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95(2001.1.11, 목요일)
찬송 : 388장.
성경말씀 : 벧전 5: 8-9.
제목 :  우는 사자 같은 마귀와 싸우라.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어제 어느 장로님과 점심식사를 함께 나누었는데, 무기력해 가는 두려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젊은 날에 가졌던 용기나 도전정신이 엷어져 가는 것을 더욱 분명히 느끼는 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가 무섭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살아왔던 일들 중에서 가장 쉽고 자신 있는 것들만을 붙드는 까닭도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아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젊은 날에는 겁없이 이리 저리 부지런히 뛰어다녔습니다. 헛된 시간도 보냈고, 헛김도 많이 뺐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는 몸으로 뼈저리게 느끼고 배웠던 소중한 경험들을 잘 살려서 뒤에 오는 후배들에게 물려줄 수 있으련만, 그것마저도 주저하는 것이 아쉽습니다. 제 주변에서도 참 배울 것이 많은 분들을 볼 수 있는데, 그 분들이 가진 생생한 삶의 보배들을 잘 정리해 두지 못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3. 오늘 말씀은 마귀와 싸울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 어느 영문학 교수님이 우리 루터교회의 세례 예식문을 보고서는 참 잘되어 있다고 칭찬했던 기억이 납니다. “마귀와 그의 하는 모든 일과 그가 취하는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기로 결심하십니까?”라는 구절이 인상적이라고 말했습니다. 마귀는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 현대인들은 이 마귀의 정체에 대해서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는 마귀라는 존재와 만나지도 않고 오직 교회에서 하나님의 반대편에 있는 어떤 좋지 않은 성품을 지닌 존재 정도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마귀에 대해서 보다 적극적인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좋은 예가 베드로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13-20)는 말씀 말입니다. 사실 이 본문의 바로 앞 문맥은, 베드로가 저 유명한 그리스도 고백을 함으로 최상의 칭찬을 받은 직후였다는 것이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천당과 지옥을 한 자리에서 경험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막8:27-38). 베드로는 교회의 열쇠를 받는 그 자리에서(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베드로가 교회의 기초라고 해석합니다), 베드로는 또 다른 이름, 사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언제든지, 아니 가장 화려하고 잘나가는 순간에까지도 마귀로 얼마든지 전락할 수 있구나하는 생각을 합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하는 존재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훼손한다면 그것은 마귀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섭리를 곡해하는 모든 경우가 마귀가 하는 구체적인 활동입니다. 마귀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대적하는 것을 위해서 존재하는 악령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마귀가 우리들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4. 어느 이단으로 정죄받은 목사님은, 모든 부정적인 문제들에는 마귀가 있다고 해서, 축귀론이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병들어도 마귀 짓이고, 사업에 실패해도 마귀 짓으로 결론지었습니다. 무엇이든 잘못되는 것에는 마귀가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어느 면에서 보면 그렇다고 인정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잘못되도록 일부러 괴롭힌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푸닥거리(exorcism)를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미 이런 사상은 무당신앙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른바 ‘마(魔)가 끼었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이럴 경우에 우리 인간 자신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 마귀 탓으로 돌리면 될 테니까 말입니다. 실제로 우리 인간은 많은 면에서 다른 누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 책임져야 할 부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얘기가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마귀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저는 우리들의 영적 생활에 마귀가 깊이 개입해 있다고 하는 말에 동의합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기 훨씬 전부터 마귀는 우리들과 교분을 맺고 있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태어나는 순간, 순진무망해야 할 어린 아이 마음에 누가 미움과 시기와 질투를 가르쳤다고 생각하십니까? 죄 가운데서 태어났다는 말은 마귀의 세계에서 태어났다는 말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귀의 생각이 우리들을 지배하는 기초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 때부터 우리는 알게 모르게 두 인격체 사이에서 혼란도 겪고, 갈등도 겪으면서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냐, 마귀냐의 갈림길에 서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독자는 투사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마귀와는 타협이 없기에 싸워야 하고, 싸우면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조용히 살 수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 편에 서 있기 위해서는 마귀와의 싸움이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저의 어머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꼭 예배를 드리려고 하면 마귀가 역사(役事)한단 말야.” 그러시면서 마귀와 한 판 싸움을 벌이고서야 교회에 가십니다. 마귀는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을 방해하고 못하도록 온갖 유혹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산산조각이 나도록 하고서 쾌재(快哉)를 부르는 것이 마귀의 가치관입니다.

5. 마귀와 싸우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 매일 새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합니다. 마귀 앞에서 물러가지 마십시오. 마귀는 여러분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통해서 접근해 올 수 있습니다. 넘어가지 마십시오. 그들의 목적은 여러분이 영육간에 철저하게 파괴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의 연약함을 돕기 위해서 곁에 서 계십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사랑은 요구하지 않는다”(위인유기 爲仁由己)

인(仁)은 무엇인가? 
애인(愛人)이라고 공자가 잘라 말했다.
愛人은 무슨 뜻인가?
남을 먼저 사랑하라. 이것이 애인이다.
그 남이란 누구인가?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이것이 仁의 절정이다.

愛人은 연인(戀人)과 다르다.
연인은 한 사람을 정해놓고 사모하는 까닭이다.
연인은 사랑을 주고받아야 이루어지지만,
공자가 밝힌 애인은 사랑을 흥정하지 않는다.
흥정하는 사랑은 애증(愛憎)의 명암을 짓는다.
결혼하고 이혼하는 것이 곧 애증의 돌림이 아닌가!

공자의 仁은 노자의 자(慈)와 같다.
자란 무엇인가?
어머니의 사랑과 같은 것이 자가 아닌가?
여래의 자비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에 무슨 조건이 없다면 인에 가깝다.
사랑함은 무한대로 베푸는 것이다.
오로지 내가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요구하지 말라.
사랑은 거래가 아니다.
그러면 인의 품안에 머문다.

어디 사람만 사랑할 것인가?
이름 모를 별까지 사랑해야지.
이렇게 시인 윤동주가 절규하지 않는가?
어느 누구를 사랑하기 전에 삶을 사랑하라.
그러면 사물을 사랑해야 하는 연유를 알 수 있는 것.
그대는 자연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삶을 사랑하는 당사자이다.
자연이 없다면 아무 것도 살 수 없는 까닭이다.

