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20(2000.10.27, 금요일)
성경말씀 : 잠 25:21-22.
찬송 : 347장.
제목 : 성경이 가르치는 원수갚기.

1. 오늘도 주님의 은총가운데서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맛보게 되시길 기도 드립니다.

2. 우리 역사는 악순환으로 점철되어 왔습니다. 성경에서도 그런 모습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을 때, 되풀이되는 왕권 다툼과 그로 인해서 처절한 원수갚기가 진행되었습니다. 마치 삶의 의미가 원수갚기 그 자체인냥 그 일에만 몰두하듯 살아가는 하였습니다. 끝없는 악순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지 아니하면, 우리 인생엔 희망이란 품어볼 수도 없다고 하겠습니다. 좀 더 멀리 인생을 내다보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성경적인 원수갚기입니다.

3. 도대체 원수란 우리와는 어떤 관계를 가진 사람입니까? 다른 민족과 달리 우리 민족에게는 한(恨)이 많은 민족이라고 합니다. 가난에서 한이 맺혔고, 배움에 한이 맺혔습니다. 무책임한 부모님에게 한이 맺혔고, 폭군 같은 지도자들로 인해 한이 맺혔다고 말합니다.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이 자칫 우리 이웃들을 원수처럼 여기는 경향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장 사랑하고 존경해야 할 부모님을 원수로 여긴다든지, 심지어는 자신을 사람되라고 꾸짖는 스승을 원수처럼 여기는 사람도 본 일이 있습니다. 자식이 원수요, 남편이 원수가 되고 있다고 말하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아무튼 우리 민족에게는 이래저래 원수가 많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잘못된 생각이나 판단이 이런 오해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성경말씀의 원수는 아마도 부모를 죽였거나 자신의 삶을 송두리체 파멸시킨 그런 류의 사람들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4. 그런데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 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는데,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고 말입니다. 얼마나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만 골라하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원수가 어려움을 겪을 때 기뻐해야 마땅한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에게 동정심을 갖고, 그의 필요를 채워주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감정상태와는 달리 원수를 도와주라고 하는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이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배고픈 원수를 방치하거나, 목마른 원수를 내버려둔다면, 어쩌면 그는 죽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 원수와 진정한 대결 - 그것이 육신적이든 정신적이든 - 의 장은 이루어질 기회조차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 아닙니까? 원수와 진정한 싸움은 항복을 받는 일이거나 용서를 비는 일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정당당하게 원수와 겨루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원수의 문제나 약점을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마음이 넓지 않고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원수의 생명을 해치는 일 대신에 원수의 마음을 부끄럽게 만드는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진정한 원수갚기라고 말입니다. 

5. 그렇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기독교인이 선택할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합니다(롬12:20). 원수가 사과하거나 회개할 기회를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 더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원수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정정당당하게 원수를 갚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상을 주실 일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모양으로든 원수된 이들이 있습니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가 망하기를 기도하시는 중입니까? 성경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것은 성도다운 모습이 아닙니다. 그를 위해서 오히려 기도하십시오. 진심으로 그가 잘되기를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청하시는 삶의 태도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평화로 만들어 가는 방법이며, 하나님께서 상주시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런 원수갚기란 우리의 의지나 감정으로는 불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성령님의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서만 이런 일들이 가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위대한 사건들이 여러분의 삶에서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6. 오늘도 진정한 원수갚기가 여러분의 생활속에서 일어나게 되기를 바라면서, 승리하십시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19(2000.10.26, 목요일)
성경말씀 : 잠 25:20.  
찬송 : 312장.

1. 오늘도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아주 오래된 인사말로 교회 예배에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The Lord be with you 입니다. 

2. 우리는 정서라는 말을 가끔 사용합니다. 정서(情緖), “사물을 대할 때 일어나는 각 가지 감정”을 말한다고 사전은 설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감정을 가진 존재입니다. 이 감정 때문에 우리들의 삶이 풍부할 수 있습니다. 요사이처럼 푸르고 높은 하늘을 보면서 여러분은 어떤 감정을 가질까요? 며칠 전에 저는 신학대학교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하늘을 바라보면서 왠지 쓸쓸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느낌을 다른 교수님들도 얘기하셨는데, 나이가 들어가는 징조라고들 하셨습니다. 참 많이 다른 감정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런 감정이 안정되어 있느냐? 불안스럽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이 크게 좌우된다는 점입니다. 이른바 감정의 기복(起伏)이 큰 사람들에게 문제가 많다는 얘기지요. 이른바 불안정한 정서를 가졌다면 말이지요.

