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95(2001.1.11, 목요일)
찬송 : 388장.
성경말씀 : 벧전 5: 8-9.
제목 : 우는 사자 같은 마귀와 싸우라.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어제 어느 장로님과 점심식사를 함께 나누었는데, 무기력해 가는 두려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젊은 날에 가졌던 용기나 도전정신이 엷어져 가는 것을 더욱 분명히 느끼는 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가 무섭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살아왔던 일들 중에서 가장 쉽고 자신 있는 것들만을 붙드는 까닭도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아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젊은 날에는 겁없이 이리 저리 부지런히 뛰어다녔습니다. 헛된 시간도 보냈고, 헛김도 많이 뺐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는 몸으로 뼈저리게 느끼고 배웠던 소중한 경험들을 잘 살려서 뒤에 오는 후배들에게 물려줄 수 있으련만, 그것마저도 주저하는 것이 아쉽습니다. 제 주변에서도 참 배울 것이 많은 분들을 볼 수 있는데, 그 분들이 가진 생생한 삶의 보배들을 잘 정리해 두지 못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3. 오늘 말씀은 마귀와 싸울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 어느 영문학 교수님이 우리 루터교회의 세례 예식문을 보고서는 참 잘되어 있다고 칭찬했던 기억이 납니다. “마귀와 그의 하는 모든 일과 그가 취하는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기로 결심하십니까?”라는 구절이 인상적이라고 말했습니다. 마귀는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 현대인들은 이 마귀의 정체에 대해서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는 마귀라는 존재와 만나지도 않고 오직 교회에서 하나님의 반대편에 있는 어떤 좋지 않은 성품을 지닌 존재 정도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마귀에 대해서 보다 적극적인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좋은 예가 베드로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13-20)는 말씀 말입니다. 사실 이 본문의 바로 앞 문맥은, 베드로가 저 유명한 그리스도 고백을 함으로 최상의 칭찬을 받은 직후였다는 것이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천당과 지옥을 한 자리에서 경험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막8:27-38). 베드로는 교회의 열쇠를 받는 그 자리에서(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베드로가 교회의 기초라고 해석합니다), 베드로는 또 다른 이름, 사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언제든지, 아니 가장 화려하고 잘나가는 순간에까지도 마귀로 얼마든지 전락할 수 있구나하는 생각을 합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하는 존재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훼손한다면 그것은 마귀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섭리를 곡해하는 모든 경우가 마귀가 하는 구체적인 활동입니다. 마귀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대적하는 것을 위해서 존재하는 악령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마귀가 우리들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4. 어느 이단으로 정죄받은 목사님은, 모든 부정적인 문제들에는 마귀가 있다고 해서, 축귀론이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병들어도 마귀 짓이고, 사업에 실패해도 마귀 짓으로 결론지었습니다. 무엇이든 잘못되는 것에는 마귀가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어느 면에서 보면 그렇다고 인정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잘못되도록 일부러 괴롭힌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푸닥거리(exorcism)를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미 이런 사상은 무당신앙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른바 ‘마(魔)가 끼었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이럴 경우에 우리 인간 자신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 마귀 탓으로 돌리면 될 테니까 말입니다. 실제로 우리 인간은 많은 면에서 다른 누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 책임져야 할 부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얘기가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마귀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저는 우리들의 영적 생활에 마귀가 깊이 개입해 있다고 하는 말에 동의합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기 훨씬 전부터 마귀는 우리들과 교분을 맺고 있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태어나는 순간, 순진무망해야 할 어린 아이 마음에 누가 미움과 시기와 질투를 가르쳤다고 생각하십니까? 죄 가운데서 태어났다는 말은 마귀의 세계에서 태어났다는 말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귀의 생각이 우리들을 지배하는 기초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 때부터 우리는 알게 모르게 두 인격체 사이에서 혼란도 겪고, 갈등도 겪으면서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냐, 마귀냐의 갈림길에 서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독자는 투사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마귀와는 타협이 없기에 싸워야 하고, 싸우면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조용히 살 수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 편에 서 있기 위해서는 마귀와의 싸움이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저의 어머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꼭 예배를 드리려고 하면 마귀가 역사(役事)한단 말야.” 그러시면서 마귀와 한 판 싸움을 벌이고서야 교회에 가십니다. 마귀는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을 방해하고 못하도록 온갖 유혹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산산조각이 나도록 하고서 쾌재(快哉)를 부르는 것이 마귀의 가치관입니다.
5. 마귀와 싸우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 매일 새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합니다. 마귀 앞에서 물러가지 마십시오. 마귀는 여러분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통해서 접근해 올 수 있습니다. 넘어가지 마십시오. 그들의 목적은 여러분이 영육간에 철저하게 파괴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의 연약함을 돕기 위해서 곁에 서 계십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사랑은 요구하지 않는다”(위인유기 爲仁由己)
인(仁)은 무엇인가?
