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9(2000.12.26, 화요일)
성경말씀 : 벧전 2:13-17.
찬송 : 518장.
제목 : 세상 속에서 산다는 것의 의미.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성탄절을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저는 목사인 때문에 교회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분의 삶의 자리와는 많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금년에는 새벽찬양을 돌지 않았기에 조금은 덜 분주했지만, 여느 해와 별반 다르지 않게 성탄절을 보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선물을 주고받으며, 축하 발표회에서 박수를 치고, 하는 등등이 성탄절을 기념하는 일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저는 여러분처럼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여유가 없기 때문에 그런 쪽에 대해서 바램이 있습니다. 성탄절은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언제부턴가 우리이웃들이 태어난 생일을 기념하듯 예수님의 생일 잔치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거나, 이런 저런 행사에 들떠 요란을 떨거나,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카드를 쓰는 기회 정도로, 굳어져 가고 있는 것을 아쉽게 생각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저는 시간적으로 성탄과 관계된 행사위주의 일들을 하기에도 정신없습니다만, 여러분은 좀 다르게 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성탄의 정신을 다시 한번 정리하는 예배에 참석합니다. 그 다음에는 평소에 나누고 싶었던 연약한 이웃들을 찾아가서 식사도 하고, 그들의 얘기도 들어주고, 필요한 이에게는 이것저것 준비한 선물을 나누기도 하고.  다시 말하면 성탄의 정신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평소엔 괜찮은 생각이 많이도 스쳐지나 갔지만, 마음 먹은 대로야 살순 없지 않습니까? 성탄절이 이런 괜찮은 생각들을 사랑과 섬김에 구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적절한 기회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지요.

3.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성도들의 사회 생활에 관한 교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 생활에 잘 적응하는 것, 혹은 바른 사회 생활을 하는 것이 성도에게 주어진 힘든 과제중의 하나입니다. 사실 저와 같은 목사는 사회 생활이 얼마나 낯선지 모릅니다. 조금은 바보스럽고, 어느 경찰청장의 말처럼 “얼빵한” 그런 경우를 많이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중 대부분은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회 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사회 제도나 관습 같은 것에 대해서 분명한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가르치는 내용과 상반되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예 두 가지 기준을 세우고 살아가는 것이 지혜로울(?)지도 모릅니다. 로마에 가서는 로마법을 따르라듯, 교회에 와서는 교회 법을, 세상에 나가서는 세상 법을 따르는 것 말입니다. 본문에 있는 말씀처럼 악행 하는 자에게는 징벌을, 선행하는 자에게는 포장(혹은 포상)을 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에게는 조금은 낯선 일이라는 말입니다.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고 허물을 감싸야 한다는 덕목을 들어온 우리들이, 이웃의 잘못을 들춰내고 비난하는 것이 잘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귀가 닳도록 들어 온 성도들이 뭔가 조금 잘했다고 상을 주고받는 것들이 역시 낯설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사회에서는 얼마나 철저하게 잘 지켜지고 있는 덕목인지 모릅니다. 저는 우리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는 윤리나 도덕관이 훨씬 더 심오하고 훌륭하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가 가진 높은 도덕관을 사회가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사회가 시행하고 있는 포상이나 징계 제도에 대해서 이해하는 눈 높이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현실에 대해서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 가끔 그런 생각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 기독교인들의 윤리관은 세상 사람들의 것보다는 한 단계 이상이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가 가진 신앙에 뭔가가 잘못되어 있다고 말할 수 밖에 없겠습니다. 최근에 우리는 우리 교회가 사회 제도보다도 더 뒤떨어진 그런 윤리관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를 하였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서 무슨 채권인가를 위조하는 주범이 되었다고 한다던지, 어느 목회자의 부인이 명동의 큰손이 되어서 두 세 개의 종금사를 쥐고 흔들었다는, 그 결과 나라를 시끄럽게 한 사건들을 보면서 말입니다. 자기 자식을 부정 입학이라도 시키려고 발버둥치는 일에 기독교인이라고 예외가 아닌 듯 하고, 대박을 꿈꾸는 투기에까지 기독교인들이 깊이 개입하고 있는 것 등은, 기독교인들의 윤리나 가치관이 세상 사람들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번 성탄절을 기해서 어느 신문사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불우한 시설을 돕는 이들은 전체의 75%이상이 기독교회이거나 기독교인들이라는 보도가 있었는데, 이는 자칫 기독교인의 가치관이 세상 사람들이 보이곤 하는 이중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마저 갖게 합니다. “개 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쓰는 것이 낫다.”는 식 말입니다. 부도덕한 수단이지만 선한 목적을 위해서는 무방하다는 사고는 윤리관이나 가치관의 혼돈을 초래할 수 있을 것이 때문입니다. 

