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1665(2005.12.7. 수요일).

시편 83:1-4.

찬송 37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한 줌의 씨앗이 나의 전부라해도, 모든 씨앗에서 곡식을 거둘 수는 없습니다. 이중의 몇낱은 벌레가 파 먹을 것이요, 몇 낱은 종자가 부실해 싹을 틔우기 어려울 것이며, 또 몇 낱은 너무 일찍 뿌렸거나, 너무 늦게 뿌려서 때를 놓치는 경우도 있겠습니다. “씨앗을 뿌릴 적에는 반드시 10, 100, 1,000배의 수확을 얻어야 하겠지마는, 결과에 너무 집착하면 손해볼까 두려워 파종조차 못하고 말려버리는 수가 있다.” 최명희의 [혼불]에 나오는 구절인데요. 많은 씨앗중에 단 한톨이라도 제 때 싹이나서 제대로 꽃이 피고, 제 때 거두어 제때 쓰이기만 한다면, 나머지 손실은 손실과 허사가 아닐 것입니다. 손실과 허사를 겁내지 않고 씨앗을 뿌리는 시간, 오늘이 그런 시간 중 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51124일 방송>

 

2. 말과 행동, 이것은 달라서는 안 될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말하는 저부터 그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고사하고 누군가와 약속을 하고 본의 아니게 잊어버린 체 살고 있는가 하면, 의도적으로 말과 다른 삶을 사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지 생각조차 하고 싶어 하지 않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점을 지적하십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지칭하시면서,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3)고 말입니다. 똑 같은 사람에게서 말하는 것은 듣고 행하나, 같은 사람에게서 그들의 행위는 따르지 말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런 문제를 가진 사람이라면 아예 상종하지 말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말 따로, 행동 따로 사는 사람에게서도 전부가 쓸모없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러고 보니, 어떤 사람도 완전히 성숙한 사람이란 없음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면에서는 성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 점에 관해서만은 확실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교만하였고 자존심도 대단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많이 알고 있다는 확신들이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경멸하는데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겸손이 무슨 말인지, 섬김의 속성이 어떤 것인지, 그것을 녹음기처럼 되풀이 말하는 사람들이 종교 지도자라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참 겸손할 줄 모르고, 참 섬김의 몸짓조차 어색한 사람들이 다름 아닌 목사들입니다. 제가 그런 사람입니다. 차라리 겸손이나 섬김이라는 말을 외치지 않았더라면 좀 봐줄만 한 일인데 말입니다. 허구한 날 하나님의 사랑을 되풀이 하면서,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온갖 감정의 샘을 퍼 올리는 사람이, 정작 사랑을 실천할 때에는 너무도 냉담하게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부드럽고 다감한 말은 어디로 승화해 버린 것입니까? 이런 이중성 때문에 마음만이라도 아파해야 하겠는데, 그 조차 찾을 수 없다면, 이를 두고 화인 맞은 양심이라고 성경이 말씀하는(딤전 4:2)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내 탓이오!”를 말하는 겸손한 천주교인을 만날 때는, 정신이 화들짝 들 때가 있습니다. 믿고 결심하는 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는지 모릅니다. “저희 말은 듣고 행하되, 그 행위는 따르지 말라이것은 주님께서 오늘 여러분과 제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3. 저는 새해 벽두에 7차 중국선교여행을 떠납니다. <로마서 주석> 혹은 <기독교 중심 교리>를 가르칠 계획입니다. 만일 기독교 중심교리를 가르친다면, 루터의 <소교리 문답서>를 교재로 택할 생각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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