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112(2001.1.28, 주님의 날)
찬송 : 248장.
성경말씀 : 단 2:17-18.     
제목 :  합심 기도를 구하는 다니엘.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거룩한 주일 아침입니다. 아마도 당분간은 매 주일에는 다니엘서를 묵상하게 될 것 같습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은 합심기도를 구하는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은 어두운 그림자가 온 나라안을 둘러싸이는 것을 직감하였습니다. 절대 권력을 가진 사람이 분노하게 될 때 생길 수 있는 시련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면, 나라와 민족을 잃고 노예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이런 시련이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소극적으로 피해보려는 자세가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시련에 맞서보려는 정공법을 택한 것을 보아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왕앞에 나아가서 꿈을 해석하겠노라고 시간을 달라고 구했을 정도입니다. 그 뒤의 다니엘의 행적이 오늘 본문입니다.   

2. 다니엘은 그의 세 친구에게 옵니다. 그리고 그가 판단하고 있는 형세를 말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을 얘기합니다. 아마도 그는 그의 세 친구에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는 하나님 손에 달려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뿐이다. 자, 이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는 것이다. 얼마나 좋은 기회이냐?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온 세상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을 왕 뿐 아니라, 온 백성에게 증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니냐? 우리가 합심해서 하나님께 간구하자. 하나님께서 여기에 오셔서 생명의 주인 되심을 나타내시라고 기도 드리자.” 여러분은 제가 재구성해 본 다니엘의 권면을 어떻게 생각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범주에 드는 얘기를 했을 듯 싶습니다. 합심기도 !  저는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라는데 주목하기를 바랍니다.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18:19)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합심해서 기도할 것을 명하시고, 그 결과에 대해서 약속해 주셨습니다. 합심 기도는 여러 가지 점에서 신앙과 생활에 유익을 줍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합심하는 우리들을 가장 아름답게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부모의 눈에 화목하고 우애 있는 자식들 모습이 대견하고 자랑스러우며 든든하듯이, 하나님의 눈에 비친 우리들의 합심하는 자세가 사랑스러울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자, 곧 그 뜻대로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아무 것도 아까워하지 않고 허락하실 것입니다. 
둘째로 합심하는 것은 행복하게 살아가는 기본이 됩니다. 혼자서 살수 없다고 하는 것은 진리입니다.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라는 말을 굳이 사용치 않아도 됩니다. 혼자 먹고, 혼자 기뻐하고, 혼자 슬퍼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얼마나 소름끼치도록 삭막하고 두려운 일입니까? 몇 년 전 제가 3개월 동안 기숙사에서 지낸 일이 있었습니다. 학교에 나갈 때 두었던 그대로 아무런 변화 없이 꼼짝하지 않고 있는 방으로 들어오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 때, 저는 많은 것에 대해서 감사드렸습니다. 외출 후에 제 방에 아이들이 들어왔다가 흔적이 뚜렷했을 때, 속 상한다고 야단을 쳤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닫고 감사했습니다. 사람이 함께 살고 있다는 증거는 변화입니다. 그 변화를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합심할 때 희망이 있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는 사람들, 비록 현실은 조금 힘들고 어렵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미래가 희망적입니다. 분명 이런 합심하는 사람들은 기쁨을 두 배로, 슬픔을 반으로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지금 우리들에게 절실하게 요청되는 과제는 합심하는 생활입니다. 합심 기도의 중요성은 하나님을 향하는 신앙에서 절대적인 것이며, 합심 협력의 중요성은 인간관계에서 절대적인 행동강령이 되는 것임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문제라고 여기는 것들이 오히려 흥미로운 과제로 새롭게 다가 올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합심하는 것들이 어떤 것인지를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는 일에 합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마귀의 종노릇하는 일에 합심하십니까? 이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하시고 여러분의 현주소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주님 주시는 은총 속에 거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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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111(2001.1.27, 토요일)
시편 9:13-20.
찬송 : 85, 258장.
성경말씀 : 요일 5:16.   
