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0(2000.11.17, 금요일)
성경말씀 : 잠 30:24-28.   
찬송 : 410장.
제목 : 미물에게서 배워야 하겠다.        

1. 오늘도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길 기도 드립니다. 어제는 겨울을 재촉하는 찬비가 내렸습니다.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시고, 독감 예방주사를 꼭 맞아 두십시오. 저도 몇 일전에 보건소에 들려 예방주사를 맞았습니다. 아직 아니라면 잠깐 시간을 내서 자기 관리를 하셔야 하겠습니다.

2.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배우는 것은 교실이나 책에서만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배울 마음을 갖고 우리 주변을 잘 관찰만 한다고 하더라도 값진 교훈들을 쉽게 주워 담을 수 있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지혜자는 잠들어 있는 그런 생각을 우리들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개미]는 미물 중에서도 보잘 것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보세요. 얼마나 부지런한지 모릅니다. 가끔씩 제 책상 위에 막내 딸 아이가 과자 부스러기를 갖다 놓는 날이면, 어디서 어떤 정보를 통해 알게 됐는지 개미들이 떼를 지어 찾아옵니다. 그 작은 몸의 생존을 위해서 극성스러울 정도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개미는 우리들에게 근면함과 준비성을 일깨워 주는 선생입니다. [사반]이라는 녀석은 우리말 국어사전에도 없는 것을 보니까, 우리 주변에서는 흔치 않는 외국에 사는 짐승인 모양입니다. 성경 레위기 11:5에서 유일하게 소개되고 있는데,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한 부정한"짐승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주석가들 가운데서는 시편 104:18에 나오는 너구리를 지칭한다고 말합니다. 아무튼 이 사반은 자기의 집을 짓는 일에 있어서만은 탁월한 수완가인 모양입니다. 제대로 된 집을 지어서 제 몸 하나 보호하지 못한 체 위태롭게 살아가는 우리들과는 대조적으로 보이는 때문에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메뚜기]는 유럽이나 중동에서는 상당히 골칫덩어리인 미물인데, 떼를 지어서 몰려다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번 앉았다하면 모든 잎사귀를 순식간에 먹어치우기 때문에, 한 해 농사를 망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메뚜기가 이동하는 것을 보면 너무도 질서정연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누군가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하듯 말입니다. 우리 인간들처럼 제 멋대로 행동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질서를 몸에 익힌 생활을 한다는 점에서 이 또한 우리들의 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도마뱀]은 주로 궁궐에 살고 있는 것으로 소개되는데, 천하에 무서운 왕의 무대인 궁궐을 활보하는 도마뱀의 기개를 오늘 우리 인간들이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심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약하디 약한 그런 정신으로 인생을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을지, 그 때마다 도마뱀의 용맹성을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3. 이런 미물들을 생각해 보면서, 어리석고 때론 부끄럽기까지 한 우리 인간의 모습을 대조해 봅니다. 하루도 빠지는 날 없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힘들고 고단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지도자라는 사람들입니다. 깊은 생각 없이 세운 미숙한 정책으로, 아니면 이권을 가진 사람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서 얼마나 비뚤어진 일들이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습니까? 쉽게 살려는 젊은이들, 제 몸을 팔아서라도 돈을 구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예전과는 퍽도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분노를 느낍니다. 배가 고프다거나 병든 부모님을 공양하려다가 기생이 되었다는 얘기는 들었어도, 핸드폰을 들고 다니고, 치킨 집에 가서 친구들에게 폼을 잡기 위해서 그런 짓을 했다는 얘기에, 우리의 앞날이 너무 어둡기까지 합니다. 어려운 일은 종종 있는 일상사인데, 그것을 관리하는 능력이 너무 미숙한 사람들, 그래서 무서운 범죄를 서슴치 않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위기는 위기일 뿐 아니라,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의식도 얼마나 모자라는지 모릅니다. 제 가족에 대해서,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까지도 무책임한체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다가 이해관계라면 진흙투성이에서 뒤 엉켜서라도 싸워 이겨야 한다는 차디찬 모습은 이제 신물이 날 지경입니다. 빗나간 사랑 얘기는 우리들 TV 의 단골 주제가 되었습니다. 

