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53(2000.1130, 목요일)
성경말씀 : 빌 2:19-24.    
찬송 : 381장.
제목 : 아름다운 추천서.

1. 우리 주님께서 오늘도 변함없이 여러분과 함께 계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오늘은 아름다운 한 장의 추천서를 받으시겠습니다. 이런 추천서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입니다.

2. 바울 사도께서 빌립보 교회를 지도하기 위한 일꾼으로 디모데를 추천하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빌립보 교회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아는 유일한 사람으로 교인들과 뜻을 같이 할 수 있다.  
   둘째, 빌립보 교회가 직면한 여러 가지 일들을 진실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다.
   셋째, 디모데는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이익과 욕망을 포기하도록 훈련받은 사람이다.

3. 상담학에서 상담자는 찾아온 피상담자의 처지에서 얘기를 들어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말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본다는 말입니다. 말하기는 쉽지만 실제로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는데 너무 오랜 시간 길들여져 있습니다. 얼굴을 붉히고 목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 소리친 경험을 떠 올려 보세요. 그 땐 분명히 자신의 입장과 생각에 빠져 있었을 때입니다. “그랬구나. 그런 일도 있었어?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그래서 그 다음은?” 우리들이 이런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 사도의 추천을 받은 디모데는 빌립보 교회 사람들에 대해서 깊은 관심과 이해를 가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짊어진 어려운 문제들에 대해서 그들 중 하나가 된 것처럼 생각하려고 노력해 온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일하게 되면 금새 숨소리까지 잘 맞아서 낯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서로의 장단점을 잘 알뿐 아니라, 그것을 함께 짊어지고 살아가면서 뜻을 같이 하는 사람, 이런 사람하고 같은 직장에서 일하고, 이런 사람과 집에서 함께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사람을 찾아야 하겠습니까? 그런 관계를 만들어야 하겠습니까? 저도 어릴 때는 그런 사람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해서 찾으려고 했었는데, 철이 들고는 그게 아니라 그런 관계를 만들어야 하는 것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좋은 이웃이나 친구는 찾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만들어야 할 대상이라고 말입니다.

4. 그는 진실 무망(無妄)한 사람입니다. 진실한 사람, 헛된 것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 순수한 사람이 정말 그리운 세상입니다. 우리 자신 역시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기 때문입니다. 알게 모르게 거짓에 깊이 물들어 있는 우리들입니다. 마음과는 다르게 친절한 체, 성실한 체, 신앙이 좋은 체합니다. 그래서 가깝고 도타운 우정의 관계로 키우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진실된 참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질 날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얼마나 큰 실망과 상처를 주게 될 것인지 ……. 바울 사도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씀합니다. “이 사람은 진실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들어야 할 말이 아닙니까? 진실한 사람으로 보여져야 하겠고, 진실한 사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진실한 사람은 거짓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 결과 손해를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때론 부끄러워질 수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명예를 잃을지도 모릅니다. 진실의 길은 이처럼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가시밭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거짓으로 회칠한 사람들은 얼마나 편리하고 실속 있게 살수 있는지 모릅니다. 가해자가 피해자로 둔갑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 보십시다. “제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요.” 이 한 마디면 모든 책임이 면해진다고 할 때, 거짓이란 얼마나 편리한 생활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의 길은 이 세상에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십자가의 길일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사람은 내가 믿는 진실한 사람입니다.”는 한 마디 말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5. 바울 사도가 디모데를 사랑하는 마지막 이유는 그의 일편단심 복음을 위한 헌신적 자세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젊은이들에게서 찾기 힘든 아름다운 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 욕심을 챙기거나 앞세우지를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자신의 전 삶을 바치기로 무장했을 뿐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어리석고 바보 같은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요사이 “죄송합니다.”란 말을 잘 사용하는 분을 만났습니다. 자신이 신뢰를 받지 못할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거기에는 힘든 약속을 지키기보다는 그 때 그 때 형편에 맞추어 쉽게 살아가고자 하는 편의주의와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 앞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송합니다.”는 말을 자주 쓰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이웃에게서 한결같은 삶의 모습을 보고싶어하고, 우리 자신 또한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디모데는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이미 다 바친 사람이었고, 그대로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멋진 인생입니다. 우리 시대의 위험한 풍조중 하나는 이기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만 생각하고, 자신만 이해해 달라고 하고, 자신만 잘되야 한다는 등등의 생각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긴 하지만, 이런 사람들과 가까워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람들은 여러분이 애써 가꿔온  아름다운 헌신의 삶을 이기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6. 아름다운 추천서, 오늘 우리들이 받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오늘도 여러분의 삶 속에서 동행하심을 감사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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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52(2000.11.29, 수요일)
성경말씀 : 빌 2:12-18.    
찬송 : 502장.
제목 : 구원을 향한 명령.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길 기도 드립니다.