제목 :  영혼을 구원하는 중보 기도.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1월 27일(토) 옥수동루터교회 특별 새벽기도회에서 증거한 말씀입니다. 은혜의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중보 기도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에 계시는 중보자입니다(딤전2:5). 서로 다른 둘 사이에 서서 그 둘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중보자입니다(갈3:20).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역할인지 모릅니다. 이런 역할을 오늘 우리들에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형제가 죄를 지을 때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책임을 우리 기독자에게 맡겨주셨음을 알게 됩니다. 이 본문에서 먼저 이해를 해야 할 말씀이 있는데,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주석에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만, 용서받지 못하는 죄로 성령을 훼방하는 것(마12:31-32)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함을 받지 못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란 성령을 거역하는 죄인데, 성령이 하시는 일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이며, 예수님의 사업을 계승하는 일인데, 이런 성령의 역할을 훼방하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누구도 도와서 그의 생명을 살려낼 수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예수를 부인하고 자신의 죄인 됨을 회개하지 않는 죄처럼 무섭고 두려운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3.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초점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들이 중보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혼은 모든 사람에게 있지만, 어떤 사람은 영혼이 살아 있으나 또 어떤 사람은 영혼이 죽어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영혼이란 하나님과 교제하거나 관계를 맺게 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의미합니다. 우리 인간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데, 그것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듣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실 때 순종하는 것이 바로 우리 안에 살아있는 영혼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영혼이 죽어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할 뿐,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제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헛된 것을 신앙하고 있습니다. 주후 70년에 유대전쟁에서 이스라엘 나라가 완전히 멸망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약 2천년동안 나라 없는 떠돌이 민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유대 전쟁 때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죽은 곳이 성전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성전에 열심히 다녔기 때문에 성전에 들어가 있으면, 성전이 울타리가 되어서 지켜줄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종하지 않으면서 교회에 일주일에 한번 나와 앉아 있는 것으로 하나님과 교제를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영혼이 살아 있어야 하고 활발하게 활동해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일이 잘되고 강건할 수 있습니다(요삼 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영혼이 건강하도록, 생명을 되찾도록 중보 기도해야 합니다.

4. 누구를 위해서 중보기도 할 것입니까?  첫째는 가장 가까운 사람을 위해서 중보기도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저절로 예수 믿게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누군가가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해 주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어머니의 기도로 자라났습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너를 위해서 기도했다고 말씀하셨을 때, 아하 어머니의 기도를 먹고 내가 성장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여러분들도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가장 많은 시간과 가장 많은 교제를 나눈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가족입니다. 가족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부모님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자녀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과 아내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에 다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겠거든, 교회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시급한 일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그리고 가까운 친구나 친척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조카 롯을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지 않도록 기도한 내용을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창18:20-33). 그들이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고 죽은 영혼을 가지고 살다가 멸망당하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마음이 편할 수 있습니까?
다음으로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사무엘은 자신의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삼상12:23). 그리고 나아가 온 세상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처나 인도의 성녀 마더 테레사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눈에 보이는 관심을 넘어서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아프리카의 어린아이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든지, 북한 어린이들이 아스피린 한 알이 없어서 죽는다고 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악하고 죄된 일입니다. 비록 우리들이 그들에게 많은 물질로 손을 내밀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는 있어야 합니다. 열심히 기도하다보면 그들을 돕기 위해서 손을 내미는 날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중보의 기도자들, 그들은 이 세상을 가장 복되게 만드는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 속에 여러분의 이름도 새겨지기를 기도 드립니다. 

5. 오늘도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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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110(2001.1.26, 금요일)
찬송 : 171, 177장.
성경말씀 : 눅 11:13.    
