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988호(2023. 3. 31. 금요일).
시편 시 124:6-8.
찬송 158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주 오래전 고대 프랑스의 달력에서는 4월 1일이 새해 첫날 이었다고 합니다. 16세기 중반까지 이 전통이 이어져 오다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그레고리 달력이 제정되면서, 새해도 1월 1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합니다. 4월 1일은 만우절이기도 하지요. 달력이 달라졌어도 오랫동안 내려오던 관습을 따라, 4월 1일을 새해로 지키는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놀리려는 것이 만우절의 유래이기도 합니다. 농담을 주고받는 오늘이 아주 먼 옛날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새해 첫날이었다고 생각을 하니까, 4월의 첫날이 새삼 특별하게 여겨지네요. 지나친 장난이나 농담보다는 새로운 기분으로 한 달을 계획하는 하루 보내시는 것은 어떨까요? <KBS FM 1, 새아침의 클래식, 2008년 4월 1일 방송>
2. “나라로의 죽음(1-16절)”과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17-27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우리로 나사로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로 안내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낯선 일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마치 죽음의 문제를 전부 다 해결한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지인이 별세 소식을 알려오면 뭔가 신앙생활에 잘못된 일이라도 생긴 양 움칠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현상은 성경에서 많은 죽음과 그 죽음을 취급하는 내용들이 크게 절실하지 못한 때문인지 모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을 읽을 때 그렇습니다. 저는 두 번째 성지순례 여행 중 베다니를 방문할 수 있었고, 나사로의 무덤을 끝까지 내려가 보았습니다.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이 아니라 흙을 파 내려가서 만든 무덤이었습니다. 사실 무덤을 알리는 표지판만 잘 읽는 사람들에 비해서 유독 한국 교인들은 사람이 뉘였던 그 자리까지 가서 확인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제가 생각한 것은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된 후였는데, 세마포로 몸을 감싸고서 그 깊은 무덤에서 올라오느라 고생 좀 했겠다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엉뚱하고 불경한 생각입니까? 성경에는 10번에 걸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의 일화를 취급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죽음은 그리 절박하지도 슬프지도 처량하지도 않은 한번은 겪어야 할 통과의례처럼 생각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우리처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사람이, 죽음의 두려움과 슬픔을 경험한 후에 주님을 만나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죽은 당사자인 나사로의 누이들 마르다와 마리아의 경우입니다. 그들은 오라비가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을 알고, 주님을 청했습니다. 빨리 오시라고. 숨이 넘어가기 전에 오셔서 그 위험한 순간을 멈추게 하시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전혀 서두시는 기색도 없이 이틀이나 더 한가롭게 지내셨다 전하고 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뒷전으로 한 이면에는 다른 상황도 알아야 한다고 제자들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유대인들이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한 일이 엊그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주님의 나사로를 돌보시지 않은 여유로움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베다니에 도착하신 주님은 나사로의 두 여동생에 의해서 거센 항의를 받아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오라비는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두 여인은 죽음의 깊은 절망과 슬픔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분명히 고백했습니다. 주님께서 부재하셔서 이런 문제가 생겼다고 말입니다. 그들은 비록 수도 없이 많은 주검들을 보았으면서도, 한 가지 분명한 신앙이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계시는 자리에는 주검이 있을 수 없다는 신앙 말입니다. 물론 나사로의 두 누이는 나사로가 고통스러워하며 두려운 눈을 뜨고 죽음을 마주하는 모습을 남김없이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에 동참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미안하고 무력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숨을 거둘 때 그들 역시 절망의 나락에 떨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통곡으로 화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쉬운 미련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부재에 대한 아픔이었습니다. 주님만 우리 곁에 계셨더라면 죽음쯤이야 멀리 내쫓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보자마자 그 생각을 깨워낸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구하시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주실 줄 압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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