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61(2000.12.8, 금요일)
성경말씀 : 빌 4:10-13.    
찬송 : 433장.
제목 : 문제풀기.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어제는 사람이 그리운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자식들이 보고싶고, 손자가 보고싶은 사람들이며, 그 옛날 함께 쑥캐던 친구들이 그립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도 멀리만 있다고 말했습니다. 파주 근처에서 평생을 살았다는 한 아주머니는 좌골신경통을 앓고 있는데, 손이며 다리가 마비 현상이 와서, 부지런히 운동을 해야한다는 말에 눈물겹도록 걷고 또 걷고 있었습니다. 말씀을 많이 하는 분과 입을 꼭 다문 체 계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소리를 높여서 말을 많이 하도록 권고합니다. 정지되어 있는 삶이 서서히 생기를 되찾고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데 분명한 것은 말하기의 힘이 효험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2. 최근 근 한달 동안 미국 대통령 선거결과에 대해서 온 세상이 시끌벅적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미국이 아닌 것 같은 그런 생각을 가졌습니다. 개발도상 국가보다도 미숙한 면을 이곳 저곳에서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미국인들이 문제를 풀어 가는 방식에 대해서 새로운 눈을 뜨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사고방식 혹은 민주적인 문제풀기를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번 선거결과에 대한 미국인의 문제풀기 방식은, 우리가 길들여온 것과는 너무 다르다고 하는 점입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우리들이 미국인들을 얕잡아 보는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미국인들이 보여준 방식은 문제를 다 풀기까지는 덮어버리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문제투성이의 세상을 살아가는데, 대부분 우리 식은 문제가 터지면 욕을 하고 비난을 하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쉬 쉬 쉬 하는 쪽으로 진행하다가 어느 날, 정치적인 결단이니, 특단의 조치니 하는 문제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외부 힘으로 덮어버리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갑니다. 보십시오. 신문에서 대서 특필하였던 사건 사고들이 불과 10여일 지나가면 용두사미가 되고, 적당한 선에서 덮는 것으로 문제를 풀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결과적으로 수면으로 올라오지만 않을 뿐, 여전히 언제든지 악재로 항상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미국 언론이며 재판부며 그리고 미국 국민들이 인내심을 갖고 문제를 풀기까지는 부끄럽지만, 수치스러운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문제를 덮어버리려고 하지 않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합리적인 해답을 찾아내려고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물론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올지는 미지수이고, 그런 바람직한 결과가 그렇게 중요하다고도 생각지 않습니다. 문제를 덮어 버리거나 얼머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그런 진지한 문제풀기의 자세만으로도 충분히 존경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3.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특히 13절에 대해서는 너무도 좋아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모든 문제 풀기의 공식이 여기에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능력을 주시는 그 분 안에서” 만사가 형통하다 는 공식 말입니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이런 공식을 어떻게 대입하는지, 실제적으로 문제 풀기에서 어떻게 해야 바른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살피거나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 낙관론이나, 불가능을 극복하는 그리스도의 가능성에 대해서만 몰두하고 있을 뿐, 신앙의 삶에 적용이라는 차원에서는 너무 허술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도 만능론을 가르치는 목사님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바른 기도이며 성숙한 기독인의 기도인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바울 사도에게서 다른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처할 줄도 알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주목할 말씀은 순경(順境)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지만, 설사 역경이 닥쳐온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서도 감사할 이유를 가지며 원망과 불평보다는 하나님의 깊고 넓으신 뜻을 이해하려고 힘쓴다는 말입니다. 어떻습니다. 여러분을 포함해서 너무도 많은 기독자들이 제 뜻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사업이 번창하고 가족들이 모두 건강하고, 아이들은 탈없이 잘 자라주는 등등 말입니다. 오직 그 목표 하나 만을 가지고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기도한대로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눈을 뜹니다. 오히려 반대 현상이 생길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실망하곤 합니다. 저는 가난한 딸이 시집가서 고생 고생하면서 친정 어머니를 더욱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일이 있습니다. 이 딸은 아직 소원을 성취하진 못했을지 몰라도, 정말 소중한 진리를 체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위대한 어머니의 모습 말입니다. 주님 안에서 나는 그 형편의 내용과는 아무 상관없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바울 사도와 여러분 자신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루터의 말을 인용한 일이 있었습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지옥에라도 가겠다.” 학생들은 왜 지옥이냐? 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가는 길은 언제나 만사 형통이어야 한다는 공식이 그들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은 오히려 햇빛 속보다는 어둡고 냉랭한 골짜기가 더 많을지 모릅니다. 제가 중학교 다닐 때 교회학교 선생님께 배운 노랫말에 [Walking with Jesus]가 있습니다. 간단한 영어이니까 한번 기억 나는 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Walking with Jesus, walking everyday, walking all the day. Walking with Jesus, walking with Jesus alone. Walking in the sunshine, walking in the shadow, walking everyday, walking all the day. Walking with Jesus, walking with Jesus alone." 함께 부르고싶은 노래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라틴어 노래는 [도나 노비스 파쳄]이 있고, 헬라어 노래 [키리에 엘레이손]이 있습니다.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날이 속히 왔으면 합니다. 