5. 경천애인(敬天愛人)이란 말의 근거가 되는 구절입니다(17절). 사회 질서나 제도의 근간 역시 두려움의 대상이 있고, 함께 사랑을 나눌 대상을 바탕에 두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윗사람을 공경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동양 도덕관입니다. 비록 자신 보다 아는 것이 적고, 힘이 모자란다고 하더라도 윗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경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사회 질서를 위해서나 사회 윤리를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간은 인격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의 우열이나, 힘의 크기로 사람의 가치를 정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도 사랑 받을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만이 사회 질서나 제도가 제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은 이런 높은 윤리와 가치를 우리들에게 일깨워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기독인들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윤리적인 덕목들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지 않고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잘 할 것이라는 결심이나 다짐만으로는 안됩니다.” 지금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 이런 덕목들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하고, 그 첫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기독인은 이 세상이 이상 사회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천국을 건설하겠다는 헛된 수고를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회가 오지 않을지라도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데 에는 이의가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왕노릇하실 세상은 분명히 그런 높은 윤리와 가치가 실현되는 세상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삶에 적응하기 위한 훈련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때로는 안돼는 줄 알면서도 낙심하지 말고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그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듯이 말입니다.

6. 연말을 지혜롭게 보내시길 기도 드립니다. 한 해를 정리해 보는 시간이나, 소원(疏遠)했던 이웃에게 따뜻한 덕담이나 인사를 드리는 기회를 만들어 보십시오. 그리고 자신을 격려하십시오. 너무 모자란 것만 들춰내지 말고, 그래도 신통방통한 점이 적지 않다고 힘을 실어 주십시오. 그래야 기운차게 새해를 설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여러분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계시는 우리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성탄절 기간을 유익하게 보내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나보다 약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이웃들을 찾아보시는 기회도 만드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오늘도 여러분과 함께 계시길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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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8(2000.12.25, 주님의 성탄일)
성경말씀 : 사 62:10-12.
찬송 : 115장.
제목 : 깃발을 꽂으라!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성탄 아침입니다. 성탄의 은총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주변에 두루 충만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성탄의 주제는 천사들의 노래(대 영광송/그롤리아 인 엑셀시스)에 잘 나타나고 있듯이, “하늘 높은 곳에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위의 사람들에게는 평화”입니다. 사람답게 사는 일을 저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함께 사는 사람들과 평화롭게 어울리는 것이라는 말에는 동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섬길 수 있다면, 그리고 더불어 사는 이웃들과 잘 어울릴 수 있다면, 그런 삶은 결코 헛되지 않은 아름다운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금 성탄절의 의미가 우리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겨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오늘 아침의 묵상 본문은 성탄절의 구약 봉독문에서 택하였습니다. 성탄절의 분위기와는 조금 다른 것 같아 보입니다만, 사실은 성탄절의 정신을 잘 들어내 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이 성문으로 나가는 것은, 그곳이 사람들이 신앙적인 모임을 갖기에 적합한 장소인 때문이었습니다. 특별히 백성들이 공개적으로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모이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모임의 성격을 분명히 해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백성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다음으로는 대로를 만들기 위해서, 돌을 제하기 위해서, 그리고 만민을 위해서 기를 들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오실 길을 예비하는 소리꾼으로 자신을 소개한 일이 있지만, 백성의 길을 예비하라는 말씀은 낯선 말씀입니다. 성문에 백성들을 모으는 이상의 여러 가지 목적들은 한 가지에 집중하고 있는데, 그것은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사명을 감당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중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를 들라”는 말씀을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4. 우리 나라에서는 깃발이 일반화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독일 같은 나라는 깃발의 나라처럼 생각됩니다. 가는 곳마다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긴 장대 끝에 높이 달린 깃발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도 주변에 수 십개가 펄럭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그 깃발이 여러분 자신과 어떤 연관이 있다고 할 때,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깃발은 여러 가지 의미를 줍니다. 어떤 공동체의식을 줄 수도 있고, 승리의 약속을 다짐하게도 하며, 모든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용감하게 앞으로 진군해 나가기를 촉구할 수도 있습니다. 분명 깃발은 잠잠하고 무의미한 삶을 흔들어 깨워주는 좋은 상징적인 도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해 나갈 때, 각 지파마다 자신들의 기를 앞세우고 행진했을 뿐 아니라, 그 깃발 아래 그들의 자리를 구별하였습니다(민1:52, 2:2-34).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공포할 때는 반드시 기를 세웠습니다(렘52:2). 또한 하나님의 승리를 확신하도록 기를 세웠습니다(시20:5, 렘51:12). 오늘 성탄절에도 기를 세워야 하겠습니다. 