4. 미물들에게 배울 것이 많습니다. 옛 어른들은 묘비명을 이렇게 썼습니다. "학생 밀양 박공 00개 지묘"라고 말입니다. 우리들 인간은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배우는 것, 혹은 깨우치는 것을 게을리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개미]보다는 더 성실하고 준비성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책이 없는 것이 아닙니까? 자기 관리에 있어서는 [사반]에게서 배워야 하겠습니다. 함께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질서의식은 [메뚜기]에게서 배웁시다. 주어진 삶을 담대하게 살아야 하겠는데, 그 땐 [도마뱀]을 생각하십시오. 그 뿐이겠습니까? 산과 들, 바람과 구름, 시내와 강에서도 우리는 많은 교훈을 얻어서, 삶을 지혜롭게 꾸려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 온통 세상이 벌거벗는 차가운 겨울로 급선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겨울은 따뜻한 축복의 계절로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면 모든 일들은 기회요, 감사요, 기쁨으로 바뀔 수 있을테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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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39(2000.11.16, 목요일)
성경말씀 : 잠 30:18-23.   
찬송 : 347장.
제목 :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 속에서도.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즐거운 하루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2. 오늘 주시는 본문은 그 동안 우리들이 무던히도 답답해하던 문제에 대해서 실마리를 주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닌 것을 경험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언뜻 보기에 착한 사람이 악한 사람보다 더 힘들게 살고 있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보다는 게으른 사람이 더 많은 행운을 누리는가 하면, 순진한 사람이 교활한 사람보다 훨씬 바보처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겉모습만 보고 하는 말입니다. 거꾸로 가는 세상처럼 보일 때가 더러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창녀가 요조숙녀처럼 살아가는가 하면, 혁명이라는 수단으로 하급 병사가 일약 국가 수반에 오르는가 하면, 미련한 사람이 훨씬 더 부자로 잘 사는 경우가 그리 귀한 일이 아닌 때문입니다. 알 수 없는 미로를 걷는 것처럼, 지금 우리들이 걷고 있는 길이 제대로 갈 길인지조차도 분별되지 않을 때가 더러 있어왔다는 말입니다.

3. 하나님께서 과연 살아 계시고, 이런 뒤죽박죽인 세상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계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저는 가끔 그런 질문을 받곤 합니다. 그 때마다 저의 대답은 한결 같습니다. “그래도 당신의 길을 그대로 걸으십시오. 그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얼마나 더 고통을 보태드렸는지 모릅니다. 오래 전에 한 젊은이를 만난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신문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분이 출세를 했는데 감히 올려다보기에도 민망스러울 정도로 너무 커 버린 것입니다. 그는 정치에 뜻을 두고 어느 정당의 ㅇㅇㅇ당의 ㅇㅇ국장을 맡은 일이 있다고 제게 자신을 소개하였습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대단한 수단가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람을 동원하는 일에 재주가 많을 뿐 아니라, 모든 부정한 수단을 다 사용할 수 있겠다는 이미지로 각인 되었던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 분이 유명한 사람으로 다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런 사람을 과연 당신의 일꾼으로 쓰실 수 있을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4. 나는 왜 이렇게 바보처럼 살아가는 것일까? 과연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얼마나 제 값을 인정받을 것인가? 내가 지금 바라보고 가는 끝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 줄 것인가? 등 등. 여러분의 뇌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뭔가 이 세상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다운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대답할 적당한 말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랍비들의 얘기를 읽고 크게 깨달음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은 뒤죽박죽인 세상을 바라만 보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세상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확신을 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얘기입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악하게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부분적으로 괜찮은 삶을 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고문 기술자라던 이근안씨도 자식을 사랑하는 父情은 여느 아버지와 다를 바 없었다고 그에게 고문을 받던 사람이 술회한 일이 있었습니다. 악으로 절여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누군가에게는 선행을 할 수 있고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아무리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마음을 뒤집어 놓았을 만큼 미움과 질투의 먹구름이 있었을 것이며,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모진 마음을 그대로 내비친 일들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말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구원행동을 분명히 믿는 기독자라고 할지라도 그의 행위로는 그가 죄인이 아닐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의 관리능력을 보게 된다는 것인데, 하나님은 천국에 갈 수 없도록, 죄인들의 선행을 땅에서 다 보상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인들이 땅에서 온갖 축복을 다 누리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의인들이 지옥에 가는 일이 없도록, 그들이 땅에서 저지른 온갖 잘못들을 땅에서 다 갚도록 하기 위해서 받을 수 있는 모든 죄 값을 치르느라고 고생을 멍에를 짊어진다고 합니다. 해석은 그럴 듯 합니다. 아무튼 알 수 없는 일들이 많고 또 많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게 우리들입니다. 

5. 어찌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 인간이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오직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과 걸어야 할 길을 걸을 뿐이 아닙니까? 저는 누가복음서에 나오는 종의 얘기를 자주 기억합니다. 들에서 열심히 일하고 돌아온 종에게 편히 앉아서 쉬면서 음식을 먹게 하는 대신에, 주인의 식사를 준비하고 식사하는 동안에도 수종들라고 명합니다. 그 명한 대로 잘 순종했다고 해서 칭찬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그 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평하는 대신에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고 대답할 뿐이라고 말합니다(눅17:7-10).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에만 충실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처리하실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일들이 많다고, 그것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불충실하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많은 우리 이웃들이 자신의 부실한 삶을 남의 탓으로 돌려서 모면할 수 있는 듯 생각하는 경향입니다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모든 이유와 변명은 일단 자신의 일에 충실한 다음에 해야 정당성을 인정받기 때문입니다. 

6. 오늘도 이해되지 않는 일들을 바라보아야 하고, 도무지 말도 안돼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어찌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 나름대로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우리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에만 열중해야 하겠지요? 주님께서 이런 여러분의 마음을 헤아려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여러분을 주장하시기를 기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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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38(2000.11.15, 수요일)
성경말씀 : 잠 30:15-16.   
찬송 : 369장.

