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489호(2024. 8. 13. 화요일).
시편 78:9-11.
찬송 414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호/號를 월암/月庵이라고 지은 것은 내 집이 월암밑에 있어서 그런 것 뿐이다. 나는 생각해 보았다. 인생이란 물 위에 뜬 개구리 밥이고, 바람 많은 나무에 걸린 버들개지이며, 울타리에 걸리거나 주렴에 날리다가 바닥에 딍구는 꽃잎이다. 그를 가로 막는 철문은 본래 없다. 월암이 내 소유의 창고인가? 알맹이 없이 이름만 소유함은, 바탕을 없애고 꾸밈을 더한 것과 같으므로, 이런 호를 갖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나는 이름을 갖고 있으나 그 이름이 동네 밖을 나가지 않는다. 비록 호를 가졌다 한들 누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나를 비난하겠는가? 허나 배움이란 나를 위한 것이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음은 남에게 달려있고, 부끄럽고 부끄럽지 않음은 내게 달려있다. 따라서 나는 나를 닦아 아무 부끄럼없기를 바랄 뿐이다. 간사한 짓거리와 위선적 행위를 하여 내심 부끄러우면서도 눈치채지 못함을 다행으로 여기는 세인들처럼 행동해서야 되겠는가?” 안대회, 고전 산문 산책, p.591.
2. “앉은뱅이를 고친 베드로(1-11절)”을 읽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는 아름다운 문(美門) 옆에는 언제부턴지 모르지만 구걸하는 거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앉은뱅이였습니다. 그 거지는 자리 하나는 제대로 잡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원을 말씀드리러 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읽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선한 마음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면 거지의 간청을 몰인정하게 뿌리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으니 말입니다. 오후 3시 기도 시간이 되어 베드로와 요한도 서둘러 성전으로 들어가려고 하였을 때, 그 거지가 한 마디 하였습니다. “한 푼 줍쇼.”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일행은 그 거지를 향해 말합니다. “우리를 좀 보시오. 나는 돈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가시오.” 그리고 그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켰는데,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아는 사람들은 다 놀라서 어리둥절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늘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제자들, 그리고 어찌하여 자신들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느냐고 한탄하던 제자들이 기적을 베푸는 주인공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신유나 기적에 무력하던 제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떻게 이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수 밖이었는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막 9:14-29은 예수님께서 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공관복음서에 그 평행귀가 소개되고 있습니다(마 17:14-21, 눅 9:37-43).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공관복음서 모두가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하고 묻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런 질문에 대한 공관복음서는 모두 다 다른 주님의 대답을 듣게 됩니다. 우선 마가복음서에서는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으니라.”고 기도 없음을 지적하였고, 마태복음서는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고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없음을 지적하셨습니다. 누가복음서에서는 “믿음도 없고 패역한 세대”를 지적하십니다. 이렇듯 공관복음서는 서로 다른 문제점을 내놓고 있습니다. 톨스토이의 말인가요? 행복한 사람들은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가 있다고 말입니다. 각 복음서 기자들은 자신들의 공동체가 가진 가장 심각한 문제점들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문제의 원인은 각기 다양하다고 말입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에서 큰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거지를 바라 보는 시각/視覺이 달라졌다고 하는 점입니다. 부활한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육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던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부활한 주님을 만난 이후의 베드로는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마음의 눈, 사랑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결국 사랑의 힘이 동전을 줄 수도 있고, 그 보다 더 큰 건강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원대한 하나님의 섭리에 눈을 뜰 수 있었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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