제목 :  성령 충만함을 받는 기도.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89세가 되신 장모님께 세배 드리고, 부산에 사는 동서 가족과 함께 큰 동서 댁을 찾아 설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교회 교우들과 아이들이 찾아와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이들이 찾아오고 가게 만드는 이런 명절은 여러 가지 점에서 좋은 풍습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였습니다. 젊은이는 어른을 섬길 수 있는 기회로, 늙은이는 젊은이를 격려할 기회로, 같은 형제 자매들은 우의를 다지는 기회로 말입니다. 오늘 말씀 역시 옥수동교회 특별 새벽기도회에서 증거한 말씀입니다. 함께 은혜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오늘 말씀은 기도의 응답 가운데 하나가 성령을 받는 일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반어법으로 말씀합니다. 기도의 응답으로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그 “좋은 것”이 “성령”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좋은 것, 가장 귀한 것이란 성령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성령을 모시는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성령이 없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의 삶이 연약하고 죽어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성령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이해하기가 힘든 부분이 성령과 관계된 내용들입니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신학자들에게서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신학자들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삼위요 일체이신 하나님이라고 가르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나님이시라고 말입니다. 그 관계는 아다나시안 신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현존으로, 성령은 아들이신 예수님의 현존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만을 나타내고, 성령은 예수님만을 나타내십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에 성령이 오실 것에 관해서 예언하셨습니다.(요14:15) 그리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인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1:4). 성령은 예수님의 사업을 대신하실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이신 하나님은 우리들 안에서 예수님을 증거할 뿐 아니라, 예수님의 사업을 계승해 가십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성령은 우리 인간을 도우시며 인도하시는 진리의 영이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실 뿐 아니라, 어리석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깨우쳐 주시며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지 않고는 크리스천으로써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은, 성령은 물건과 같이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에 오셔서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사랑할 수 있도록 마음을 감동 감화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성령님을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주시겠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기도는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받게 하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3. 우리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히 누가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이런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들의 얘기를 많이 읽을 수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성령님께서 온전히 우리 안에서 일하시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가령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숨어 지내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을 때, 그들은 방언을 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행2:4). 그들은 오순절에 모인 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복음을 외쳤습니다. 그 결과 복음이 모든 백성들의 귀에 들려지게 되었습니다. 방언이란 지방마다 사용하는 말로, 성령이 충만할 때 자신들의 말로 알아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을 때, 그는 진리를 밝히 증거할 수 있는 대 사도가 되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성령께서 무식한 어부 베드로를 깨우쳐서 복음의 사도로 변화시키셨습니다. 행전 4장 8절 이하를 보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 분이 구원 얻을 유일한 이름이라고 담대하게 증거 하였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가 성령을 받지 못했더라면 그는 존재도 없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첫 집사들도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구제와 봉사하는 일에 헌신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행6:1-6).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사랑과 봉사의 사람이 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또한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 같은 집사는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뜨거운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명령을 따라 안수 받은 바나바와 바울이 첫 전도여행을 구브로란 섬에 가서 전도할 때, 그곳의 점쟁이 엘루마가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를 방해할 때, 바울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서 그에게 크게 책망하니 그가 소경이 되어버렸던 일화가 있습니다. 이렇듯 성령이 충만할 때, 복음도 증거할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도 행할 수가 있었다는 것이 성경이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4. 그러므로 우리가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으면 도무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마땅히 성령의 사람으로 살기를 바라는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일하시기를 위해서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오직 예수님만을 나타내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대신해서 우리를 도우시는 보혜사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힘이나 지혜로는 주님을 증거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실 때, 우리는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기적이고 추한 세속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기쁨으로 동참하는 그런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가장 좋은 것은, 성령께서 온전히 나를 주장하시도록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오셔서 성령님께서 말씀하실 때, 순종해야 합니다. 어느 집사님이 성경을 읽다가 가난한 자와 과부를 돌아보라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 때 성령님께서 마음에 말씀하시기를 네 주변에 있는 그런 불행한 사람을 돌봐야 하지 않느냐?는 마음을 갖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몇 년만에 그 과부의 가정을 방문하고 돌아왔다는 간증을 하셨습니다. 지금도 여러분에게 성령님은 속삭이고 계십니다. 모든 의롭고 선한 일은 성령님만이 도우시는 일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성령님을 여러분에게 보내시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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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109(2001.1.25, 목요일)
찬송 : 418, 196장.
성경말씀 : 롬 10:10.    
제목 :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기도.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설은 즐거우셨습니까? 저는 어제 새벽 5시에 독일에서     공부하는 김장호전도사님에게서 전화로, 미국에서 공부하는 김준현준목님에게서 카드를 받았습니다. 이국 땅에서 외롭고 힘든 생활을 하는 이들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더 많이 배려해 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의 평화가 그들에게 임하기를 기도드렸습니다. 오늘 묵상 자료는 1월 25일 옥수동루터교회 특별 새벽 기도회에서 증거한 말씀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은혜의 시간이 되시길 기도 드립니다. 