3. 여러분과 저는 감정에 의해서 얼마나 큰 영향을 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물론 우리에게 이성(理性)이 있어서 매우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대처해 나가고 있지만, 많은 면에서 이성보다는 감정이 더 앞설 때가 많았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특히 가까운 가족들에게 우리는 냉정한 이성으로 대하기보다는 감정으로 대할 때가 훨씬 더 많았다는 것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상처를 주고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문제아가 될 수 있는 감정상태가 기복이 크다고 생각해 보세요. 자기 자신도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면, 얼마나 불안할까요? 오늘 본문에 이런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아픈 사람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람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옆 사람은 아픈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런 사람 옆에서 신이 나서 노래를 흥얼거린다고 한다면, 이런 사람은 추운 날에 옷을 벗어 던지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사람을 자기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남이야 기분이 어떻든, 어떤 생각을 하든 상관없이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드러낼 뿐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4. 그렇습니다. 자기 감정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사람, 정서적으로 안정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역시 이성이나 감정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황이나 때에 알맞은 이성과 감정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기뻐하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안정된 정서를 가진 사람이고, 함께 살만한 그런 대로 괜찮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혼자 있을 때와 함께 어울릴 때의 차이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가정 생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위 행복하게 보이는 가정들이 있습니다. 눈에 띄게 드러나는 특징은 서로에 대한 배려하는 부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행복했던 시절들을 떠올리게 되는데, 그 때는 분명히 이런 남에 대한 배려가 많았던 시절이었습니다. 형은 아우를, 아우는 형을 많이 염려해 주고 생각해 주었던 때 말이지요.

5. 오늘 여러분의 주변을 살펴보십시오. 여러분 곁에 누가 있는지 뿐 아니라, 그의 얼굴 빛, 그의 말투, 그의 몸짓, 등등을... 그리고 여러분이 그에게 어떤 말로 어떤 느낌으로 다가서야 할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내 생각 내 기분에만 취해있지 말고 말입니다. 그러면, 오늘 여러분은 훨씬 더 행복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런 행복한 분위기에서 일하고 사는 것, 이것이 우리들이 누릴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이런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를 엮어 가시길 기도합니다. 샬롬!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18(2000.10.25, 수요일)
성경말씀 : 잠 25:9-12.
찬송 : 301장.

1.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데는 여러 가지 힘이 필요합니다. 체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적당히 먹고, 일하고 휴식하고 운동합니다. 금력이 필요합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데 에는 먹고 입고 쓰는데 지불해야 할 최소한의 돈이 있습니다. 지력도 필요합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권력도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권력 만능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했으니, 너무 짧은 힘이지요. 이렇듯 여러 종류의 힘들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힘들은 적당한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도록 잘 조정해야 하는데 그렇지들 못해서 그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파멸하는 이들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힘들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3. 오늘 본문에서는 말의 힘(言力)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말의 힘이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더 큰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신앙인에게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의 힘으로 믿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우리 자신들이 사용하는 말에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겠고, 그 힘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말의 힘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한 마디 말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을 들으셨을 것입니다. 한 마디 말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삶의 방향을 바꾼 예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위로의 말 한마디가 죽음 직전에서 구할 수 있었고, 칭찬의 한 마디가 인생을 완전히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말의 힘은 우리의 생각보다도 훨씬 크다는 점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일은 한 마디 말에 의해서 좌우될 수 있다면, 우리는 말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 사과니라.” 어떻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많은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를 만들어 가시는 축복의 하루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4. 따뜻한 말, 격려의 말, 용기를 주는 말,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말 등등은, 여러분 주위에 좋은 친구들을 다가서게 만들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들의 입술을 주장하시도록 의탁하십시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17(2000.10.24, 화요일)
성경말씀 : 잠 24:30-34.
찬송 : 370장.       

1. 주님이 주시는 은총 가운데서 오늘도 유익한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2. 우리의 삶은 시간이라는 제약을 받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인생은 시간이다.”라고 말합니다. 인생의 시간은 한번 지나가면 다시 되돌이킬 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생각할 때, 시간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소중한 시간을 낭비한다던 지, 아니면 뒤로 미룬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치명적인 손실을 가져오는지 모릅니다. 