2.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은 여타의 다른 종교가 가르치는 신앙과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구원에 관한 가르침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점을 가장 명확히 가르친 분이었습니다.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행동을 시작하셨다고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는 그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믿는 것밖에는 없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구원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롬5:8). 그런데 오늘 말씀은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조금은 의아하게 느껴지는 말씀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3.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선생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거나, 모순되거나, 풀기 힘들 때, 선생의 안내는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바울 사도와 같은 대 스승이 있다는 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축복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구원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서 잘 지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의 모든 가르침에서 직설법과 명령법이라는 문법적인 방법을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께 넘치는 은혜를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선언적인 표현인데, 문법에서는 직설법적인 용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또 말씀하시길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거하라.”고 명령법을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직설법이 있는가 하면 동시에 명령법이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도 그런 시각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이미 구원받았다.”고 말씀하시면서 “너희는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고 하십니다. 

4. 우리가 이 점에서 깨우쳐야 할 것은, 하나님의 선언적인 사실이나 진리에 대한 말씀이 언제나 기초가 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고, 은혜를 베푸셨으며, 구원의 행동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과 진리 위에서 우리는 무엇인가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말입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사랑할 수 있게 되었고, 주님 안에서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무엇인가 우리들의 삶에서 아름다운 것들(사랑하는 마음이나 행동, 선한 열매들 등)이 있다고 한다면, 그 시발점은 바로 우리 주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결단코 우리 자신이 공로를 받게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들을 위해서 행동하신 사랑과 섬김과 은총을 바탕으로, 그것도 주님의 도움심을 받아서 생각하였고, 행동한 때문입니다. 만일 공로가 있다면 오직 하나님께 돌릴 따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명령법의 말씀들을 많이 받았습니다. 세상에 빛이 되어야 하고 소금이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남을 섬기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종이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런 명령의 말씀은 결코 무리하거나 부당한 것이 아닙니다. 항상 그 배경에는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축복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축복을 받은 자로써 당연한 의무사항이라고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삶과 모습에 대해서 “나의 나된 것은 주님의 은혜라”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우리 됨은 주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5. 오늘은 박숙자 집사님의 막내 딸 최이령양이 첫 돌을 맞는 날입니다. 주님 은혜 가운데서 건강하고 바르게 자라나도록 기도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모든 부모의 마음이 그렇겠습니다만, 똑똑하고 아름다운 아이가 되기를 바랍니다만, 우리는 조금 다르게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똑똑한 것보다는 바르게 살기를 더 바래야 하겠고, 예쁘기보다는 건강하기를 더 바래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말속에서 희망 속에서 그런 마음을 가지시기를 권고합니다. 또한 오늘은 우리가 존경하는 김해철목사님께서 신학대학 교수로써 은퇴하시는 날입니다. 백발이 성성하신 분이 이제야 은퇴하신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미 30대부터 흰머리가 많으셨답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참 고마운 분이시며 귀한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남은 생애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평안하시고 아름답기를 기도해 주십시오. 

6. 주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도와주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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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51(2000.11.28, 화요일)
성경말씀 : 빌 2:5-11.     
찬송 : 507장.
제목 :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서.

1. 오늘도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길 기도 드립니다.