4. 자족을 배우지 못하는 한, 여전히 문제를 덮어 버리는 상태에 있는지 모릅니다. 질병과 고통 속에서도, 기쁨과 즐거운 기회를 얻고서도 그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귀한 뜻을 깨닫고 감사하며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는 한, 우리가 외치는 신앙의 구호나, 신념은 다 부질 없는 문제 덮기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지 않아서, 교회 섬기는 일이 재미없다.”고 까지 말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 건강할 때에도 감사하고, 병들었을 때에도 감사하는, 그런 어떤 처지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문제풀기의 바탕이 그 마음속에 가득 번져 오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지금 일주일째 감기 기운을 갖고 마음이 무겁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감사드릴 것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아내의 정성스런 사랑을 받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고, 연약한 이웃들을 위해서 같은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깨달음은 어떤 처지 형편에서도 자족할 수 있었다던 바울 사도를 배우는 일입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에게 이런 큰 축복이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5. 내일 임구원목사님께서 귀국하실 예정입니다. 편안하고 즐거운 여정이 되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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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60(2000.12.7, 목요일)
성경말씀 : 빌 4:8-9.      
찬송 : 523장.
제목 : 종말론적 생활태도가 필요합니다.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성경에서 우리는 종말이라는 말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세상 끝날'이라는 뜻인데, 아직 세상 끝이라는 말을 사용하기에는 이르지 않은가는 생각에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말입니다. 이런 우리의 기분과는 달리 예수님이나 세례 요한, 그리고 사도 바울은 줄기차게 이런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종말은 우리들에게서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닌 때문이며, 또한 종말은 빨리 생각할수록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언급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은 일들까지도 이 종말이라는 말 때문에, 정 위치를 세울 필요를 느끼게 하는지 모릅니다. 바울 사도는 종말론적인 자세에 대해서 여러 차례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 읽은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기대되는 일들이 있는데, 무슨 일이든 진실되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바르며, 깨끗하며, 사랑스러우며, 칭찬들을만 하며,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주며, 널리 알리며 살고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들이 살고 싶어하는 덕목들과는 얼마나 편차가 큰 얘기들인지 실감할 수 있습니까? 마치 우리들과는 낯선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의 얘기들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3. 종말론적인 생활 태도가 필요합니다. 조금 전 말씀 드린 대로 우리는 사용하는 용어에서부터 큰 세대차를 느끼고 있는지 모릅니다. 참, 경건, 정결, 사랑, 칭찬, 덕, 기림 같은 말은 컴퓨터 시대의 용어가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말은 종말론적인 용어입니다. 가령 종말론적인 말로 부적합 것은, 성공, 출세, 1등, 부자, 호화스런 삶 같은 말입니다. 전혀 이런 말은 낯선 용어입니다. 우리 나라안에도 하룻밤에 500만원 하는 호텔 방이 있다는 얘길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누군가는 그런 방을 사용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런 사람은 앞서 얘기한 종말론적인 용어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종말의 날에는 하나님 앞에 벗은 몸으로 서게 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그토록 뽐내며 자랑스러워하던 겉치레를 다 벗어 던지고서, 빈 몸으로 주님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참, 경건, 전결, 사랑, 칭찬, 덕, 기림과 같은 용어들을 사용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 날이 오기 전에, 지금부터 그 날과 같은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 바로 종말론적인 삶입니다. 마치 종말의 날처럼 사는 것, 이것을 종말론적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혼돈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겉치레에 해당되는 이 시대의 가치관을 과소평가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 까닭은 종말론적인 용어들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두 가지 상반되는 말을 동시에 강조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진실 되게 살고자 하면서 출세 지향적일 수는 없습니다. 둘 중 어느 하나는 순서가 매겨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제 이익만을 챙기는 부자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삭게오는 재산상의 엄청난 손해를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열심히 긁어모았던 재산을 태반이 넘게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을 위해서 내 놓았기 때문입니다. 

4. 어느 것이 잘 사는 삶인지 더 이상 방황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듯 살아가는 것이 잘 사는 삶입니다. 마지막 보는 사람처럼 바라본다면 얼마나 애틋하겠습니까?  마지막 유언처럼 남기는 말이라면 결단코 가슴을 후벼파는 비수 같은 독기 어린 말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 식탁이라면 밥 알 한 톨 한 톨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마지막 순간까지 도토리 키재기식으로 허세나 부리고, 힘 자랑하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이 마지막 순간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는 아침 잘 먹고 나선 젊은이가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는 얘기들을 보기도 들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남의 얘기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하든 참되게, 경건하게, 깨끗하게 사랑스럽게, 사랑하며, 칭찬하며, 유익을 주며, 아름다운 얘기를 널리 알리며 그렇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잘 사는 모습입니다.