실연했다고 절망하지 말라.
짝 사랑만 한다고 푸념하지 말라.
그러한 사랑은 진정 큰사랑은 아니다.
흘러가는 구름을 사랑하고,
이름 모를 나그네를 사랑하고,
길가에 그냥 피어있는 풀꽃을 사랑한다면,
사랑이 얼마나 자유인가를 알리라.
        [빛나되 눈부시지 않기를], 윤재근, pp.128-9.


불외 입외(불외 入畏) : 두려워할 줄 알면 두려울 게 없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그러면 그 강아지는 어떻게 되겠는가?
분명 호랑이의 밥이 되고 말 것이다.
이른 두려움을 몰라 두려운 일을 당하는 꼴이다.

화약을 짊어지고 불길로 뛰어드는 것은 용기가 아니다.
두려움을 알고 두려움을 막는 것이 용기일 뿐,
두려움을 몰라 두려움을 얕보면 그것은 만용이다.

용기 있게 사는 사람은 만용을 무서워한다.
겁없이 사는 사람은 세상이 무서운 줄을 모른다.
그래서 죄를 짓고 감옥에 가는 자들이 사라지지 않는 게다.

두려워하는 마음을 비겁하다고 말라.
두려워하는 마음은 아는 길도 물어서 간다.
그릇이 깨어져 무엇을 담을 수 없다면 그 또한 두려운 일이다.
인생을 담아야 할 자신이 깨진다면 되겠는가!
모든 일을 살펴 조심하라. 이것이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두려워하지 않으면 두려운 일을 당한다.
두려움을 모르는 장수는 졸병을 몰살시키고,
두려움을 모르는 임금은 백성을 궁지로 몰아간다.
어른일수록 두려워하는 마음을 간직해야 하는 연유가 있다.
거느린 식솔들이 마음놓고 밤잠을 자야 하는 까닭이다.

노름꾼은 제 자식을 거지로 만든다는 게다.
노름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몰라 험한 꼴을 당하는 게다.
그러므로 두려워하라. 그것은 용기 있는 자의 준비이다.

건방진 사람, 오만하고 교만한 사람, 그들은 두려움을 모른다.
권력을 믿고 사람을 얕보는 자,
돈을 믿고 사람을 무시하는 자,
명성이 높다고 뽐내는 자,
그들도 두려움을 몰라 가볍다.
태풍을 얕보고 항해를 하면 배는 침몰한다.
거친 바다의 항해 그것이 인생이 아닌가?
인생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마주하고 매사를 조심하라.
그러면 발밑의 함정이나 덫을 거더낼 수가 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느냐? 아니다.
더럽고 추해서 피하는 게다.
인생을 더럽히고 추하게 하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없다.
이를 안다면 인생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용기를 마련한다.

두려운 일을 당해서 험하다고 절망한들 이미 늦었다.
절망으로부터 다시 거듭나자면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실패가 두려운 줄 아는 자라면 성공을 거둘 수가 있는 것.
두려움을 모라 게으름을 피우면 실패하는 것.
이것이 공평하기 짝이 없는 인생이란 저울이 아닌가!
삶을 두려워하라. 이는 삶 앞에 성실 하라 함이다.

                      書經에서 
註 : 불(弗)은 불(不)과 같이 영어의 not과 같다.
        [빛나되 눈부시지 않기를], pp.166-7.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94(2001.1.10, 수요일)
찬송 : 432장.
성경말씀 : 벧전 5: 7.
제목 : 근심과 걱정에서의 진정한 탈출(?).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사람들은 저마다 근심과 걱정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남녀노소가 다름이 없고, 빈부귀천의 사람들 역시 다를 바 없습니다. 이렇듯 근심과 걱정의 일반적인 현상은, 우리들에게 이른바 의식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부정적인 시각으로 대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것들이 삶의 내용이라는 생각을 하자는 말입니다. 기왕 짊어지고 살아가는 내용이라면 좀 더 친하게 지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저는 정월 초하룻날 어머님의 추모 예배를 인도하였습니다. 가족들 앞에서 이런 설교를 하였습니다. “가족 여러분들이 보아오신대로, 저는 근심과 걱정을 짊어지고 살았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객지로 떠돌기 시작하였고,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겨울에도 불을 지피지 않는 시멘트 바닥 기숙사에서 아침 점심 저녁을 밀가루 음식을 먹으면서 살았습니다. 지금까지도 이런 고생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점심을 거르기가 일수 였습니다. 언제나 삶의 무게를 항상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고통은 저에게 낯선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저는 고통을 아주 당연한 것일 뿐 아니라, 그것을 즐기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저의 삶의 자세는 항상 긍정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원망스럽고 부정적일 수 있지만, 애써서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려고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말씀은, 바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는 구절입니다. 루터는 저보다 몇 십배 백배 더 많은 일들을 해야 했기에 생각도 많았을 것이고, 걱정거리들도 뒤따랐을 것입니다. 그는 도저히 자신의 힘과 능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이렇게 말하곤 했답니다. ‘주님, 이 일이 내 일입니까?  주님 일입니까?  주님 일이니까 주님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저는 피곤해서 잠이나 자러 가겠습니다.’  그 때, 루터의 마음에는 평화가 찾아왔고 새로운 힘이 솟아났다고 합니다. 금년에도 근심과 걱정이 많을 테지요. 주님께 맡기십시오. 주님께서 일하시도록 기회를 드리십시오. 주님께서 도우실 뿐 아니라, 책임을 지시고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3. 어떤 의미에서 근심과 걱정은 새로운 도전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괴로움뿐인 것 같아 보이지만,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고 생각해 보면, 그같은 근심과 염려들은 불완전한 삶의 반영이며, 다른 쪽에서 보면 고쳐야 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류의 발전사를 살펴보면 예외 없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좋은 자극제가 되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1961-1963년)에 수학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 머지 않아서 버튼 하나만 누르면 방안이 따뜻해 질 게고, 또 다른 버튼 하나를 누르면 밥이며 국이 끓게 될게다.” 당시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얘기였습니다.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펴야 했고, 그것도 한 밤중에 군불이라는 것을 한번 더 때야만이 새벽까지 방이 따뜻했던 힘겨운 시절이었는데, 오늘과 같은 온수 보일러를 꿈도 꿀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좀 더 따뜻한 방에서 편리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와 같은 근심과 걱정들이 마침내 문명을 발전시키는 도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들 모두에게 이런 도전들을 허락하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감당할만 하기에 그런 걱정거리들을 맡기셨다고도 생각합니다. 뒤로 물러가지 마십시오. 정공법을 택하십시오. 분명 여러분들이 그런 근심 걱정거리들을 잘 살펴보시고 그 해답을 얻게 된다면, 여러분은 살아가는 맛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저는 금년에 [특별 예식서]라는 책을 집필하려고 자료를 모으고 있습니다. 주일 예배가 아닌 다른 특별한 경우에 드릴 예배의식이 마땅치 않은 실정입니다. 사실 이런 이름으로 20여권의 책들이 나와있긴 하지만, 그 양식이나 내용에서 대동 소이할 뿐 아니라, 전혀 상황이 다르고 주제가 다른 예식임에도 불구하고 그 순서는 별 차이가 없이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불만스러워 하는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많다는데 착안한 것입니다. 결혼식 순서는 결혼식에 적합해야 하고, 장례식 순서나 내용은 장례식다운 것이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오래 전부터 가져오면서도 용기를 내지 못했는데, 이미 10여개의 특별 예식서 순서를 만들어 실제로 사용해 보았는데, 반응이 좋아서 본격적으로 도전하게 된 것입니다. 필요에 의해서 사건은 생겨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근심과 걱정거리였지만, 그것이 나중에는 멋진 열매가 되어서 우리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이지요. 