2.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품어야 정상이지, 어떻게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는지, 그것부터 부담스럽게 들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이런 생각 때문에 자주 걸려 넘어지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근본적으로 우리들에게 특별하게 생각하는 틀을 갖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치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따지거나, 방법상 가능한지 여부를 생각하는데 마음 쓸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과학적 혹은 논리적 방식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면에서는 가장 인간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사람은 이런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읽어서는 크게 도움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은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문제의 근원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관심을 가진 사람은 그 본질과 근원을 묻는 관심으로 성경말씀에 접근해야 합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 그 까닭은 무엇일까? 하고 말입니다. 

3.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할 까닭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바울은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한 권리를 포기하고 오히려 종의 모습으로 화육(化肉-사람의 몸을 입으심)하실 뿐 아니라, 하늘 높은 곳에서 세상 가장 낮은 자리에까지 내려가시고(섬기러 오심),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은, 예수님의 마음이 특별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이 세상을 살리는 출발점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위대한 구원의 진리가 바로 예수님의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중심 의도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마음, 그 마음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절실하다고 말입니다. 비록 예수님처럼 세상을 구하는 큰 일을 해낼 수는 없을지라도, 그런 마음이 작은 불씨가 되고, 생명의 씨앗이 될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조금씩 아름다워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4.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분들을 얘기하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모릅니다. 오는 주일에는 우리 교단이 정한 자원봉사자의 주일로 지키게 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이웃을 섬기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분들을 찾아내어 격려할 뿐 아니라, 무심하거나 잠들어 있는 사람들의 선한 마음을 흔들어 깨우기 위해서 작은 칭찬을 하려고 합니다. 이미 자원봉사상 내규를 만들어 금년에는 [자원봉사자 은상 수상 기념패]를 만들어서 드리려고 합니다. 금년에 수상자는 3분으로, 지난 7년동안 매 주일 제단의 꽃꽂이 봉사를 실천해 오신 김효은집사님과 조미숙집사님, 무의탁 노인들중 자신의 힘으로 움직일 수 없는 중증환자들을 위한 목욕봉사에 5년간 50회 참여하신 문경원권사님이십니다. 저는 이런 분들이 우리 교회 안에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기쁜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물론 기독교인으로써 선한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만, 5년 혹은 7년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그 선한 관심을 실천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분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아름다운 마음을 몸으로 실천하심으로 우리들에게 큰 격려와 소망을 보여 주셨습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분들을 찾아서 상을 주려고 합니다. 또 감사한 것은 용돈이 궁한 형편인데도 이런 값진 일에 써달라고 이성준 장로님께서 돈을 맡겨 주셨습니다. 액수보다는 그 마음이 또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들도 진심에서 축하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예수님의 마음을 여러분의 형편에 맞게 여러분이 있는 자리에서 실천하실 수 있습니다.

5. 예수님의 마음은 우리 모든 기독자들이 품고 살아야 할 마음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한 순간의 감정에 좌우되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한결같은 마음을 품고 살기 위해서는 좋은 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유혹과 어려움을 이겨내는 훈련이 몸에 길들여져야 합니다. 저는 가끔 목회를 지망하는 학생들에게 몇 가지 부탁을 하곤 합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에는 좋은 훈련을 길들이게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 한 예로 새벽기도회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시절에 어머니를 따라서 새벽 기도회에 참석하곤 했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이 좋아서도 아니고, 새벽 공기가 시원해서도 아닙니다. 어머니가 부르시면 대답했고, 교회 가자는 말씀에 거절하지 않았던 것뿐입니다. 저의 어머님은 저를 목사로 만들기로 서원하셨고, 그 목사의 길을 걸어갈 저를 위해서 훈련시키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새벽 기도회 시간에 일어나는 일이 그리 힘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새벽 시간에 하나님의 큰사랑을 많이 체험하고 있습니다. 저는 선한 일도 이런 훈련을 요구하고 있다고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 두 번 선한 일을 하는 것으로 기독자가 아닙니다. 까닭은 여러분은 예수님의 마음을 항상 지니고 살아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그 마음이 지시하는 대로 사는 것이 복된 삶이 아니겠습니까? 