1. 주님께서 오늘도 여러분과 함께 계시길 기도 드립니다. 

2. 오래된 유행가 가사에, “저 산 저 너머 저 언덕에는 무슨 꽃잎이 피고 있을까?”로 시작되는데, 마치 거기엔 무엔가 우리가 기대하는 것들이 있을 것 같은 환상을 갖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미지의 세계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런 현상을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리다. 가령 잘 알고 있는 사람, 한 동네에서 자라났고, 말씨며 성품은 물론 집안 내력도 줄줄이 욀 수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지나칠 만큼 호감을 갖고 있고 무엇인가 대단한 것이 있기라도 하듯 호기심을 갖곤 합니다. 결과적으로 가까이 다가섰을 땐, 옛 말처럼 “구관이 명관이로세.”로 끝나곤 했습니다.

3. 바울 사도는 행복을 멀리서 찾으려고 하지 않았던 대표적인 현실주의자였다고 보여집니다. 그는 삶의 비결을 터득하였다고 고백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현실적인 삶에 대해서 자족하는 마음으로 사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2) 본문은 이런 바울 사도와는 너무 다른 마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거머리의 두 딸’ 비유인데, 일생동안 족한 줄 모르고 “다고 다고”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탐욕에 취한 인간처럼 그 끝이 없는 욕망을 빗대어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자라나던 시절에는 논에서 쉽게 거머리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미나리 논에 가면 어김없이 거머리가 떼를 지어 몰려왔습니다. 성경 말씀처럼 거머리는 한번 달라붙으면 제 스스로 떨어져 나가지를 않습니다. 가정입니다만, 만일 거머리를 떼내지 않는다면, 우리 몸의 피를 다 빨아먹은 다음에야 멈출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바울 사도의 자족하는 마음과 거머리의 두 딸의 끝없는 탐욕과 비교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두 경우에서 행복이 무엇이며, 어떻게 그 행복을 누릴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4. 사람마다 자신의 현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선 자신의 생김새가 확연히 다릅니다. 말씨도 마음에 품은 관심사도 천차만별합니다. 이것은 어찌 생각해 보면 운명적인 것입니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우리가 선택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겉모습과 성격도 우리의 관심과 다르게 이미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아무리 바꿔보려고 할지라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팀 라헤이가 쓴 [성령과 기질]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사람은 타고난 기질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가진 기질은 강하고 약한 면이 동시에 있어서, 다른 말로 하면 장점이 단점이 되고 있는데, 성령을 통해서 장점은 더욱 살리고, 단점은 극복해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타고 난 것들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그것을 원망만 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그런 힘든 삶의 자리가 더 나은 삶을 향한 도전이 되고 목표를 분명하게 정할 수 있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현실을 긍정적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밑천으로 삼아 꿈을 꾸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자족(自足)이란 이런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고, 거기에서 삶의 둥지를 트는 적극적인 자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난이나 질병 그 자체가 불행이 아니라는 인식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어떤 이는 그런 것들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조금 불편한 것이라는 인식아래, 거기에서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를 긍정적으로 모색하는 일, 그리고 실천해 나가는 일이 중요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족이라고 생각합니다. 

5. 저는 60년대에 한국을 방문해서 젊은이들에게 강연으로 뜻을 남긴 임어당 선생님의 글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농부의 자식들아, 꿈을 꿔라.”는 주제의 강연이었습니다. 중국에 유명한 세도 가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명문가의 자식은 주색잡기에만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재상인 아버지가 아들을 초달하였습니다. “나는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온갖 고생 끝에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너는 좋은 환경에서 뭐가 불만이어서 이렇게 주색에만 빠져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그 때 아들은 대답하기를 “아버지는 농부의 자식이니까 꿈을 가지고 열심히 살 수 있었지만, 저는 그런 꿈을 꿀 수 없는 형편이지 않아요?  저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요. 그래서 술독에 빠져서 사는 거지요.” 이런 예화가 현실 속에서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땅 값이 치솟아 하루아침에 졸부(猝富)가 된 분들을 보세요. 얼마나 돈 쓸 줄을 모르고 살지 않습니까? 근사한 집에서 값나가는 자동차를 굴리는 것이 행복인줄로 착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행복은 자신의 삶의 자리를 자족으로 인식하고 거기에서 감사와 평화를 만들어 가는 일이 아닐까요? 오늘 여러분들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현실을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아름다움을 만들어 가십시오. 여러분의 주위 사람들에게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도록 하십시오. 좋은 것을 나누고 싶어하는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리고 적극적으로 실천하십시오. 일본의 무교회 지도자였던 내촌 선생님은 一日一善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좋은 생각을 품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실천에 옮기라는 말입니다. 행복은 바로 이런 사람들의 것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이런 마음을 우리들 자신의 힘으로 가지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어려운 일임을 잘 압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런 마음을 품도록 인도하여 주시기를, 그리고 실천하도록 용기와 힘과 여건을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행복은 여러분의 현재의 삶에서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의 여러분이 부딪히는 갖가지 삶의 씨줄과 날줄로 행복의 비단을 짜내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오늘은 이대웅군과 박찬주군 그리고 김성훈군이 수능시험을 봅니다. 여러분의 기도 가운데 잠깐 들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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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37(2000.11.14, 화요일)
성경말씀 : 롬 8:24-25.    
찬송 : 487장.
제목 : 우리가 가진 소망.           