4.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할 수 없는 것은 말할 것 없지만, 비록 자신만만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주님께 맡기는 자세로 일에 임한다는 것이 좋은 자세라 하겠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항상 그의 아버지에게 물어보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더 나은 지혜와 힘을 얻게 될 테니까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지금 매우 힘겨운 처지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더욱 더 주님을 의지하라고 권고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즐겨 사용하는 말처럼, 지금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의 삶 한 복판에 들어오실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모셔들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선하게 여러분의 문제를 취급해 주실 것입니다. 엊그제 저는 고통스럽게 18개월간을 살아왔던 한 권사님을 작년에 이어서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혼을 하였고, 한 푼 위자료도 받지 못한채 동생 집에 얹혀 사는 딱한 처지가 되신 분입니다. 그냥 얼굴이라도 보면서 옛날 얘기도 나누고 그리고 진심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기도해 드리기 위해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밝고 명랑해지셨는지 깜짝 놀랄 만 했습니다. 생각도 생활도 행복하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힘들게 번 돈으로 신학교를 위해서 상당액을 기부하기도 하였고, 어린아이들을 위해서 선물까지 준비해 오셨습니다. 어려움 중에서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더 풍성해진 것 같다고 말씀했습니다. 즐거운 그러면서도 감사한 저녁시간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생활이 근심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5. 주님께서 오늘도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이석윤집사님께서 10-12월에 보내 드렸던 묵상자료를 책으로 묶어서 제게 선물해 주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혹시 도중에 받아보신 분들이나, 중간에 빠진 것을 보고 싶어하시는 분은 연락 주십시오. 첨부 파일을 통해서 쉽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93(2001.1.9, 화요일)
찬송 : 340장.
성경말씀 : 로마서 12:21.
제목 : 한 소년과의 대화.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저는 지난 해 사이버 피해를 톡톡히 본 경험이 있습니다. 불특정 다수를 향해서 불공정한 인신공격을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너무 분개하여서 고소할 생각도 하였습니다. 사실을 거짓으로 바꿀 뿐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완전히 덮어 씌우는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몇 날을 고통가운데서 보내야 했습니다. 많이 기도할 시간을 가졌고, 인내하는 기회였습니다. 지금은 얼마나 마음이 평안하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 때 잘 참고 견딜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해악을 줄 수 있는 전자 매체가, 바르게 사용할 수 있다면, 사람들 사이에서 따뜻하고 아름다운 마음들을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편리하고 좋은 수단인지 모릅니다. 오늘은 오늘 새벽 제가 한 소년과 나눈 대화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소년은 제게 가끔 질문을 메일로 보내오곤 합니다. ‘93년 12월 31일 생이니까, 이제 만 7살이 되었습니다. 이런 어린 아이에게 적합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느낍니다. 저는 이런 아이들이 어른들의 얘기를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조금만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만일 저나 이 어린이,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어른들, 혹은 선생님이나 목사님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값진 삶을 살아가고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이제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서야, 그 때 들었던 말씀들이 참 귀한 양식이었구나 하고 생각되니 한심한 노릇이 아닙니까?

3. 소년은 이런 글을 보내왔습니다. “목사님. 선교예요. 저요 목사님께 여쭤볼게 있는데요. 답 좀 보내주세요. 목사님. 저는 예준이와 엄마께 잘하려고 하는데 왜 자꾸만 내 마음대로 안되고 예준이를 놀리게되고 , 엄마를 속상하게 만들어요. 왜 그럴까요? 자꾸만 나쁜 마음이 드나봐요. 예수님 마음으로 되고싶어요. 엄마는 성경에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고 그럤는데. 왜 잘 안되는지 속상해요. 목사님. 저 매일 성경말씀 한바닥씩 줄공책에다 써요. 그리고 성경말씀 암송도 해서 용돈도 타요. 제발 답좀 알려주세요. 꼭이요! 목사님 안녕히주무세요.” 

성경 암송을 하게 하고 용돈을 주는 부모님을 먼저 칭찬하고 싶습니다.

제가 보낸 답장입니다. “ 사랑하는 선교에게.

주님께서 너와 함께 하시길 기도한다. 
오늘 아주 좋은 질문을 해 주어서 매우 기쁘단다. 모르는 것은 언제든지 묻는 습관을 기르기를 바란다. 그래야 모르는 것을 알게 될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어머니나 예준이에게 잘해 주고 싶은데 마음먹은 것처럼 잘 안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어른들도 너처럼 이런 생각을 많이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구나. 그래야 더 나은 사람도 되고,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을테니까. 가까운 사람, 특히 가족에게 마음처럼 잘해 주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모른단다. 선교 너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런 아픈 마음을 가지고 있단다. 가족은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특별한 관계가 아니겠느냐? 함께 생활할 뿐 아니라, 함께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을 나누어 가지는 관계이기 때문이란다. 자식으로써 부모님을 생각하면, 너무 감사할 것들이 많단다. 자식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너무도 많은 수고를 해 주시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어찌하여서 자식들은 그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일을 해야만 할까? 그래서는 안되는데도 말이다.