6. 오늘도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당신이 품으셨던 마음을 가지기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오늘부터 예수님의 마음(겸손한 종의 마음)으로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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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50(2000.11.27, 월요일)
성경말씀 : 빌 2:1-4.      
찬송 : 522장.
제목 : 성도의 관계.

1. 오늘도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길 기도 드립니다.

2.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성도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특별한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성도(聖徒)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일컫는 말인데, 그 의미는 ‘구별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일반적인 세상들과 구별된 사람들이 우리들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중국 사람들은 서로 도와서 함께 잘 살려고 한다고 하지요? 그런 얘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을 해보지 못했습니다만, 사실이라면 참으로 부러운 얘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관계도 이런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3. 사람은 관계를 맺고 살수밖에 없는 사회적인 존재임에 분명합니다. 그런 면에서 성도들 역시 어떤 모양이든 관계를 정립해야 할 사이입니다. 바울 사도는 두 모습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성도들이 보여 주어야 할 모습입니다.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은 어리석은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 특징은 다투는 관계이거나 허세를 부리는 관계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들은 쉽게 떠올 수 있을 것입니다. 항상 싸우는 사람처럼 목에 핏대를 올리거나 비아냥거리기를 잘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확실히 마음이 꼬여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거기다가 기회만 있으면 허세를 부립니다. 너무도 그 처지와 형편을 잘 알고 있는 대도 불구하고 속일 사람이 따로 있지, 격에 어울리지 않는 거짓말과 허풍을 떨어댑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경우를 피해망상증이거나 불안공포증의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혹시 손해를 보지 않을까? 혹은 자존심이 상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심리가 자신도 모르게 공격적이 되거나 허세 쪽으로 급선회한 경우입니다. 이런 관계에서는 그 우정이나 신뢰가 오래 지속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사람에게 기만당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극도로 불쾌감을 가지게 되며, 이런 경우를 당할 때 더 이상 속마음을 내주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방어하려는 의식이 생긴다고 합니다. 

4. 그런데 또 다른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자기 보다 낫게(질이나 수준이 높다고 매김) 여기는 성도들의 모습이 그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일을 충실히 하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일까지도 관심 있게 돌보아 주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겸손한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도 큰 행운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사람 곁에서는 사는 즐거움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칭찬하고 격려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남을 기쁘게 하는 언행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로 인해서 삶에 대한 전혀 새로운 용기와 희망이 솟아나게 됩니다. 갑자기 우리 자신이 무명에서 유명으로 바뀐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성도들이 보여주어야 할 참된 모습이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4년전의 기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제가 한 학기 연구여행을 떠난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가르치는 예배학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는데, 거기엔 훌륭한 교수님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Dr. Carl Volz교수님은 우리 교회에서도 설교를 하신 일이 있는 분으로, 그 대학에서는 제가 알고 있는 유일한 분이기도 하였습니다. 하루는 저에게 교수회의에 와서 인사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40여분의 교수들이 모인 정례회의였는데, 저를 소개하는데 정말 몸둘 바를 모를 만큼 저를 칭찬하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제가 준비했던 인사말도 미국 교회와 신학에 대해서 배우려고 왔다는 겸손한 내용이었기에 어느 정도 궁합이 맞는 대답이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지금까지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는 추억입니다. 제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미국 학자들은 상당히 교만하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분은 그런 저의 인식을 송두리체 깨트리고도 남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은 말씀으로만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으로 저를 높여주셨고 도와 주셨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말았습니다. 