2.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기독교 구원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구절입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짧은 구절 속에 기독교의 진리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 마음과 그 믿음을 고백하는 일이 동시에 중요함을 배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대체로 믿는 마음은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을 고백하는 단계는 대단히 소극적인 것이 일반적인 형편이 아닌가 합니다. 바로 이 점이 동양적인 사회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것을 지적 받곤 합니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분명하고 바르게 표현하지 못하는 점 말입니다. 우스운 얘기 하나 드리지요. 초등학교 동창회가 열렸습니다. 참 오랜만에 불러보는 이름들이었습니다. 한 동네에서 자라났던 어릴 적 소꿉동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여자 동창생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나, 너를 좋아했는데, 그것 알고 있었니?” 졸업하고 헤어진지 44년만에 처음 듣는 얘기였습니다. 그래서 “왜 그 때 이 말을 하지 않았니?” 하고 한바탕 웃었습니다. 만일 그 한마디 말을 했더라면, 그리고 그 한 마디 말을 들었더라면, 우리들 인생에는 엄청난 변화가 생겼을 수도 있을 법하지 않습니까?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입으로 말하지 않는 일이 얼마나 큰 문제가 될 수 있는지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얘기입니다. 마음에 담긴 생각을 말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열어드리는 기도를 시간을 만듭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을 열고 모든 생각들이나, 모든 기쁨과 슬픔들을 다 고백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3. 마음을 열고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말씀하는 것, 이것이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두 기도하는 사람의 얘기가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얘기입니다(눅18:10-14). 한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한 기도였는데, 자신의 좋은 점들을 고백하였습니다. 바로 바리새인의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홀로 성전에 들어오지도 못한채 하나님께만 작은 소리로 기도하였는데, 자신의 모든 약점을 한 마디 말로 분명히 고백하였습니다. 바로 세리의 기도입니다. 둘 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마음을 말씀드렸다고 생각됩니다. 바리새인의 마음에는 자랑하고 싶은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그의 마음에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하나님께도 숨기지 않고 큰 소리로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리에게는 부끄러운 것들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그의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숨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이런 고통에서 해방 받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이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와 오직 “불쌍히 여겨주시라”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하나님께서 받아 주신 기도는 바리새인의 것이 아니라, 세리였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세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기에 꼭 필요한 기도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구원을 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행위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바리새인이 세리보다 더 나은 생활을 힘썼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사람의 행위가 중요한 것인지, 하나님의 행위가 더 중요한 것인지를 구별하지 못한다면, 낭패중의 낭패입니다. 같이 기도 드렸지만, 한 사람은 구원의 길로 열납된 것이나, 다른 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까지 자신을 의로운 사람으로 은폐하는 잘못을 저지른 셈입니다.

4.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기도는,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기도여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믿는 그 믿음이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우리가 마음으로 믿는 것은, 하나님만이 우리를 살려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를 용서해 주시고 살려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매 주일 키리에라는 영창을 부릅니다. 키리에란 라틴어인데,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예배자들이 이 기도를 드리기를 기뻐하신다고 믿습니다. 마치 왕앞에 나아가는 신하들이 왕의 자비와 은총만을 구하는 까닭처럼 말입니다. 왕은 모든 사람들의 생사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진 분이 아닙니까? 그 분에게 황공무지로소이다. 라는 말이 합당합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는 당신의 불쌍히 여겨주심 밖에는 다른 것이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인 것을 고백해야 마땅합니다. 여러분들이 기도드릴 때, 반드시 죄인 된 것을 고백하십시오. 예수를 구주로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여러분들은 예수를 떠나서 살아갈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것까지도 떳떳하게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죄인입니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행위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살지 못하는데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리고 기도에 이르는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을 가진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는 말씀을 고백하는 일입니다. 죄인 됨을 깨달았다고 해서 그리고 그것을 말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철든 사람이라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죄인들을 용서해 주시마하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믿고 고백하지 않는다면, 구원받을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다윗 왕을 위대한 신앙의 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보여준 위대한 신앙하는 자세 때문입니다. 다윗 왕 역시 행위로는 문제가 많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잘못을 깨닫았을 때,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앞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주홍빛 보다 더 붉은 죄라도 하나님은 용서해 주신다는 그 말씀을 믿고 나아갈 때, 하나님은 그를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5. 오늘도 기도의 용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입으로 시인하는 구원에 이르는 기도를 드립시다. 죄인인 것을 고백하십시다. 그리고 용서하시는 은총을 베푸시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기도로 나아갑시다. 오늘도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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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108(2001.1.24, 수요일)
찬송 : 188, 312장.
