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7(2001.1.3, 수요일)
찬송 : 405장
성경말씀 : 벧전 3:18-22.
제목 : 성경으로 말하게 하라.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성경을 읽을 때 난처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때를 위해서 두 세 가지 성경해석의 지침을 알고 있으면 크게 도움이 됩니다. 

   첫째는 성경 말씀이 이상스럽게 여겨질 경우중 하나는, 성경 본문의 역사적인 삶의 자리가 우리들의 것과 다르다는데서입니다. 가령 구약에는 대부분의 등장 인물들이 첩을 두고 있습니다. 솔로몬 같은 이는 셀 수 없이 많은 여인을 두고 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의 성경의 배경은 일부다처제도를 가진 아랍문화권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혼법을 가진 유대인들은 남자가 자기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게 되면, 그의 동생이 죽은 형님의 형수와 관계를 맺어서 아들을 낳아줄 의무가 있었습니다(막12:18-23). 이런 낯선 얘기들을 만날 때, 우리와는 다른 역사적인 삶의 자리를 말하고 있구나 하고 그 배경을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성경은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목적에서 씌어진 책이라는 점입니다. 자칫 성경에서 과학적이거나 논리적인 해답을 얻으려고 하다가 실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창조에 관해서, 삶에 관해서, 구원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지만, 그 과정이나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과학적 방법), 오히려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구원은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 인간의 모든 문제들의 근원 혹은 본질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종교적인 관심사라고 말합니다. 물론 성경 안에서 사람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에 관한 에피소드를 읽을 수 있습니다. “흙으로(먼지로) 사람을 빚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사람이 되었다.”는 등의. 그러나 이런 성경 말씀은 인간의 호기심을 다 채워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에서 우리들이 기대해야 할 것은, 왜 인간이 창조되었는지, 인간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등을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전체적인 혹은 중심적인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각 구절들을 따로 떼어놓고 이해하게 되면 낭패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어느 감리교회에 다니던 가족이 잘못된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에 불화가 생겨났습니다. 소위 “일점 일획이라도 다 이루리라”(마5:18)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구절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의 뜻이 하나도 훼손되지 않고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씌어진 구절 하나 하나가 꼭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말은 얼마나 잘못된 오해인지 모릅니다. 성경 원본을 우리가 읽는 게 아니라는 것은 알고 계시지요? 번역본을 읽는 중입니다. 우리가 가진 번역본은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는지 모릅니다. 전체적인 면에서 통일성이 있고 의미는 통하지만, 일점 일획이란 측면에서는 얼마나 큰 차이가 생기는지 모릅니다. 결국 남편인 장로님을 제외하고 모든 가족들이 마가복음 16:17-18절을 믿고 청산가리를 마시고 죽게 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생겨났습니다. 여전히 여호와의 증인들은 수혈의 거부합니다. 그래서 출혈을 많이 한 산모가 죽는 일이 최근에도 생겼습니다. 그들은 “생명이 핏속에 있다.”는 레위기 17:11의 말씀에 대한 곡해 때문입니다. 내가 살겠다고 남의 생명을 빼앗을 수는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경의 전체적인 빛에서 읽고 해석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살리기 위해서 스스로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앞서 마가복음 16:17-18의 의미는 초대교회의 삶의 자리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영원히 죽지 않는 신앙을 심어주어야 할 절실한 필요에서, 박해 중에 죽어 가는 성도들을 위해 선포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3. 오늘은 길게 딴 전을 피운 것 같습니다만, 사실은 중요한 얘기를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죽으신 주님께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는 말씀에 대해서 너무나도 현저히 다른 신학이 있어서 혼란스럽기 때문입니다. 혹시 로마 카토릭교회가 믿고 가르치고 있는 연옥설이라는 것을 들어 보셨습니까? 이 구절이 그들의 연옥설의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먼저 연옥이라는 곳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곳에서 자신들이 세상에서 무엇을 했는지 불로 연단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이런 이론의 근거를 고전 13:10-15에서 가져왔습니다. 각 사람의 공력이 불로 시험을 받게 되는데, 나무나 풀로 된 집을 지은 사람은 다 타서 없어질 것이나, 금이나 은처럼 귀한 공력을 세운 사람은 오히려 더 빛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연옥에서 태울 것은 다 태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연옥에 계속 머무르고 말 사람들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중세기에는 이 연옥에 있는 자를 천국으로 끌어올려주기 위한 운동(?)을 벌인 일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면죄부를 돈으로 사면 죽은 조상들, 연옥에 있는 사람들을 천국으로 올라가도록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주장의 결정적인 잘못은 성경을 전체적인 통일성 혹은 중심성에서 읽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인 것입니다. 사람이 구원받고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사람 자신들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보혈인 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라는 중심 진리를 망각하고 있는 어리석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죽은 자들에 관해서 우리들이 궁금해하는 모든 것들을 다 채워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스토리를 만들어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런 말씀을 한 일이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구원받는데 필요한 모든 말씀을 하고 있을 뿐, 그 이외에는 큰 관심이 없는 말씀이다.”고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내가 아침에 빵을 먹어야 할지, 밥을 먹어야 할지를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구원을 위해 말씀하는 책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하겠습니다. 

4. 본문의 해석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기까지 3일 동안 음부에 내려가신 것은, 구약시대에 저주받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는 견해(로마 카톨릭)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 자체가, 영원한 죽음이며 저주라고 기세 등등하였던 지옥의 악령들을 향하여, 세상의 구주가 되신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인류의 가장 무서운 세력은 지옥 권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옥은 저주의 상징이며, 절망의 표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저주와 절망의 세력들을 향해서 승리의 선포를 하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이 세상의 구주가 되신 것을 가장 극적으로 선포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이런 해석이 우리 개신교회가 주장하는 내용입니다만, 충분하지는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림자만 보듯 희미한 것들 속에 살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주님 앞에서만 실체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고전 13:12).