3. 성경에서는 시간을 두 가지 용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크로노스라는 말인데,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시간으로 대체로 ‘길이’로써 시간입니다. 시간의 양을 셈할 때 이 말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말이 있는데, 카이로스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때, 기회’로써 시간을 의미합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들이 생각하는 시간은 카이로스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맞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시간에 관해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6:34)  이 말씀을 이렇게 고쳐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일은 오늘하고, 내일 일은 내일 가서 하라.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오늘 일을 오늘 하십니까?
혹시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는 분은 없습니까? 또 여러분은 내일 일을 오늘부터 걱정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뜻은, 하루 하루가 충실한 삶이 되기 위해서는 오늘 일은 반드시 오늘 해야하고 또 그렇게 충실한 하루가 되기 위해서는, 내일 일까지 오늘로 앞당겨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일 일은 내일 가서 해도 늦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걱정을 앞당겨서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셨던 것 같습니다. 하루 생활도 힘겨운데 내일 일까지 당겨다 놓고 걱정하는 것이 너무도 안타까우셨을 것입니다. 하루하루에 충실하라고 하십니다. 

4. 해답은 나와 있습니다. 오늘 일은 오늘 하는 자세와 습관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저는 밤늦게까지 일하는 분들을 보면서 자라났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농사꾼이셨는데, 밤늦도록 일하시는 모습을 자주 볼 수가 있었습니다. 모심기를 위해서 못줄을 준비하는데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하셨습니다. 그래야 품아시로 온 이웃 사람들이 제대로 모를 심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룬다면 결코 작지 않는 문제가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첫째는 오늘이 충실하지 못한 셈이 되고, 둘째는 내일 해야 할 일이 영향을 받게 됩니다. 저는 때를 놓지는 생활보다도 더 후회막급한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런 자세는 우리의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잘못된 시간관리가 어쩌면 우리의 삶을 전체적으로 어리석게 만들고 있는지 모릅니다. 

5.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시간은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채워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우리의 인생의 길이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매일이 마지막 인생인 듯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종말론적 자세]라고 부릅니다. 오늘도 우리들이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미루지 마십시오.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내일 해도 괜찮다.” 이것이 마귀의 소리입니다. 힘들더라도 오늘 일은 오늘 끝내는 습관을 길러갑시다.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을 지켜 주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16(2000.10.23, 월요일)
성경말씀 : 잠 24:15-16.
찬송 : 348장.

1. 오늘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으로 승리하시는 하루가 되시길 기도 드립니다.

2. 칠전팔기라는 말을 많이 사용해 왔는데, 성경에도 이런 말씀이 벌써 3천년 전에 솔로몬 왕을 통해서 기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16절).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이 말씀 속에는 오늘 우리들이 묵상할 귀한 뜻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우리들이 그 동안 사용하던 이 칠전팔기라는 말의 의미는 “비록 일곱 번이란 거듭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공할 기회는 남아 있다는 희망을 주는 의미가 있”는 가 하면, “우리 인간은 실패를 많이 할 수밖에 없는 인생살이에서 끝까지 참고 도전하면 기회는 오고야 말 것이라는 인내심에 호소하는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3. 그러나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뜻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 질지라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인 역시 시련과 고통의 멍에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점과 함께, 그러나 의인은 반드시 승리하고 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악인은 반드시 망하고 만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하겠습니다. 아무리 힘든 인생 길이지만, 의인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믿음, 이것은 오늘 우리들이 굳게 가져야 할 신앙입니다. 

4. 문제는 이런 놀라운 축복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인”에게 제한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의인입니까?  성경은 의인을 사람의 행실이나 마음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진 믿음에서 찾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가진 의는 상대적인 의에 불과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조금 더 의롭다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인 의를 가진 인간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 과연 어떤 사람이 의인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 점을 바로 깨달은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물론 하박국 2장 4절에서 가져온 말씀이었습니다. 

5. 우리 기독교회는 믿음을 잘 가르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내가 이렇게 저렇게 하면 잘 될 것이다.”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신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하신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든지, 하나님이 행하신 행동은 놀라운 힘이 있다든지”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행동을 받아들이는 행위를 믿음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참된 의인이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행동을 믿는 사람들은, 반드시 승리하게 됩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최후의 승리는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이 의인이며,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승리를 약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기억하며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의인의 반열에 서 있는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6.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 나름대로 힘든 시간들일지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우리의 지혜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항상 우리들이 가는 길에 가까이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리라.” 
오늘도 여러분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승리하는 기쁨을 맛보시길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15(2000.10.22, 주일)
성경말씀 : 잠 24:9-12.
찬송 : 278장.