성경말씀 : 요 15:16.    
제목 :  필요를 채우는 기도.

1. 주님께서 설날을 맞이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묵상 자료는 1월 24일 옥수동루터교회 특별 새벽 기도회에서 증거한 말씀입니다. 

2. 오늘 아침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고,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좋은 나무로 우리를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의 삶에 있어서 모든 것의 주도권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주도권적인 선택의 이야기가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을 선택하셨다고 말씀하시며,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 있는 우리들을 선택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선택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셨던 것과 똑 같은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열매를 기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5:2과 렘2:21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극상품에 해당되는 포도나무로 선택하여 팔레스타인 땅에 심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좋은 포도 열매를 맺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포도 열매란 또 다른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드는 일입니다. 이것이 선택받은 사람들이 축복의 근원으로 일하며 살아가는 방법인 것입니다. 

3. 어떻게 이런  좋은 과실을 맺을 수 있겠습니까? 이를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을 구할 길을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과실을 맺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모든 필요를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구하는 것, 곧 기도란 우리가 가진 모든 부족한 것을 채우게 하고, 우리가 짊어진 모든 연약함을 강하게 만들어주는 하나님의 은총이 들어오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잘 읽어보십시다.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기도의 응답은 조금 들어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라는 말씀은 구체적으로 무슨 말씀입니까?  여기에는 두 가지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들의 생활 전반에 관한 필요들입니다. 예수님의 산상 설교 가운데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세상에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날마다 필요한 양식을 허락해 주십니다. 이미 유대 광야 40년동안 하루도 예외 없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셨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질병과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우리를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절망과 슬픔 속에서는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데는 천가지 만가지 것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들보다도 우리들의 필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서 미리 준비해 놓으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곧 여호와 이레의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우리의 필요에 대해서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응답을 잊어버리고, 얼마나 근심과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곤 하는지 모릅니다. 공중의 나는 새를 먹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들에 핀 백합화를 아름답게 입히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영혼의 필요들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배부르다고 해서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엊그제 어느 여대생이 자살하게 해달라고 요청을 받고, 500만원을 받기로 하고 한 젊은이가 자살교육을 시켰다고 합니다. 500만원씩이나 들여가면서 왜 죽으려고 했을까요? 그 사람은 아마도 삶에 필요한 것은 떡이나 옷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 젊은 여대생은 자신의 영혼의 필요를 채울 수가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고 생각 해 보았습니다. 어쩌면 그에게는 사람에 대한 신뢰심이 사라져 버렸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그녀의 마음에 사랑이나 소망 같은 것들이 메말라 있었을지 모릅니다. 영혼이 메마른 사람들은, 혹은 정신적인 공허감이나 무의미를 가진 사람들은 살아가는 것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일 것입니다. 이런 영혼의 메마름을 채울 수 없다고 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불쌍한 우리들을 위해서 영혼의 필요들을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세계에서 가장 복지제도가 잘 되어 있는 북 유럽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다고 합니다. 그들 역시 영적인 필요를 채울 수가 없는 절망감에서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들도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그들의 메마른 영혼을 풍성한 것들로 채워주십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채워주시고, 기쁨과 감사와 즐거움으로 살아가도록 도와주십니다. 

4. 기도의 용사가 됩시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주안에서 즐거운 설날이 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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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107(2001.1.23, 화요일)
찬송 : 197, 470장.
성경말씀 : 히 4:16.     