5. 성도로써 우리는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지를 살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서로 겸손하게 서로를 높여 주고, 서로에게 자신의 본분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짐이 되는 것은 서로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안겨주는지 모릅니다. 그런 다음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는 그런 모습을 우리 자신에게서 찾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도들인 우리에게 주님은 그런 모습을 기대하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6. 오늘은 서영우집사님을 위로하는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어제 밤 서집사님의 모친께서 소천하셨습니다. 아마도 내일 출상하게 될 것 같습니다. 고인은 천주교회를 출석하셨다고 합니다. 교회에서는 오전에 연락을 취하고 오후 1시에 문상하기 위해 출발하려고 합니다. 동참하실 분들은 저에게 연락을 주시면 동행하실 수 있겠습니다. 다시 한번 나그네인 우리 인생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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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49(2000.11.26, 주 일)
성경말씀 : 계 1:4-8.      
찬송 : 438장.
제목 : 새로운 시작을 위한 마지막 시간입니다.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오늘은 [왕이신 그리스도의 날 주일]입니다. 교회력으로 마지막 주일입니다. 신앙적으로 한 해를 마감하는 주일입니다. 시간을 셈하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지혜로운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어제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오늘인데도 ‘마지막 날’이라는 시간의 의미가 붙게될 때, 전혀 특별한 날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마지막’은 우리들에게 뒤를 돌아보게 만들고, 많은 깨우침을 줍니다. ‘좀 더 잘 할 수 있었고, 좀 더 잘 살수 있었는데’하는 마음을 들게 하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간의 의미를 진지하게 묵상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2. 오늘 본문은 [왕이신 그리스도의 날 주일]의 사도서간문 말씀입니다. 다니엘서 7:13-14과도 비슷한 내용의 말씀인데, 하나님은 시간의 처음이시며 끝이 되신다는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시며 동시에 심판자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이해 혹은 선언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들 인간은 저마다 시간의 시작과 끝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문제를 안고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사는 것인지를, 어떻게 살아야 바른지를 알지 못한 채 시간의 한 복판에 서 있다는 말입니다. 삶의 시작을 모르기 때문에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세우지 못했던 것입니다. 방향을 모르기에 얼마나 방황하는 헛수고를 했는지 모르며, 뜻을 똑바로 세우지 못했기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역시 그런 연장선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3. 하나님은 알파(헬라어 첫글자)이시며 오메가(헬라어 마지막 글자)이십니다. 시작이 되시는 하나님을 생각해 봅시다. 알파이신 하나님은 우리들 삶의 근거가 되십니다. 우리 인생들이 엮어 가는 삶의 실타래를 푸는 첫 순간에 계셨던 유일한 분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모태에 있을 때 계셨고(시71:6),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삼상16:7) 분이십니다. 놀랍게도 우리 자신을 가장 잘 알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인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솔직하고 지혜롭다면, 우리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상의할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당신만이 저를 아시나이다. 저의 앉고 일어섬, 마음의 방향, 그리고 언제든지 튀어나올지 모르는 비굴함과 연약함까지 주님은 너무도 잘 알고 계시나이다. 당신만이 이런 저를 도우실 수 있나이다.”고 말입니다.

4. 오메가이신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마침이 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우리는 뜻을 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엮어 가는 삶의 모양새를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할 것인지를 말입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먹고 입고 사는 것”이 삶의 전부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마6:31-33) 위해서 살 의무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기를 쓰고 발버둥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되고 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가 불안과 두려움의 불확실함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로 진행될 희망찬 것이라는 믿음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5. 알파요 오메가이신 하나님 앞에서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서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느 편에 더 가까운지 확인해 보십시다. 한 사람은 여전히 자신의 뜻과 생각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는 한 시도 쉬지 않고 “주십시오.” “이렇게 저렇게 되어야 합니다. 믿습니다.”를 연발합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아버지의 선하신 뜻대로 하십시오.” “저는 아버지께 맡기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분명 한 사람은 하나님을 피곤케 할 뿐 아니라, 제 멋대로 인생을 살수 있는 양 야단법석을 떨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좁은 생각을 다 내놓고 하나님 아버지의 넓고 깊은 뜻에 의탁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모습은 누구와 닮아 보입니까?