5. 첫째는 회개의 기를 세웁시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되는 첫 단계는 옛 생활을 끊고 새롭게 시작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회개이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옛 생활 가운데 어리석고 부끄러운 것들을 과감하게 내던지는 일, 그리고 전혀 반대되는 길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우리는 회개할 것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생각의 틀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야 만이 새로운 삶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조금 넓고 크게 생각하고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내 생각의 틀 안에서 벗어 나오지 않는 한, 가족이나 이웃 그리고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둘째는 소망의 기를 세웁시다. 우리 성도들이 가진 소망은 일신의 영달이나 야망의 성취를 향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소망은 평화의 세상을 만들려는 꿈입니다. 평화로운 가정, 평화로운 마을, 평화로운 나라, 평화로운 세계를 꿈꿔야 하겠습니다. 물론 이런 평화는 이 세상 안에서 이루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소망은 우리가 죽는 날까지 끝까지 붙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지켜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런 소망의 깃발을 항상 세워두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승리의 기를 세웁시다. 때때로 “이렇게 살아도 되나?”와 같은 질문을 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바보처럼 살고 있는 때문이며, 잘못 살고 있다는 자책 같은 생각에서 그랬을지 모릅니다. 저도 여러 차례 대학 시험에 낙방한 후, 농부가 되기로 결심하고 논밭을 오가면서 수도 없이 던졌던 질문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실패자의 인생을 산다고 생각될 때가 있을지 모릅니다. 바로 여러분들에게 승리의 깃발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누르고 위로 올라가는 것이 승리가 아니라, 참 승리란 모든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밑으로 내려가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이 세상에 승리의 인생을 살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제 친구중에 왼쪽 팔 하나가 잘려 의수를 단 녀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항상 밝게 생활하였습니다. 한 쪽 팔만 가지고도 승리의 삶을 살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호주 시드니 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하다가 지금은 중앙대학교에서 교수직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섬기는 삶을 사는 한 승리하지 않을 인생은 하나도 없다고 믿고, 이 승리의 깃발을 그의 가슴 한복판에 꽂고서 살았던 것입니다.

6. 깃발을 세우는 것은 여러분이 해야 할 몫입니다. 누구도 여러분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오늘 성탄절에 우리에게 오신 주님은 여러분에게 이런 가능성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회개의 깃발을, 소망의 깃발을 그리고 승리의 깃발을 세우셔야 합니다. 그것을 아기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기대하고 계십니다. 우리 주변의 슬픈 얘기들은 이렇듯 가슴을 흔드는 깃발을 세울 이유와 방법을 몰라서 생겨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큰 소리로 세상을 향해 외쳐야 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구주가 오셨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깃발을 세우는 성탄절을 만드시길 기도 드립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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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7(2000.12.24, 주님의 날)
성경말씀 : 벧전 2:11-12.
찬송 : 217장.