5. 오늘도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으로 유익한 하루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저는 어제 신영옥씨의 찬송 CD를 한 장 구입했습니다. 새해에 첫 번째로 지불한 것이 음악을 사는 일이었습니다. 노래가 있는 마음은 평화와 감사가 솟아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찬송을 많이 부르시는 한 해를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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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2001.1.2, 화요일)
찬송 : 301장
성경말씀 : 벧전 3:13-17.
제목 : 선한 생활에 힘씁시다.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새해 첫날을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의미 있는 시간을 보     내셨기를 바랍니다. 저는 모친의 3주기 추모 예배를 9남매가 모여서 드리기 위해 고향엘 다녀왔습니다. 모처럼 조카들의 노래를 듣는 등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2. 성경에서 윤리적인 용어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에서 몇 차례 반복돼     고 있는 “선”, 혹은 “선행”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용어를 만날 때, 상당히 추상적인 의미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령 “선한 생활”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묻는다면, 대답하는 이마다 각지 각색으로 말할 것입니다. 일정한 기준 혹은 말의 뿌리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선하다느니(혹은 좋았다느니) 악하다(혹은 나쁘다)는 말은 분명한 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만드시고 보시니까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창1:4, 10, 12, 18, 21, 25, 31). 선하다, 좋았다는 말은 “제 구실을 하는 것”을 의미하고, 악하다는 말은 “제 구실을 못하다”는 의미입니다. 낮은 좋은 것이고 밤은 악한 것이라는 말은, 이원론(서로 다른 두 가지가 존재한다는 이론)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입니다만, 낮은 그 자체가 언제든지 제 구실을 하는 것에 반해서, 밤은 언제든지 제 구실을 못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옳지 않은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들인 낮은 낮의 역할을 하는 한 선한 것이고, 밤 역시 제 구실을 하는 한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적용을 해 봅시다. “아무개 권사님은 참 선한 생활을 하십니다.”고 했다면, 그 권사님은 자신의 역할을 잘하고 있다는 표현이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어떻습니까?  제 구실, 혹은 제 역할을 다하는 것, 이것이 선하고 좋은 일이라는 해석에 대해서 말입니다. 

3. 할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을 보신다면,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고 훌륭한지 모릅니다. 누가 보든     지 보지 않든지, 묵묵하게 자기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서 짊어지고 가는 사람을 떠 올려 보십시오. 언제나 있어야 할 자리에 있고, 언제나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 말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신의 역할은 완전히 잊어버린 사람처럼 살기 때문에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줄 뿐 아니라, 오히려 책임을 전가할 뿐 아니라 물귀신 작전까지 쓰면서 남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적지 안은 게 현실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들이 저마다 제 구실을 다할 때, 선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할 때 악한 것이 되곤 하였습니다. “선한 양심”이니, “선한 행동”은 마땅히 가질 생각과 당연히 그렇게 행할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생각을 할 때, 우리 중 어느 누가 있어 제 구실, 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그러나 이제 제 구실을 하도록 해 보자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분이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축하의 인사를 드리니까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저는 상받을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바로 이 말입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 적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널리 모델을 삼고자 상을 주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4. 우리는 성도로써, 구별된 무리들로써,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증거 하는      일입니다. 예수가 우리의 구주(그리스도)이심을 알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선한 첫 번째 일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맡은바 직분을 열심을 다해서 짊어져야 합니다. 가정이나 직장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여러분에게 위임된 일들을 충성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이 두 번째 해야 할 일들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할 수 있으면 더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사랑의 수고를 짊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힘써 할 세 번째 일입니다. 이런 것들은 특별한 일이 아니고 당연한 일이어야 합니다. 우리 기독인은 귀만 커져 있거나 소리만 크게 내는 사람이어서는 안됩니다. 듣는 것으로 족하고, 말하는 것으로 끝내는 사랑실천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엄청나게 큰 것을 해보려고 하지 마십시오. 어쩌면 평생동안 단 한번도 해보지 못한 체 끝날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형편에 맞게 시작하십시오. 제가 1979년도에 목사가 된지 3년 되었을 때, 몇 가지 결심을 하였습니다. 아무리 내 생활이 어려워도 나를 낳아 키워주신 부모님들(장모님 포함)을 섬길 수 있어야 한다고, 그리고 나보다 힘들게 살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찾아서 작지만 사랑의 관심을 보여주자고 하는 등. 저는 매우 미미한 섬김을 실천할 뿐입니다만, 제 주변에서는 참 자랑스럽게 살아가는 분들을 많이 보고 있습니다. 해외에 나가 선교하는 평신도 선교사를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와 정기적인 물질로 섬기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옷 한벌 사서 입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자식들에게는 검소의 미덕을 수 없이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5. 사람답게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만, 그러나 성도는 그래야 합니다. 미덥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실망과 좌절을 겪는지 모릅니다. 오면 오고 가면 가는 그런 무관심의 대상이 늘어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자기 생각밖에는 마음의 여유라고는 하나도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이 더 많아져 가고 있어서 마음이 아픕니다. 어느 여류 시인이 이런 글을 썼습니다. “당신이 있어서 저는 행복합니다. 당신을 알게 된 것이 저에게는 행운입니다. 당신은 있어야 할 자리에 항상 든든히 서 계신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누군가에게 그런 주인공이 될 수 있었으면 하면서 이 한 해를 살아가십시다. 물론 때로는 많이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험담을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혹시 그런 말을 하는 이들이 제 구실을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일축하십시오. 의례 그런 사람들은 그런 말 이외에는 할 말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제 구실을 하게 될 때 별들이 너무 아름다운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세상이 그렇게도 사랑스러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루하루가 이런 하루로 채워져 가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여러분과 함께 묵상에 참여하고 있는 김장호선생님이 지난 23일 유학지인 독일에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 녀석이 2주 앞당겨 태어남으로 인큐베이터에서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께서 오늘 이 어린아이와 그의 부모님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겠습니까? 
주님께서 오늘도 여러분과 함께 계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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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5(2001.1.1, 월요일)
찬송 : 102장
성경말씀 : 눅 2:21.
제목 : 예수 그 거룩하신 이름.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송구영신 촛불 예배를 위해 준비한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새 해를 맞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제야(除夜)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새해를 맞이하려고 합니다. 오늘 저녁 종로와 세종로 거리는 차량통행이 통제된다고 합니다. 벌써 제야의 종소리를 듣기 위해서 사람들이 종로 거리를 매우는 것도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제야라는 말은 제석(除夕)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인데, 섣달 그믐밤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조상님들은 새해 첫 날인 정월 초 하루를 맞기 위해서, 졸거나 잠이 들면 눈썹이 하얗게 된다고 해서 방마다 불을 환하게 켜 놓고 새해를 맞이하는 풍습을 지켜 왔습니다. 깊이 생각해 보면, 새해를 맞이한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꼭 같은 시간이고, 꼭 같은 날처럼 보이지만, 오늘은 우리들에게 특별한 시간입니다. 이렇듯 시간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서양에서도 우리와 비슷한 새해 맞기 풍습이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 세계에서는 독특한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월 초하루를 예수라는 한 인물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월 초하루를 예수님에게 이름이 붙여진 날이라고 기념합니다. 그리고 이 날이 예수님이 할례를 받으신 날입니다. 어린아이가 이름을 얻게 되는 날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아이가 할례를 받는 그 날입니다. 과거에 양반이나 귀족이 아니고서는 이름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에게 붙여진 이름은 마당쇠니, 길동이니, 갑돌이 끝순이 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이름이 아닙니다. 양반들이 편의상 붙인 이름입니다. 집안 허드레 일이라 하는 종놈에게 마당쇠라고 불렀습니다. 하도 딸만 낳다보니까 이제 그만 낳아야 하겠다는 뜻으로 끝순이 혹은 말자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름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게 될 때, 비로소 이름이 생겨났습니다. 훗날 기독교는 할례를 대신해서 세례를 주었고 카톨릭에서는 이 때 영세명이라는 것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살던 나라 유다에서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붙여지는 날이 있는데, 할례를 받는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할례를 받으시고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을 기념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생각해 보면 우리들이 받은 세례와 우리들이 받게 된 이름에 대한 기념이기도 한 것입니다. 