5. 성탄절이 가까워 오고, 연말이 되니까 마음들이 바빠진 것 같습니다. 서두르지 말고 차분하게 일의 순서를 정하고 하나 둘 매듭을 지어 가시기 바랍니다. 낮은 기온으로 감기에 고생하는 이들이 늘었습니다. 서로 위해서 기도합시다. 오늘은 목욕 봉사하는 교우들을 모셔다 드리는 운전사가 될 것 같습니다. 아직 끝맺지 못한 공동의회 자료를 정리하는 일, 주일 설교를 다듬는 일, 그리고 학기말 시험을 감독하는 일, 신학원 입시문제를 출제하는 일, 새해 [교회 생활]에 필요한 자료를 정리하는 등 등. 저는 매일 매일이 전쟁터에서 정신없이 뛰어 다니는 소총수처럼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제게 주어진 시간이 그렇게 속도를 내서 달음질 할 수가 없어요. [특별 예배의식서]를 집필할 목적에서 1-2월 동안에는 자료를 수집해야 합니다. 몇 년동안 앓는 이처럼 저를 사슬로 묶고 있는 과제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하나 하나 책으로 엮어 내려고 합니다. 저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섬기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 드립니다. 누군가의 천사가 되신 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길 기도 드립니다. 

6. 오늘 두 번째 출석을 부르겠습니다. 길게 대답치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여러분이 매일 묵상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저는 감사하고 기쁜 일이 됩니다. 묵상자료를 받으시고, "예, 잘 받고 있습니다."고 대답해 주십시오. 주님의 평강이 여러분 위에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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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59(2000.12.6, 수요일)
성경말씀 : 빌 4:6-7.      
찬송 : 487장.
제목 : 걱정하는 사람과 기도하는 사람.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의 근심과 걱정을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어린아이들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이런 근심과 걱정이 없는 세상을 살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먼저 우리들이 생각할 것은 도대체 근심과 걱정의 실상에 대한 이해가 아닌가 합니다. 근심과 걱정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하는 일용할 양식에 대한 생각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을 한 걸음 더 발전적으로 풀이하면, 더 맛있게 먹으려면 어떻게 할까? 더 멋있는 맵시를 내고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까? 등등 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부정적인 의미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이 전혀 없으니 어떻게 할까? 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삶의 내용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의 차이가 얼마나 큰 결과를 가져다주는지 모릅니다. 절망적인 생각은 인간을 파멸로 이끌 것이지만, 희망적인 생각은 인간의 삶을 더욱 자랑스럽게 인도해 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이 만나게 되는 삶을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날씨가 추워지겠다는 일기 예보를 들었을 때, 긍정적인 생각은 “이젠 내복과 외투를 입어야 하겠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털모자며 목도리도 그리고 장갑도 준비하게 될 것입니다. 미끄러운 눈길을 생각해서 구두 밑창을 새것으로 바꿀 것도 생각할 것입니다. 건강하고 튼튼하게 겨울을 살아갈 준비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부정적인 생각은 “나는 추운 것이 싫은데 이거 야단났구나. 밍크 코오트를 살 돈이 있나. 보일러도 고장나면 어떻게 하지?” 등등 금새 얼굴을 잿빛으로 바꾸게 하는 많은 걱정거리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3.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의 특징은, 긍정적인 생각의 사람은 항상 자신이 가진 것을 잘 사용하려고 한다는 점이나, 부정적인 사람은 자신이 가지지 않을 것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토로한다는 점입니다. 유대인들의 얘기 가운데, 꼭 같은 무화과가 담긴 광주리를 들려주었는데, 한 사람은 그 중에 제일 좋은 것부터 골라 먹으면서 “나는 기분이 좋다. 나는 항상 좋은 것만 먹기 때문이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가장 나쁜 것부터 먹으면서 “나는 왜 상한 것을 먹어야 하는지 모르겠어.”하면서 얼굴을 찌푸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처럼 살고 있습니까? 사실 우리는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기 전에 감사하고 기뻐할 것이 얼마나 많이 가진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100가지 중에 한 두 가지가 조금 부족하다고 해서 원망 불평한다고 하면 이것은 정당한 자세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찬송가 가사는 “만 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내 평생 슬프나 즐거우나 이 몸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서 주님만 위하여 늘 살겠네”(356장 4절)고 고백합니다. 가진 것을 먼저 생각합시다. 받은 사랑을 먼저 기억합시다. 