1. 오늘은 주님의 날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2. 우리들의 마음은 한없이 너그러우면서 동시에 그렇게 좁을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어느 것이 우리의 진짜 마음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관대하고 자비롭지만,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철저하게 모질고 잔인스러울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도 딱히 그 까닭이 애매 모호하기도 합니다. 참으로 이런 우리 인간의 마음은 변덕스러우며 또한 정당성을 갖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들에게 마음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라고 권고하시는 이유가 예 있습니다.

3. 긍휼을 베푼다는 말은 누군가를 불쌍히 여겨주는 일을 의미합니다. 11절을 보면 죽음의 길로 끌려가는 사람이나 살육 당하게 된 사람을 살려주라는 말씀을 합니다. 천하보다도 더 귀한 생명을 죽음에서 건져주는 일이란 어떤 일보다도 더 크고 위대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영국의 한 시인은 “참새 새끼 한 마리를 제 둥지에 올려놓아 줄 수만 있어도 내 삶은 헛되지 않아요.”라는 시를 남겼습니다. 참새 새끼의 생명을 구해 주어도 헛되지 않은 생명이라면, 한 인간의 생명을 구해 주는 일이란 얼마나 큰 일이겠습니까?

4. 이런 위대한 일을 우리로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변에는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죽게 될찌도 모를 수많은 비참한 생명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돈 몇 푼 더 빨리 벌어보겠다고 온갖 독성이 있는 약품을 처리한 식용업자들이 순진한 백성들의 생명을 죽이고 있다면, 그들은 이런 악행을 당장 멈추어야 할 것입니다. 남의 통장을 가로채서 도주하는 사람들, 뇌물을 주고 1급 정보를 빼내어 착복하는 사람들, 등등 지금 우리 사회에는 알게 모르게 이웃을 생명을 죽게 만드는 일에 가담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 자신들이 그런 위험한 일에 가담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반대로 “한 어린아이를 도와주십시오. 한 달에 몇 만원을 보내 주시면 이 아이는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습니다.” 고 우리의 작은 도움으로 한 생명을 소망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5. “불쌍히 여기라.” 이것은 지금 우리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이웃에 대한 관심, 특히 연약한 이웃에 대한 동정, 지금 우리들이 힘들면 힘들수록 반드시 가져야 할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들 때문에 우리가 위로를 받을 수 있고, 그들 때문에 우리가 용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중년 부인이 남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냈습니다. 그 때 그 여인은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불행한 여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삶의 의욕이 다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남편을 따라서 죽는 것이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를 딱하게 주목하고 있던 친구가 찾아 와서 “오늘 나랑 어디 좀 가자.”고 해서 따라 나섰는데, 부모들이 내다 버린 아이들을 일시 보호하는 수용소였습니다. 그 곳에 들어섰을 때, 한 어린아이가 엉금엉금 기어오더니 자신의 치마 자락을 잡으면서 “엄마!”하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그 여인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아, 이 세상에는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훨씬 더 많구나.”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이런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서 일생을 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물론 지금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6. 서로 불쌍히 여깁시다. 남편을 불쌍히 여깁시다. 아내를 불쌍히 여깁시다. 아이들을 불쌍히 여깁시다. 그들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기를 기도합시다. 그리고 내가 도울 수 있는 작은 일이라도 주저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그 아름다운 마음을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14(2000.10.21, 토)
성경말씀 : 잠 24:1-8.
찬송 : 278장.