4. 예수 그 이름은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 나라 서정시인 김소월은 초혼이라는 시를 써서 유명해졌습니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라고 시작됩니다. 아마도 죽은 사랑하는 님을 부르는 처량하고 절망적인 노래입니다. 그가 부르는 이름은 죽은 사람의 이름입니다. 그러나 지난 2천년동안 우리 인류에게 가장 큰 기쁨과 소망을 주었던 이름은 예수 그 이름이었습니다. 저는 세바스찬 바흐의 “인류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노래를 좋아합니다. 얼마나 좋아했는가 하면 방송국에 신청해서 들을 정도였습니다. 예수 그 이름을 위해서 수 천 수만의 사람들이 순교의 길을 택했고, 예수 그 이름을 위해서 옥에 갇혀 온갖 수난을 감수했습니다. 예수 그 이름 때문에 손해보는 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 이름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져낼 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던 사람들이 예수 그 이름 때문에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무 소망이 없던 사람들이, 예수 그 이름 때문에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교외에 카타콤베라는 지하 교회가 있습니다. 수 만 명이 들어가서 살 수 있는 천연 석회석으로 된 지하 동굴입니다. 거기에 가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한 여인의 석상이 모로 누워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세실리야.  그녀는 당시 최고를 자랑하는 오페라 가수였다고 합니다. 황제도 사랑하는 당대 최고의 가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 그 이름에 홀려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화려한 무대보다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지하교회를 선택하였고, 결국 로마 군병에게 체포되었습니다. 황제는 그녀를 구할 마음으로 지금이라도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말하라고 권고합니다. 세실리야는 황제에게 똑똑한 말로 대답하기를 “황제 각하, 저를 위해서 하시는 말씀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위대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나의 주님이신 예수이십니다. 저는 그 분을 떠나서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저는 그 이름을 노래하는 것보다도 더 기쁜 순간이 없습니다.” 세실리아는 목이 잘려 죽고 말았습니다. 세실리아는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러나 그녀는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습니다. 예수 그 이름은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체 바꾸게 만든 놀라운 이름이 되었습니다. 

5. 저는 새해를 맞는 여러분들에게 간절히 권고합니다. 예수 그 이름만이 병든 우리 인생을 고칠 수 있고, 예수 그 이름만이 썩은 우리 영혼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 이름 때문에 링컨은 노예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어야 할 사명감을 느꼈고 그것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예수 그 이름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울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 때늦은 성탄절 카드를 받았습니다. 제게 공부했던 나이든 한 학생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 분은 대학원에 진학해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분은 신학교에 들어와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전에는 건성으로 교회에 한 두 번 나갔을 뿐입니다. 그 분이 예수 그 이름을 부르게 되었을 때, 세상은 새롭게 보였습니다. 그의 삶은 완전히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는 목적이 생겼고, 사는 방법이 새로워졌습니다. 예수 그 이름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이름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2:21). 사도들이 외쳤던 가장 힘있는 말이었습니다. 예수 그 이름, 이것이 새해를 시작하는 여러분들이 부를 이름입니다. 예수 그 귀하신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화와 기쁨이 충만하실 것입니다. 이런 은총이 여러분 위에도 가득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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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4(2000.12.31, 주님의 날)
성경말씀 : 벧전 3:8-12   
찬송 : 444장.
제목 : 사랑의 실천.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다사 다난했던 한 해를 보내는 시간입니다. 여러 가지로 감회가 교차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느 젊은 여집사님처럼, 감사한 마음으로 가득 채워진 시간을 먼저 가지셨으면 합니다.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서 마음을 열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 내 연약한 삶에도 불구하고 따뜻하게 손을 내밀   있었던 것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물론 여전히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에 아직도 부끄럽고 모자란 자신을 바라볼 뿐이라면, 그런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혹시 나는 감사할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고 원망스럽게 생각하실 분이라면, 그래도 목사님이 해보라고 하니까 그 말 값이라도 하자는 심사에서 그냥 무조건 감사하십시오. 감사는 내 힘만으로 살고 있지 않다는 고백이며, 내 뒤에 누군가의 사랑이 나를 붙들어 주고 있다는 표현이기에 꼭 필요한 고백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3. 오늘 주시는 말씀은 한 해를 마감하는 우리들에게 너무도 적합한 말씀으로 다가오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라는 말씀이 그렇고, “너희가 마음을 같이 하여”로 시작되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오늘을 위한 말씀임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에게 형제와 자매가 된 이들은 비단 혈육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물론 불 신앙 가운데 살고 있는 이들 까지도 포함해야 옳을 것입니다. 이 마지막 시간에 우리는 나 자신이 아닌, 나를 제외한 모든 이웃들을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참 좋은 친구들이며, 동료들입니다. 그들이 있음으로 해서 때로는 자극도 받았고, 열심도 낼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위로와 힘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마라톤너는 함께 다리는 다른 마라토너에 대해서 늘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 주변의 경쟁자 혹은 친구들이 없다면, 마라톤은 아마도 고통스러운 달리기에 불과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의 거친 숨소리나 힘겨워하는 몸짓, 일그러진 표정들은 바로 자신의 것과 동일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될 때, 오히려 자신이 아닌 동료에게 사랑과 이해 그리고 용기를 주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있어야 만이 자신의 길고 긴 마라톤의 여정이 가능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었지요. 지금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이웃들, 형제 자매들에 대해서, 우리가 깊은 애정을 갖고 생각할 때인 것 같습니다. 

