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488(2021. 11. 16. 화요일).

시편 시 39:9-11.

찬송 41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말했다. “이렇게 묶을 때마다 네게 준 내 인생 때문에 사무쳐 목이 메인다.” 꼬맹이로 불렸던 시절에, 아버지 구두를 닦고 100원을 용돈으로 받았습니다. 엄마가 골라준 넥타이를 매고, 딸내미가 서투르게 닦은 구두를 신고 출근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천둥번개가 치고 비바람이 불어도 끄떡없이 그 자리에 있는 산처럼 든든해 보였습니다. 아무 일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린이로 불렸던 시절에 놀이터에서 놀다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한 동네 고등학생 언니를 보고,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을 봤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언제 커서 저렇게 근사한 교복을 입나, 그 날이 무척이나 기다려졌습니다. 아무 일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 땐 교복을 입고 양복을 입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몰랐습니다. 자격이 없으면 입지 못하는 옷 같아, 그 자체로 선망의 대상이었지요.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 왜 넥타이를 싹둑 잘라버리는 퍼포먼스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기억하시나요? 더 이상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넥타이를 맬 수 있었던 첫 날을. 그렇게 말고 이렇게 매듭을 묶을 수도 있다고 가르쳐 주지 않았니. 그 후로 이렇게 말고 이렇게도 인생을 묶으며 살아왔다. 아니 늘 이렇게만 살았다. “이렇게 묶을 때마다/ 네가 준 내 인생 때문에 사무쳐 목이 메인다나희철 시인의 <넥타이>라는 시입니다. 그렇게 말고 이렇게도 매듭을 묶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늘 이렇게만 묶으며 살아왔습니다. 더 이상 교복이나 양복이 부럽지도 신기하지도 않습니다. 가끔은 내가 옷을 입는 게 아니라, 옷이 나를 입는 것 같습니다. 내가 옷 속에 들어갑니다. 학교에 들어갑니다. 회사에 들어갑니다. 공부와 일이라는 파도가 세월을 끌고 가고, 나를 끌고 갑니다. 문득 멈춰서 돌아보면 1주일이 흐르고 한 달이 흐르고 1년이 흘러 있습니다. 가끔 교복 입은 고등학생 언니가 부러웠던, 양복을 입고 회사에 출근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던 시절의 나로 돌아가곤 합니다. 그 시절의 아버지를 다시 보고, 그 시절의 여고생을 다시 봅니다. 결코 아무 일도 없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의 나처럼 말이지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4114일 방송>

 

2. “금식하며 죄를 뉘우치다 2(26-38)”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죄를 뉘우치는 일, 회개를 매우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회개란 말은 잘못을 깨닫고 죄짓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꾼다는 의미인데, 입으로만 회개하고 삶의 방향은 여전히 그대로 있으니 말입니다. 거짓부리로 죄를 뉘우치고 있을 뿐이라는 말입니다. 회개란 시궁창으로 향하던 삶의 방향을 푸른 하늘을 향하여 방향을 바꾸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가르치는 회개란 이전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행동하는 삶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기대하는 회개란 달라진 삶이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동안 유대인들이 살아오던 삶이 어떠했는지를 구체적으로 고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는 예언자들을 죽였고, 그래서 벌로 원수들의 손에 맡겼으나 울부짖어서 풀어주면 오래지 않아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다시 원수의 손에 맡겨 힘들게 되면 탄식을 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 해서 건져주면 또 제멋대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미운 일곱 살 개구쟁이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철부지 어린 아이들이 아니라, 임금과 장관들 그리고 제사장들과 장로 등 지도자들까지 예외가 없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습니다.

   서글프고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철부지들이라면 여유롭게 기다려 볼 수도 있고, 참을성을 갖고 타일러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앞뒤를 잘 분간할 사람들,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흥망성쇠의 역사의 내력을 철저하게 배운 사람들이 뻔히 알면서도 저지르는 죄악을 지켜볼 때는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모든 기대가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이런 경우에 할 수 있는 방법이란 무엇이 있을까요? 채찍 밖에는 없습니다. 눈물이 쏙 빠지는 따가운 채찍보다 더 좋은 가르침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녀에게 채찍을 아끼지 말고 근실히 징계하라(13:24) 말씀하십니다. 유대의 70년 바벨론 유수, 우리나라의 35년 치욕은 새로운 삶을 향한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신 사랑의 채찍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눈물을 쏙 빠지게 만드는 스승의 가르침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는 교사에게, 사회는 종교에 서로 미루고 뒷짐을 점잖게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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