제목 :  승리하게 하는 기도.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오늘 묵상 자료는 1월 23일 옥수동루터교회 특별 새벽 기도회에서 증거한 말씀입니다. 함께 은혜를 나누게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나타났다는 것은 기독교가 증거 하는 진리입니다. 십자가는 어느 누구도 원치아니하는 최악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야말로 가장 연약한 모습을 남김없이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수치와 어리석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위대한 구속의 역사를 이룩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 고백(고전2:2)하는 것은, 바로 이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역설적인 진리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강하심은 인간의 약함 속에서만 나타나는 것이며, 하나님의 강력한 빛은 인간의 절망 속에서만 비추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아무 것도 의지하지 않는 온전한 빈 마음이 될 때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나며, 인간이 가장 낮아지고 겸손하게 될 때,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하게 비추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침묵해야 하겠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맡겨야 하겠습니다. 우리들 인간이 죽어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사시는 것이다. 

2. 오늘 본문은 승리하는 기도 생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게 될 뿐 아니라, 가장 적절한 때에 돕는 은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보좌 앞으로 담대하게 기도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승리의 기쁨을 주십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세 가지 것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는 기도함으로 자신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골칫거리가 되는 대상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가장 괴롭고 힘들었던 것이 당신 자신의 뜻과의 싸움이었다고 보여집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오직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눅22:42).  그렇습니다. 사람마다 자신의 “원”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드릴 때, 자신의 뜻 혹은 자신의 원대로 기도합니다. 우리가 기도 드리는 첫 번째 동기를 제공해 주는 것도 나의 원, 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솔직히 나의 원, 나의 뜻대로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만이 하나님께서 날 사랑하시는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우리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의 뜻대로 되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나의 뜻이나 나의 원을 쳐부수지 않는다면, 우리들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녀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어린 아이시절에는 부모님의 말씀을 곧잘 듣던 아이들도, 나이가 들면서 이른바 공부를 많이 하면 할수록, 부모님의 말씀을 무조건 듣지를 않습니다. 제 생각에 맞지 아니하면 매우 소극적으로 나오던지, 심지어 반대하기도 합니다. “이제는 저도 제 생각대로 살만큼 다 컸습니다.”는 식으로 나옵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서서히 문제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나의 뜻”, “나의 원”이 방해꾼으로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이 될 때, 제일 먼저 이 점을 회개하게 됩니다.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좋은 게 아니라는 것, 오히려 내 뜻과는 반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저는 학생들에게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어떻게 아느냐고 물을 때, 이렇게 대답합니다. 성경에서 확실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많이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특별한 경우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을 땐, 내 뜻과 반대되는 것, 내 생각과 다른 것이 하나님의 뜻이 되기 쉽다고 대답합니다. 이처럼, 우리 자신의 뜻과 우리 자신의 소원이, 우리 안에서 버티고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사람은 이 점에서 확실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를 쳐 복종시키게 될 것이며, 겸손해 짐으로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기를 바라는 순종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나의 고집을 꺾고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만이 진정한 기도이며, 승리를 얻는 기도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기도함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어떤 것들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들로 가득차 있다고 하겠습니다. 흔히들 신분 상승을 위한 욕망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더 높고 명예로운 지위를 얻기를 바랍니다. 더 경제적으로 윤택한 생활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지금보다도 더 건강하고 더 지혜롭게 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행복하고 잘 살게 되는 생각들로 가득차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것들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참된 기도는 제대로 된 기도는 이런 세상 것들을 추구하기 위해서 힘쓰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작년 초에 오산리 금식기도원에 가서 사흘동안 성경을 읽으러 갔는데, 새벽과 저녁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도회를 인도하시는 분이 빼놓지 않고 말씀하시는 내용중 하나는, 부도 맞은 분들의 부도를 막아 주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에 오신 분들 가운데는 크게 사업을 하시는 분들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여전히 세상의 가치들에 대한 미련과 욕망이 얼마나 문젯거리가 되는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기도는 이 모든 것들에게 변화를 요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중에, 이 모든 세상 것들을 하나 둘 주님 앞에서 내 던져 버려야 합니다.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로 변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승리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기도함으로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에 마지막 방해꾼은 마귀, 곧 영적인 삶을 적극적으로 파괴하려는 원수인 사탄입니다. 마귀의 세력에 대해서는 제가 여러 차례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장면을 보도하는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특별 하느냐 하면, 보통 사람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흔하게 벌어지고 있는데, 그것을 형상화해 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마귀에게 끌려서 시험받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을 괴롭히고, 잡아 가두고 죽이는 그런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마귀의 시험에 걸려 넘어진 모습입니다. 베드로 역시 마귀노릇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기보다는 사람의 문제만 생각한 때문이라고 성경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는 마귀를 이기지 않고는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마귀는 우리들 곁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십시오. 언제든지 하나님의 일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여기게 하며, 하나님의 뜻보다는 내 뜻이나 세상체면을 더 중요하게 여기도록 할 때는, 바로 마귀가 우리를 붙잡고 있는 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마귀를 이기는 유일한 길은 기도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3. 우리의 기도는 승리하는 신앙생활의 기본 요소입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 자신을 이겨낼 수 잇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는 세상의 욕망도 이길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마귀의 세력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의 기도 생활에 하나님의 승리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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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106(2001.1.22, 월요일)
찬송 : 66, 454장.