4. 문제는 삶을 짊어질 때, 그 해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두 종류의 사람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하나는 땅이 꺼져라고 걱정만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그 문제를 가지고 누군가를 찾아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걱정만 하는 사람의 경우는, 자신의 힘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차고 불가능하다는 절망감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자신의 무능함과 무기력을 한탄합니다. 그런 사람은 평소에도 자신만을 믿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의외로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른 또 하나의 사람은 문제가 만만치 않다고 생각될 때, 자신보다 더 인생 경험이 많은 사람이나, 자신의 처지를 잘 이해하는 친구를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무력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는, 아예 그 문제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내다 놓습니다. 물론 문제는 심각할 수 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절대로 문제 풀기를 포기하거나 도전 정신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불가능에 도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문제 앞에서 당황하고 절망하는 사람과, 그 문제를 붙들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매달리는 사람과, 어떤 사람이 희망에 도전하는 사람이겠습니까?

5.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문제가 많은 세상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 새로운 문제들이 등장하는 세상입니다. 나약한 여러분 자신만을 의지하고 절망에 빠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강하고 담대한 사람으로 시험하고 계시는 지도 모릅니다.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그런 위기를 관리하는지를 보고 싶어하시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인생관리가 성숙해지도록 때에 맞는 시련을 주신다고 생각하십시오. 기도하는 사람들보다도 더 힘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네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 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복음송의 가사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근심과 걱정이 기도의 제목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동안은 걱정 근심을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선하게 해결해 주실 것을 기대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어떻게 응답해 주시는지를 예상해 보시고 그 차이에 대해서 확인해 보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지금 힘든 문제와 씨름하며 기도하고 있다면, 기도 일기를 써 보십시오.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여러분의 놀라운 경험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는 끈질겨야 합니다. 기도의 응답을 얻을 때까지 쉬지 말아야 합니다. 487장을 다시 한번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에 승리하는 생활이 바로 우리 기독자의 삶입니다. 

6. 주님께서 오늘도 여러분의 기도 속에 함께 계심을 감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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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58(2000.12.5, 화요일)
성경말씀 : 빌 3:17-21.    
찬송 : 367장.
제목 :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사람마다 삶에 대한 이해나 관심은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잘 사는 것이 무엇일까?라고 물을 때, 그 대답은 천차만별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잘 사는 기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바울 사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말씀이 그것이라고 말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이 구절에서 우리의 삶의 기준을 가늠해 볼 말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적어도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이것이 우리의 삶을 저울질하는 기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십자가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행동을 의미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예수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고전2:2)다고 고백한 일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바울 뿐 아니라, 모든 인생에게 있어서 유일한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 기독자들의 신앙입니다. 

3. 그렇다면 십자가를 삶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고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십자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적어도 예수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필수적인 멍에라는 사실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대해서 적극적인 이해와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십자가를 기피할 대상으로가 아니라, 반대로 십자가를 더욱 가까이 대해야 하겠다는 자세 말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분은 오랫동안 소녀 가장과 결연을 맺고 지속적인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남을 도울 만큼 생활이 넉넉한 분이 아니지만, 그 소녀를 돕기 위해서 지출을 줄일 뿐 아니라, 특별히 일하는 시간을 하루에 한 시간을 늘렸다고 했습니다.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더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가장 깊고 넓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 십자가 때문에 여러분과 제가 죄와 죽음에서 자유할 수 있었고, 소망을 가진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받은 최상의 축복이며 행운입니다. 그런데 이런 축복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이 짊어질 십자가가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와는 전혀 다른 우리만의 십자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4. 예수님처럼 누군가의 죄와 허물을 대신 짊어질 십자가는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어떻게 우리가 남의 죄를 대신할 수 있으며, 설사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효력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십자가는 죄 때문에 지는 십자가가 아니라, 다시 생명을 찾게 된 것에 대한 감사와 기쁨에서 짊어지는 사랑의 십자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연약한 이웃을 돌아보는 사랑의 행동을 말합니다. 이것은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만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십자가입니다. 이틀 후에는 선한 사마리아 자원 봉사자들이 목욕을 시키러 갈 예정입니다. 보름동안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어떤 냄새가 나겠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때로는 불쌍한 마음으로, 때로는 앞으로 얼마나 더 사실까 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씻어 드리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때로는 전혀 마음이 내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에 좀 근사하게 폼잡고 앉아서 책이나 읽거나 음악 감상을 할 수 있는데, 이게 무슨 꼴이람.” 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는 거룩한 의무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더 크고 귀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며, 그래서 우리 자신들에게 할당된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5. 오늘도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지는 사랑의 십자가 때문에, 하나님의 평화와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십자가가 있는 곳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통해서 세상을 더 환하고 맛나게 만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향기입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허락된 십자가를 잘 짊어질 수 있도록 때마다 일마다 힘 주실 것입니다. 자랑스런 십자가의 용사로 오늘을 살아갈 때, 참된 감사와 기쁨이 여러분 안에서 피어날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길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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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57(2000.12.4, 월요일)
성경말씀 : 빌 3:10-14.      