1. 오늘도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어제는 우리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시던 고 박병학집사님의 1주기 추모 예배가 자택에서 있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육신으로는 서로 만날 수는 없지만, 영적으로는 여전히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아름다운 추억을 통해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저는 그 분을 가까이서 지켜 본 목사로써 감회 어린 추억들을 많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성미가 불같이 급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얼마나 여린 분이었는지 모릅니다. 자녀들에게 대한 애정도 각별하셨고, 목회자에 대한 관심도 참 각별하신 분이셨습니다. 제가 처음 뵈었을 때는 도봉교회에서 일할 때였고, 옥수동교회로 부임해 왔을 때는 가장 반겨주셨던 몇 분 가운데 한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가지셨던 지병으로 항상 힘겨워 하셨습니다. 그래서 임권사님께서 그 짐을 대신 짊어지고 고생을 많이 하셨지요. 그러다가 기적같이 건강을 회복해서 일하시게 되었고, 일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격스럽고 감사해서 하나님께 서원을 하셨다고 했습니다. 적지 않은 헌금을 매년 약속대로 보내주셨고, 값지게 사용되었습니다. 그 분은 연약했지만 강하게 살려고 힘썼고, 많은 장벽을 인정하시면서도 끝까지 힘써 사셨습니다. 지금은 고향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편히 쉬고 계십니다. 

2. 소망에 대해서 바울 사도께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가진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며, 그 소망은 눈으로 보는 소망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어찌 참된 소망이 되겠느냐고 반문하고 계십니다. 소망이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사용되는 소망이라는 말은 [엘피스]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사람에 대한 것도 아니고, 어떤 물질에 대한 것도 아닙니다. 이 소망은 하나님께 두는 소망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그 소망에 대해서 여러분은 누군가와 얘기를 나눈 일이 있습니까? 많은 어머니들의 소망은 너무 현실적이며 땅에 것들입니다. 신열이 나서 몸이 불덩이 같은 자식을 안고 눈물을 흘리며 “내 자식이 열만 내리면 소원이 없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군 복무중인 아들이 제대하고 건강하게 돌아만 오면 소원이 없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이가 든 딸년에게 정혼할 사위가 생기면 소원이 없겠다고 하십니다. 도대체 이런 소망들이란 끝도 없습니다. 그런 것들도 소망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눈으로 보이는 것들입니다. 우리들 기독자에게는 보이는 소망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소망이 있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3. 생전에 꼭 이루고픈 소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 세상에서는 이룰 수 없는 소망이 우리에게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영원히 이 땅에서는 이루지 못한 소망을 품어 보자는 말입니다. 이 말을 바울 사도는 지금 우리들에게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랑하며 사는 삶이고, 서로 믿고 의지하며 사는 삶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과 믿음이 풍성한 세상을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런 우리의 마음이 너무 쉽게 상처를 받고 좌절에 빠져버리곤 하였습니다. 때로는 오해로, 때로는 너무 큰 기대로, 우리의 소박하기만 한 소망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는 참된 사랑보다는 사랑을 흉내 내는 것으로 만족하였고, 믿음과 신뢰도 속 깊은 것보다는 겉으로만 형식을 적당히 갖추는 정도에서 멈춰서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음의 주파수가 달라서, 주고받기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을 때, 따뜻했던 마음이 식어지게 되고, 그 때부터는 흉내내는 것으로 길들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사랑은 끝없이 참아 주는 것이고, 어떤 경우에도 부드럽고 시샘하지 않으며, 자랑하지도 교만하지도 무례히 행치도 아니하며, 제 유익을 챙기지도 아니하고, 쉽게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지도 아니하며 불의한 일을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만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며 견딘다고 했는데, 이런 사랑의 삶을 소망할 수 있겠습니까? 

4.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기 위해 마련된 곳이 아닐까요? 우리는 믿음을 나누면서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믿음은 벌써 상처를 입고 신음을 하고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가 이 믿음을 헌신짝처럼 내 동댕이쳐 버렸습니다. 일전에 신문에서 읽은 글을 통해서 그 동안 그렇게도 값진 신념처럼 여겨왔던 것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부모를 공양하는 것을 최고의 효도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정도는 미물인 짐승들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마음을 나누고 믿음으로 의지하는 정신적인 끈끈한 관계가 없다면, 이런 것들은 한낱 형식에 불과하다는... 남편과 아내가 이 믿음을 내다 버리고 있습니다. 마음이 떠나버린 사람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관심을 함께 나누지 못하고 있습니다. 겉껍데기만 서로 만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할 말이 얼마나 많은 지요?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가진 관심보다 더 우선적이고 중요한 것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관심을 어느 누구도 빼앗아 가는 것을 참고 바라볼 여유가 없어졌습니다. 양보하는 일, 희생하는 일, 기다려 주는 일, 아낌없이 주는 일, 이런 것들이야말로 바보 천치나 하는 일들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것은 이런 상처 입은 꿈들이 제자리를 찾게 되는 일입니다. 그 소망은 이곳 땅에서는 이룰 수가 없을지 모릅니다. 그 소망을 죄와 허물로 뒤덮혀 있는 우리 인간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리수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꿈을 땅에서 이루지 못하고 하늘나라에까지 갖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도타운 믿음의 세상을 만들어 놓으셨다는 말씀을 의지하면서 말입니다.