   마음과는 달리 우리 역시 악인을 닮아 가는 경향성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진리일 것입니다. 말이나 마음으로는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우리의 삶은 어느새 그 흉내를 열심히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에는 악인의 생각을 품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악인의 생각이란, ‘출세나 성공하면 모든 약점이나 부끄러운 점은 감추어진다.’는 속임수를 말합니다. 정말 악인은 가까이 해선 안될 요주의 인물입니다. 그는 교묘하게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악한 길로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악인을 가까이 하게 되면 필경 악인과 같은 운명을 맞게 될 것입니다. 악인의 길은 망하는 길 외에 달리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변을 살펴보십시다. ‘나는 지금 악인을 가까이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대안으로 지혜자를 가까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악인과는 달리 지혜자는 항상 신중합니다. 그는 서두르지도 않고 당황하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작은 일보다는 항상 큰 일을 생각하고 있는 때문이며, 눈앞을 보기보다는 좀 더 멀리 내다보기 때문입니다. 바둑 용어에 ‘소탐대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작은 것을 탐하다가는 큰 것을 잃고 만다는 교훈입니다. 악인과 지혜자를 대조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힘든 결정을 내려야 할 일이 있을 것입니다. 작은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큰 것을 항상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눈앞만 바라보지 말고 좀 더 멀리 바라보는 눈을 가지도록 하십시오. 이런 지혜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만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이 넓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인내가 쓰지만 그 열매는 반드시 달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누구를 가까이 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주변을 주목해 보십시다. 지혜자들이 여러분의 주변에 많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여러분을 침착하게 만들어 주고, 좀 더 크고 멀리 바라보게 하는 눈을 띄워줄 것입니다. 만일 이런 친구가 없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찾아오십시오.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십시오. 이런 좋은 이웃을 허락해 달라고 말입니다. 옛 신앙의 선배들은 하늘에 떠 있는 달과 별을 지혜자로 삼기도 했으며(스펄전), 심지어는 강아지를 지혜자로 삼기도 했습니다(루터). 예수님은 시장 어구에서 노는 아이들을 지혜자로 소개하셨습니다. 

   내일은 거룩한 주님의 날입니다.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부지런히 끝내는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날에는 주님 만날 준비로 기쁨 가득한 복된 날을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주님의 은총으로 승리하십시오. 

Posted by 박성완
,

찬송 : 217장.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아셈회의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나라들 간에 필요를 채워주는 대화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바람직한 일인지 모릅니다. 참가하는 모든 정상들이 피차에 유익한 정보를 교환하고 협력을 증진시키며 세계 평화를 위해서 기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은 독주가 될 수 있는 음주 습관에 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술을 마시게 된 역사는 꽤 오래일 것입니다. 식사와 함께 술을 마셨고(飯酒), 사교를 위하거나 잔치에서 술을 마셨습니다. 술은 적당히만 마신다면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많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술을 적당히 마시는 절제 능력이 상실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독주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결국 과음하게 될 것이고,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가져다 줄 것이고(간), 간접적으로 엄청난 문제를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그 중에 우리 나라 교통 사고중 음주로 인해서 생긴 것을 비롯해서 온갖 분쟁으로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문제는 음주 습관에 있어서 절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먹는데,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먹는다.”고 하듯 절제 능력을 상실하게 되면,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다르게 술의 힘에 끌려 다니게 된다는 말입니다.

   한국에 기독교회를 가지고 왔던 첫 번째 선교사들은 다행스럽게도 퓨리탄(청교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생활에서 금욕적인 면을 많이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그 분들의 눈에 비친 우리 민족의 모습은 술과 담배로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많게 보였습니다. 사실 기독교회 진리는 술과 담배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기독교 진리의 핵심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문제만은 꼭 가르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초 문제를 고치지 않는 한, 이 민족의 미래가 어둡다고 판단한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개신 교회는 주초 금지가 교리처럼 생각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사람이 인박히면 고치기 힘들어 집니다. 소위 중독 현상인데 그 후유증은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절제하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 그렇습니다. 참된 용기는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릴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해야 될 일과 해서는 안될 일을 구별하고, 실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말로 큰 일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생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소위 성공적인 사람들은, 그들이 가진 지혜나 배경 때문에게 아니라, 그들이 가진 절제하는 힘 때문이라고 할 것입니다. 자신이 세운 작은 계획 하나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큰 것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술은 우리 인간의 절제 능력을 약화시키는데 일조 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처음부터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도록 하십시오. 

   오늘 본문 32-35절의 말씀은 술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의 결과를 얼마나 잘 표현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뱀같이 물 것이요, 독사같이 쏠 것이”라고 말입니다.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망령된(헛된) 것을 발할 것이요.” “너는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얼마나 위험한 생각이며 행동입니까?  절제를 못하게 하는 술에 인 박이지 마십시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몸을 더러운 돼지 울안에 처박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모든 일에 절제하는 삶이 될 때, 참된 평화와 소망이 넘쳐날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은총이 여러분 위에 내리시길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