찬송 : 238장.
제목 : 삶의 목표를 확인해 보자.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어제 주일 예배를 마치고 천사가 되기 위해 제비를 뽑았습니다. 저는 두 분 교우의 천사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제비를 통해서 다시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돌보고 섬겨야 할 분들은 모두 저의 사랑과 관심 그리고 기도가 필요한 분들임을 깨우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 그 분들을 위한 천사의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를 돌보는 천사에게서 편지를 받았습니다. 오후 찬양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편지가 도착했다고 전해 온 것입니다. 누군가를 섬긴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긴다는 것은, 우리 기독교인이 잊어서는 안될 거룩하고 아름다운 의무인데도 소홀히 했음을 깨닫게 하는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하며, 이 일을 맡아 수고하시는 김승구집사님께 우리 함께 감사드려야 하겠습니다.

2. 제가 대학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배운 것은, 계획을 세우는 방법이었습니다. 단기 계획과 장기 계획을 세우는 것이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지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하루의 계획, 주간 계획, 월간 계획, 년간 계획, 그리고 4년 계획을 차례로 세워서 교수님께 제출해야 했습니다. 계획을 세운다는 것, 그것은 목표를 갖는다는 것이며,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해서 충실한 과정을 만들어 보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런 인생 계획표를 만들어 보셨는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확고한 목표가 세워진 사람이라면, 도중에 힘든 일이 많겠지만 그 확고한 목표 때문에 여간해서 절망하거나 주저앉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3.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 사도의 편지는 인생 계획이나 목표를 세우려는 이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 가노라.”고 말씀하십니다. “푯대를 향하여”라는 말과, “부름의 상을 위하여”라는 말은 같은 내용을 의미합니다. 전자는 목표를 바라보고 달려간다는 말이고, 그 목표가 부름의 상이라고 말씀합니다. “부름의 상”이라는 구절 때문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헛된 생각을 많이 하게되었다는 주석을 읽은 일이 있는데, 바울 사도 역시 사람들이 마음쓰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이런 표현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보여집니다. 가령 “성실하게 삽시다.”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실성의 가치를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성실하게 살면 부자가 되고 행복하게 살게 됩니다.”고 말하면 성실성의 가치를 크게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부자가 되든 현재대로 살든, 성실함은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유일한 삶의 길이며, 그 자체가 행복의 내용입니다. 슬프게도 이런 인식을 진지하게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상이 따른다거나 상을 준다고 말하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교회에서 상을 주는 것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상 받는 것을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전도나 봉사는 당연한 일이지 상받을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가하면 전도상이나 봉사상은 사람에게서 받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상 주실 테니 열심히 전도하고 봉사합시다고 말하면, 관심을 가지는 사람을 얻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김치냉장고를 준다고 하면 달라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상에 대한 집착과 관심,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이 연약함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빨리 고쳐야 할 것은, 진정한 상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것은 부모 공경이나 이웃 사랑, 그리고 하나님 섬김, 그 자체가 진정한 행복이고 축복이며 상이라는 점입니다. 한 장의 상장을 받은 일이 없는 위대한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직 주의 말씀안에 살다가 죽은, 그러나 땅에서는 출세한 일도 없고, 부자나 권세가가 되어 보지 못한채 일생을 마친 이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상 보다는 목표가 더 강조되어야 할 구절이라고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요?

4. 12-13절은 바로 11절의 목표를 향한 분명한 자세를 말하고 있다고 할 때, 바울 사도가 말하고 있는 그의 삶의 목표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 희망도 없는 깊은 절망과 슬픔의 대명사인 죽은 자, 그 가운데서 새로운 생명이며 희망인 부활에 이르는 것, 이것이 그의 목표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부활은 육신이 죽은 후에 부활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새로운 삶을 말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는 우리도 죽음 앞에 이르게 될 것이며,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만, 오늘 우리의 삶에서도 부활의 기쁨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이제는 새 것이라.”(고후5:17) 이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이 목표를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루도 놓쳐서는 안되기에, 이것은 매일의 목표이면서 동시에 일생의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일이나, 모세와 함께 출애굽 하던 이스라엘에게 매일의 만나를 주셨던 사건들에서, 매일과 영원이라는 관계를 깨달았습니다. 오늘의 삶과 영원한 삶은 동떨어진 것들이 아니라, 가장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죽은 후에 부활하는 것만이 우리의 목표일 수 없습니다. 오늘 살아서도 우리는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고 일하고 행동하는 것, 이것은 분명 옛 사람과 다른 모습입니다. 제가 작년 미국에 가서 어린이들을 위해서 선물로 사온 팔찌는 “What Jesus would do?"라는 구절이 쓰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삶의 모퉁이에서 항상 이런 질문과 함께 살아가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는 우리의 목표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삶이 이어져서 영원한 부활에 이르러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5. 이상곤집사님께서 근무하는 회사(서울 은행)의 생일날에 우수 근무사원 표창을 받으셨습니다. 축하드리고, 세상 속에서 착한 행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져 봅니다. 우리 교회에서 목회 실습을 하고 귀국하신 마크 지쇼우 전도사님께서 미국 시카코 근교 “바람의 도시”에서 준목실습을 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린 일이 있는데, 이 메일로 안부를 전해 오셨습니다. 전화는 1 708 484 0504이고, 이 메일 주소는 mark-zuehsow@usa.net입니다. 글을 쓰시려면 아마도 영어로만 써야 될지 모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여러분의 삶속에 좌정하시도록 적극적으로 모셔들이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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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56(2000.12.3, 주일)
성경말씀 : 빌 3:4-9.      
