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6994(2020. 7. 10. 금요일).

시편 90:11-13.

찬송 49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온조를 찾아주세요. 생후 4개월 정도 됐고, 날개를 세 장 커트했습니다. 비둘기 몸집 정도 크기, 꼬리는 발간색.” 반려 조를 잃어버렸던 분이 애완조 카페에 올린 사연은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온조는 앵무새이름이었는데요. 하루 종일 애타게 찾은 끝에 겨우 애완 조를 찾았을 때 꿈만 같았다고 합니다. 동물을 좋아해 가까이 두는 반려동물의 영역은,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포유류를 넘어서, 이제는 파충류 조류로 확산되고 있는데요. 그 중에서도 땅에 사는 사람과 하늘에 사는 새의 동거야 말로, 하늘에 사는 쪽에서 희생이 필요해 보입니다. 마치 날개옷을 나무꾼에게 빼앗긴 선녀처럼 말이지요. 애완 조를 키우는 이들의 대다수는 밍컷을 필수로 여기는데요. 밍컷은 말 그대로 날개를 자르는 겁니다. 깃털을 조금 잘라서 새를 보호하는 거지요. 갑자기 걸려오는 전화벨 소리에 놀라서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칠 수도 있고, 가스랜지 같은 위험한 곳으로 날아들 가능성도 있어서, 새의 행동반경을 줄이는 게 안전하다는 겁니다. 산책하다가 개 짓는 소리에 놀라 날아가 버리기도 하고, 잠시만 방심해도 미아조가 될 수 있는데, 그렇게 야생으로 날아간 새는 십중팔구 살기 힘듭니다. 도심을 헤매다가 굶어죽거나 야생동물에게 당할 수도 있는 거지요. 날개의 속 깃털을 가지런하게 잘라서 정리해 주는 거니, 생살을 잘라내는 게 아니고 잔인한 일은 아니다. 잊지 않고 밍컷 해 주어야 큰 위험 없이 자랄 수 있다 라는 긍정적인 의견도 있지만 밍컷은 새들에게 스트레스와 충격을 주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활발하고 친화적인 성격을 가졌던 녀석들이, 의기소침해지고 졸기만 하는 등, 행동의 변화가 생기기도 한다는데요. 또 깃털을 자른 사람에게 극도의 거부감을 갖거나 공격적으로 반응하기도 하고, 밍컷이 된 부위를 부리를 조아서 자해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며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조언하기도 하는데요. 옳다 그르다 정답이나 아니다를 간단하게 규정할 순 없지만, 더불어 사기 위해 역설적으로 상대를 속박하고 다치게 하고. 과연 사람과 동물 사이에만 그럴지, 혹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언어나 생각으로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 건 아닐지, 한번쯤 돌아보게 됩니다.<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6719일 방송>

 

2. “율법과 유다인(1-8)”을 읽었습니다. 어제 말씀의 연장입니다. 사도는 유대인의 나은 점이 무엇이냐고 따져 묻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할례의 이로운 점이 무엇이냐고도 묻습니다. 그러면서 지체하지 않고 여러모로 많이 있습니다.”고 대답을 합니다. 사실 한 20여 년 전에 한 신학대학 구약교수라는 분이 제 강습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년 후 제가 상해의 한 교포교회에 강의하러 갔을 때 막무가내로 따라가겠다 졸라서 동행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저와 머무는 내내 “Back to Jerusalem.”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몇 년 전에 영국을 거쳐 이스라엘로 선교하러 간 제자 생각이 났습니다.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며 열의를 비치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거의 서른 차례 선교강의를 했던 중국의 한 조선족 멘토도 생각이 났습니다. 그분은 준비를 착실히 해서 서안에 교회를 개척하려고 한다고 하면서, 그 최종 목표는 예루살렘이라고 했습니다. 이 분들의 얘기를 요약하면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소위 대위임령/ The Greatest Commission)을 완수하기 위해서 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나은 점을 하나님의 말씀을 맡긴 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현존이신 말씀을 유대인에게 맡겨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게 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사명은 결코 작은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할 책임보다는, 그 말씀을 자신들을 위한 안전장치쯤으로 삼아버리고 만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말씀하셨던 복이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12:1-2). 하나님은 말씀과 함께 현존하시기 때문에, 그들은 이 말씀을 한 순간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쉐마교리입니다(6:4-9).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물론 그들은 쉐마교리를 지키려고 힘썼으나 문제는 삶에서 적용되는 말씀이 아니라 입에서 외우고 그것으로 자부심만 키우는 교리가 된 것입니다. 마치 우리들이 입버릇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말만 되풀이 할 뿐, 사랑 없는 무정한 삶을 사는 것처럼 말입니다. 생활 속에서 열매 없는 신앙의 슬픈 비극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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