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109호(2020. 11. 2 월요일).
시편 시 110:4-7.
찬송 511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마운 친구에게> 정아야, 부랴부랴 꾸려 보낸 너의 구호품과 구호품 속에 편지, 무사히 잘 도착했어. 아무런 사전 예고도 없이 불쑥 도착한 너의 선물, 마치 하늘에서 수호천사가 뚝 떨어뜨려 놓은 것 같았단다. 게다가 그 아기자기한 내용물들이라니. “이건 정아가 고르고 골라 보내는 거랍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 했지. 그런데 너의 편지를 조금 웃기도 했어. 내가 중국에서 몇 년 더 살았다간 어딘가 탈이 단단히 날 것 같은 그런 절박감마저 들었다고. 그래서 소포 값이 들더라도 머글 거리를 자주 챙겨 보내주겠다니, 정말 고맙다. 그런데, 글쎄 이번 한번이면 족하지 않을까 싶어. 중국으로부터의 쇼크, 외부인들이 느끼는 충격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겠는데, 여기서 살아야 하고 이곳에서 공부를 하면서 중국이라는 나라와 낯을 익혀가는 내 입장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존해 나가야 하고 또 생존해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중국에 와서 이곳을 공부하면서 비로소 야, 우리는 같은 이웃이라면서 서로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구나. 생각했지. 지금 중국은 엄청나게 변화하는 중이야. 그래서 사실 자신들조차 어디서 멈춰야 하는 줄을 모르고 질주하는 중이라고 말을 하고 있어. 우리가 잘 모르는 그런 변화에 대한 작은 예를 하나만 들어볼까? 1977년 3월 7일, 베토벤 음악 공연 금지령을 해제한다는 법령이 공포됐데. 그 말은 바꿔 말하면, 1977년 3월 7일 그 법령 전까지는 베토벤 음악을 공연할 수조차 엇었다는 뜻이겠지. 이렇게 닫혀 있던 나라가 갑자기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변화를 적극 수용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엄청난 뉴스거리들이 등장하고 있는지 상상이 가지. 나는 우리나라와 연관해서 이런 중국의 변화들을 정말 잘 지켜보고 싶어. 그러기 위해서는 나도 그들 방식대로 살고, 먹고, 숨 쉬어야 한다고 생각해. 너의 구호품, 정말 오랜만에 보는 부식품들 많이 반가웠어. 하지만 앞으론 그냥 마음으로만 응원해 줘도 충분하단다. 생존도 공부도 잘 해 낼 수 있단다. 가끔 네가 많이 그리워.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년 11월 3일 방송> a.
2. “예수와 베드로(15-19절)”과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20-24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 단락입니다. 세상 이 참 많이 변했다고 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상대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생각을 억지로 요구한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가령 “나를 믿습니까?”나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십니까?”와 같은 물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난처하면서도 어려운 질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난처하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느끼는 것이지 말로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때문입니다. 어렵다는 것은 누군가를 향한 자신의 사랑도 얼마의 함량인지 측정 불가능한데, 불특정 다수의 다른 사람의 사랑과 비교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음 밑바닥에 깔려 있을 믿음이니 사랑이니 하는 것을 따져보려는 주님의 의도가 참으로 흥미진진하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특유의 순발력과 앞장 서기 좋아하는 성미가 가미된 어투로, “주님이 아시는 대로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고 대답합니다. 그렇게 무려 세 번씩이나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유대인의 어법에서 같은 말을 두 번하면 비교급에, 세 번 하면 최상급에 해당된다 합니다. 그러니 매우 매우 중요하다는 의미인 셈입니다. 베드로의 대답이 있을 때마다, 주님은 “내 양들을 잘 돌보거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질문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밝히십니다. 양들을 돌보는 일은 물론, 베드로의 말년과 그의 죽음을 암시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남이 와서 허리를 묶고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고 말입니다. 이렇듯 베드로는 시련과 역경이 기다리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의 삶은 우리들 크리스천의 삶의 모델일지 모릅니다. 주님을 따르고 사랑하는 일이란, 부귀영화와 평안이 기다리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고통을 짊어지는 삶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공공연히 알려진 크리스천의 삶이었습니다. 적어도 이 땅에서는 충분히 예견된 삶이나, 그래서 천국이 더욱 기다려지는 이유일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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