찬송 : 102장.
제목 :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위해서.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2. 사람들은 저마다 잘 살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을 것입니다. 아무 의미 없이 물결 위에 떠내려가는 낙엽처럼 자신의 삶을 내동댕이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그렇게 보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겠으나, 여전히 그들의 마음속에는 버리지 않고 붙들고 있는 제대로 된 삶에 대한 희망이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현재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그런 대로 만족스럽든지 아니면 “이런 것은 아니야”하는 편이든지간에, 정말 심사숙고해야 할 질문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무엇이 제대로 된 삶인가?”하는 물음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바울 사도에게서 이에 대한 대답을 듣게 됩니다.
이 본문의 배경은 소위 어느 정도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만족스럽게 여기는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자신의 삶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아마도 유대적인 배경 곧, 혈통과 전통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보여집니다. 참으로 놀랍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한 것은, 오늘의 현대인 역시 삶의 방향성보다는 자신이 누리고 있는 외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삶을 저울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는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 사이에 별 차이가 없고, 심지어 신앙인들이라는 사람들 역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3. 바울은 이 점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해서 말을 시작합니다. 자신은 이런 점에서는 자랑거리가 적지 않다고 말합니다. 제대로 된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사람이며, 구체적으로 베냐민 지파에 속하고 있으며, 그리고 신앙적인 면에서는 가장 율법에 충실하게 살고 있는 바리새파에 소속되어 있다고 소개합니다. 그래서 이런 신앙적 열정의 증거로 유대 율법에 거슬리는 이단자로 여겼던 기독교회를 핍박하는데 앞장을 섰던 전력을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유대인이 누리고 있는 특권의식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언제든지 그 점들을 주장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완전히 새로운 단계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만 아니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고 말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그렇게도 자랑스럽게 여기던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그리고 그분 안에서 내가 살기 위해서라면, 배설물처럼 생각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가치관을 무의미하게 내다 버린다는 말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것들은 나름대로 삶의 의미도 될 수 있을 것이나, 예수그리스도와는 비교할 것이 못된다는 말입니다. 유대적 가치를 전면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할 때 배설물의 수준밖에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좀 더 적극적으로 이해하는데는 찬송 102장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부귀 영화 행복도 주 예수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하찮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4. 무엇이 잘 사는 삶인지를 항상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승진했다든지, 사업이 확장되었다든지, 학위를 받게 되었다든지 등 등, 그런 삶이 제대로 된 삶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사는 삶인지를 살필 때 명확하게 판정이 나기 때문입니다. 저와 함께 신학을 공부했던 분을 우연히 남대문 시장 어귀에서 만났습니다.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만, 그는 생활설계사로 제법 높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집도 장만했고 돈도 제법 벌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삶을 살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초라한 외모의 저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지금 아주 빗나간 외도중이라고 말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는가? 한 사람은 썩을 것을 위해서 모든 수고를 바치고 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영원히 썩지 아니할 것을 향해서 발버둥치고 있는 것입니다. 몇 일 전에 제가 가르친 목사님과 얘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천안에서 교회를 개척 중에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 분은 내게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었던 분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 분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해 준 일이 없어서 늘 마음 한 편이 걸리는 분이었는데, 그 날 역시 그 분에게서 또 하나의 깨달음을 가졌습니다. “지금은 힘들지만 살아 있는 나무는 반드시 꽃도 피고 열매도 맺힐 거라고 믿어요. 주님 안에 살고 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것이 있고, 죽은 것 같으나 살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최고의 가치로 삼고 일하고 사는 사람들은, 혹시 죽은 것 같아 보일지라도 실제는 살아 있는 삶이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해야 하겠습니다. 