제목 : 육체의 정욕과 싸워야 합니다.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오래된 유행가 가사에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방인]의 작가 까뮤는, 인간은 이 세상에서 낯선 존재라고 얘기합니다. 많은 부분에서 동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 세상과 친해질 수 없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태어나는 것에서 죽는 모습을 볼 때, 이 세상이 우리들이 정들이고 정붙일 곳이 못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다른 대안이 없다는데 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얼마나 큰 위안과 용기를 주는지 모릅니다.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하는 말씀 중에는, 나그네 생활의 문제점과 그 해답을 동시에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3. 나그네 인생에서 가장 힘든 부분은 육신의 정과 욕망을 제어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인격적인 사람이란 마음속에 지고 지순한 생각을 가득 채우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온갖 더러운 욕망과 추한 생각이 마음속에 가득차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잘 절제하고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붙들고 있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말씀 말입니다. 신앙의 사람이 다른 사람과 어떤 면에서는 다를 바 없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악한 생각이나 욕망이 신앙의 사람의 마음속에서도 항상 꿈틀거리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은 그런 것들이 자신을 지배하지 않도록, 성령의 도움으로 붙잡고 있는 사람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나그네 인생으로 우리들이 항상 싸워야 할 것은, 영혼을 거슬리는 육체의 정욕과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하는 나그네의 투쟁의 실체인 것입니다. “영혼을 거슬리는”, “육체의 정욕”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육체의 정욕이 영혼을 거슬린다고 말하지 않는다는데 주목하셔야 합니다. 오히려 “어떤 육체의 정욕은 영혼을 거스리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해야 옳다는 말입니다. 흔히들 육체의 정욕을 인간 중심적인 욕망이라고 표현하곤 합니다. 인간 중심적인 욕망은 문자 그대로 이기적인데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런 욕망은 하나님도 이웃도 안중에 둘 리 없습니다. 곧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이기적인 수렁에 서 허우적거리는 경우입니다. 이에 반해서 영혼을 거슬리지 않는 일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나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마음이나 일은 항상 이기심의 반대쪽에 서 있게 마련입니다. 

4. 여러 해 전에 우리 교단 선교사님 가운데 한 분이 두 명의 한국 아이를 입양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은 잘 생기고 건강한 아이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아무도 데려가려고 하지 않는 병들고 썩 잘 생기지 않은 아이를 일부러 택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자비를 들여 여러 차례 미국을 오가며 치료를 해야 했고, 다른 아이를 키우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고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이른바 천사표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며, 천성적으로 타고난 성품 때문이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분은 아마도 여러 차례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후회도 하였을 것이고, 이것이 참 사랑일까 하고 회의도 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누구 하나 그에게 상을 주거나 칭찬해 주는 사람도 없는 일을 자청했다는 것이 어리석게 생각되기도 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때로는 억지로 이런 사랑을 실천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위선이라고 혹시 생각 드십니까?  속마음과 다르게 겉으로 사랑을 흉내내는 것일 때도 있었기에 말입니다. 옳은 관찰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위대한 싸움이 있습니다. 분명하고 아름다운 삶은, 우리들 사람의 의지나 생각과는 확실히 거리가 먼 세계의 삶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인간의 욕망이나 자연스런 생각은 자기 중심적인 것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을 시인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거슬리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런 자기 중심적인 욕망과 투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5. 지금 우리들 안에 이와 같은 투쟁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음으로 원하는 것과 육신이 즐겨하는 것 사이에 갈등이 있는지를 찾아보자는 말입니다. 만일 이런 종류의 갈등이 여러분에게 있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물론 마음으로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않고, 육신이 즐겨하는 것을 따라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은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지금은 만족스럽게 살고 있지 못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울 사도는 진심으로 고백하기를,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분명히 자신의 현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를 도우시는 분은 자신의 의지나 용기가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동안 여러분은 크건 작건 선한 일, 주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에 참여하신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누군가 작은 소자 하나를 섬기는 일이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여러분 마음에 선한 생각이 들어왔다고 해서 그를 섬길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생각을 떼밀어내려는 생각이 반대편에서 줄기차게 여러분을 압박해 들어왔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피나는 싸움을 해야 했고, 많은 시련을 통과한 후에야 그런 귀한 일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느 한번도 육신의 정욕과의 한 판 이상의 싸움이 없이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에게 이런 선한 싸움이 필요합니다. 자연스럽게 그리고 순리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육신의 정욕, 자기 중심적인 생각과 싸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싸워서 이겨야 여러분은 값진 삶을 시작할 수 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6. 우리에게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내 안에 있는 악마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주님께 손을 내밉시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손을 반드시 붙잡아 주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위대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오늘은 대림절 넷째 주일이며, 성탄 이브가 있는 주일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새롭게 느끼며 감사하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의 사랑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풍성한 성탄절을 맞게 되시길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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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6(2000.12.23, 토요일)
성경말씀 : 벧전 2:9-10.