6.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십니까? 이제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에게 부탁하신 말씀을 받아들일 시간입니다.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마28:20)는 약속은 지금도 그리고 영원토록 유효합니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는 명령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오늘은 여러분에게 의미 있는 반성과 출발의 시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항상 여러분과 함께 계시길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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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48(2000.11.25, 토요일)
성경말씀 : 빌 1:25-30.    
찬송 : 520장.
제목 : 기대된 삶.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2. “황당하다”는 표현은 전혀 기대 밖의 일이 발생하고 있다는 그리 반가운 얘기가 아닌 경우에 사용하는 말입니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가까운 이웃에게서 이런 황당한 경우를 맛보게 될 때, 어째 이런 일이? 라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게 됩니다. 40년을 한 직장 한 교단에서 생활하던 분이, 이해관계에 얽혀서 갑작스럽게 황당한 경우를 만들고 떠나간 일이 있었습니다. 전혀 기대 밖의 사건을 만들어 버린 셈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에서 황당한 일들이 자주 벌어질 때, 우리는 분명 불안정한 삶의 한 복판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처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고 있다던 지, 기대된 짐을 짊어지고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보다 더 든든하고 도타운 삶은 없다고 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지금 황당한 일들을 자주 만나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아니면 기대된 삶을 사는 이웃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새삼스럽게 생각해 보게 하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3. 본문은 바울 사도가 빌립보 교인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다는 점을 솔직하게 말하면서 자신의 속마음을 열어 보이는 내용입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인하여 협력하는 것과,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vv.27-28a) 복음의 합당한 삶을 기대하는데, 두 가지 분명한 구체적인 내용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는,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적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의 신앙이란 거짓 신앙이 아니라, 살아있는 신앙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기독교 신앙은 항상 도전을 받아왔고 공격을 받아왔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점을 항상 염두에 두고서 신앙지도를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율법적 신앙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행동”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회만 있으면 “인간 중심, 혹은 인간의 능력과 의지에 전적으로 매달리는 사상”이 “하나님 중심, 하나님의 주도권에 모든 것을 위탁하는 신앙”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복음적이라는 말과 율법적이라는 말을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복음적이라는 말은 성경에 근거를 둔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만물의 창조주로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모든 일을 하셨고 지금도 일하고 계시다고 믿는 일입니다. 그러나 율법적이라는 말은 사람의 지식과 힘에 근거를 둔 신앙으로, 사람이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무엇인가 일해야 하고 일할 수 있다고 믿는 일을 말합니다. 복음적인 신앙에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일하실 수 있다는 것에 반해서, 율법적 신앙은 인간도 크든 작든 자신과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반드시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보다는 후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기독교 신앙을 흔들리게 만드는 문제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우리가 살 수 있지만, 그래도 우리들 역시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이 있고, 반드시 우리 자신의 몫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는 생각하는데, 바로 이것을 율법적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복음적 신앙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을 고백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로마서 5:8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중심의 구원역사를 약화시키는 그 어떤 사상이나 가르침을 통칭해서 율법적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율법적인 신앙은 기독교 정통 신앙을 가장 위협하는 거짓 가르침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이 이런 복음적 신앙을 위해서 한 마음으로 협력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신앙을 위협하는 대적자들에게 대항해서 싸울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4. 우리가 가진 신앙은 단순히 정신활동만이 아님을 29-30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난도 받”기를 기대하고 있으며, 필요하다면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다고 구체적인 행동하는 신앙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이런 위대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후견인이 되셔서 도우시기 때문입니다(대상22:13).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붙드십시오. 우리 인간은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이지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역할이 귀하면 귀할수록 주인 되시는 하나님은 뜻과 계획은 더욱 소중함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시길 기도 드립니다.  샬롬. 샬롬,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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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47(2000.11.24, 금요일)
성경말씀 : 빌 1:19-24.    
찬송 : 508장.
제목 : 기독교인의 사생관(死生觀).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길 기도 드립니다. 어제 저는 참 귀한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윤정숙권사님이신데 올해 93살이 되십니다. 허리가 아프다고 호소하셨지만, 그래도 거동이 양호한 분들이 거하시는 6호실에 계신다고 자신을 소개하시는 분이었습니다. 1929년에 세브란스 대학 간호학과를 졸업, 평생 간호사로 환자들을 돌보는 삶을 사신 분입니다. 3년전까지만 해도 연세대학에서 초청, 후배들과의 만남을 가졌지만 아흔이 넘으면서부터는 소식이 끊겼다고 섭섭해 하셨습니다. 30여년전에 남편을 사별하고, 하나 뿐이던 아들도 전쟁 중에 이별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친구요 안식처였다고 했습니다. 살아가는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또렷이 대답하셨습니다.  