애인(愛人)이라고 공자가 잘라 말했다.
愛人은 무슨 뜻인가?
남을 먼저 사랑하라. 이것이 애인이다.
그 남이란 누구인가?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이것이 仁의 절정이다.
愛人은 연인(戀人)과 다르다.
연인은 한 사람을 정해놓고 사모하는 까닭이다.
연인은 사랑을 주고받아야 이루어지지만,
공자가 밝힌 애인은 사랑을 흥정하지 않는다.
흥정하는 사랑은 애증(愛憎)의 명암을 짓는다.
결혼하고 이혼하는 것이 곧 애증의 돌림이 아닌가!
공자의 仁은 노자의 자(慈)와 같다.
자란 무엇인가?
어머니의 사랑과 같은 것이 자가 아닌가?
여래의 자비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에 무슨 조건이 없다면 인에 가깝다.
사랑함은 무한대로 베푸는 것이다.
오로지 내가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요구하지 말라.
사랑은 거래가 아니다.
그러면 인의 품안에 머문다.
어디 사람만 사랑할 것인가?
이름 모를 별까지 사랑해야지.
이렇게 시인 윤동주가 절규하지 않는가?
어느 누구를 사랑하기 전에 삶을 사랑하라.
그러면 사물을 사랑해야 하는 연유를 알 수 있는 것.
그대는 자연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삶을 사랑하는 당사자이다.
자연이 없다면 아무 것도 살 수 없는 까닭이다.
실연했다고 절망하지 말라.
짝 사랑만 한다고 푸념하지 말라.
그러한 사랑은 진정 큰사랑은 아니다.
흘러가는 구름을 사랑하고,
이름 모를 나그네를 사랑하고,
길가에 그냥 피어있는 풀꽃을 사랑한다면,
사랑이 얼마나 자유인가를 알리라.
[빛나되 눈부시지 않기를], 윤재근, pp.128-9.
불외 입외(불외 入畏) : 두려워할 줄 알면 두려울 게 없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그러면 그 강아지는 어떻게 되겠는가?
분명 호랑이의 밥이 되고 말 것이다.
이른 두려움을 몰라 두려운 일을 당하는 꼴이다.
화약을 짊어지고 불길로 뛰어드는 것은 용기가 아니다.
두려움을 알고 두려움을 막는 것이 용기일 뿐,
두려움을 몰라 두려움을 얕보면 그것은 만용이다.
용기 있게 사는 사람은 만용을 무서워한다.
겁없이 사는 사람은 세상이 무서운 줄을 모른다.
그래서 죄를 짓고 감옥에 가는 자들이 사라지지 않는 게다.
두려워하는 마음을 비겁하다고 말라.
두려워하는 마음은 아는 길도 물어서 간다.
그릇이 깨어져 무엇을 담을 수 없다면 그 또한 두려운 일이다.
인생을 담아야 할 자신이 깨진다면 되겠는가!
모든 일을 살펴 조심하라. 이것이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두려워하지 않으면 두려운 일을 당한다.
두려움을 모르는 장수는 졸병을 몰살시키고,
두려움을 모르는 임금은 백성을 궁지로 몰아간다.
어른일수록 두려워하는 마음을 간직해야 하는 연유가 있다.
거느린 식솔들이 마음놓고 밤잠을 자야 하는 까닭이다.
노름꾼은 제 자식을 거지로 만든다는 게다.
노름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몰라 험한 꼴을 당하는 게다.
그러므로 두려워하라. 그것은 용기 있는 자의 준비이다.
건방진 사람, 오만하고 교만한 사람, 그들은 두려움을 모른다.
권력을 믿고 사람을 얕보는 자,
돈을 믿고 사람을 무시하는 자,
명성이 높다고 뽐내는 자,
그들도 두려움을 몰라 가볍다.
태풍을 얕보고 항해를 하면 배는 침몰한다.
거친 바다의 항해 그것이 인생이 아닌가?
인생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마주하고 매사를 조심하라.
그러면 발밑의 함정이나 덫을 거더낼 수가 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느냐? 아니다.
더럽고 추해서 피하는 게다.
인생을 더럽히고 추하게 하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없다.
이를 안다면 인생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용기를 마련한다.
두려운 일을 당해서 험하다고 절망한들 이미 늦었다.
절망으로부터 다시 거듭나자면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실패가 두려운 줄 아는 자라면 성공을 거둘 수가 있는 것.
두려움을 모라 게으름을 피우면 실패하는 것.
이것이 공평하기 짝이 없는 인생이란 저울이 아닌가!
삶을 두려워하라. 이는 삶 앞에 성실 하라 함이다.
書經에서
註 : 불(弗)은 불(不)과 같이 영어의 not과 같다.
[빛나되 눈부시지 않기를], pp.1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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