5. 제 주변에는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연약한 분들, 경제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분들, 심지어는 영적으로 흔들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는 그 분들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이런 힘든 시간이 도리어 축복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어쩌면 이런 저런 약점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좋은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제가 가끔씩 드리는 간증입니다만, 저는 가장 어둡고 힘들다고 여길 때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苦像)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나면 얼마나 마음에 평안과 기쁨, 그리고 힘까지 솟아오르는지 모릅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힘든 경우에서만이 아니라, 즐겁고 형통할 때에도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바울 사도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 정도로 예수님이 보여 주신 삶의 방향성을 묵상하십시오. 그것이 정말 제대로 살아가는 삶이 될 것입니다. 

6. 오늘은 교회력으로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교회력의 시작이며, 오시는 주님을 대망하는 경건과 절제 그리고 참회와 준비로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주님을 여러분의 중심에 모셔 드리기를 위해서, 그리고 초림하셨던 주님의 모습을 통해서, 재림 주를 그려보는 의미 있는 절기가 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오늘 교회에 나오실 때는 가장 깨끗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나오세요. 신랑을 기다리던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말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아름다운 마음을 더 사랑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을 사랑하며 주님께서 복주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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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55(2000.12.2, 토요일)
성경말씀 : 빌 3:1-3.    
찬송 : 418장.
제목 : 교육의 출발점.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2. 저는 요즘 자주 외손자를 만납니다. 매일 달라지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아이에게 사용하는 대부분의 말은 “안된다. 하지 마라.”는 금지 용어들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놀랬습니다. 사실 저는 입버릇처럼 긍정적인 말의 필요성을 되풀이해 왔다고 자부하는데, 실제 생활에서는 부정적인 말만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그런 부정적인 말을 하더라도 자세히 까닭을 설명하고 이해를 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해왔었는데, 그런 말은 한 마디도 찾을 수가 없이, 무조건 “안된다.”는 말만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말 바꾸려는 구차한 변명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설명도 이해도 기대할 수 없는 철부지에게 가장 먼저 가르쳐야 할 교육내용은,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교육의 시작은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할 줄 알게 하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하지 말아야 할 것부터 가르쳐야 한다는 깨달음입니다. 저는 십계명을 읽을 때마다 왜 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을까? 전 근대적인 교육방식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품어왔는데, 그 까닭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철부지 인생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생명을 보존하도록 도와주는 금지조항을 익히는 것뿐이라고 말입니다. 분별력이 없는 사람에게 제 마음대로 선택하고 제 마음대로 행동하도록 자유를 주었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그는 미숙하고 무지하기 때문에 자신을 해치게 될 것이고 그 결과 어쩌면 생명을 잃게 될 것입니다. 적어도 이런 단계에서는 우선 생명을 보호하는 교육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 할례당을 삼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삼가라”는 말은 조심하라는 뜻인데, 가까이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자기 집에서 기르지 않은 개에게 접근하다가는 물릴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용어들은 상징적인 해석이 필요합니다. 짓기 잘하고 물기 잘하는 개 같은 사람들이나, 악을 저지르면서도 당당하게 행동하는 사람들, 할례의 정신을 상실한 체 그 형식만을 내세우는 율법적인 고집쟁이들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 결과는 심각한 상처를 얻게 되거나 귀중한 생명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아직 누리고 즐겨야 할 아름답고 찬란한 삶이 기다리고 있는데, 꽃다운 나이에 시들어 죽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적인 분별력이 생기기 전에는 “안된다”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선 살아 남아야 미래든 희망이든 품어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4. 우리는 몸집은 어른이 되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유아기를 벗어나지 못했는지 모릅니다. 사는 길과 죽는 길조차도 구별하지 못한다고 하면, 성숙한 어른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먼저 할 일과 나중할 일을 골라서 순서를 매기지 못하고서, 눈에 보이는 것에 매달리는 사람이라면 여전히 어린 아이임에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금지조항을 지켜야 합니다. 해서는 안될 것부터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저는 목사로써 여전히 이런 금지조항을 말하고 있는 자신을 서글프게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 모습이 어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부터는 당연한 일이라고 자위하게 되었습니다. 성숙한 사람으로 자라나기까지는 이런 금지조항이 가장 적합한 교육 내용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속히 금지조항의 틀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생각의 영역을 넓혀서 이웃의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고, 하나님의 마음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그런 자랑스런 사람들 속에서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5. 그러나 이런 희망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금지조항들에 주의를 기우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충실하게 가르칠 각오도 가져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혹시 제 얘기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아이로 취급받고 있는 게 아닌가 해서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여러분의 인격을 해치고 있는 말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의 현실을 얘기할 뿐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오히려 기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어린 아이 시절에는 책임질 일 보다는 누릴 권리가 더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흔히 신학에서는 이런 금지조항의 대명사인 율법 혹은 십계명을 일컫기를 ‘거울', ‘안내판’ 그리고 ‘경계석’이라고 부릅니다. 거울이라 함은 이런 금지조항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는 말이며, 안내판이라 함은 이런 금지조항을 통해서 빗나가지 않고 제 길을 걸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경계석이라 함은 살고 죽는 위험 지대를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표지가 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금지조항은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6. 교육의 첫걸음은 “안된다”입니다. 그것은 어린 아이 같은 사람들의 생명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 같은 사람에게는 여전히 이런 금지조항 들이 긍정적으로 이해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생명이 풍성하게 자라나도록 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생명을 보호하는 교육은 절대로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엔가는 신앙과 정신이 자라나게 되어서, 조금씩 조금씩 “하라.”는 교육 내용으로 바뀌어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 날이 우리들에게 속히 오게 되기를 기도합시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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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54(2000.121, 금요일)
성경말씀 : 빌 2:25-30.    