2. 삶에 대해서 질문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꺼리는 경향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생각하는 것보다 더 적극적인 삶의 자세는 없”는 지 모릅니다. 사는 것은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며, 동시에 죽음에 대한 생각은 삶을 충실하게 채워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죽는 것과 사는 것에 대한 분명한 이해, 지금 우리들에게 이것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는 일이며,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고백합니다. 삶과 죽음에 대해서 이처럼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부럽고 멋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3. 여러분은 어떤 사생관을 가지고 계십니까? 혹시 누군가에게 자신의 사생관에 대해서 얘기를 나눠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자신의 죽음에 대한 얘기를, 혹은 글을 남겨본 적이 있으십니까? 이번에 적극적으로 이 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요? 물론 어두운 느낌이 잠깐 스쳐지나가게 될 것이나, 결코 부정적인 얘기로 끝나지 않음을 곧 아실 것입니다. 오히려 훨씬 더 긍정적이고 건강한 삶을 만들어 가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람은 죽음을 앞둘 때 가장 순수해지고 가장 아름다워진다고 합니다. 비록 언제일지 알 수 없는 장래 일이긴 하지만, 미리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실존에 대해서 진지하게 살필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만들어 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사생관을 가짐으로 해서, 그의 삶이 훨씬 더 간결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심 목표가 세워진 삶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며, 우선 순위가 명확한 생활이 될 수 있었다고 보여 집니다. 우리들 역시 사생관이 필요합니다. 잘 살기 위해서며, 동시에 잘 죽기 위해서입니다. 

4. 우리는 눈앞에 있는 일들에 너무 많은 노력과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것들이 소홀히 할 수 없는 것들일 것입니다만, 그래도 좀 더 멀리 내다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훨씬 마음이 여유로워질 것입니다. 매일 100미터 달리기를 할 수도, 해서도 안되지 않겠습니까?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열심히 살긴 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너무 눈앞의 일에 골몰하거나 숨가쁘게 몰아쳐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루하루가 모아져서 만들어 가게될 삶(인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매일의 삶이 엮어질 우리의 인생이 어떤 것이 될 것인가에 더 깊은 관심과 애정을 쏟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느 부잣집에 가정교사로 입주해서 1년을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말이 가정교사이지, 그 집안의 크고 작은 허드렛일도 도와야 했습니다. 만일 그 때 저의 인생의 어떤 형태를 분명히 내다보지 못하고, 그저 하루하루만 열심히 산다고 했다면 숨이 막혀서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살아야 할 삶과는 너무 동떨어진 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생관이란 자신의 삶을 하나의 완성된 그림이나 조각처럼 머리 속에 만들어 두고서, 그것을 향해서 기운차게 살아가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는 바울이 아니기에 바울과 같은 사생관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사생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윤정숙 권사님은 하나님과 함께 살 영원한 삶을 바라보면서, 매일 감사와 사랑으로 살고 계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오늘 아침엔 너무 무거운 주제가 될지 모릅니다만, 우리에게 꼭 필요한 묵상자료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오늘도 여러분과 함께 계시길 기도 드립니다. 승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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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46(2000.11.23, 목요일)
성경말씀 : 빌 1:12-18.    
찬송 : 444장.
제목 : 긍정적인 삶의 해석.           