사람들은 몇 가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단다.
첫째는 심리학자들의 얘기인데,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중심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얘기한단다. 아무리 좋은 부모님과 형제 자매가 있지만, 그들은 주어진 형편속에서 많은 고생을 하면서 사랑하고 도와 주었지만,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 이기적인 사람은 그런 것들로도 만족할 수가 없단다. 그래서 불평과 불만이 마음속에 가득차 있다는 것이다. 감사할 줄 모를 뿐 아니라, 오히려 원망과 불평이 결국에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야 마는 것이란다. 자기 생각만 하는 사람이 될 때, 마음과 다르게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마음 아프게 만든다는 말이다. 선교가 가지고 있는 마음은 이런 것이 아닐찌 생각해 보려무나.
두번째는 이것은 정신과 의사들의 얘기인데, 사람들이 좀 더 넓게 그리고 크게 생각해야 하는데, 마음이 좁아서 눈앞의 것들에만 매달리는 바람에, 그런 속 좁은 생각으로 마음과는 다르게 잘못을 저지른다는 것이다. 가족끼리 싸우는 경우를 보면,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보다 이런 현상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단다. 화가 나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다른 사람이라면 생각을 많이 해 본단다. 왜냐하면 만일 화가났다고 해서 금방 말했다가는 손해를 볼수도 있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가족관계에서는 화가나거나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곧 바로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다시 말하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인지 아닌지 생각해 보지 않고 말해 버린다는 말이다. 그래서 가족들 사이에서 상처를 많이 입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지 모른단다. 정신과 의사를 찾아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가족들에게서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에, 어찌할바를 몰라서 도움을 청한다는구나. 선교야, 네 경우는 어떤 것이겠니? 조금만 생각을 깊이 하거나 넓게 했다면, 지금보다는 더 엄마와 예준이를 기쁘게해 줄 수 있었을텐데 하고 생각되지 않니?
마지막으로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이다. 그것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죄 가운데서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인간은 마음이 악하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마귀가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다. 목사님도 이 말에 동의한다. 우리는 어느 한 순간도 마귀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단다. 그래서 마귀가 시키는대로 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귀챦게 하고, 괴롭히고, 미워하고, 싸울 마음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이다. 예수를 잘 믿는다는 사람들도 마귀에게 끌려서 살아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바울 선생님은 이런 불쌍한 우리 인간들이 마귀를 이겨내면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마귀를 이기는 생활은, 예수님을 우리 마음안에 모셔들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선교 네가 말한대로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려고 한다면, 예수님이 나를 다스리도록 예수님께 맡겨야만 한단다. 가령, 마귀의 생각이 내 마음안에 들어올 때, 당장에 예수님께 가야한다. 그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는 일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을 읽거나 생각하는 일이다. "예수님, 내 마음이 나쁜 생각으로 가득차 있어요. 나를 도와 주세요. 나쁜 마음을 착한 마음으로 바꾸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할 때, 악한 마음을 이겨낼 수 있단다. 물론 어떤 때는 마귀가 끈질기게 달라붙어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을 때가 있단다. 그런 때는 계속해서 예수님께 매달려야 하겠지? 마귀가 떨어져 나갈 때까지 말이다.

성경을 암송한다니 참 잘하는 일이다. 성경 말씀을 많이 외우고 있으면, 마귀가 들어올 때, 필요한 말씀으로 물리칠 수 있단다. 목사님이 네게 한 말들을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리고 좋은 말씀이 있으면 실천해야 한다. 듣기만 하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좋은 질문을 주어서 고맙다. 네게 도움이 되는 대답이 되었으면 한다. 좀 더 쉽게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너는 충분히 이해하리라고 생각한다. 오늘도 건강하게 즐겁게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선교와 예준이를 사랑하는 목사님이. ”

4. 로마서 3:12은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도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서는 선을 행할 능력이 상실된 것입니다. 시편 51:5은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죄와 함께 먹고 마시고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들 인간 실존입니다. 심리학자들의 원인분석이나, 정신과 의사의 진단도 따지고 보면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인간을 고발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 분만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모셔야 합니다. 예수를 잘 믿는다는 말은, 모든 것을 주님께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5.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는 아름다운 삶을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제게 격려를 주신 앵글러(임구원)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기도하시는 루터란 아워가 한국의 많은 사람들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줄 뿐 아니라, 그들에게 신앙에 눈뜨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기도드리며, 보내 주신 한 구절을 영어 공부를 위해서 인용합니다. “Thanks for sending your daily meditations.  I hope we do something like this for the new Korea Lutheran Hour web site.  That is, have a daily devotion."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92(2001.1.8, 월요일)
찬송 : 305장.
성경말씀 : 벧전 5:5-6.
제목 : 젊은이들을 위한 권고.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어제 새해 첫 주일은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어제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나올 때부터 시작된 눈은 거의 13시간동안 계속 내렸습니다. 서울 지역에 내린 적설량은 약 16㎠나 되었다고 합니다. 20년만에 많은 눈 구경을 할 수 있었습니다. 거의 교통이 마비되는 현상이었는데, 지하철이 큰 몫을 해 주어서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예배에 92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어제부터 교인출석부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눈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새벽 미국 시카고에서 준목실습중인 마크 시쇼우준목으로부터 이 메일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안부인사를 전해 왔기에 몇 구절을 보냅니다. 영어공부 하시라고요. 

Dear Pastor Sungwan Park, Thank you for your e-mail message and pretty card. I'm sorry to learn of your loss of an elder, but I'm sure you rejoice that he is with Our Father in heaven. Was the elder who died the one who invited us for dinner? We are doing fine. We are very happy to be at the church where I am assigned as vicar. They are a unified and growing congregation. The pastor has been gracious to me so that I am starting slowly with my activities. We have fond 
memories of our stay in Korea and Ok Su Dong Church. If you wish, you may greet the congregation from us. The peace of Christ be with you, Mark Zuehsow I just received your card. Thanks a lot. 