찬송 : 374장.
제목 : 사명을 위해 택함을 입은 사람들은.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동양의 생각은 크게 두 줄기로 흐른다고 합니다. 하나는 자연이 되라는 길(道)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되라는 길입니다. 자연이 되라는 길은 노장(老莊)의 도로 통하고, 사람이 되라는 길은 공맹(孔孟)의 도로 통합니다. 있는 그대로 살아가라는 가르침이 노장의 길인 반면에, 바람직하게 살아가라는 것이 공맹의 가르침입니다. 이런 두 갈래 길에서 어느 하나만을 택해서 살아가기란 어렵습니다. 살아가는 일은 자연스럽게 사는 것과 억지를 부려서라도 그런 대로 괜찮게 살고싶은 생각이 있게 마련입니다. 하고싶거나 해야만 할 일까지 버리고 있는 그대로 살라는 노장의 길은, 우리의 마음과 몸을 편안하게 하는 무위(無爲)의 길을 걷게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들길의 풀처럼, 산중의 짐승처럼 살수야 없지 않습니까?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할 욕망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인위(人爲)의 길을 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읽었던 논어(論語)를 풀어쓴 책에서 따온 글입니다.

3. 우리 성도는 하나님께서 불러내셨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우리를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동양 사상처럼, 우리 성도는 우리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인 셈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뽑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선택된 사람들 얘기는 구약성경의 주제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이 처음으로 하나님의 선민(選民)이었습니다. 창세기 12:1-3은 이런 택함의 목적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축복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들을 축복하는 사람까지도 복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세상을 축복할 사명이 주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택함을 받은 것은, 단순히 축복의 대상이 되게 하시려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서 온 세상을 복주시려는 원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일꾼들이 배울 중요한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선민에게는 사명이 있다는 것 말입니다. 바람부는대로, 물결치는 대로 살아가는 그런 삶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땅히 행하지 않으면 안돼는 삶의 과제가 맡겨진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4.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민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맡은 사명은 이내 잊어버리고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복주실 백성이라는 사실만 자랑스럽게 생각할 뿐, 그들이 해야 할 일,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나눠주는 것에 대해서는 무책임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또 다른 일꾼을 세우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새 이스라엘인 기독자들입니다. 우리가 교회라고 부르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의미하는 말인데, 이 말은 “불려내진 사람들”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분문에서 택함을 받은 사람들, 왕같은 제사장들이며, 거룩한 나라이고,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인 우리들에게는, 우리를 죽음의 절망가운데서 생명의 빛 가운데로 불러내신 분의 아름다운 소식을 선전하도록 사명이 주어져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여러 가지 훈련과 자기 성장 등 해야 할 일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잊어서는 안될 사명이 있다는 것을 항상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살려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 방방곡곡에 선전하는 일이 그것입니다.

5. 복잡한 전철 안이나, 길거리에서 어깨띠를 띠고 전도하는 분들을 만나셨을 것입니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전도방법입니다. 누군가는 그런 방법으로 전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과 신앙을 얘기하는 자리는 조금은 진지하고 인격적인 관계에서 나눠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름다운 생활로 증거 해야 할 것입니다. 전도는 장사하는 것과는 달라야 할 것입니다. 호객행위를 하듯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선 가까운 관계부터 시작되는 것이 정석이라고 믿습니다. 살고 죽는 것을 가족이나 친척과 나누지 않는다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친구들 그리고 이웃들이 전도의 제1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니까 자연히 그들에게는 말로만이 아니라, 믿는 사람다운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생활이 덕스럽지 못하면서 전도한다고 하면 오히려 전도에 걸림돌이 될지 모릅니다. 실제로 예수를 믿고 싶어도, 아무개처럼 될까봐 못 믿겠다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입은 살아있는데 생활은 죽어 있다는 것이 그 이유들입니다. “너희 착한 행실로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 불림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자인 우리 자신들이 어항 속의 물고기처럼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입술 뿐 아니라 생활로 주님을 증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6. 성탄절이 가까이 왔습니다. 거리엔 성탄 케롤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저마다 성탄절엔 좋은 일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미 성탄절은 좋은 일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절기이며, 또 다른 좋은 일을 기대하기보다는, 우리들이 직접 좋은 일에 참여할 기회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저의 제자 가운데 한 분이 지금 아기 아빠가 되려고 합니다. 그런데 먼 이국 땅 독일에서 낯선 사람들 속에서 공부하는 중이어서 많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김장호선생과 그의 아내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예수님 생일보다는 조금 일찍 태어날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 오늘도 여러분과 함께 계시길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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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5(2000.12.22, 금요일)
성경말씀 : 벧전 2:4-8.