5. 보이지 않는 소망이 참된 소망이라셨는데, 얼마나 옳은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들은 곧 허망하게 사라지고 말 것이며, 우리에게 아픔과 고통을 남길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두는 소망, 보이지 않는 소망이 우리 마음 안에서 자라나게 될 때,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불가능한 가능성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런 보이지 않는 소망 때문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을 믿게 하는 불가능한 가능성이 시작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로 모든 불가능에 도전하는 용기와 기쁨이 여러분에게 넘치시길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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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36(2000.11.13, 월요일)
성경말씀 : 잠 30:7-9.     
찬송 : 487장.
제목 : 진실을 찾아서.              

1. 오늘도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계시길 기도드립니다. “정(情)이 더럽다.”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저는 어릴 때 이런 말씀들을 어른들이 하는 것을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진 남다른 정을 얘기하고 있는데, 정에 매여서 끊고 맺는 일이 분명치 않은 부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지만, 오히려 이런 정으로 인해서 인간관계가 도타와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어제 오전에는 이성준장로님께서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장갑 한 켤레씩을 선물해 주시는 것을 보았고, 오후 찬양예배를 마친후에는 시쇼우 전도사님 가족을 위해서 몇 분 교우들이 시간을 내어 추억만들기를 하신다는 말을 듣고서 마음이 퍽 흐뭇하였습니다. 이런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이들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2. 오늘 본문은 아굴이라는 분의 잠언입니다. 솔로몬 왕의 측근으로 보이는데, 이런 현자들이 그의 주변에 있었겠다는 것은 그리 낯선 얘기가 아닙니다. 예로부터 악인 곁에는 악인들이 끓게 마련이고, 선인 곁에는 그런 동류들이 모여들게 마련인 때문이지요.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음에 분명합니다. 그의 기도는 주제가 분명했던 것 같습니다. 이른바 중언부언하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우리들이 아굴에게서 귀한 기도의 본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는 목적이 뚜렷한 단순하면서도 일관된 기도를 드렸다고 보여집니다.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허탄과 거짓말을 멀리하게 해달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일용할 양식으로 먹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3. 아굴의 기도를 들으셨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기도와 비교해 보신다면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는지요? 저는 아굴의 기도에서 정신이 번쩍 드는 주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허탄이란 “거짓이 많아서 미덥지 않음”이란 의미인데, 거짓 투성이로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을 고발이라도 하듯 지적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허망한 일”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 이 허탄이라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의 삶을 꾸미고 있는지 모릅니다. 행복하지도 않으면서 행복한체 하고, 성실하지 않으면서도 성실을 가장하며, 아는게 별론대도 식자연하고, 부자도 아니면서 배를 내밀었던 때문만이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도, 진정한 성실을, 진정한 지혜와 부자의 자세를 모르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과 이웃에게 조금만이라도 솔직하고 진실하다면, 우리는 훨씬 더 희망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때 진정한 친구와 이웃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친구는 거짓 꾸밈 가운데서 만나고 있는 위장된 관계인지 모릅니다. 아니면 그저 일 때문에 형식적으로 만나는 껍데기 뿐인 관계일지도 모릅니다. 진실한 사람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짓의 탈을 벗어던지지 아니한다면, 영원히 진실한 친구는 우리를 찾아오지 않을지 모릅니다. 이런 심각한 문제를 먼 관계에서 보다는 가까운 관계부터 점검해 보시지요. 저는 어느 막노동하는 아버지의 얘기를 읽은 일이 있었습니다. 자식들에게는 그럴듯한 회사에 출근한다고 잘 차려입고 집을 나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공사장에 가서는 옷을 바꿔 입고 막노동을 한 것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식들에게 자신의 허상을 벗어던지고 참된 자기 모습을 보여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식구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자신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게 되었고, 갑작스런 충격적 고백에 모든 가족들이 망연자실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밝고 기운차던 집안 분위기는 어두워졌고 식구들은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대로 그냥 감추고 살 것을, 하면서 후회스럽게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몇 일이 지나서 가장 철부지였던 아들녀석이 공사장으로 찾아 왔고, 아버지가 힘들게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진심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고백을 듣게 됩니다. 참된 아버지를 찾았고, 사랑스런 아들을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마음속에 담긴 정말 하고픈 얘기를 다 하지 못한체, 아무렇지도 않은체 담담히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고 그들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우리의 진실을 보여주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합니다. 크고 작은 일들을 함께 나눌 가족이라는 사실을, 그것이 때로는 어두운 문제일 수도 있고, 꺼내기 힘겨운 아픔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그 모두를 함께 짊어지고 가야할 가족공동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진실로 가려는 용기만 있다면, 분명 우리 가족은 더욱 도타운 마음으로 하나될 수 있을 것이고, 더욱 강한 응집력으로 뭉칠 수 있을 것인데 말입니다. 

