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위대한 미국 영화 100편>에 61위에 오른 <셜리반의 여행>은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저 유명한 아카데미상 후보에 단 한부문에도 오르지 못한 영화였다니 말이다.
2차 대전이 한참이던 시절에 이런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각설하고 나는 영화의 수준이나 작품의 질을 따져보고 감상하는 편은 아니다.
1960년 대나 1970년 대는 영화를 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신문이나 벽에 붙어 있는 포스터를 보는 것으로 전부였던 가난한 시절이었으니까 말이다.
더군다나 모범 학생 신분이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그래서 지금은 시간이 날 때마다 둘 중의 하나를 고른다. 영화감상 아니면 도봉산 둘레길 산책이 그것이다.
<셜리반의 여행>도 실버 극장에서 보내주는 안내 메일을 보고 결정한 것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려는 작업은 나같은 목사나 할 일인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오늘 또 다른 한 사람 제대로된 영화를 만들고 싶어했던 인물을 만났다.
헐리우드에서 잘 나가는 코미디 영화 감독이 새로운 영화를 만들겠다며 제작진에게 구상한 내용을 얘기한다.
그것은 <오 ! 형제여 어디 있느냐>란 제목의 영화인데, 보통사람들의 애환을 그린 영화를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제작진들은 모두가 반대한다. 흥행에 성공할 수 있는 섹스 영화나 갱단이 등장하는 미국 영화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다큐멘터리 적인 삶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서민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그린 영화를 만들기 위해
감독은 직접 그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현장속으로 체험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노숙자들이 묵는 합숙소인데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이불 삼아서 추위를 견디는 잠자리가 나온다.
그곳에서 한 소녀를 만나게 되고 당시만 해도 몸에 기생하는 이와 벼룩으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가난 체험은 번번히 실패를 맛보게 된다.
히치하이커로 올라탄 트럭은 엉뚱하게도 가난 체험을 마치고 제작진과 만나기로 한 라스베이거스에 내려놓는가 하면,
도둑 승차한 기차 화물칸을 타고는 지독한 감기에 걸려 여행을 계속할 수 없게 된다.
그러다가 가난한 사람들의 도움에 감사하는 의미로 나눠주던 5달러 지폐를 노린 한 늙은 노숙자의 강탈과 서글픈 죽음을 목격한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이 신문에 대서특필하게 된다.
그 늙은 노숙자가 자신의 신발을 훔쳐 신었고 그 신발에는 셜리번 감독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싸움에 말려들어 쉽게 훈방될 수 있었지만 자신의 이름을 밝힐 수 없어
6년 노동형이라는 중형을 선고 받고 강제 노역에 참가하는데 비인격적인 대우를 감수해야 한다.
발에 족쇄를 차고 노역하는 죄수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이런저런 싸움을 한다.
그리고 노역장의 감독은 아주 잔인한 사람으로 마음에 들지 않은 죄수를 하루 종일 서 있는 개인 감옥에 넣는다.
마치 삼청교육대를 보는 듯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영화는 반전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바로 이런 죄수들을 위해 한 흑인교회에서 영화를 감상하게 되는데, 그때 처음으로 신나게 웃는다.
디즈니 만화가 한 순간에 고통에 찌들어 죽지 못해 살고 있는 죄수들에게 웃음과 기쁨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 날 한 죄수가 읽던 신문에서 자신의 죽음 기사를 읽고 반전을 꾀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셜리번 감독을 살해한 사람이라고 외치자 그의 모든 행위가 밝혀지고 옛 생활로 돌아온다.
다시 제작진을 만나게 되고, <오 !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라는 작품 대신 코미디 영화를 만들겠노라 선언한다.
영화는 이렇게 막을 내린다.
영화 <셜리반의 여행>은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웃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민낯을 고발하거나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어서 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에 접근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세상의 어두운 면들에는 너무 복잡하고도 풀기 어려운 문제들로 가득 차 있음을 눈뜨게 한다.
어찌하여서 가난한 사람들은 그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올 수 없는 것일까?
오래 전 교회를 이전하기 까지 30년 동안 내가 일하던 교회를 찾아오던 한 폐병 환자가 있었는데,
그는 올 때마다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며 도움을 청했고, 나는 실험삼아 그를 도왔었다.
도장 파는 일을 해 보겠다고 했고, 라디오 수리 센터를 운영하겠다고 했다.
막노동 시장에서 미장공으로 일하겠다고도 했고, 조용한 요양소에 머물겠다고도 했다.
물론 그 때마다 적지 않은 돈을 요구했다. 그런데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결심은 강한데 그 결심을 지탱할 의지가 너무 약했다. 그것이 가난과 질병에서 벗어날 수 없는 원인이었다.
노숙자가 새벽 기도회 시간에 참여했다. 작은 기도실에는 악취로 가득 찼다.
몇 명 되지 않던 참석교인들이 하나 둘 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깨끗이 세탁한 옷 가지도 주고 목욕할 돈도 주었다. 그러나 며칠 후면 똑 같은 모습으로 찾아온다.
고향으로 내려 보낼 계획도 세우고 실행했지만 도레미 탕이 되었다.
결심도 의지도 약한 사람들이 노숙자인 것을 배웠다.
어쩌면 <셜리반의 여행>을 세상에 내 놓은 감독은 현실을 고발하는 것으로는 문제를 풀 수 없음을 알았던 것일까?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밝게 해 주는 일이 먼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마치 성경적이 아니건, 비 윤리적이건 그도 아니면 말도 안 되는 기적 이야기건
이런 저런 이상적인 내용 보다는 우선 재미 있는 한 순간을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는 부흥사들이 생각났다.
그래서 어쨌든 꿩 잡는 것이 매다는 식으로 예수 믿게 하고 정신 차리게 하면 되지 않느냐는 식 말이다.
그 결과는 바로 오늘의 한국 교회를 만들고 말았다.
예전에 비해서는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훨씬 잘 살게 되었지만,
교회나 신앙생활은 완전 꽝이 되고 말았다.
마음의 평화를 얻는 수단으로 말이다. 지금도 코미디언을 자처하는 목사들이 인기 목사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줄 수 있는 것은 슬프고 답답한 현실을 잊어버리게 하는 역할로 끝나고 있다.
아무튼 <셜리반의 여행>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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