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6932(2020. 5. 9. 토요일).

시편 78:70-72.

찬송 5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말했다. “살다보면 애초에 갚을 수 없거나, 아무리 갚아도 줄어들 수 없는 필생의 빚을 안게 되는 경우가 생기곤 한다.” 소설가 이청준의 산문집 [인생]에는 일생 갚아야 하는 빚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작가가 20대 초반이었던 1960년대 어느 해 겨울 밤, 중학생 아이의 밤공부를 돌봐주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주머니에 버스비가 없었습니다. 군밤을 팔고 있는 청년에게 사정을 말하고, 버스비를 꾸어달라고 했다지요. 청년이 버스비 보다 많은 100원짜리 한 장을 건네주며 이렇게 당부했다고 합니다. “이 돈 몇 푼 갚을 생각 말고, 공부 열심히 하시오.” 청년의 그 말은 작가로 하여금 많은 걸 생각하게 했고, 여전히 그 빚을 짊어지고 사는 느낌이라고 했습니다. 30대 후반 어느 날에는 비원 근처의 찻집에 앉아 있다가, 주문하지 않은 차가 날라져 왔습니다. 독자가 찻값을 미리 치루고 나갔다고 했습니다. 이 때 차 한 잔은 작가에게 일생에 문학적 짐을 지워주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신용카드가 없던 시절에 누구나 한번쯤은 겪었을 법한 에피소드도 떠올립니다. 잠시 종합운동장 앞을 지나다 김밥과 소주 생각이 나서 주문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음식을 받아놓고 보니, 집에 갈 차비밖에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음식을 되돌려주려고 하는데, 머리 수건을 한 아주머니가 이렇게 말하며 작가를 다시 주저 앉혔다고 하지요. “그냥 드시고 갔다가, 나중에 지나는 길이 있으면 갚아도 좋고, 오실 일 없으면 말아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때, 아주머니의 가판대는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어쩌면 정작 베푼 사람은 잊었을지 모릅니다. 작다면 작은 액수니까요. 무엇보다 돌려받기를 기대하고 베푼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따금 세상 참 살만하구나 하고 안도하고 감동하는 순간은, 그처럼 모르는 사람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내게 친절한 마음을 베풀 때입니다. 우연히 지나치다 만난 사람이니 다시 만나기는 힘들 겁니다. 그래서 갚기도 힘들 겁니다. 작가는 말합니다. “살다보면 애초에 갚을 수가 없거나, 아무리 갚아도 줄어들 수 없는 필생의 빚을 안게 되는 경우가 생기곤 한다. 작은 신세짐에서라도 그것을 쉽게 갚을 길 없는 일에서, 더욱 그런 마음의 빚이 쌓이게 마련이다.” 마음의 빚을 안고 사는 사람은 착한 사람입니다. 빚을 갚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비슷한 친절을 계속해서 베풀 테니까요. 세상사는 동안 마음의 빚 하나 없이 살기란 불가능한데, 우리는 그 빚을 얼마나 인식하고 있을까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6426일 방송>

 

2. “야훼께 성막을 세워 바치다(16-33)”야훼의 영광이 성막을 떠나지 않다(34-38)”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 단락입니다.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동안을 지낼 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를 말하는데, 출애굽기는 이를 만남의 장막이라고 설명을 붙였습니다(40:2). 훗날 예루살렘 성전에 구비했던 모든 기물들이 이 성막에서부터 기원(起源)하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그러니까 증거궤, 진설상, 등잔대, 금분향단, 번제단과 휘장 등이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을 만나는 장막에는 필요한 모든 것들이 잘 갖춰져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우리가 만나는 예사롭지 않은 구절은 모세는 야훼께서 지시하신 대로 다 하였다.”라는 말씀입니다. 어찌 보면 시키는 대로 따라 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 없을 것 같은데, 사실은 그게 어렵고 어렵다는 것입니다. 시키는 대로 하다는 말은 노예가 초점 잃은 눈으로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동작일 수 있으나, 자신의 뜻과 의지를 모두 다 포기해야만 하는 순종이라는 점에서, 매우 힘들고 어렵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을 포기하는 순종의 삶을 살았다는 말이 됩니다.

    다음으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을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훗날 예루살렘 성전이 되었고, 그 실체인 오늘의 예배당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라는 분명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번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여러분과 저는 기독교 방송국에서 보내주는 TV예배를 자주 시청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맞나 싶은 그런 생각을 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예배를 섬기는 사람들은 물론 예배에 참여하는 회중들이 과연 하나님을 만나고 있다는 감사나 기쁨, 그리고 두려움(경외심)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기도는 회중에게 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이 받으실 감사와 찬양은 자신들이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는 설교는 엉뚱하게도 회중이 듣고 싶은 세속적 성공담들로 가득 찼습니다. 어떤 설교자는 듣도 보도 못한 외국의 어떤 박사의 사상을 분석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우리의 예배당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하루 빨리 하나님께서 지시하신대로 순종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되있기를 바래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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