성경말씀 : 마 7:11.     
제목 :  축복 받는 기도.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어제 오후에는 새해 첫 연합행사로 [평신도 수련회]가 중앙교회당에서 있었습니다. 1부에는 총회장님 설교로 예배가 드려졌고, 2부에는 “새 천년 루터교회의 전망과 나아갈 방향”이란 주제로 김선회박사님의 특별 강연이 있었습니다. 저는 김박사님의 강연에서 많은 은혜와 도전을 받았습니다. “순수한 복음을 회복하게 될 때, 우리 교회의 전망은 밝다”고 말씀하시면서, “사람이 앞서서 일하려고 말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도록 교회가 낮아지고, 겸손해지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는 요지의 말씀이었습니다. 기회가 되는대로 초록을 준비해서 여러분과 다시 한번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2. 오늘 아침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축복 받는 기도에 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축복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영적인 축복이고 다른 하나는 육적인 축복입니다. 기도할 때 영육간에 다 축복을 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축복이란 무엇입니까? 영적인 축복은 3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을 만나 교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2년전에 우리 교회를 방문하신 한 손님이 계셨습니다. 주일 오전에 예배에 참석하신 분인데, 그 이튿날 청와대에 초청을 받아 대통령과 점심을 함께 하신다는 스탈셑박사님이셨습니다. 노르웨이교회 대주교를 하신 경력도 있고, 노르웨이 대학교 총장을 하신 일도 있는 분이었습니다. 이런 훌륭한 분과 교제할 수 있었다는 것이 참 기뻤습니다. 몇 년 전에 제가 미국에 공부하러 갔을 때, 저에게 그 대학교 교수회의에 참석해서 인사말을 하라는 부탁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대학 총장님과 보직 교수들이 모인 약 40여명이 모인 자리였습니다. 학생 신분으로 와 있는 사람에게, 그 대학교의 중요 교수들과 교제할 기회를 얻게 되었을 때, 참으로 감개가 무량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자랑할 것도 내 세울 것도 하나도 없는, 오히려 부끄러운 죄인들인 우리가, 만군의 왕되신 하나님과 사귈 수 있다고 하면, 얼마나 큰 영광이며 축복이겠는가 말입니다. 여러분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다는 감격과 기쁨을 가져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과 만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뜻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분명 우리들의 뜻을 하나님께 말씀 드리는 것이지만, 놀랍게도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계시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기도는 일방적인 얘기가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에서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못하는 우상에게 기도하니까, 죽은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응답하시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산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고, 우리들이 무엇을 해야 옳은지를 깨닫게 됩니다.
  세 번째로 기도의 영적 축복은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강건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마귀의 종노릇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담대하게 살아갑니다.

3. 다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받게되는 육적인 축복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도 생활을 하게 될 때, 우리들의 실제 삶에 하나님의 은총이 충만하게 나타납니다. 우선 기도하게 되면 정신적으로도 안정되게 하십니다. 걱정과 근심에서 평화를 얻을 뿐 아니라, 공포와 두려움에서 해방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고, 어떤 모양으로든지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됩니다. 즉각적이든지, 시간이 걸리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반대하신다는 것을 깨닫든지간에 말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은 저는 여러분들이 기도를 통해서 여러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에만 집착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여러분들이 기도를 드림으로해서, 여러분 안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기를 바라고, 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기도의 축복이라고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뜻이 오늘도 여러분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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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105(2001.1.21, 주님의 날)
찬송 : 442장.
