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098호.
시편 23:1-3.
찬송 530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녀의 이상형은 이랬습니다. 처음 봤을 때, 가슴이 뛰는 남자. 참 당연한 조건이지만, 이런 인연 만난다는 게 쉽지 않지요.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에 나오는 대사처럼, 저 하늘 높은 곳에서 홀씨 하나 떨어트려 나풀나풀 땅으로 내려와, 땅위의 꽂혀 있는 바늘에 그 홀씨가 꽂히는 가능성입니다. 그런데 그런 남자를 만났습니다. 보는 순간 가슴이 뛰더랍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됐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 때 가슴이 뛰었다는 이유가 이랬다고 하지요. 카페인에 약한 여자가 하필이면 그 때 커피를 마시고 있어서. 가슴이 뛰었던 이유가 남자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더라는 겁니다. 이럴 경우에 그 남자는 그녀의 이상형이라고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애매모호하지만요. 그래도 인연이라면 인연 아닐까요? 고대의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연은 항상 존재한다. 낚싯바늘을 항상 던지고 있어라. 당신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 고기가 있을 수 있다.” 우연이 인연으로 이어지는 건 나도 모르게 순식간입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년 5월 11일 방송>
2. 어린 시절에 할머니가 탈난 손주들 배를 문지르시며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할머니 손은 약손, 내 손만 닿으면 다 낫는다.” 주술 같은 그 말씀을 여러 차례 하시며 배를 문지르시면, 놀랍게도 씻은 듯 나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주님의 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손이 닿기만 하면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오병이어를 들었습니다(10-11절).
갈릴리 바닷가에 벳새다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경사진 너른 들판인데 아직도 버려진 땅으로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5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여인과 어린 아이를 뺀 수라고 하니까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그리고 행하시는 표적을 보려고 몰려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 빌립에게 물으셨습니다. “어디서 먹을 것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게 하겠느냐?”고. 그러자 빌립은 비용을 계산해서 대답합니다. “2백 데나리온도 부족하다.”고 말입니다. 로마 병졸의 200일 급여입니다. 그 때 주님은 한 어린 소년의 도시락에 담긴 오병이어를 두 손 높이 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음식을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을 배부르게 먹이고 열 두 광주리나 남겼습니다. 예수님의 손에서 배고픔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허기진 세상에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희망이 보이게 된 것입니다. “돌로 떡을 만들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병자들이 주님 손에서 고쳐졌습니다(1-2절).
배고픔의 문제 다음으로 세상을 슬프게 하는 것은 질병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는 가지각색의 병든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육체의 질병으로부터 마음의 병든 사람들로 길이 막히고, 말씀이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주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설교를 방해한다고 욕까지 먹던 가나안 여인이나(마 15:21-28), 여리고 노상의 소경 둘이나(마 21:29-33), 그리고 철부지이며 무시당하던 여인들과 어린아이들(마 18:1-5)은 모두 주님의 손에 들려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주님의 이름을 부르거나 교회당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두 팔 벌여 환영해 주시는 주님을 만나려고 나아오는 것입니다. 육신의 질병 뿐 아니라, 마음의 상처와 두려움으로 사는 일들을 친히 따뜻하게 안아주시는 주님 손길을 바라고 말입니다.
주님의 손에 들려졌는지 살필 때입니다(시 89:13, 23:1-6).
신앙인들이 경계해야 할 가장 위험한 것은 자신의 팔이 힘 있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형통함과 성공에 취해서, 주님의 능하신 팔과 손을 소홀히 여길 때라는 말입니다. 우리들 신앙의 현주소를, 자신의 형통함이나 출세에서 확인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짓입니다. 오히려 시편 기자처럼 절망으로 앞이 캄캄하고 두려울 때, 바로 그 때가 제대로 된 신앙의 자리를 마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을 평화 넘치는 배경을 노래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가장 힘들고 답답하고 두려운 배경 속에서 부르고 있는 노래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붙잡아 주지 않을 때, 여호와 하나님을 유일한 목자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메마른 사막을 지나면서 푸른 초장을 희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수가 괴롭히고 있을 때,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과 능력에서가 아니라, 주님의 손에만 붙들려 지기를 기도할 때, 바로 그 때가 우리가 가장 행복하고 복된 순간인 것입니다.
3. 저는 오늘 저녁 제32차 베트남 선교여행을 떠납니다. <성서 해석학>를 주제로 어느 신학교에서 24시간 강의를 할 예정입니다. 저의 강의초록이 베트남어로 번역되어서 학생들 손에 들려져 있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여러분의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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