찬송 : 372장.
제목 : 작은 제 역할을 다하는 것이 살아 있는 돌이 되는 비결입니다.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동짓날 팥죽은 잡수셨는지요?

2. 오늘의 말씀은, 우리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짓는데 꼭 필요한 산 돌이 되라.”고 하십니다. “산 돌이 되라.” 무슨 의미입니까? 아마도 ‘산낙지’란 글을 읽으셨을 때, “살아 있는 낙지를 말한다.” 혹은, “산에서 사는 낙지를 말한다.” 는 등, 둘 중에 어느 하나를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 번 언급된 “산 돌”이라는 낱말 앞에서 당황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다행히 표준 새번역 성경에서는 “살아 있는 돌”이라고 번역을 해두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원어인 헬라어는 물론 “살아있다.”는 단어 jaw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돌”이란 무슨 말입니까? “산 희망”, “산 제사”와 같이 “제 기능을 다하는 희망” 혹은, “효력이 있는 제사”를 뜻하고 있습니다. 모순이 되듯 생각될 수 있습니다만, 이 세상에는 말에만 있고 혹은 이름만 있을 뿐, 실제 삶에서는 죽은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아무 효력도 능력도 없고 제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명목상의 신자도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3.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몸에 비유한 분은 바울 사도입니다.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12:5),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7), “교회는 그의 몸이니”(엡1:23),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 등, 여러 차례 이런 상징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집인 교회는 놀랍게도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 의해서 지어져 간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마치 몸을 구성하는 백체(百體)가 있듯이 하나님의 교회에도 각기 다른 기능들을 하는 구성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 묘사한 곳이 고전 12:12-31입니다. 손과 발, 눈과 귀가 생김새로부터 기능까지 전혀 다르지만, 한 몸을 위해서 일하듯, 하나님의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도 같은 역할을 해야 마땅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신령한 하나님의 집을 만들어 가는 재목들임을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비록 연약하고 볼품없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들을 당신의 거룩한 집의 재목으로 쓰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4. 중요한 것은, 오늘 하나님께 불림 받은 우리들이 “산 돌같이” 제 역할을 다하고 있어야 한다는데 초점을 맞춰야 하겠습니다. 우선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이 흔들릴까 걱정할 때가 있습니다. “세습제가 웬말이냐”느니, “사회적 관심이 부족하다”느니, 하나님의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 때문에 실망하는 사람들이 많은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이 하나님의 집의 기초석이 누구인가를 확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퉁이의 머릿돌”로 묘사된 예수님께서 하나님 집의 기초석 구실을 하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집을 떠받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기초가 제대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것들이 조금 부실하더라도 크게 염려할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381미터의 높이에 64대의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미국 뉴욕에 있는 거대한 빌딩 엠파이어스테이트는 지난 1945년 안개가 자욱한 어느 날 B-25 전투기가 이 빌딩의 78층과 79층 사이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건을 당하였습니다. 열 네명이 사상하고 비행기는 산산조각이 났지만, 비행기와 충돌한 빌딩의 벽면은 시꺼멓게 그을린 구멍만 남았는데, 3개월 안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수리되었다고 합니다. 이 빌딩의 견고함은 기초석에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는 근본적인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산 돌”이 되지 못하는 교회 구성원들에 의한 지엽적인 것들이라는 사실입니다. 