4. “체휼하며”,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랫사람의 곤경을 듣고서 돕고 구해 주는 일이라고 국어사전에서 풀이하고 있는데, 윗사람은 아닐지라도 이웃의 어려움을 못본체 하지 않는 마음과 행동이라고 생각하십시다. “불쌍히 여기며”, 이 말투는 제가 참 좋아하는 것인데, 누군가가 이런 글을 쓴 것을 기억하는데, “가족을 집밖에서 멀찍이 서서 바라볼 때 불쌍하지 않은 적이 없다.”는 것처럼, 불쌍한 마음이 왠지 서글픈 말이지만, 그런 마음으로 서로 대할 수 있다면 얼마나 불필요한 다툼이나 신경전은 줄일 수 있을 테니까 말이지요. “겸손하며”,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그런 행동인데, 그게 말처럼 잘 되지 않지 않았는데, 우리는 이 점에서 언제나 낙제 점수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자신과 관계된 것이라면 별 것도 아닌 것을 침소봉대(針小棒大)하고, 자화자찬(自畵自讚)하기 잘하는 사람보다는, 남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자신은 감추는 그런 태도를 가진 사람은 누구나 친해질 수 있는 타입이 아닙니까?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는 대신 복을 빌어 주는” 그런 사람은 정말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아마도 이 부분에 와서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그런 억지를 부리지 않고서는 생각조차 하기 힘든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마음으로 참 싫어하는 타입의 사람이 있습니다. 교활하고 음흉한 마음으로 겉과 속이 다른 그런 분이지만, 저는 그 분에게 성탄카드를 쓸 경우에는, 마음과 다르게 항상 “주님의 풍성하신 은총이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라고 적곤 하였습니다. 마음대로라면,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가 임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해야 진실하겠지요. 적극적으로 나를 헐뜯고 욕하고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서 복을 빌어 준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성품으로 보아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복을 빌 수 있는 것은 자연스럽게 기대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억지를 부리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불가능에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내 안에 있는 더러운 악마와 싸우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요청입니다.
그렇게 해야 할 분명한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바로 이런 목표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5. 우리가 의지하는 주님은, 의인에게 눈을 돌리시고, 귀를 기우려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이며 신나는 일입니까? 다른 누군가 아니라 우리의 주님께서, 당신의 눈을 우리에게 고정시켜 두신다고 하니, 그리고 우리가 말할 때마다 그 소리를 귀담아 들어 주신다 시니,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고 힘이 절로 솟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악행 하는 자들에게는 주님의 낯을 그들에게로 향하신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낯”은 죄인에게는 저주와 죽음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형제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복을 비는 사람들을, 비록 그들이 부족하고 허물 많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항상 동행하시는 하나님으로 서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형제를 미워하고 악행 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보응하시는 두려움의 하나님으로 다가오신 다는 것을 다시금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나 여러분은 지금 이웃에 대한 인색한 마음을 몰아내는 투쟁을 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그들 이웃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 시간이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마음은 원치 않더라도, 그리고 불가능한 일처럼 생각되더라도, 그들이 복되게 살아가도록 빌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행동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께 의지하십시오.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6. 오늘 우리 교회에서는 정상적인 예배를 드리고, 저녁 11시 30분에는 여느 해와 다름없이 송구영신 예배를 드립니다. 촛불로 드리며, 오늘은 특별한 의식문을 준비했습니다. 감사 예물도 그릴 예정이고, 새해를 위한 기도를 함께 드린 후, 각자 하나님과 나누는 새해를 살아가는 기도문을 작성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오늘도 의미 있는 시간들로 마지막을 채워넣으시기 바랍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저에게 보내 주신 여러분의 사랑과 기도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의 부족한 점들이나, 허물들을 많이 보셨을텐데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를 위해서 뿐 아니라,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그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풍성하신 사랑은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새해에는 주님 은총 가운데서 좋은 일, 기쁜 일, 감사할 일들이 많이 여러분과 주변에서 일어나게 되기를 기도 드립니다. 여러분 모두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샬롬.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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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2000.12.30, 토요일)
성경말씀 : 벧전 3:1-7.   
찬송 : 286장.
제목 : 성경적 부부윤리.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난데없이 결혼식 찬송을 부르시게 되었습니다. 기혼자께는 여러분의 결혼식을 회상하는 기회로, 미혼자께는 결혼의 참된 의미를 새겨보시라는 뜻에서 그리하였습니다.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된다는 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엄청난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평생을 함께 살아야 할 사람이고, 모든 것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야 약속을 실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아내를 一心同體라고들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연 남편과 아내가 일심동체로 살아갈 수 있으며, 그런 윤리가 합리적인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결혼하는 순간에 자연적으로 이런 관계가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한 분이 있다고 한다면, 분명 큰 착오를 느끼실 것입니다. 20, 혹은 30년을 전혀 다른 가치관속에서 살아온 사람이, 결혼식이 끝나자 마자 하나의 가치관, 인생관으로 둔갑할 수는 절대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 맞추어 가는 일, 의논을 통해서든, 서로를 잘 관찰하며 협력하는 동안에서든, 이런 함께 살아가려는 눈물겨운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말입니다. 

3. 많은 젊은 신혼부부들이 겪는 문제중 하나는, 소위 주도권의 확보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속담을 보면 결혼 후 3개월은 깨가 쏟아지지만, 3년은 목숨을 걸고 싸우고, 나머지 30년은 참으면서 살아간다고 하는 말처럼, 이 주도권 싸움에 3년 혹은 10년을 소비하는 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제 주변의 어떤 분은 거의 20년이 가까이 되는데도 아직도 이 주도권 싸움이 끝나지 않아서 보기에도 민망합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성경은 일찍부터 부부간의 윤리를 설정해 두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성경의 말씀 때문에 많은 부부들이 그 권위에 복종하고 나서야 문제를 해결했던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그런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선 성경에서 남자가 먼저 창조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 다음에 그 첫 남자인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토대로 해서 여자인 하와를 만드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기에 남자와 여자는 처음 시작부터 하나에서 출발했던 것입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궁금하던 내 분신을 다시 찾는 예식”이 바로 결혼식인 셈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남자와 여자를 함께 인생 길을 가는 동반자로 묶으시면서, 남자에게는 대표권을 주셨고, 여자에게는 동역권을 주셨습니다. 분명 1세기 전까지만 해도 남존여비라는 잘못된 사상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자들이 불평등한 대우를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너무 오랜 시간동안 그런 악습아래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사상이 들어오면서부터 이런 악습을 고치려는 노력이 일어났고, 불과 50여년 전부터 여성권익을 찾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그래서 남녀에게 일할 수 있는 동일한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고, 동일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였고, 자신의 의견을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헌법에서도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다는 평등권을 세우게 하였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고 잘된 일입니다. 

