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2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집사님이 용산의 중앙대 의료원 영안실에 누워있는 것을 입회했던 게 말입니다.
담당 형사의 말로는 용산의 한 길가에서 발견되었다고 했습니다.
집사님은 성남의 한 회사에서 노조 위원장을 맡고 계셨습니다.
그때 저를 불러서 두어번 설교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참석자는 매번 합해서 10여명 정도이었지만, 제 설교에 그닥 반색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때 무슨 얘기를 했는지 전혀 기억에 없습니다.
다만 노사간에 갈등만 증폭되고 있구나 라는 감을 느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도봉산 둘레길 산책을 위해 나선 제가 입구에서 한 떼의 시위대를 만났습니다.
<전국 노점상 위원회 제2대 의장 이필두 선생 2주기 추모식>에 모인 시위대였습니다.
그래서 집사님을 생각했습니다.
노조의 집행부에 뽑힌다는 것은 죽음에 내몰릴 수 밖에 없는 현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이필두 선생도 그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말입니다.
S 집사님,
집사님은 제가 서울로 목회지를 이동하고 난 후 두번째로 제게 결혼주례를 부탁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13년간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참 많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우리나라 근로자들의 열악한 노동 상황에 대해서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사업자들이 얼마나 교활하게 노동자들을 착취하는지를 고발하셨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많은 사회적 부조리에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시는대로 저희 교회는 이른바 보수적인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분들 역시 다 힘겹게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노동자들이지만,
시대 조류에 조용히 순응하며 살아가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집사님은 제가 이런 부조리한 사회현상을 고발하는 정도로 끝나고 있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어쩌면 집사님은 제게 더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바로 그 시절에 소위 5공화국 수뢰인 전두환장군에게 붙들려 가서 죽기로 싸웠다는 분을
교단장의 완곡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흥 사경회 강사로 초빙해서 집회를 열었으니까요.
그때 우리 교회는 형사들이 매 집회마다 뒷줄에 자리를 잡았고,
그 후로도 몇 달은 형사들이 주일 예배에 출석하곤 했습니다.
집사님은 이런 저의 모습에서 행동하는 양심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저는 바로 그 지점에서 더 이상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화가 난 것은 예상된 일이었습니다.
집사님은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한 밤중에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몇 사람의 청년 교우들을 데리고서 말입니다.
어떤 때는 싸우고 들어온 것인지 옷 매무새며 얼굴 등에 핏자국도 보였습니다.
그리고 주정꾼처럼 제게 세상 돌아가는 형국을 얘기하셨습니다.
울면서 또는 열변을 토하면서 말입니다.
저는 그저 묵묵히 들어야 했습니다. 그것 밖에 제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틀린 말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때 저는 솔직히 말해서 제 자신이 비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진리를 행동으로 말해야 하는데, 저는 말 밖에는 못했고, 행동은 머뭇거리고 있었으니까요.
취중이긴 하지만 두 따님에게는 "너희 큰 아버님이시다. 말씀 잘 들어야 한다."고 얘기했었지요.
S 집사님.
70년대는 서슬 퍼런 유신시절에 이래저래 잡혀가서 많이 죽임을 당했고,
80년대 이후로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젊은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분들 가운데는 시위대의 지도자들이 많았습니다.
분신 등 극단적인 방법으로 목숨을 끊은 것이지요.
당시만해도 너무 심했다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그럴 수 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출구가 보이지 않았으니 알게 모르게 죽음을 강요당하고 있었는지 모른다고 말입니다.
제5공화국이 한참일 때 독일에 유학중인 분이 이화대학을 다니는 동생을 데리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두 자매는 저의 부산목회시절 학생들이었습니다.
이화대학을 다니는 학생은 구로공단에 위장 취업을 해서 의식화 훈련을 시키고 있다 했습니다.
그 때 그녀의 입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피흘리는 것을 두려워 말아야 한다 했습니다.
당장이라도 분신을 하거나 옥상에서 뛰어내릴 기세였습니다.
청계천 피복노조의 전태일씨의 분신이래
아까운 꽃들이 너무도 많이 불 속으로 뛰어들어간 것입니다.
그 때도 저는 어줍짢게 생명의 소중함만을 강조할 뿐 그녀들에게 힘이 되주질 못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번 죽는 목숨, 의미있는 목숨이 되고 싶어하는 이들이 부럽다고 말입니다.
점진적인 변화나 새로운 세상은 공짜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많은 자유와 행복은 누군가의 피와 눈물로 얻어진 것이라고 말입니다.
아직 목숨을 오래 붙들고 싶어하는 속물 근성이 제 안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끝까지 목숨을 부지하며 변화되는 세상을 지켜보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흘린 피를 되새겨주는 누군가는 반드시 필요할 테니까 말입니다.
이필두 의장의 2주기 추모제를 보면서 집사님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2018년 춘분에 도봉산입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