찬송 : 239장.
제목 : 아름다운 실패.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2. 오늘 본문은 바울 사도를 병간하기 위해서 빌립보 교회가 파송하였던 에바브로디도를 변호하는 내용입니다. 불행하게도 병간을 위해 고용되었던 에베브로디도가 도리어 자신이 힘든 병에 걸리고 만 것입니다. 남을 돕기는커녕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되고 보니, 바울 사도는 그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자신의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퇴출되는 그가 겪어야 할 마음의 고통과 육체적 고통이 바울 사도의 마음을 혼란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득불 그를 위한 변호의 글을 써야 했습니다. 

3. 누구도 원치 아니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질병에 걸리는 것과 삶에서 실패하는 것 등입니다. 그러나 이런 원치 아니하는 것들이 우리들의 삶의 모퉁이에는 언제나 숨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이런 원치 아니하는 일들에 대해서도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나폴레온은 항상 “내 사전에는 실패란 없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바로 그 때문에 그는 비운의 황제가 되고 말았는지 모릅니다. 실패를 예상할 수 있어야 인생의 고갯길을 잘 헤치고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 역시 자신이 병들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평소 건강관리를 잘하지 못한 책임을 짊어져야 하겠지요. 그러나 이런 일들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비난하거나 문제로 삼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4. 바울 사도의 변호는 대단히 적극적입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보여준 헌신적인 봉사 자세를 강조하고 있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서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목숨을 걸고서도 자신이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한 사람임을 분명히 알리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는 자신의 역할을 완수하지 못하고 도중에 그만 두게 된 사람입니다. 결과로만 본다면 실패한 인생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교우들이 그를 파송하기 위해서 많은 물질과 정성을 들였습니다. 그런 수고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준 사람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보잘 것 없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의 삶의 내용은 그런 혹평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 바울의 변호입니다. 그는 악조건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서 자기의 임무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과정이 충실한 사람을 나쁘게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권고합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주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고 말입니다. 실패한 인생이긴 하지만, 그 내용은 실패하지 않은 사람들이 존귀히 여김 받을 충분한 근거를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5. 우리는 어떻습니까? 너무 결과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요사이 잘 사용하는 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만 하면 된다는 성공주의 말 말입니다. 그래서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무시할 수도 있다는 세상 풍조에 우리 기독자들도 얼마나 심정적으로 동조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제일주의 출세주의는 모두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분명히 이 점에 대해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과만을 보시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반드시 그 과정을 살펴보시고 평가하실 것입니다. 그래야 참다운 열매를 거짓 열매로부터 구별할 수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좋은 목적을 위해서 좋은 수단이 뒤따라야 합니다. 정당한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결코 실패한 인생은 아니라 평가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마음을 두고 계십니까?

6. 오늘은 제가 루터 신학대학에 출강하는 날입니다. 2000년 마지막 수업을 하는 날입니다. 시작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마지막입니다. 먼저는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하겠고, 동시에 하나님께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이르게 해 주심이 감사하고, 부끄러움을 떨쳐버리지 못함이 회개할 이유입니다. 
오는 주일(3일) 우리 교회는 자원봉사자 3분에게 축하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우리 교단에서는 매년 12월 첫째 주일은 봉사자의 날로 지키고 있는데, 금년부터는 우리 교회 안에서 숨은 봉사자들을 찾아내서 칭찬하고 귀감을 삼고자 합니다. 5년동안 목욕봉사에 수고하신 문경원권사님과 7년동안 교회 꽃꽂이 봉사자로 수고하신 김효은집사님과 조미숙집사님이 그 분들입니다. 여러분께서도 그 분들을 본받아 기쁨으로 섬기는 아름다운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김승구집사님께서 제2회 20일간의 천사축제를 준비하시기로 하였습니다. 누군가를 섬길 천사로 생각하며 주님을 기다릴 수 있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수고하실 김집사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주님께서 오늘도 여러분을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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