4.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도권의 문제인 것입니다. 평등한 사람이기 때문에 같은 권리 같은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사회주의 사상이 바로 이런 평등이라는 주제를 신봉합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내세웁니다. 이 때 가장 반겼던 사람들이 하층 계급의 사람들이었고, 여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주장은 보완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분명 사람은 그 인격이나 가치에서 똑 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그의 능력과 역할에서는 구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차바퀴 굴러가는 소리를 내는 사람이 미성(美聲)의 소프라노를 하겠다고 고집한다면, 이런 사람은 제 분수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논리적인 사고력이 없는 사람이 회계사를 하겠다고 발버둥친다면 곤란한 얘기가 아닙니까?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적합한 재능에 따라서 할 일을 맡아야, 자신도 보람있고 남들도 괴롭지 않은 삶을 살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다 사장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며, 반대로 아무도 사장이 되어서도 안 된다는 말은 문제가 됩니다. 누군가는 사장이 되어야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중간 간부가, 그리고 많은 다른 사람들은 사원으로 그 기업체를 함께 꾸려가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남편과 아내에게 이런 의미의 역할 분담을 하고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남편에게는 대표권을 주었습니다. 아내에게는 그 남편을 돕는 동역권을 부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둘 다 대표자로 행사할 수는 없다고 말씀합니다. 까닭은 “사공이 둘이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 속담처럼 항상 분쟁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대표권자가 독재자형이라면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는 경영자형의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함께 의논하고 함께 연구해서 최선의 길을 만들어 가는데 앞장서는 그런 대표자 말입니다. 어떤 경우에 아내가 대표권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영국의 대처는 여성으로써 수상을 역임했던 이른바 여장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정에서만큼은 남편에게 좋은 동역자로 살았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정이 산으로 올라가는 불행을 막는 유일한 길일지 모릅니다. 

5. 성경에서 왜 남성과 여성에게 이런 차별성 짙은 역할을 맡기고 있는가 하고 반문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일반적으로 남성은 감성보다는 이성에 호소하는 사고력을 가졌고, 여성은 감성적인 사고력을 가진 점도 한가지 이유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대통령 후보가 유세 중에 자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눈물을 흘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다음 날 신문 사설은, 미국의 대통령이 자기 감정을 조정하지 못하는 여성 스타일이라면 어떻게 다른 나라 지도자들과 국가 비밀을 유지하면서 국가 이익을 위해서 일할 수 있겠는가고 힐문했다고 합니다. 남성들의 냉정한 성품이 대표권자로서는 적합하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저의 생각이 옳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잘 이해가 될 때까지는 성경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대안의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표권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는 여성들이 이혼을 하겠다면 말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아내와는 평생 고통스런 투쟁밖에는 기대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남편을 높이 세워 줄 수 없는 아내라면 그는 이 세상에서 어느 누구와도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없는 독불장군 이외에 다른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너무 심한 표현이었는지 모릅니다. 여기에서 남성들 혹은 남편들이 꼭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아내는 자신의 종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그런 남편과 일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고통밖에 없을 것입니다. 남편은 함께 하늘의 유업을 물려받을 귀한 친구와 동료로 아내를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자신과 함께 행복한 삶을 나누어 가질 가장 가깝고 친한 동반자이기 때문입니다. 