5. 제구실을 한다는 것의 중요성은 예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손이 손 노릇하고, 발이 발 노릇 하는 것으로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제대로 못한다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교회를 근심하게 하는 사람들을 주목해 보십시오. 가장 단순한 사실, 자기 자리를 지키는 일에서부터, 자신이 맡은 작은 일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열심히 짊어지는 일에서 실망을 주는 때문입니다. 나는 내 길을 간다는 분명한 자세로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책임적인 행동이 절실하다는 말입니다. 환경운동을 하는 분들은 우리의 미래 사회가 직면한 위기 가운데 하나를 [물 부족]을 듭니다. 지금처럼 물을 사용해서는 안되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 하나가 절약한다고 무슨 변화가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나 한 사람만 잘하면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자신이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책임적인 자세로 임할 때, 세상은 비로소 꿈을 꿀 수 있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우리의 역할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하나가 일찍 교회에 와서 예배를 준비하고, 나 하나가 누군가를 섬기려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 하나가 내 본분에 알맞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교회는 날마다 새로워고 아름답게 자라날 것이라고 말입니다. 

6. 저는 어제 뜻밖의 자리에 나가 뜻밖의 상을 받았습니다. 성동구청장께서 배석하신 곳이긴 하지만, 유명한 단체나 인물에게서가 아니라, 한 이름 없는 장애인 자원봉사단체(회원 100여명)가 주는 “사랑 실천” 메달이었습니다. 봉사라는 이름으로 제 자신이 상을 받기는 처음 있는 일이며, 제게는 가당치도 않는 것이어서 극구 사양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자원봉사자들이 마련한 것이라는 간곡한 청에 못이기는척 하고 말았습니다. 저와 함께 메달을 받으시는 분들은 지역을 위해서 크게 공헌하신 자타가 인정하는 분들임에 비해서, 저는 뭔가 잘못 선택된 그같은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가져달라는 100분의 장애인들 앞에서 새로운 과제가 주어져 있음을 깨우치는 시간을 가져 보았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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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4(2000.12.21, 목요일)
성경말씀 : 벧전 2:1-3.
찬송 : 239장.
제목 : 갓난 아이같은 신앙태도를.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님을 경험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먼저는 이전에 길들여져 있던 구습을 벗어 던지려는 싸움이 있어야 할 것이고, 다음으로는 새로운 그래서 낯선 삶을 살기 위해서 특별한 수고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부인할래야 할 수 없도록 우리의 생활은 악한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남을 해하려는 생각이 있고, 겉으로는 선하게 보이지만 속으로는 남을 속이려는 마음이 있으며, 겉과 속이 전혀 다르고, 남이 누리는 기쁨과 행복을 함께 기뻐하기는커녕 못마땅해하곤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남을 헐뜯는 얘기를 서슴지 않고 내뱉습니다. 이런 구습이 기독교인이 된 지금도 여전히 우리들에게 남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이런 구습은 우리가 육신아래 사는 동안은 떠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들만이 아니라, 다윗도 그랬고 바울도 그랬으니까, 그리 특별한 일이라 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구습과의 싸움을 멈춰서는 안됩니다. 매일 매일 이런 육신의 더러운 찌꺼기들과 진지하게 마주서야 합니다. 이것을 모든 십자가 군병들에게 지워진 멍에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삶을 향한 또 다른 수고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일인데,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새로운 길을 걷게 되거나,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이 우리들을 불안하게 할 수도 있고, 힘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아직 경험해 보지 않은 일들일 뿐 아니라, 낯설게 여겨지는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이 이 세상에서는 낯선 일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삶이 자연스럽고 일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특별한 것처럼 생각되는 때문입니다. 구세군의 자선냄비에 매년 빼놓지 않고 거액을 넣는 손길이 올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는 보도를 들었습니다. 주님이 세상을 살리려고 오신 넘치는 사랑을 받은 것을 감사해서, 누군가에게 그 사랑의 일부를 나누고 싶은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고 자연스러운 일인데도, 특별하게 보이는 까닭은 그런 선행이 이 세상에서는 낯선 이방인의 행위처럼 보이고 있는 때문입니다. 제 부모님을 지극히 섬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만, 실상은 불효자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제 구실을 하는 사람이 오히려 특별한 사람처럼 보이고, 상을 주어서 본을 삼아야 한다고들 야단입니다. 하물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하는 모든 몸짓이나 말씨는 저절로 혹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기를 기대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4. “갓난아이처럼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하십니다. 갓난아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어머니가 물려준 젖꼭지를 열심히 빨아댑니다. 그것 이외에 그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듯이 말입니다. 어머니의 젖줄에 그는 만족할 뿐 아니라, 그것으로 그의 모든 삶을 감사하며 평화롭게 잠이 들곤 합니다. 배가 부르기까지 그는 어머니의 젖을 사모합니다. 그 외에 그가 힘쓰는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매일 매일 그는 몰라보게 자라나는 것입니다. 본문의 저자는 이런 갓난아이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영적인 성장과 구원에로 나아가는 길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갓난아이처럼 우리 기독인들에게는 신령한 젖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상징적인 표현입니다만, 신령한 젖이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설교를 통해서, 일상의 삶을 통해서, 혹은 사건과 사고들을 통해서,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책을 통해서, 하나님은 쉬지 않고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만일 우리들이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자세로 살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거듭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하나님의 말씀인 신령한 젖은 저절로 혹은 자연발생적으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생활에서는 전혀 길들여지지 아니한 낯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 마음에 들려주시는 것들을 따라 순종해야 합니다. 