3. 오늘 본문은 젊은이들에게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어느 시대나 젊은이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변함없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들이 오는 시대의 주역들이기에 그들이 바른 정신과 자세로 살아야 희망이 있는 시대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젊은이들에게는 많은 장점들이 있습니다. 젊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일 것이고, 세상에 때묻지 않았다는 점에서 순수하고 아름다움이 장점입니다. 그리고 아직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에 가능성으로 열린 미래를 내다보는 때문에, 창조적인 정신과 의욕이 있다는 점도 들 수 있습니다. 용기가 있고, 소망으로 가득찬 마음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약점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현재와 미래에 집착한 나머지, 자신의 과거 혹은 뿌리에 대한 인식이 약하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피할 수 없는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젊은이가 과거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잘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뿌리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곤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장로들에게 순복하라고 말씀하는데, 비단 교회 안에 있는 지도자들만을 말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모든 윗사람들을 존경하고 순종하는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젊은이가 어느 날 자신이 아버지보다 힘이 더 세다 는 것을 알게 됩니다. 기억력도 훨씬 좋고, 기운도 훨씬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육체적인 면에서 자신이 부모들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문제가 생깁니다. 그것은 부모를 경히 여기거나 외면하는 것 등으로 나타납니다. 아마 경제적인 면에서 독립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완전히 부모를 무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어느 시대나 있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물론 매우 적은 수의 젊은이들이 부모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참 드문 일입니다. 대체로 남들 눈에 나쁘게 보일까를 염려해서 의식주를 공양하는 정도에서 부모를 공경할 뿐, 삶의 중요한 인생선배나 상담자로 적극적으로 부모님과 상의하며 지내는 자녀들은 그리 흔치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4. 젊은이는 어른을 공경해야 합니다. 이것은 사회 공동체를 위해서도 그렇지만, 인류의 파멸을 막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권고입니다. 어른은 젊은이의 뿌리요 근원입니다. 비록 교육은 덜 받았고, 현대 지식에서는 모르는 것이 많다고 할 수 있고,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뒤쳐지는 세대이지만, 그들과 잘 어울려 살아갈 수 있을 때, 우리 자신은 물론 앞으로의 인류 미래가 소망스럽다 하겠습니다. 인간은 일반 동물과 다른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것은 윤리적인 존재라는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관계를 바르게 유지해야 할 존재라는 말입니다. 상하의 관계가 있고, 좌우의 관계가 있습니다. 상하의 관계에서 필요한 덕목은 사랑과 순종입니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사랑으로,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순종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좌우의 관계에서 필요한 덕목은 겸손과 섬김입니다. 서로 자신을 낮추는 일과 서로 섬기는 일보다, 더 아름다운 관계는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덕목이 별로 관심의 대상이 아닌 시대입니다. 일의 능률이라는 미명으로, 혹은 경제적인 원칙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개인중심주의라는 풍조에 밀려서, 이런 인간관계가 깨트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구 사회와는 달리 우리 사회는 인간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사회입니다. 이런 인간관계는 사업이 성공하는 것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더 멀리 내다본다고 할 때, 결코 소홀히 여길 수 없는 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서구 사회는 인간관계를 강조하는 동양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뿐 아니라, 흠모하는 눈길을 보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날이 갈수록 삭막한 세상을 맛보고 있기 때문에, 문제를 푸는 대안으로 동양 사회의 인간관계에 대해서 좋은 점들을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요사이 노자 사상이니 공맹 사상에 대해서 놀라운 관심들을 가지는 것에 대해서 많은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별 도움이 안돼는 얘깃거리이지만,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 일에 있어서는 엄청난 플러스 요인이 된다고 확신합니다. 어른을 공경하는 것은, 혹은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 되는데 크게 도움을 얻게 될 것입니다. 결국 성공적인 삶이란,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살아가는 사람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5.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란 어떤 이를 두고 하는 말이겠습니까? 억만 금을 가지고서 행여 도둑이 들어올까? 금고를 깨트리면 어떻게 할까?  노심초사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아니면, 자신을 이해하고 용납하며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그런 좋은 이웃들 속에서 활짝 웃음꽃을 피우며 살아가는 사람이겠습니까? 젊은이가 노인들의 어깨와 다리를 주물러 주며, 정답게 얘기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분들의 고단함은 바로 자신들의 성장을 위한 밑거름이었음을 감사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른이게 겸손하십시오. 그런 사람이 정말 훌륭한 사람이며, 미래가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의 삶속에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91(2001.1.7, 주님의 날)
찬송 : 374장.
성경말씀 : 벧전 5:1-4.
제목 : 교회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베드로전서는 초대교회의 삶을 엿보게 하는 자료입니다. 그러나 그 교회는 제법 틀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장로제도를 택해서 운영하고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장로라는 명칭은 이미 구약시대부터 있었습니다만, 초대 기독교회의 장로라는 명칭과는 거리가 있는 용어입니다. 구약에서는 12지파의 지도자들을 의미했습니다. 그 지파의 어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각 지파를 대표하는 여러 가지 일들에 앞장을 서서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출3:16) 일종의 정치적 혹은 사회적인 지도자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에서의 장로는 순전히 신앙적인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이름이었습니다. 각 지역 교회는 적어도 몇 분의 장로들을 세웠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딤전4:14-16) 그리고 그 중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감독이라는 직제도 두었던 것 같습니다.(딤전3:1-7) 이 장로들은 회를 구성하고 있었는데, 교회내의 질서와 건덕을 위해서 치리(治理)하는 일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딤전5:17) 아무튼 장로는 안수를 받은 교회 지도자들이었습니다.

3.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피면, 교회 지도자들은 세상 지도자들과는 분명히 다른 자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지도자들과 비교하는 뚜렷이 구별되는 몇 구절을 살필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들이라는 것,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재림을 의미함) 영광에 함께 참예할 자라는 것, 의무감과 같이 소극적인 자세로가 아니라 즐거움으로 적극적인 자세로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 어떤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고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 자기 생각을 이루기 위해서 독재적인 방법도 불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성도들에게 솔선 수범하는 본을 보이는 행동으로 지도하는 사람이라는 것 등입니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집단이라는 점에서는, 교회가 일반 사회와 하나도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도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고, 가지각색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매사에 긍정적인 사람도 있을 것이고 반면에 부정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하면 마음이 꼬여서 다른 사람을 헐뜯기 잘하는 그런 사람도 있게 마련입니다. 열심인 사람과 게으르고 말썽만 일으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역시 세상처럼 시끄러울 수 있습니다. 이런 공동체를 지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교회의 일꾼이 된다는 것은 분명 명예롭고 자랑스러운 것입니다만, 다른 어떤 일보다도 더 많은 수고를 해야 할 자리라고 생각됩니다.