4. 우리에게 여러 가지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러나 허망한 일이나 거짓의 껍질을 벗어던지는 일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를 살면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거짓의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살아가는지를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고도 섬칫 놀라지 않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느니라.” 하나님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희망을 찾기 위해서라도 진실하려고 노력하는 오늘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지켜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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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35(2000.11.12, 주님의 날)
성경말씀 : 요 1:19-23.    
찬송 : 405장.
제목 : 나는 누구인가?                   

1. 오늘 아침 묵상자료는 [2001년 예배와 강단] 686-691쪽에 실린 저의 설교 연구문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한국에서 일하는 목회자들을 위해서 교회력에 따른 설교 준비자료를 만드는 일에 일조 하게 되어서 기뻤는데, 어제 새 책을 받았습니다. 제가 10여 년 간 새 가정사에서 발행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라는 가정 예배서에 매년 2-3편씩 설교문을 제공해 왔는데, 이제는 목회자들을 위해서도 일할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2. “너는 누구냐?” 세례 요한이 받았던 질문입니다. 유대 공의회인 산헤드린에서 보낸 사람들이 물었던 말입니다. 세례 요한은 당시 유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주목의 대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언행이 예사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 식민지 아래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세례 요한이 자기 민족을 위해서 큰 일을 할지도 모르는 그런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예언되었던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던 시대 정황으로 보아서, 세례 요한은 그런 기대를 할만한 요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세례 요한은 단도직입적으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어떻습니까? 혹씨 여러분이 이런 질문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면, 아무래도 난감하시겠지요? 무엇이라고 여러분은 자신을 소개하시겠습니까? “저는 아무개 목사입니다.”라거나, “저는 아무개 아버지입니다.”라고 대답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앞의 대답은 직업이나 하고 있는 일로서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경우라고 할 수 있고, 뒤의 대답은 여러분의 가족 상황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경우인 듯 합니다. 그러나 이런 대답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여러분 주변을 말하고 있을 뿐, 핵심이 되는 여러분 자신을 아직 소개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계십니까? 

3.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질문을 해 봅시다. 나는 누구인가? 참으로 중요한 질문입니다. 섣부른 대답을 하기 전에 세례 요한에게서 배워봅시다. 어려운 일을 만날 때,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 엿볼 필요가 있습니다. 실수를 하더라도 조금 덜할 수 있는 방법은, 다른 사람들이 하는 모습을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아닌 것부터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메시야가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질문을 가지고 왔던 사람들의 마음을 훤히 들여보면서 하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들은 세례요한에게서 메시야인지 여부를 알고자 했습니다. 메시야란 히브리말인데, 그 뜻이 구세주라는 말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그리스도라는 헬라말로 번역해서 사용하고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세례 요한은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아주 분명합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구세주가 아닌 것을 큰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어떻습니까?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때인데, 하루에 수 천명의 군중들을 몰고 다니는 인기인이었는데, 그런 말로 추켜세우는 사람들이 결코 작은 수는 아니었을 터인데도, 그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는 구세주가 아니다.”고. 그러면 세례 요한은 거듭해서 질문을 받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냐? 엘리야냐? 선지자냐? 그 때마다 “나는 아니라.”고 하는 말 외에는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질문자들은 “그러면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하느냐?”고 묻습니다. 세례 요한은 지체하지 아니하고 “나는 광야에 외치는 소리로다.”고. 바람결에 흘러 사라져 버리고 말, 소리에 불과 하다고.
그는 뒤에 오시는 위대한 분의 길을 안내하는 소리꾼으로, 자신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마치 그 옛날 시골 관리가 행차하는 것을 연상할 때, “길을 비켜라! 원님이 납신다.”고 외치는 소리꾼을 보는 듯 합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리는 인기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소리꾼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4. 이제 여러분이 대답하실 차례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먼저 여러분이 아닌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세례 요한처럼, 우리 자신이 아닌 것에 대해서 큰 소리로 “아니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서 있어야 할 참된 제 자리에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그 다음으로는 내가 무엇을 위해서 세상에 보내어졌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서 세상에 왔습니다. 뜻없이 왔다 가는 인생이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맡겨 주셨습니다.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여러분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에 충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주님의 신들메를 풀기에도 감당치 못할 자로 자신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속담에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이 난다.”는 말처럼, 주제를 파악하지 못한 체 이리 저리 망둥이처럼 뛰어 다니기만 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고, 그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하겠습니다.