6. 주도권 싸움은 이미 끝났습니다. 성경은 대표권을 남성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함께 가정과 사회를 위해서 손을 맞잡고 살아가는 동역자입니다. 대표권은 어떤 힘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부분을 책임진다는 의미에서 화려한 이름이 아니라, 오히려 무거운 멍에일 뿐입니다. 우리들의 모든 가정들이 남편과 아내의 윤리가 지켜지기를 기도 드립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샬롬.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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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2(2000.12.29, 금요일)
성경말씀 : 벧전 2:18-25. 
찬송 : 358장.
제목 : 의로운 고난.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고난이라는 주제는 하루도 우리들의 일상에서 떠나지 않는 보편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고난이 무엇인가 잘못된 원인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잘못 생각했거나 결정한 결과일 수 있고, 게을렀거나 실수에 의한 것일 수 있습니다. 교회에 거지가 자주 찾아온다고 말하니까, 냉정하게 뿌리치라고 말씀하시던 분이 생각납니다. 그런 사람들은 더 고생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일할 것이 많은 세상인데 어째서 빌어먹느냐는 것이지요. 게으르거나 쉽게 살아가려는 잘못된 습관을 고쳐야 할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금만 생각을 바꾸고 조금만 행동을 고친다고 하면, 고난의 폭을 얼마든지 줄여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고난은 할 수 있는 대로 받지 않아야 하겠고, 받더라도 힘써서 많이 줄여 가야 할 것입니다. 부끄러운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3. 그런데 오늘 우리가 묵상할 주제는 의로운 고난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애매한 고난”이며, “선을 행하다가 당하는 고난”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과 같이 누군가를 위해서 목숨까지 내놓는 고난입니다. 의로운 고난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들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 갈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런 의로운 고난의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어야 하겠으며, 또 그런 분들에게 감사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저의 교우 가운데 한 분을 예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가끔 만나게 되면 허리와 다리 등 관절에 고통이 있다고 호소하십니다. 얼굴이 퉁퉁 붓기를 잘 합니다. 그러면서도 자녀들을 위해서는 너무 많은 고생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다 좋은 직장에 다니며 잘 사는데도 어머니에게 기대하는 것이 많은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가족들이 무관심한 것인지, 어머니의 고통을 덜어드리려는 구체적인 노력이 없는 것 같습니다. 너무 마음이 아파서 자녀들에게 간접적으로 어머니를 돌보아 드리라고 말씀해 보았고, 심지어는 그 교우에게 나와 같이 병원에 가서 제대로 된 진찰을 받아보자고 제의도 해 보았습니다. 아직도 고통을 호소하고 계십니다. 이런 얘기는 흔한 우리들 주변의 얘기가 아닙니까? 바로 우리들의 어머니 모습입니다. 그 분들은 자녀들 일이라면, 사서라도 고생을 떠맡으시는 분들입니다. 이런 우리 어머니의 고난 때문에 오늘 우리들의 삶이 건강하고 평안한지 모릅니다. 의로운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분들이 어찌 이런 분들뿐이겠습니까?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에 일선 고지에서 나라를 지키는 병사들이 그렇고, 질병과 싸우기 위해서 온갖 고난을 감수하는 의료를 맡은이들, 불우한 장애자들의 친구가 되어서 그들의 연약함을 대신 짊어져 주는 자원 봉사자들이 이런 사람들입니다. 저는 남다르게 고난의 길을 자원하는 분들을 보면서 이런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은 아직도 길이 참아 주시는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4. 오래 전 얘기입니다. 제가 부산 YWCA에서 성경반을 지도하고 있을 때, 맹인 대학생의 요청으로 점자 교육을 시행하게 되었습니다. 자원 봉사자들을 모아 훈련을 시키고, 맹인 학생과 결연을 맺어서 점역이나 녹음 봉사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영어책을 읽어 주는 일이나, 시를 낭독해 주어야 하기에, 부득불 가족들이 다 잠든 시간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꼭두새벽에 추운 골방에 들어가서 몇 날 동안 녹음을 했노라 는 봉사자의 말을 듣고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그 때 참여하였던 분 가운데 한 분은, 적극적으로 고난을 자원하셨는데 어느덧 이런 고난의 길을 20년 가까이 걸어가고 계십니다. 얼마 전에는 어느 방송국의 칭찬 주인공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릅니다. 그 분은 남은 일생을 맹인과 장애자들을 위해서 살겠다고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자랑스러운 제자 때문에 제가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잘 먹고 잘 입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 말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잘 사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저 편하게 사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일인 것으로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수입이 많고, 남들 앞에서 품위 있게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베드로서의 기자를 통해서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의로운 고난을 짊어지라고 말입니다. 어느 시인은 “둥지에서 떨어진 참새 새끼 한 마리를 제 자리에 올려놓아 줄 수만 있어도, 헛된 삶은 아니다.”는 시를 썼습니다. 누구나 자신을 돌보며 살아갑니다.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작은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 줄 수 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아름다운 삶이 만들어져 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5. 저는 예수 믿고 천당 가자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짧은 말속에는 담아야 할 것들이 분명히 있다고 믿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속에는, 사랑과 관심과 의로운 고난과 같은 것들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야 그 믿음이 생명이 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받는 것으로 족하거나 끝나는 게 아니라고 믿습니다. 세상을 향해서 “축복의 근원” 노릇을 해야 할 과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계십니다. 왤까요? 여러분이 지금 붙잡아 일으켜 세울 연약한 이웃을 돌보라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여러분은 많은 것을 배우셨습니다. 그것은 무식하고 둔한 이웃들이 바보처럼 속고 살지 않도록 그들을 깨우치는 일을 하라는 하나님의 축복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사람들이 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의로운 고난이 있는지를 항상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비록 작은 것이라도, 누군가를 위해서 나눌 수 있는 그런 삶을 만들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마음만 가진다면 너무도 할 일이 많은 우리들 인생입니다. 헛되고 어리석은 것들에 마음쓰지 말고 의로운 고난에 동참하십시다. 여러분에게 쉬지 않고 이런 아름다운 초청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거절하지 마시고 귀를 기우려 주십시오. 

6. 어제 장로님을 떠나 보냈습니다. 교육관을 지을 때, 큰 돌덩이를 치우기 위해서 대형 선풍기를 끌어다 놓고 잠시 땀을 닦고 있는 장로님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그 분이라고 어찌 허물과 잘못이 없겠습니까만, 마지막 10년은 너무 열심히 의로운 고난을 짊어지고 사셨습니다.  우리는 그 아름다운 추억만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여러분의 생활 속에 의로운 고난이 있는지를 확인해 보시기를 바라면서,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길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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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1(2000.12.28, 목요일)
성경말씀 : 막 10:42-45. 
찬송 : 376장.
제목 : 섬김의 삶.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의 묵상 자료는, 오늘 오전에 드릴 고 김성일 장로님의 장례예배에서 선포하게 될 설교입니다. 