4.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교회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할 제목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그 분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으로 충실하도록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교회의 존재의미는 예수가 그리스도(구세주)이심을 증거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구세주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구주가 되셨다는 것을 힘껏 외쳐야 합니다. 이런 교회의 역할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삶이 더 이상 죄와 죽음 아래 있지 않고, 새로운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이 복음을 들어야만 우리는 옛 사람이 아니라, 새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들은 이 복음을 선포하는 일보다는 세상적인 가치에 너무 많은 관심을 쏟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초대 교회의 설교는 고난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주제였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목숨을 내 걸고 외쳤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는 교회 지도자들이 세상 명예나 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좇는 일에 열심을 다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오랜 전 얘기입니다만, 어느 부흥강사가 자신을 소개하면서, “예수님은 5천명 앞에서 설교했지만 자신은 백만명 앞에서 설교했다.”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무슨 뜻에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게 공부했던 나이든 한 학생은 “목사님의 권위는 외모에서 풍기는데, 좋은 차를 타야하고 재력도 있어야 꿀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세상 지도자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야할 지도자인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어쩌면 세상의 명예와 부귀 권세와는 거리감이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어야 한다고 말씀하시기에, 병든 세상에서 사람 대접을 받도록 해 주라고 말씀하시기에, 뒤엉켜있는 무질서를 제대로 풀어주라고 말씀하시기에, 이전에 가지고 있던 것들까지 내다 버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는 우리 지도자들이 되기를 기도합시다.
마지막으로 교회지도자들은 信行一致, 혹은 言行一致의 삶을 살도록 기도하는 일입니다. 좋은 말만 늘어놓는 사람이 아니라, 말하는 것처럼 생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겸손을 가르치기 위해서 스스로 겸손해야 하며, 섬김을 가르치기에 자신이 섬김에 본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오래 된 우화를 우리는 잘 기억합니다. [바담 풍]얘기 말입니다. “바람 풍”을 혀가 짧아서 “바담 풍”이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배우는 학생이 어떻게 “바담 풍”이외에 달리 배울 수 있을까요? 신행일치나 언행일치를 본보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말을 아껴서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말 쟁이라고 세상 사람들이 비웃었습니다. 말의 성찬(盛饌)에 비해서 삶은 별볼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결과는 교회 지도자들이 자기 성찰없이 사용한 말과 행동에 대한 따라하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교회 지도자가 되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마23:10)을 새삼 기억합니다. 교회 지도자는 뒤에서 부리는 독재자가 아니라, 앞에서 솔선 수범하는 본을 보여야 하는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지도자들이 되도록 기도할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고백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끊임없는 기도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주님께서 오늘 새해 첫 주일을 은혜 가운데로 인도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90(2001.1.6, 토요일)
찬송 : 446장.
성경말씀 : 벧전 4:12-19.
제목 :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으라.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8:34)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성스러운 의무입니다. 자기만의 독특한 십자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제 소개 드렸던 치매를 앓고 계시는 권사님처럼 질병도 자기 십자가일 수 있고, 힘든 가족들 속에서 살아야하는 것도 자기 십자가일 수 있겠습니다. 피할 수 없는 멍에를 누구나 가지고서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묵묵히 견디면서 이 짐을 짊어져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주시는 말씀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주님을 위한 고난에도 참예하라고 권고하십니다. 그런데 그 고난은 불 시험이라고 했으며(12절), 욕을 먹는 일이라고 했습니다(14절). 또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고 암시합니다(16절). 한번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 보십시다. 주님을 위해서 불 시험을 받아본 적이 있는지, 주님을 위해서 욕을 먹어본 일이 있는지, 주님을 위해서 부끄러움을 당해본 적이 있는지 말입니다. 저는 목사이면서도 이런 주님의 고난에 그리 자주 참예하였다고 말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오히려 주님 때문에 많은 영광을 얻었고, 칭찬을 들었고, 유익을 얻었을 뿐입니다. 

3. 주님을 위한 고난, 지금 우리들에게 깊이 생각할 묵상의 주제로 주고 계십니다. 어제 우리 교회에서 수고하실 전도사님과 선생님들과 함께 경기도 마석에 있는 모란공원을 찾아갔습니다. 그곳은 한 시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젊은이들이 많이 묻혀 있는 묘지입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기독교인들의 묘지로 개발된 듯 한데, 지금은 소위 민주 열사들의 성역으로 새롭게 인식되고 있는 곳입니다. 저는 가끔씩 그곳을 찾곤 합니다. 삶이 단조로울 때나, 하는 일이 힘들고 의미를 상실해 가는 것 같을 때, 그곳에 가서 하나 둘 비문을 읽으면서 많은 충격과 도전을 받곤 하였습니다. 거기에 묻힌 분들 가운데는 인생을 특별하게 살았던 분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안일과 평안을 생각했다면 구태여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 고난의 길을 일부러 찾아 껴안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죽음을 택했고 형극의 길을 내디뎠던 사람들입니다. 문익환, 전태일, 박종철, 천세응, 고정희 ………. 그들은 이 세상, 이 조국, 이 민족을 위해서 자신들의 뜨거운 피를 아낌없이 조국이라는 제단에 뿌렸습니다. 저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어느 겨울 저녁을 잊을 수 없습니다. 문익환목사님을 묻던 날이었습니다. 모란 공원은 수 천 수만의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는데, 숨을 죽인 듯 조용하였습니다. 한 의로운 삶을 살다 가는 목사님을 천국으로 배웅하는 마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인자하기만 하셨던 목사님이 어느 날 갑자가 투사가 되셨습니다. 강의실 혹은 교회에서 만나 뵙던 목사님은 참 조용하셨고, 차분하셨는데, 불법으로 김일성을 만나고 노동자들의 선두에 머리띠를 띄고 앞장을 서는 그런 분으로 둔갑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힘없는 사람들의 이웃이 되라는 주님의 명령을 몸으로 실천하려고 했던 때문입니다. 기성 기독인들에게 조차 미움을 받았습니다. 저는 신학대학의 채플에서 어느 교수님이 설교하시면서 문익환목사님을 매도하던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목사도 아니다는 식이었습니다. 그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말씀하는 분은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연약한 이웃을 위해서 무엇을 얼마나 했다는 말인가? 하고 말입니다. 