5. 우리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계시길 기도 드립니다. 오늘 주일 예배로 마크 시쇼우 전도사께서 실습을 마치고 귀국하시게 됩니다. 그 분의 앞날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함께 하시길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샬롬! 샬롬!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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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34(2000.11.11, 토요일)
성경말씀 : 잠언 30:5-6.   
찬송 : 411장.
제목 :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            

1.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겨울 날씨를 보이고 있습니다. 몸을 따뜻하게 하라고 어머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여러분들도 그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차가운 날씨를 잘 이기는 방법은 따뜻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을 어떻게 우리 의지로 가질 수 있느냐고요? 옳은 말씀입니다. 우리 마음을 누가 다스리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2.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매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는 사람, 이런 저런 교회 직분을 맡고 있는 사람, 세례를 받은 사람 등 등. 외적으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을 그런 조건들로 규정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이라고 규정합니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존재 양식(存在 樣式)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 모양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을 때라고 말입니다. 아무리 교회 생활이 충실하고, 중요한 직분을 맡고 있든 간에, 그 분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지 않다고 하면, 그리스도인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부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과 그리스도 밖으로 들락 달락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도 하고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않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 머문다는 말은 긴 설명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주제와 관련이 있지만, 아무래도 간단히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란 “안에”라는 전치사의 의미를 잘 이해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 말은 존재 상태를 나타내는 특별한 의미와 함께, “-를 통하여”, “-로 말미암아”와 같은 뜻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 에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우리의 실존 상태를 의미하며,” 이는 또한 “그리스도를 통하거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일을 하고자 하는 자세”를 말하기도 합니다. 

3. 우리 인간만큼 외로움을 타는 존재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누군가가 응원해 주기를 항상 희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많이 듣는 말 가운데는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하는 말입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대도(代禱)라는 것이 있습니다. 대신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제도적으로 이런 응원의 색채를 띈 것들을 많이 만들어 두고 있습니다. 세례 받을 때는 대부모(代父母-god parent)를 세우는 일도 그런 예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이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큰 위로와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서 이른바 배경(background)을 중시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응원에 불과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다시 말하면 응원하는 사람이 자기 문제가 힘들거나, 피곤해질 때도 나를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해 주고, 도와줄 수 있다고 기대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응원하는 사람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란 보잘 것 없는 것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분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시편에서 우리는 아주 강하고 힘있는 구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46:1). 그렇습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과 항상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마28:20). 우리는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이런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인생을 승리하였는지를 보여줄 뿐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실패한 인생을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나 제가 안고 있는 큰 약점은 하나님이 하실 방법에 대해서 믿어워하지 않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도와주실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거기에는 우리 자신들이 기대하는 방법들이나 내용들이 항상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가져야 할 신앙은, 하나님 자신의 뜻과 방법에 전적으로 의탁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도와 주시”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시라는 자세가 참된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그 때 참된 평안과 감사가 생기고,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우리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4. 제 아우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오른 발 오금장이에 물 혹이 나 있었습니다. 그 물 혹이 너무 커서 오른 발을 오므릴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해동안 여러 차례 병원에서 그것을 고치려고 시도했지만 허사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시골 저의 모교회에서 부흥집회가 있었는데, 식구들은 다 예배드리러 가는데, 이 동생만은 집을 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교회에 나와 앉아 있는 게 아닙니까? 그 날 밤에 동생의 물 혹은 기적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가 동생에게 물으셨습니다. “너는 엄마 말 듣지 않고 교회에 나왔느냐?”, 그 때 동생은 똑똑한 말로 “다 천당에 가는데 나만 지옥에 가는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담을 뛰어 넘어 교회에 가고 싶었어요.” 그 날 밤의 기적을 저는 순수한 제 아우의 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계획이나 욕심을 따라 기도하는 것이나, 우리의 소원대로 살려고 하는 것까지도, 적절한 방법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만이 저를 아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저를 인도해 주십시오. 하나님께 의지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드릴 기도의 형식이며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는 것으로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며 축복인지를 감사하십시오. 비록 여전히 풀리지 않은 문제들이 남아 있고, 아픔과 고통이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선하신 주님께서 여러분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적절한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선하게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계시길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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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33(2000.11.10, 금요일)
성경말씀 : 잠언 29:15, 17.   
찬송 : 239장.
제목 : 바른 자녀 교육을 생각해 봅시다. 

1. 주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어제는 선한 사마리아회가 목욕봉사를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단수에다 기계 고장이 났다는 얘기를 뒤늦게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원봉사자들 6명이 봉사의 내용을 바꿔보기로 하고 충북 영동으로 시집가신 박성희집사님 사과 농장으로 가서 3시간동안 사과 꼭지를 가위로 손질하는 일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5천평이나 되는 농장과 저온 저장고 등 규모가 만만치 않았고, 요사이는 매일 10여분의 일꾼들을 불러 분주하고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시어머니와 함께 네 식구가 살고 있는데 아주 건강하고 열심히 살고 계시는 집사님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이렇게 탐스럽게 열린 사과 알처럼 신앙의 열매들도 많이 맺히기를 기도 드렸습니다. 

