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477(2013. 8. 19. 월요일).

시편 시 112:5-7.

찬송 47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일흔 넘어 한글 배우신 어머니의 시가 온라인에서 화제입니다. 제목은 <아들>.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나한테 태어나서 고생이 많았지/ 돈이 없으니까/ 집도 못 사주니까/ 다른 데 마음 쓰느라/ 너를 엄청 많이 때렸다/ 화풀이해서 미안하다/ 엄마는 엄마는 마음이 많이 아프다/ 용서해 다오/ 저 세상에서는 부자로 만나자/ 사랑한다여기에 색 도화지에 손수 쓴 글씨와 그림이 감동을 더해 주었습니다. 내용만 아니라면 초등학생의 서투른 솜씨입니다. 그러나 서툴러서 더 감동적이었습니다. 마치 아들에게 이 편지를 쓰기위해 일흔이 넘어 한글을 배우기로 결심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많은 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툰 글씨체,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편지를 즐겨 쓰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떠나기 4년 전, 동료 작곡가 프란체스 토크하우젠에게 여섯 장에 걸친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형편이 어려우니 도와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편지의 가치는 우리 돈으로 14천여만 원. 바로 친필이기 때문입니다. 베토벤의 어수선한 글씨체를 통해, 어릴 때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편지를 쓰다가 줄을 그어서 지우기를 반복한 것을 통해, 생각이 어떻게 변했는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편지 또 휴대전화 문자 모발일 메신저, 모두 똑 같이 한글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문자를 주고받아도, 상대의 마음을 유추할 뿐, 편지만큼 짐작하기는 어렵습니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행복한 책일기]에서, 목소리로 연애하는 것 보다 눈으로 연애하는 것이 훨씬 내면적이라면서, 편지가 전화보다 훨씬 내면적이라고 했는데. 똑 같이 눈으로 보는 것이라고 해도, 편지와 전화 문자는 아무래도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385일 방송>

 

2. 언제 어디서나 있는 일이긴 합니다만, 질문을 받는 일이, 한편으로는 긴장을 갖게 하거나 모르고 지나치던 것에 눈길을 주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힘들다 못해 맥이 빠지는 결과를 갖기도 합니다. 이번 저의 선교여행에서도 가르친 과목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질문을 갖고 나와서, 매 휴식 시간마다 붙들려서 힘들었던 경험을 하였습니다. 6:5-6은 선지자가 화 있을 자들에 대한 언급을 하는 내용의 하나로,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는 자를, 말하고 있는데, 그 질문자는 다윗이 지은 시편이나 노래들을 몽땅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는 일이라고 해석해야 옳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질문을 하신 분이 이미 목사가 되었다가 다시 편목 과정에 있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저는 이 구절을 처음 대한듯 낯설었고, 통역이 저를 대신해서 전체적인 문맥에서 읽을 것을 주장해서 끝이 났습니.

   갑자기 사도행전에서 복음서로 옮겨왔습니다. 지루한 생각도 들었고, 제가 지난 한 주간 너무 서두른 탓에 본문을 틀리게 만들어서 바로 잡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래도 동일한 날짜의 본문이니까 이런 변화도 우리에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 성전 청결> 일화와 <저주 받은 무화과나무> 일화입니다. 자주 묵상하게 되는 내용입니다만, 언제나 그 중심 뜻을 찾아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성전 예배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것은 생산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목적과 수단이 문제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근본 목적보다는, 그 섬김에 도구가 되는 제물에 너무 힘을 쓰고 있었던 그 옛날이나, 오늘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은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지만, 그래서 저주가 합당치 않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여전히 여기에서도 무화과나무의 존재 목적은 열매에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목적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3. 오늘부터 나흘간 저희 교단 목회자 가족 수련회가 여수에서 열리는데, 저는 아내와 달랑 둘이 참석하지만, 젊은 후배 목사님들은 주렁주렁 아이들을 매달고 참석하는데, 그렇게 예쁠 수가 없습니다. 그 애들을 보러갑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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