4. 주를 위한 고난, 이것은 앞서 말씀드린 분들의 고난과도 별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민족을 위해서 혹은 약자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바라시는 구체적인 내용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는 것, 이것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사랑과 도타운 정으로 어우러지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곤 합니다. 주를 위한 고난, 그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짊어지는 고난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기뻐하실 일을 위해서 달음질하는 숨 가쁨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영광스럽도록 하기 위한 섬김입니다. 여러분이나 저는 그런 일들을 힘써 찾아야 하고, 팔을 걷어붙이고 그 일에 매달려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과 출세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습니다. 그런데 그런 관심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삶의 내용이 빈약하다면, 그럴싸한 허울 대는 곧 시들어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의 내용이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고난까지도 즐겁게 짊어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 

5. 새로운 한 해가 다가 왔습니다. 한 젊은 준목님이 목회 계획서를 보내왔습니다. 목회 방향이라는 항목 중에는 생활보호 대상자 및 노인 선교(농촌 특성상)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들을 위한 봉사를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생각이라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변치 않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그들의 이웃이 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고난을 통해서 영광과 승리의 삶에 이르는 길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결코 부정적인 주제가 아니라, 오히려 도전과 희망을 더욱 강하게 갖게 하는 긍정적인 주제라고 생각됩니다. 그 중에서도 주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고난에 동참하기를 힘쓴다면, 분명 여러분의 삶의 내용은 진정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것들로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고난의 길은 매우 친근한 우리의 삶의 내용입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도움을 받으면서 한 걸음 또 한 걸음 기운차게 걸어가십시다. 주님께서 여러분 위해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화와 기쁨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9(2001.1.5, 금요일)
찬송 : 375장.
성경말씀 : 벧전 4:7-11.
제목 : 선한 청지기가 되라.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어제 새해 첫 자원봉사자 모임에 따라 나섰습니다. 고맙게도 젊은이들이 많이 동참해 주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자기밖에 모른다고 하는 젊은이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늙은이를 섬기는 일에 함께 했으니 고마울 수 밖에요. 저는 요사이 논어에서 많은 것들을 배우고 있습니다. 논어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그것도 확트인 사람이 되기를 요구합니다. 논어는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면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막힌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사랑함과(仁) 올바름(義)을 덕목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인의(仁義)가 절실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녀노소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지만, 인의를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훨씬 더 살아 볼만한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특히 우리는 기독인으로써 이런 인간관계에 대해서 소홀히 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만 잘 섬기면 그만이라는 정신(?)이 너무 강한 때문인지, 부모를 섬기는 일에서도, 약한 이웃을 돌보는 일에서도 부족을 넘어 무관심할 때가 많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중심주제로 삼고 우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3.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선한 청지기의 상(像)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청지기 정신에 관해서는 성경 여러 곳에서 분명하게 제시되었습니다. 그는 주인이 아니라는 것과, 주인의 뜻을 좇아 충성스럽게 맡은 일을 하는 정체성과(마21:33-41), 그들의 역할에 대한 평가가 반드시 뒤따른다는 말씀(마25:14-30)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들 인간은 하나님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일을 맡은 청지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마다 다른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나, 동시에 그 하나의 목적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영광을 위해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흥미 있는 일입니까? 다르게 살면서 같은 목적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공통 요소들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도에 힘쓰는 생활(7절)이 있어야 하고, 서로 열심히 사랑해야 하며(8절), 서로 원망 없이 섬겨야 하며(9절), 자신이 받은 재능으로 서로 도와야 합니다(10절).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 그 중심(中心)에는 항상 하나님이 계셔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11절). 7절과 11절을 제외하면 공자나 맹자와 같은 인간관계를 강조하였던 이들의 가르침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우리는 사람의 의지나 지혜로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도 발전시킬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들은 언제나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죄악입니다. 이런 죄악과 맞붙어 싸워서 이겨낸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고 고백하는 것이 우리 기독인 입니다. 해 아래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좋은 인간관계를 위해서 단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청지기로써의 삶의 주제는 뚜렷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서 힘써야 할 과제들이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먼저 보이는 형제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한다.”(마5:23-24)는 것입니다. 

