교하라, 이심주역, 서울 : 부흥과개혁사, 2009.

41. 도널드 맥컬로우, 내가 만든 하나님최규택역, 서울 : 그루터기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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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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