2.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은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래된 말,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는 우리 부모 세대들이 뼈저리게 체험하였던 아픔을 내비치는 표어입니다. 그래서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자녀 교육을 위해 분에 넘치는 투자를 했던 것입니다. 제 얘기를 가끔 드렸습니다만, 저는 아홉 남매의 셋째로 태어났는데, 가난한 살림 때문에 부모님의 힘으로 가르친 자식은 형님을 고등학교에, 누님을 중학교에 다니게 한 것 외에는 모두가 초등학교밖에는 보내질 못했습니다. 막내와 제가 대학을 나오긴 했지만, 부모님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고 주변이나 고학으로 공부한 케이스입니다. 그래서 저의 부모님은 평생 이 점을 늘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너희들에게 해 준 것이 없다.”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늘 같은 말로 대답하였습니다. “아닙니다. 부모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부모님께 배워야 할 것은 다 배웠는걸요.” 그것은 기본 교육에 대한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말하기, 습관들이기, 하나님 신뢰하기 등 등, 어쩌면 이런 것들이 제대로 배우고 익히지 않았다고 한다면, 아무리 현대적인 좋은 교육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제 구실을 할 수가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습니다.

3. 사람은 선천적인 것을 잘 개발해야 하고, 후천적인 교육으로 훨씬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해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생긴 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갓 태어난 어린아이를 보신 일이 있겠지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아이라는 것을 관찰 하셔야 합니다. 제 자신의 뜻을 제대로 표현할 줄도 모르고, 심지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스스로 먹을 것과 먹어서는 안될 것을 구별조차 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살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우리들의 첫 출발 모습입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우리들에게는 헌신적으로 사랑을 베풀어주신 부모님들을 만난 것입니다. 하루에도 수 천번씩 사랑의 눈길을 쏟아 부어 주셨고, 온갖 필요 적절한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끔 손자를 돌봐주는데, 지금 그 아이를 가르치는 내용은 해서는 안될 일밖에 없습니다. 아직은 전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때이므로, 이것은 이렇게 저것은 저렇게 하면 좋겠다고 가르칠 수 없습니다. 그보다 먼저 가르쳐야 할 일들이 산더미 같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해서는 안될 일들입니다. 아무 것이든 손에 잡히는 대로 입으로 가져갑니다. 배가 고파서거나, 먹고 싶어서가 아닌 것을 압니다. 때로는 위험하기까지 한 것들까지도 서슴없이 입에 넣곤 합니다. 지금은 “하지 말라”, “안 된다”는 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아이가 곧 말귀를 알아듣게 될 날이 오리라고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때에는 왜 하지 말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잘 하는지를 구별하도록 가르칠 것입니다. 

4. 그런데 오늘 우리 시대의 큰 걱정거리 중 하나는, 가정 교육의 부재 또는 부실 현상이 아닌가 합니다. 어쩌면 부모님들이 가정 교육을 포기한 것과 같은 생각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물론 겉모양으로 보아서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더 많은 교육적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얼마나 허깨비 교육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피아노다 속셈이나 미술이다 태권도다 영어다 해서 학원에 맡기는 것을 교육이라고 한다면 예전 우리 부모님들 보다 교육적 관심이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이런 교육은 이른바 기초 교육이 되어 있을 때, 효과를 거두는 것이지 기초 교육이 부실했을 때는 사상 누각처럼(모래 위의 집) 반드시 엄청난 실망을 가져다 줄 날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기초 교육이란, 앞서 언급했습니다만 말하기 교육과 정서적인 안정감 주기, 좋은 습관 길들이기 등등입니다. 바른 말과 틀린 말을 구별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좋은 말과 나쁜 말도 가르쳐야 하고, 밝은 말과 어두운 말의 사용법도 익히게 해야 합니다. 사실 말 하나만 제대로 가르쳐도 그 아이는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입 속에서 맴도는 말버릇을 고치지 않으면 그 아이는 지도자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분명하고 똑똑하게 말하는 훈련을 시키십시오.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갖는 것은 쉬운 교육이 아닙니다만, 매사에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서적으로 불안한 사람입니다. 정서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사물이나 사건을 대할 때 반응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우리는 일생동안 수 만가지 것들을 대해야 합니다. 그 때마다 안정감을 갖고 대할 수 있어야 하겠는데, 그렇지 못하다면 이것처럼 큰 낭패도 많지 않을 듯 합니다. 쉽게 반색하고 쉽게 낙담하는 사람들, “죽었구나”라는 말을 잘 사용하는 사람들, 모두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정신 상태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훈련으로 얼마든지 극복해 나갈 수 있습니다. 제가 잘 아는 한 분은 참 훌륭한 부모님 밑에서 자라났습니다. 그 부모님은 항상 “당황하지 말고, 차분히 들여다보면 길이 있단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분은 그 힘들다는 공학과 의학을 공부해서 존경받는 대학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 분의 부모님께서는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훈련시킨 것이지요. 학교 교육이나 사회 교육에 자녀를 맡기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하고 더 필요한 교육은 기본 교육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자녀를 가진 부모라면, 이점을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한 교육을 맡겨 주셨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5.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제 멋대로) 하게 내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오늘은 여러분이 받은 기본 교육을 점검해 보는 날로 삼아보시면 어떨까요? 그리고 이제는 그 기본 교육의 교사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교안을 만들어 보면 어때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묵상팀 중의 한 분이 제 얘기를 읽으면서 자녀 교육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을 해 오셔서, 덧붙인 제 생각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오늘도 여러분에게 평화와 기쁨을 주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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