4. 우리의 삶은 막연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허망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 나라의 자랑스러운 청지기들입니다. 맡은 임무는 달라도 그 목적은 동일한 하나님의 청지기들입니다. 우리들의 삶이 복된 것이냐, 부끄러운 것이냐는 맡은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였느냐의 여부로 판가름 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높은 지위를 누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로 살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는 당연히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날”이 올 것이고, 아무리 낮고 천한 자리에서 살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로써 살았다고 한다면,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 날이 올 것입니다. 문제는 지금 자신이 맡은 임무를 하나님의 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는데서 불거져 나오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토기장이 비유에서(롬9:21) 잘 나타나 있는 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의 삶은 이미 역할이 분담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저는 어제 치매병원으로 잠시 이주해 간 거동을 못하는 할머니들을 방문했습니다. 거기에서 치매로 고생하고 계시는 권사님 한 분을 만났는데,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원망으로 가득차 있는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이런 몹쓸 병을 주셨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대로 자신은 하나님을 잘 섬기며 살아왔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분을 삭일 수가 없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저는 욥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이런 수치와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쉬운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에는 헛된 삶이 없는 것처럼 고통 역시 헛된 것을 주시지 않으시다 는 점 말입니다. 반드시 그 고통과 시련 속에도 하나님의 깊고 오묘하신 뜻이 계시다고 말입니다. 만날 때마다 빨리 데려가게 해달라고 기도를 부탁하시는 집사님도 계십니다. 그 때마다 저는 나무랍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이지요. 그 분에게는 말도 안돼는 얘기처럼 들리는 모양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살아있다는 것은 아직도 할 일이 남아 있는 때문이라고 말이지요. 이런 비참한 곳에서 할 일이 무엇이 있으며, 그것도 이런 추하고 연약한 몸으로 무슨 일을 하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그 때마다 반복합니다만, 여기에서도 복음을 증거하고, 그것을 몸으로 실천하라고 말입니다. 여전히 청지기로써 임무가 남아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청지기가 건강하고 당당한 모습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실제 우리의 모습에서 살핀다면 전혀 아닙니다. 이런 부끄러운 모습으로써도 하나님의 청지기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하느냐고 항변합니다. 그러나 만족할만하게 설명할 수는 없어도, 어떤 처지 어떤 형편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5. 오늘은 날씨가 가장 추울 것이라고 걱정스럽게 예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추운 날씨가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거나 대충 해치우려는 그런 소극적인 삶의 자세를 문제 삼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일은 오늘 하십시오. 내일은 내일 해야 할 일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너무 잘하려고 망설이다가 못 다하였다고 변명을 늘어놓지 말고,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언제나 족하게 생각하십시오. 오늘도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8(2001.1.4, 목요일)
찬송 : 438장.
성경말씀 : 벧전 4:1-6.
제목 : 지나간 때와 남은 때.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새해에 세우신 계획들은 잘 진행되고 계시지요?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힘들다는 것을 배우시리라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Excuse라도 할 수 있으니까, 잘해 보려고 노력할 수 있지만, 가장 무시하기 쉬운 상대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일이 가장 힘든 일인 것이겠지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우리가 지나온 과거의 삶의 내용과, 새롭게 살아가야 할 삶의 내용에 대해서 차별성을 갖도록 권고하는 내용입니다. 주의 할 말씀은 “지나간 때”라는 말과 “남은 때”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은 두 종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이고, 그리고 아직 사용하지 않은 남은 시간이 그것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에게는 제한된 시간이 허락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그 제한이 각기 다를 뿐 아니라,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관심사는 남아 있는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가에 있어야 하겠습니다. 

3. 지나간 때는 부끄러움으로 얼룩져 있다는 것이 성경의 준엄한 평가입니다. 음란, 정욕, 술취함, 방탕, 연락, 무법한 우상 숭배와 같은 이방인의 뜻을 따르던 삶의 내용들이 지나간 때의 모습이었다고 말입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방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물론 이런 모습들은 세상 사람들의 보편적인 특징들을 상징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관심사는 이런 범주에서 크게 빗나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기독자들 가운데서도 이런 지나간 때의 잔재들이 남아서 괴롭힐 수 있습니다.
교회와 일상 생활 사이가 이중적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적어도 기독자라는 사람들은, 지나간 때를 청산하고 오히려 남아 있는 시간을 새롭게 살아가려고 힘쓰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지나간 때의 일들에 발목이 잡혀서 허우적거리고 살아간다고 하면, 청산하지 못한 부끄러운 잔재로 인해서 남아 있는 때에 적지 않은 부담을 넘겨주는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대 신앙 선배이신 바울 사도 역시 이런 자기 모습을 바라보면서 괴로워한 흔적을 살필 수 있습니다(롬 7-8장). 분명한 것은, 지나간 때의 일들이 오늘 그리고 내일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를 옛 사람으로 되돌아가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집착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매일 매 순간마다 자신이 이런 부끄러운 삶에서 돌아섰던 세례를 기억하는 십자가 성호를 그으라고 권고하십니다. 

4. 지금 우리는 남아 있는 시간을 잘 관리해야 하겠습니다. 기자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남은 때를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저는 가끔 이런 생각에 멈춰 서곤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하고 말입니다.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사소한 일, 하찮은 일에서까지도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는 것이 중요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때에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끌리는 것이 있고, 내키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금년에는 신앙의 기본을 지킵시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과 십일조를 드리는 일, 그리고 선한 일에 더욱 힘쓰는 일입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을 때, “목사님, 세상을 아직도 모르고 말씀하십니까? 주일을 성수하면 목이 잘리고 살아 남아 있을 수가 없는데도요? 십일조라니요? 몇 푼 받는다고 그 중에서 십일조를 뗍니까? 적금을 들어놔야 노후가 안정되지 않겠어요? 선한 일이라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습니다. 더 이상 바보처럼 살아가진 않을테니까요. 누가 알아주는 일이며 상을 줍니까?” 이렇게 대답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목사님은 세상에서 사는 분이 아니라, 딴 세상 사람처럼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앙 생활은 신앙 생활이고, 일상 생활은 또 그렇게 적절하게 맞춰서 살아야 지혜로운 일이 아니냐고요. 우리는 그 목사님의 말씀에 대해서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라는 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런 때에 우리의 삶에 대한 이해와 자세에 대해서 낮선 것이, 어쩌면 하나님의 뜻에 훨씬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적절한 타협보다는 지나간 때를 청산하는 결연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성도들이 겪어야 할 가장 큰 도전이고 시련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까닭은 이렇습니다. 우리의 남은 때가 그리 길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삶의 내용들은, “지나간 때로 족하기” 때문입니다.

5.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저는 여러분에게 매우 어려운 권고를 드리고 있습니다. 지나간 때로 옛 삶을 정리하고, 남은 때를 새롭게 살아야 한다는 제안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뜻을 좇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살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새로운 몸짓을 한다는 것이 때늦은 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한 가지만은 분명히 믿어주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결코 손해보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수지맞는 일이라는 것 말입니다. 처음 얼마간은 손해본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직장에서 쫓겨날 위험으로 가슴 조일 수도 있을 것이며, 적금통장을 갖지 못해서 불안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쓸데없이 헛수고만 했다는 선행일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생명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계산법보다 더 확실하게 여러분을 지켜주시고 채워주시고 알아주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으로만이 아니라, 생활로도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단 한번도 자신의 약속에 대해서 우리에게 실망을 주신 적이 없으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날이 얼마인지 아시는 분이 있습니까? 10년 혹은 1년 아니면 단 하루밖에 남아있지 안은 지를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 뜻과는 다릅니다. 내가 하고픈 대로가 아니라면 하나님의 뜻에 더 가까울지 모릅니다. 

6. 주님께서 여러분과 오늘도 함께 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와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과, “내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어 주리라.”는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Posted by 박성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