2. 어떻게 사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이며, 동시에 잘 사는 것일까? 하는 주제는 우리들의 마음 안에서 항상 떠나지 않는 물음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 저는 이런 우리들의 삶의 의미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람마다 삶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다르고, 꿈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람직한 삶이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규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 모릅니다. 이런 때에 가장 지혜로운 방법은 모델을 찾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시대를 초월해서 역사에 향기를 풍기는 삶을 살았던 분들을 주목해 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우리 기독인들에게 있어서 삶의 모델이 될 만한 분으로는, 바울이나 어거스틴 같은 분들이나 루터와 마더 테라사와 같은 분들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위인들의 삶에서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넘치는 사랑을 품고 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사랑을 가슴에 품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섬김이라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으로 사는 것 혹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란, 사랑으로 충만한 마음을 갖고, 그 사랑을 몸과 생활속에서 섬김으로 실천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우리의 생각을 분명하게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3.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은 저마다 야심을 갖고 주님을 따르고 있는 제자들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훗날 그런 제자들의 야심이 표출되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제자들 역시 예수님이 왕이 되실 줄로 알았고, 그 때에 예수님의 오른편 자리와 왼편 자리에 앉게 되기를 꿈꾸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일반 세상 사람들과 하나도 다를바 없이, 자신들의 꿈과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 주님을 따라 나섰다는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생각해 보면, 자신들의 신분이 올라가고, 생활의 품격이 높아지는 것은, 소박하면서도 자연스럽기까지 한 꿈일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 보다 높이 올라가고 싶은 것이나, 다른 사람보다 더 큰 권세를 누리는 생활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출세와 성공적인 인생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생각을 나무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신분 상승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런 범주에 들어 있었다는 것을 예수님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조용히 입을 여셨습니다. “너희가 아는대로, 민족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 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러왔다.”(표준 새번역) 예수님은 제자들과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장 아름다운 사람다운 삶을 살기를 원한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을 딛고 위로 올라가서 그들을 지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서,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성공적인 삶을 살수 있는 길이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한 두 사람만이 성공하고 주인공이 되는 역사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성공적인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것은 저마다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고 온갖 음모와 투쟁을 일삼는 것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종이 되는 길을 가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저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니, 주 하나님의 영이 내게 임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여 주고”라고 말씀하셨는데, 왜 기독교의 복음이 가난하고 병들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는지를 예수님의 말씀에서 깨닫게 된다고 말씀을 드립니다. 누구든지 그리고 모든 사람이 다 성공할 수 있는 길, 그리고 모든 사람이 다 성공할 수 있는 길, 모든 사람이 다 자랑스러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란,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라는 말씀을 성경 말씀에서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그런 삶을 살았던 고 김성일 장로님을 추모하며 여러분과 함께 은혜의 시간을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곁을 떠나가시는 김성일 장로님의 생애는 보기에 따라서는 참 외롭고 고단한 일일생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또 다른 한 편에서는 분명히 참된 의미에서, 성공적인 삶을 향해서 열심히 달려가신 자랑스러운 삶이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장로님께서 자신보다 더 연약하고 힘겨워 하는 사람들 곁을 지켜 주면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그들의 아픔을 나누는 섬기는 일에,자신의 모든 힘을 다 쏟아 부어넣은 성공적인 삶을 사신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김성일 장로님과 26년간 가깝게 지냈던 사이입니다. 그 가운데서 18년간은 담임 목사와 집사로 혹은 장로의 관계로 교제하였지만, 우리들 사이에는 그 이상의 교분을 맺고 있다고 서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 보다는 15년 년배이신데도 항상 저의 말이나 생각에 대해서 존경을 아끼지 아니하였고, 저의 많은 부족한 점을 감싸주셨고 격려를 아끼지 아니하셨습니다. 교회와 관계된 일 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저의 집안의 일들까지도 항상 챙겨주는 깊은 관심으로, 마치 저의 가족중의 한 분처럼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김성일 장로님에 대해서 제가 조금은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김성일 장로님은 1951년 1.4 후퇴 때, 혈혈 단신으로 월남하신 이산 동포이십니다. 아는 이 하나없고, 의지할 곳 하나 없는 남한 땅에 오셔서 일가를 이루시고, 꽃과 나무를 사랑하는 평범한 소시민으로 사신 분입니다. 젊은 날에는 민족 종교인 천도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독교의 구체적인 사랑실천이 마음을 감동시켜서 기독교로 개종하시고는 한번도 한눈 팔지 않고 이 외길만을 걸어가셨습니다.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크고 작은 일들을 충성스럽게 짊어지셨기에, 우리 교회는 16년 전에 장로님으로 선출하여, 앞에서 교회를 끌고 나가도록 책임을 맡겨드렸습니다. 장로님께서는 장로로 장립한지 5년후부터 당신의 삶에 대해서 참으로 진지하게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 계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점점 더 깊이 쌓여갔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88 서울 장애자 올림픽이 끝나고, 어느 봉사단체가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라는 것을 만들었다고 초청장을 보내왔습니다. 그 때에 장로님들과 함께 그 창립 총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사는 것과 죽는 것, 그것이 서로 다른 일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으셨다고 하였습니다. 그 깨달음으로 장로님의 마음은 흥분하였고, 곧 바로 10주간의 호스피스 케어 자원봉사자 훈련을 받으셨습니다. 그 교육을 마치자 마자, 충북 음성에 있는 꽃 동네 봉사를 자원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저 역시 한 순간의 생각이려니 하였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대 부분의 사람들이 한 두 번 선한 일을 하는 것으로 제 몫을 다한 듯 생각하는 것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 가운데서 확실히 다른 몸짓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처음 얼마동안은 몇 사람이 다니다가 나중에는 버스 한 대를 대절해서 다니셨습니다. 10여년 전만해도 자원봉사라는 것이 생소하였습니다. 비록 한 달에 한번 꼴이지만, 40여명의 봉사자를 불러 모으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버스 대절료를 마련하는 것도 쉽지 않은 때였는데도 그 일을 5년동안 계속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서울대학 병원의 호스피스 요원의 하나로 온갖 궂은 일들을 맡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장로님의 봉사하는 마음에 덜찼던지 우리 교회안에 자원봉사단체인 선한 사마리아회를 만드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고, 그 초대 회장으로 4년간 목욕봉사에 참여하셨습니다. 혹시 서울대학 병원을 이런 저런 일로 방문하신 분들은, 병원내에서 장로님의 바쁘게 뛰어다니시는 모습을 보신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한 주간에 4-5일씩을 장로님은 그곳 병원에서, 연약한 사람들을 위하여 피고름을 닦아내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고 헌신적으로 사랑의 섬김을 실천하셨습니다. 마침내 2년전 부터는 서울대 자원 봉사회원 400여명을 대표하는 회장으로 책임을 짊어지고 수고 하셨습니다. 

