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488호(2024. 8. 12. 월요일).
시편 78:5-8.
찬송 396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인간 세계는 고통으로 저며져 있는 듯하다. 추위와 더위 배고픔과 갈증, 시름과 고민 걱정과 질병이라는 상황들을 이겨내려고 노력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전해 온다. 우리는 고통을 겪을 때, 자신보다 더 힘들어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것은 매우 상식적이면서도 평범한 일이나, 어찌 보면 대단한 지혜가 아닐 수 없다. “추울 때는 가난한 집의 아이를 생각해 본다. 더울 때는 잠방이를 걸치고 일하는 머슴을 생각해 본다. 배가 고플 때는 이집 저집 찾아다니는 거지를 생각해 본다. 목마를 때는 소금을 갈망하는 사람을 생각해 본다. 수심이 찾아올 때는 가화/家禍를 입은 사람을 떠올린다. 번민이 찾아들 때는 순장/殉葬을 당하는 사람을 떠올린다. 근심스러울 때는 임종을 앞둔 사람을 떠올려 본다. 병들어 누워 있을 때는 이미 죽은 옛 사람을 생각해본다.” 안대회, 고전 산문 산책, pp.561-563.
2. “개종한 첫 사람들(37-42절)”과 “신도들의 공동생활(43-47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이제는 아주 옛날 추억처럼 멀어져간 이야기입니다만, 풀무원이 의정부 회암리에 둥지를 틀고 있을 때입니다. 저는 매년 겨울철에 열리는 농어촌 교회 지도자 성경세미나에 강사로 두어 차례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가족 단위로 또한 혼자서 풀무원 공동체에 가입해서 살고 있던 분들이 있었습니다. 예배실 뒤편에 보면 60년대나 볼 수 있었던 여러 가지 광고들이 붙어 있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지난 달 공동체의 수입과 지출 내용도 있었습니다. 수입이 얼마든 자신의 수입을 다 공동체에 내놓고 필요한 것은 공동체로부터 청구해서 지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회계를 보는 원경선원장님의 막내 따님은 이화대학을 나오신 분이 부친을 돕겠다고 이곳에 와서 고생을 하고 계셨는데, 적자를 면치 못한다 하소연 하셨습니다. 그리고 풀무원 공동체가 사는 집들의 기둥들에는 “욕심 뽑기”라는 글귀가 여기 저기 붙어 있었습니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이상적인 인간의 꿈입니다. 수입을 다 내놓고, 필요한 것은 공동체가 해결해 주는 방식은 꿈의 나라에서 가능한 일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도전을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어김없이 그런 꿈과 도전들은 여지없이 깨트려지고 말았습니다. 그 까닭은 매우 단순하고 간단했습니다. 인간이 가진 욕심, 더 나쁘게 말하면 탐욕을 뿌리 뽑지 못하는 때문이었습니다. 문동환 박사께서 야심차게 출발했던 새벽의 집도 마찬가지 루틴을 그리다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초대 기독교회가 보도/寶刀의 검/劍처럼 자랑하는 한 가지는 성도들의 공동생활이었습니다. 자신의 전 재산을 교회에 바치고 빈부귀천 나누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삶이었습니다. 제 얘기를 하는 게 좋겠습니다. 지난 6월에 캐나다에 사는 막내딸이 두 남매를 데리고 제 아들 집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아들과 우리 내외가 조용하게 살던 집에 갑자기 3명이 불어나 여섯 식구가 함께 살게 된 것입니다. 방이 셋인데 가장 큰 방은 막내딸에게 주고, 골방은 아내, 그리고 저의 서재로 쓰던 작은 방은 아들에게 그리고 거실은 제가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식구니까 서로 너그럽게 이해를 해 주려니 생각하지만, 거실 소파에 늘 누워있는 제 모습이 캐나다 손주들에게 어떻게 비칠지 좌불안석입니다. 그리고 거실 창가에 아내의 작업(그림그리기)을 위해 두었던 작은 테이블은 저의 서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냉장고입니다. 아내는 어린 손주들을 위해서 평소보다 2배 많은 음식재료며, 아이들의 간식을 사다 나르는데 분주합니다. 어린 피붙이를 먹이는데 무엇이 아까울까요?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생활 리듬이 깨지는 것입니다. 어른 셋이 살 때는 서로의 식성을 알기에 서로가 필요로 하는 것은 잘 지켜주곤 합니다. 그런데 강아지들의 식사를 위해 준비해 둔 것들이 자꾸 축이 납니다. 그래서 마침내 제가 입을 열었습니다. 강아지를 위해 준비해 둔 것들은 손대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것을 구입하려면 아산까지 가야 한다고. 아이들은 섭섭해 했을 것입니다. 손주보다 딸 보다 강아지가 우선이냐고 말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지난/至難한 일입니다. 공동소유의 재산 개념은 철든 어른들에게도 힘이 드는 판에, 어린 아이들은 도무지 가르치기도 고치기도 어렵다 합니다. 가장 수입이 적은 분의 아들이 찾는 것은 언제나 메이커 제품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이 5천 원짜리 운동화를 신는데 반해 그 아이들은 10만 원짜리 운동화를 고집해 사 주어야 한다니 얼마나 속이 터지겠습니까? 초대 교회 공동생활을 지금도 찬양하는 철부지 어른들이 있습니다. 그 아내와 자식들은 “너나 하세요.” 한답니다. 이상과 현실을 오가며 살고 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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