성경말씀 : 단 2:17-18.
제목 :  생명을 위한 기도.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다시금 다니엘서로 돌아왔습니다. 오늘 본문은 신     앙심이 깊은 다니엘의 여유로움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내용입니다. 그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용기를 가지고 왕에게 자원해서 왕이 꾼 꿈과 그 의미를 해석해 보이겠다고 나섰습니다. 이미 다른 많은 박사와 술객들과 함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생각해 볼 때, 이런 용기는 최선의 적극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신앙심이 깊은 다니엘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이와 같은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삼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명의 노예가 온 세상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칠 수 있는 말없는 시위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니엘의 다음 행동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믿고 위험한 불구덩이로 찾아 들어간 것일까? 하고 말입니다. 

2. 다니엘은 자기 집으로 가자 마자, 친구 세 사람에게 그가 한 일을 말하고,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부     탁합니다. 예상했던 대로 다니엘은 자신 뿐 아니라, 친구들과 함께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이 기도하기 시작한 것은, 문제 자체가 아니라는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왕이 꾼 꿈이 무엇인지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뜻도 알게 해 주십시오.” 전혀 뜻밖에도 그들이 기도한 내용은 “바벨론의 다른 박사와 함께 죽임을 당치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구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기도는,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 자신들과 다른 박사들의 생명을 구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생명을 위한 기도, 너무도 평범한 것이면서 소홀히 하기 쉬운 것이, 우리들의 생명을 위한 관심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중병에 걸리거나 어떤 생명의 위기를 맛보기까지는 생명에 관해서 무심하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도 예외가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무엇이 가장 중요한 기도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출세나 성공이 아니라, 또는 지혜와 총명도 아니라, 생명의 소중함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뿐 아니라, 억울하게 죽게 될 다른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위해서도 기도하였습니다. 

3. 오늘 우리들의 기도 생활에 있어서 심각하게 고려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가장 중요한     것과 그 보다 덜 중요한 것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분주하고 복잡한 생활이 우리를 잠시동안 눈멀게 하고 귀먹게 하는 것으로 판단하기에는, 우리의 생활이 무엇엔가 쫓기듯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 좀 더 깊이 사색하고 묵상하는 자세보다는, 우선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매달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지난 IMF 이후 우리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두드러진 현상 가운데 하나는, 교인들까지도 마음이 넉넉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각박함 때문인 것 같은데, 회사일이다든지 아니면 개인적인 중요 사항이라고 생각하면, 다른 무엇도 고려하지 않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가령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일이나, 교회봉사 활동에 참가하는 일, 그리고 헌금하는 일 등에 있어서, 얼마나 달라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신앙심이 좋다고 믿었던 사람들도, “교회가 밥 먹여 주나?”거나, “아이들 학교에 보낼 시간인데 기도회에 어떻게 참석합니까?”는 식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현상적인 문제 때문에,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내면 세계가 닫혀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살게 하는지, 무엇이 우리들 삶의 본질인지에 대해서 눈을 감아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떡으로 산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떡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삶의 뒤안길에서 배웠습니다. 삶은 의미가 있어야 하고, 보람이 있어야 합니다. 오히려 그런 내면적인 것들이 풍부하면 할수록 삶은 더 진지해 질 수 있었고 자랑스러웠습니다. 

4. 지금 우리는 생명의 소중함, 특히 영적인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할 때입니다. 물론 당장에는 회사의 경영 상태를 호전시키는데는 아무 기여를 할 수 없을 것이고, 성적을 올리는데도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 바탕에 이 생명의 소중함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삶은 제대로 된 힘과 지혜와 용기를 얻게 될 것이며, 누가 참된 소망의 근거가 되는 지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다니엘처럼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엎드릴 것이며, 그로부터 진정한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한 세상에서, 지금 심각한 반성과 새로운 다짐을 해야 할 때라고 믿습니다. 오늘도 여러분의 생명이 강건하기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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