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외출을 할 때는 옷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써야 합니다.
기온이 많이 올라서 옷을 벗어야 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그런 날입니다.
이번 달 들어서 도봉산 둘레길 산책을 자주 하는 편입니다.
천천히 걸어서 한 시간 정도 걸리는데 여러 면에서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두번째 쉼터에서 저보다 10살 위인 아저씨 두 분의 얘기를 엿듣게 되었습니다.
두 분은 처음 만나신 것입니다.
나이를 서로 물었고 동갑나기임을 확인한 후, 말이 편해졌음을 느끼게 했습니다.
한 분은 훨씬 늙어보였습니다. 고생을 많이 하신 모양입니다.
그런데 화제는 요양원 생활에 대한 질문과 대답으로 오랫동안 진행되었습니다.
앞으로 10년이면 나도 그럴 수 있겠다 싶어 귀를 기우렸던 것 같습니다.
좀 늙어보이는 분은 2년전 부인을 사별하고 요양원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 요양원엔 22평형과 35평형 짜리가 있다했고,
자신은 22평형인데 2억 5천만원의 임대료를 지불하고 들어갔는데,
한 달에 45끼니는 요양원 식당을 이용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한 달 총 90끼니 중 절반은 요양원 운영에 협력해야 한다는 얘기였습니다.
한끼에 \6,500인데 맛은 시내 식당보다는 훨씬 못하다고 했습니다.
1남 2녀의 자녀를 두셨는데 한 달에 한 두번 찾아오는데,
그 때 자녀들과 외식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고 했습니다.
요양원 내에 의사가 한 분 있는데 치료를 할 정도로 젊은 분이 아니어서,
누군가가 아프다 하면 제휴하는 병원에 연결해 주는 그런 역할이 전부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요양원에 대해서 이런저런 불만이 많다고 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입소자들에게 살갑게 대해주기는 커녕 불친절하기까지 하다 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너무 외롭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더 살지 모르지만, 사는 것이 두렵다고도 했습니다.
B 학장님 !
우리 나라도 이제는 고령화 사회로 들어가면서 노인 문제가 심각해져 가고 있습니다.
노인들을 위한 안전한 시설을 준비하는 등 제도적인 면에서는 대체적으로 발전하고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앞서의 노인처럼 외로움과 삶에 대한 무의미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노후대책에 관해서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강조해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경제적인 문제만 해결되었다고 해서 충분하지 못한 것을 알게 됩니다.
제가 가끔 들리는 아산의 마을 노인회관에는 오후 3시 이후에는 많은 노인들이 모여듭니다.
그런데 제법 모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아주 조용합니다.
누구도 얘기를 꺼내려 하질 않습니다.
자식 자랑도 너무 많이 들었던 얘기들이라 그런지 할 말이 없습니다.
우두커니 먼 산을 바라보듯, 서로의 얼굴을 보는데 무표정합니다.
미국 영화에서 보듯 무슨 프로그램이란 것들은 아직은 시기상조인듯 합니다.
지난 해 제가 그분들을 찾아가서 태풍을 몰아치듯 야단법석을 떨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분들에게 글을 써 보라고 다그쳤기 때문입니다.
일기를 쓰든지, 시를 쓰든지, 편지를 쓰던지 뭔가를 써 보라고 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을 밖으로 끌어내 보라고 했었지요.
그래서 자녀들이나 이웃들과 소통할 계기를 만들어 볼 량으로 그랬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은 전혀 진척이 없습니다.
아무튼 뭔가를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중입니다.
그 분들의 초점잃은 눈동자에 힘을 주게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마지막 순간이 올 때까지는 생기를 되찾게 해드리려고 합니다.
B 학장님 !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다시 새겨봅니다.
우리들 삶에는 의미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기쁨도 있어야 하겠습니다. 보람도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아주 오래전 지나가듯 나눴던 이야기들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부산 YWCA에서 성경반을 지도할 때의 일입니다.
그 때 그곳의 교육 재벌 학장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제가 부산 YMCA 성경반을 지도하고 있을 때, 저를 YWCA 성경반으로 끌어들인 장본인이십니다.
몇 차례 제 강의에 참석했고, 저를 지금의 부산 경성대 신학부에 전임교수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래서 날벼락 맞듯 교수가 되었고, 목회지도과장이라는 보직까지 받아 3년을 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해가 지난 어느 날 제게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당신이 10여 세대가 입주하는 아파트를 지으려고 한다며,
당신 자신이 좋아하는 지인들에게 싼 값으로 분양해 주어 같이 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파트에는 시인도 성악가도 택시 운전수도 교사도 과일장사꾼도 살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저의 아파트의 목사님이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매일 낮에는 자신의 일터로 나가서 일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녁 식사를 함께 한 후에는 얘기 꽃도 피우고 노래도 부르고 시 낭송도 듣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감사의 기도회를 가질 것입니다. 그 때 우리에게 설교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서른 네 살때 들었던 꿈같은 이야기였습니다.
그 후 5 공화국에 찍혀서 학장님은 미국으로 쫓기듯 가셨고, 끝내 귀국하지 않고 계십니다.
비록 아쉬운 꿈이 되고 말았습니다만, 그런 생각을 품게 해 주신 것만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분명 의미있는 삶을 살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역할을 하고 계시기를 바랍니다.
주 안에서 평안하시고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평화 !
박성완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