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7(2001.1.3, 수요일)
찬송 : 405장
성경말씀 : 벧전 3:18-22.
제목 : 성경으로 말하게 하라.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성경을 읽을 때 난처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때를 위해서 두 세 가지 성경해석의 지침을 알고 있으면 크게 도움이 됩니다. 

   첫째는 성경 말씀이 이상스럽게 여겨질 경우중 하나는, 성경 본문의 역사적인 삶의 자리가 우리들의 것과 다르다는데서입니다. 가령 구약에는 대부분의 등장 인물들이 첩을 두고 있습니다. 솔로몬 같은 이는 셀 수 없이 많은 여인을 두고 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의 성경의 배경은 일부다처제도를 가진 아랍문화권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혼법을 가진 유대인들은 남자가 자기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게 되면, 그의 동생이 죽은 형님의 형수와 관계를 맺어서 아들을 낳아줄 의무가 있었습니다(막12:18-23). 이런 낯선 얘기들을 만날 때, 우리와는 다른 역사적인 삶의 자리를 말하고 있구나 하고 그 배경을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성경은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목적에서 씌어진 책이라는 점입니다. 자칫 성경에서 과학적이거나 논리적인 해답을 얻으려고 하다가 실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창조에 관해서, 삶에 관해서, 구원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지만, 그 과정이나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과학적 방법), 오히려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구원은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 인간의 모든 문제들의 근원 혹은 본질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종교적인 관심사라고 말합니다. 물론 성경 안에서 사람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에 관한 에피소드를 읽을 수 있습니다. “흙으로(먼지로) 사람을 빚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사람이 되었다.”는 등의. 그러나 이런 성경 말씀은 인간의 호기심을 다 채워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에서 우리들이 기대해야 할 것은, 왜 인간이 창조되었는지, 인간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등을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전체적인 혹은 중심적인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각 구절들을 따로 떼어놓고 이해하게 되면 낭패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어느 감리교회에 다니던 가족이 잘못된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에 불화가 생겨났습니다. 소위 “일점 일획이라도 다 이루리라”(마5:18)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구절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의 뜻이 하나도 훼손되지 않고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씌어진 구절 하나 하나가 꼭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말은 얼마나 잘못된 오해인지 모릅니다. 성경 원본을 우리가 읽는 게 아니라는 것은 알고 계시지요? 번역본을 읽는 중입니다. 우리가 가진 번역본은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는지 모릅니다. 전체적인 면에서 통일성이 있고 의미는 통하지만, 일점 일획이란 측면에서는 얼마나 큰 차이가 생기는지 모릅니다. 결국 남편인 장로님을 제외하고 모든 가족들이 마가복음 16:17-18절을 믿고 청산가리를 마시고 죽게 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생겨났습니다. 여전히 여호와의 증인들은 수혈의 거부합니다. 그래서 출혈을 많이 한 산모가 죽는 일이 최근에도 생겼습니다. 그들은 “생명이 핏속에 있다.”는 레위기 17:11의 말씀에 대한 곡해 때문입니다. 내가 살겠다고 남의 생명을 빼앗을 수는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경의 전체적인 빛에서 읽고 해석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살리기 위해서 스스로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앞서 마가복음 16:17-18의 의미는 초대교회의 삶의 자리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영원히 죽지 않는 신앙을 심어주어야 할 절실한 필요에서, 박해 중에 죽어 가는 성도들을 위해 선포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3. 오늘은 길게 딴 전을 피운 것 같습니다만, 사실은 중요한 얘기를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죽으신 주님께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는 말씀에 대해서 너무나도 현저히 다른 신학이 있어서 혼란스럽기 때문입니다. 혹시 로마 카토릭교회가 믿고 가르치고 있는 연옥설이라는 것을 들어 보셨습니까? 이 구절이 그들의 연옥설의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먼저 연옥이라는 곳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곳에서 자신들이 세상에서 무엇을 했는지 불로 연단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이런 이론의 근거를 고전 13:10-15에서 가져왔습니다. 각 사람의 공력이 불로 시험을 받게 되는데, 나무나 풀로 된 집을 지은 사람은 다 타서 없어질 것이나, 금이나 은처럼 귀한 공력을 세운 사람은 오히려 더 빛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연옥에서 태울 것은 다 태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연옥에 계속 머무르고 말 사람들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중세기에는 이 연옥에 있는 자를 천국으로 끌어올려주기 위한 운동(?)을 벌인 일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면죄부를 돈으로 사면 죽은 조상들, 연옥에 있는 사람들을 천국으로 올라가도록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주장의 결정적인 잘못은 성경을 전체적인 통일성 혹은 중심성에서 읽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인 것입니다. 사람이 구원받고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사람 자신들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보혈인 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라는 중심 진리를 망각하고 있는 어리석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죽은 자들에 관해서 우리들이 궁금해하는 모든 것들을 다 채워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스토리를 만들어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런 말씀을 한 일이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구원받는데 필요한 모든 말씀을 하고 있을 뿐, 그 이외에는 큰 관심이 없는 말씀이다.”고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내가 아침에 빵을 먹어야 할지, 밥을 먹어야 할지를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구원을 위해 말씀하는 책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하겠습니다. 

4. 본문의 해석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기까지 3일 동안 음부에 내려가신 것은, 구약시대에 저주받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는 견해(로마 카톨릭)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 자체가, 영원한 죽음이며 저주라고 기세 등등하였던 지옥의 악령들을 향하여, 세상의 구주가 되신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인류의 가장 무서운 세력은 지옥 권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옥은 저주의 상징이며, 절망의 표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저주와 절망의 세력들을 향해서 승리의 선포를 하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이 세상의 구주가 되신 것을 가장 극적으로 선포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이런 해석이 우리 개신교회가 주장하는 내용입니다만, 충분하지는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림자만 보듯 희미한 것들 속에 살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주님 앞에서만 실체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고전 13:12).

5. 오늘도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으로 유익한 하루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저는 어제 신영옥씨의 찬송 CD를 한 장 구입했습니다. 새해에 첫 번째로 지불한 것이 음악을 사는 일이었습니다. 노래가 있는 마음은 평화와 감사가 솟아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찬송을 많이 부르시는 한 해를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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