5. 오늘 저는 인생의 달려갈 길을 다 다릴신, 한 분의 인생 선배를 앞에 모시고 그 분의 삶의 역정을 되돌아 보았습니다. 이 분은 예수님의 말씀,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추한 모습으로가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서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에, 몸과 마음으로 응답한 흔치 않은 삶을 사셨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마지막 토막을, 남을 섬기는 삶을 실천하시다가 이 세상을 떠나 가시는 우리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김성일 장로님의 앞 길에 주님의 은총이 있으시리라 확신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장로님을 따뜻하게 영접해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섬김의 삶, 이것은 오늘 우리들 모두에게 주어진 잘 사는 비결이며, 성공적인 인생의 척도가 되는 것임을 우리 김성일 장로님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듯 합니다. 장로님께서 남겨두신 조정진 권사님과 김효준 집사님,  김효철 집사님, 그리고 김영애 전도사님 가족 여러분위에 주님의 다함 없는 은총이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지어다. 아멘.”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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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0(2000.12.27, 수요일)
성경말씀 : 살전 4:13-18.
찬송 : 460장.
제목 : 죽음을 사랑하라(?).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어제 오전 11시 50분, 우리의 사랑하는 고 김성일장로님이, 우리 곁을 떠나가셨습니다. 그 동안 가족까지도 잘 모를 만큼 육신의 아픔이 컸었다는 게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지난 추석절에 옥상에서 내려오다 계단 밑으로 떨어진 후, 인대파열로 고생하시는가 했는데, 소화가 안돼는 등 위장 장애로 계속 고통을 겪으시면서도 변함없이 교회와 병원(자원봉사활동)을 오가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의지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연약함으로, 지난 한 주간동안 집에서 힘든 시간을 가지시다가 24일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이송, 끝내 우리 곁을 떠나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는 28일 오전 11시에 옥수동루터교회장으로 장례예배를 드릴 예정입니다. 오늘 저는 한 인간의 삶을 추모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혹시 이방인처럼 느껴지실 분에게는 미안한 말씀이 되겠습니다만, 깊이 생각해 보면 무관하지만은 않은 주제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 저는 김장로님과 1975년부터 가깝게 지냈습니다. 실개천이 흐르는 실향 난민촌이었던 옥수동 자택을 방문, 족보도 없는 강아지를 선물 받았던 것이 엊그제 같습니다. 서울 임마누엘 교회를 도봉동으로 이주하고 천막교회에서 5개월을 지낸 후, 장로님께서 감독하시며 지은 오늘의 도봉교회 교육관과 사택으로 이사하던 기쁨도 엊그제 같습니다. 부산 신일교회 개척자로 연고도 없는 부산 개금동으로 내려가서 첫 임시교회를 짓던 때나, 본당을 다시 짓던 때에도 참여하셨고, 인생의 선배로써 저를 격려해 주셨던 것도 엊그제 같습니다. 장로님은 우리 교단과 많은 일을 함께 하셨습니다. 지역 교회를 세우는 일이나, 루터신학대학교 본관과 교수 사택, 기숙사를 짓는데 참여하셨고, 선교사 사택과 베델회관을 짓는데도 많은 공헌을 하셨습니다. 그 뒤 장로님이 계시는 옥수동교회로 옮겨와서 18년을 함께 교회를 섬기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겉모습과는 달리 옛날 건축 자재와 건축 기술 때문인지는 몰라도 교회당이 전체적으로 부실하여서 매년 연례행사처럼 손을 보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여름에는 너무 덥고 겨울엔 너무 추워서 예배를 드리는 일이 고행하는 시간과도 같았습니다. 처음 몇 년동안은 교회당 수리에만 정신을 쏟아야 했습니다. 내부를 교회 생김새에 어울리도록 인테리어 공사를 하였고, 종탑을 전면적으로 수리할 때, 장로님과 함께 땀을 흘렸던 것도 엊그제 같습니다. 어려운 교우들을 독려해서 당시로써는 엄두도 낼 수 없는 150여평에 달하는 교육관과 사택을 지을 때에도 장로님은 많은 용기와 사랑의 수고로 앞장 서 주셨습니다. 교회가 매년 헌혈을 할 때에도 나이를 속이면서까지 헌혈에 동참해서 다른 교우들에게 참 사랑과 섬김을 본 보여 주시던 장로님, 장애자 올림픽이 있은 다음 해부터 자원봉사(호스피스 케어) 훈련을 전문 기관에서 받으신 후, 곧 바로 충북 음성의 꽃동네를 시작으로 서울대병원 그리고 정원 노인요양원에서 자원봉사자로 새로운 삶을 실천하셨습니다.

4. 장로님은 강직하신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교회 재정부장을 맡으셨을 때는 너무도 엄하시게 재정을 관리하시는 때문에, 교사들이 힘들어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입니다. 아마도 장로님은 옛 세대가 다 그러했듯이 아끼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장로님의 삶의 역정을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1951년 1. 4 후퇴 시에 단신 월남하셨는데, 이유는 공산당이 싫어서였습니다. 그리고 곧 바로 남한 군대에 입대하셔서 제주도에서 훈련을 받으시고 수 없이 많은 전투에 참가하셨으며, 휴전을 얼마 앞두고서 부상을 받으셨습니다. 일가 친척 하나 없는 남한에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자수성가한 이들의 특징중 하나는 자기 주장이 분명하고 강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삶의 환경이 자신도 모르게 강한 이미지를 만들어 가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5. 제가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모임”이 창립한다는 말씀을 드렸을 때, 기꺼이 창립총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삶과 죽음, 그것은 서로 다른 주제가 아니라, 하나의 주제라는 것을 새롭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셨던 것 같습니다. 그 뒤 자원봉사자 훈련에 기쁘게 참가하셨고, 배운 대로 몸과 마음으로 실천에 옮기기를 12년, 장로님은 삶을 죽음처럼 사셨고, 죽음을 삶처럼 짊어진 말년을 만들어 가셨습니다. 죽음은 멀리 있는 낯선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 곁에서 죽음의 얘기는 일어나고 있고, 매일 뉴스를 통해 듣고 보는 친근한 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자신과는 동떨어진 다른 사람들의 얘기려니 하고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삶을 사랑하듯, 죽음을 사랑하는 것, 그것은 결코 염세적이거나 부정적인 생각일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삶과 죽음은 손바닥과 손등처럼 같은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죽어서 산다.”는 말을 실감할 수가 없었는데, 요사이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를 알 것도 같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고 했는데(시90:10), 우리의 삶의 길이가 삶의 전부라고 하면 너무도 허망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죽어서도 말하는 이들을 볼 때, 어쩌면 죽은 다음에야 빛을 발하는 분들을 만나면서, 죽음이 전부가 아니고, 더욱 죽음이 한 인간의 끝이 아님을 배우게 됩니다. 

6. 데살로니가 교회는 임박한 종말사상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것을 눈으로 볼 자가 있을 것”이라는 가르침 때문에, 주님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줄로 생각하고 염려하고 있을 때, 바울 사도는 죽음과 신앙, 죽음과 부활을 다시금 가르쳐야 했습니다. 죽은 자들이 산 자들보다 결코 신앙이나 생활에서 잘못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주님을 만나는 일에 있어서 우선권이 주어져 있다고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죽지 않고서 주님을 만나지 못할지 모릅니다. 먼저는 자기중심적인 더러운 욕심을 죽여야 하겠고,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을 앞세우는 것을 죽여야 할 것입니다. 내가 살려고 버둥치는 것을 죽여야, 주님께서 내 안에서 살아 계실 것입니다. 죽음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은 더욱 삶에 충실할 것이고, 삶의 의미를 엮어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죽을 각오로 살라는 결연한 의지를 배수의 진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는 그런 배수의 진을 치고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죽음은 아주 가까이 서 있습니다. 항상 죽을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죽음에는 순서가 없다지 않습니까? 그러나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기 때문에 살아도 죽어도 여전히 향기를 풍길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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