1.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2. 우리가 짊어진 삶은 생각보다 더 고단하고 힘겹다는 생각을 하실 때가 더러 있을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런 생각은 더 진하게 다가옵니다. 어느 어머니처럼 “왜 내게 이런 일이?” 하다가도 “내가 하나님을 너무도 멀리 떠나 있었어요.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고난임을 깨닫습니다.”는 고백에서는, 까닭 모를 시련이란 없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하지만, 기껏 의로운 일에 많은 희생의 값을 치른 일인데도 앞이 캄캄해 질 때는 정말이지 모든 것을 다 팽개쳐 버리고 싶은 마음까지도 들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심정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 사도의 마음일지 모르겠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바울의 자리는 너무 커서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까지도 조심스러웠을텐데, 이게 웬 날벼락입니까? 감옥에 갇혀버렸으니 말입니다. 실정법을 어긴 것이건, 미풍 양속을 헤쳤건, 아니면 남의 이해관계에 손해를 끼쳤건 간에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는 것은 부덕한 일임에는 틀림없다고 하겠습니다. 옥에 갇힌 바울 사도, 무슨 할 말이 남아 있겠습니까?

3. 어제 목표(Goal)이란 특별한 홈페이지를 방문했습니다. 거기에서 한 위대한 미국 시민,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한국계 미국 시민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미국 상원의원이 된 Phall H. Shin이란 분이었습니다. 그 분은 미국에 입양되어 좋은 양부모님 밑에서 자랐고, 미국의 유수한 대학에서 오랫동안 교수로 일하다가 마침내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미국에 보은하기 위해서 정치가로써 섬길 각오를 가지고 정치에 입문한 분이었습니다. 그의 미국 생활은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그를 가장 힘들게 하였던 것은 차별이었습니다. 이미 자신의 얼굴에 동양인이라는 것, 그리고 한국 출신이라는 것이 쓰여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인 전용 식당에서 쫓겨나는가 하면, 일본에서는 독일산 셰퍼드를 풀어 허벅다리를 물리게 된 설움도 맛봐야 했습니다. 그 때마다 그는 “나는 누구인가?” 하는 자기 정체성에 대해서 묻곤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일게 아니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자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어려운 결심이며, 상식을 뛰어넘는 역설입니까?  그러나 바로 문제를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대처하는 자세야말로 오늘 우리들이 배우고 익혀야 할 삶의 자세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점을 바울 사도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4. “나의 당한 일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오히려 어떤 기독교인들은 바울 사도가 감옥에 잡혀 들어가기가 무섭게 “겁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무슨 방도로 하든지 ……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바울 사도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는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구주가 되십니다. 당신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당신은 이 예수님 안에서 참 평안과 소망이 있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당신은 믿어야 합니다.” 이런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밥을 먹는 것이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일생을 살았던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가 감옥 안에 있던, 감옥밖에 있던 그의 삶의 내용은 하나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자신의 삶의 현실은 명백하게 해석할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참으로 성공한 전도자입니다. 그가 얻은 결실의 크기와는 아무 관계없이 그런 삶의 해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5. 여러분도 자신의 삶을 해석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어진 그대로 마음에 들면 드는 대로 안 들면 안드는대로,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실 수 있습니까? 어떤 경우이건 저는 여러분에게 바울 사도의 삶의 해석, 긍정적인 해석, 을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실상에 대해서 마음에 들건 들지 않건, 확고한 목표에 따라서 긍정적인 해석을 내려보시라고 말입니다. “나는 지금 힘들지만, 하나님은 이 어두운 통로를 통해서 더 밝은 세상을 보여주려고 하신다.” 어떻습니까? 왠지 희망이 생기지 않습니까?  긍정적인 해석은 조금은 아니 못내 아쉬움을 담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계속 그런 해석을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보다 훨씬 더 밝아진 마음과 몸으로 활발하게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6. 주님께서 오늘도 여러분과 함께 계시길 기도 드립니다. 오늘은 용미리 무의탁 노인들에게 목욕 봉사하는 날입니다. 추수감사절이기도 해서,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을 그 분들과 나누려고 합니다. 노인들이 좋아하실 사탕 120봉지와(장은하집사님이 손수 포장한), 귤 3상자와 사과 3상자를 준비했습니다. 여러분도 기도하시는 가운데 따뜻한 마음으로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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