5.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요6:27).  오늘은 우리 기독교 통신강좌(C. C. C)가 인터넷으로 올려져서 누구나 손쉽게 기독교의 기초신앙을 배울 수 있도록 하였는데, 그 시연회를 연다고 합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많은 불신자들이 기독교 신앙과 만나는 축복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새로운 몸짓으로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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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3(2000.12.20, 수요일)
성경말씀 : 벧전 1:24-25.
찬송 : 205장.
제목 : 속 사람을 찾읍시다.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영원한 것이란 무엇이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시간 앞에서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것들로 변화되어 가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게 주시는 말씀은, 육체의 덧없음에 대해서 좀더 분명히 이해하고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오래 전에 세브란스 병원 직원들을 위한 예배를 인도한 일이 있습니다. 그 때 들은 얘기인데, 사람의 육체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충격적인 얘기였습니다. 작은 먼지 만한 것 하나가 호흡기를 통해서 뇌로 들어간다면, 정신 착란과 같은 엄청난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에서부터, 우리가 먹는 음식물에 따라 들어오는 온갖 독성을 간이나 쓸개와 같은 장기(臟器)들이 걸러내 주지 않는다고 하면, 하루를 살지 못할 것이라는 등의 얘기 말입니다. 결국 사람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우리의 몸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그런 위험 속에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기에 아니면 무시하기에, 우리는 지금 웃고 있는 것이며, 꿈까지도 꾸는 것이 아닐까요? 

3.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우리의 몸이 한 여름을 살다가 시들어버리고 마는 풀과 같다고 말씀할 뿐 아니라, 우리 인간이 자랑하는 모든 영광들이란 그 풀잎에 매달렸다가 떨어지는 꽃에 불과하다고 말씀합니다. 천하보다도 더 귀하고 위대하다는 인간이 풀에 비유되는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데 화가 나십니까? 어떤 분은 질그릇처럼 빚어진 존재라는 말씀(롬9:21-23)을 듣고, 인간 자신에 대해서 분노를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들 육체의 실상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도 또 외면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들 인생이 얼마나 무기력하고 절망적인 존재라는 것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한 시라도 헛된 꿈에서 분명한 현실로 깨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실상에 대해서 절망만 할 것이 아니라는, 또 다른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 질그릇처럼 언제든지 산산조각이 날 견고한 존재가 아니지만, 이런 질그릇 안에 너무도 엄청난 보배를 담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질그릇 같은 우리가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복음을 간직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역설적인 말인지 모릅니다. 인간은 질그릇 같이 보잘 것 없으나, 그 안에 위대한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의 복음을 소유하게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4.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의 한 지체로 생각할 때는, 풀잎이건 미물이건 다를 바 없는 피조물에 불과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피조물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입혀주실 뿐 아니라, 당신의 창조와 구원역사에 참여할 수 있게 하셨고, 당신과 교제할 수 있는 특권까지도 부여해 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인간의 참 모습을 찾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겉모습을 보아서는 풀잎에 불과하지만, 인간의 속 모습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대상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a), 할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4:16)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가치는 그 겉 사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 사람에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될 이유가 그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지금부터라도 많은 시간과 정열을 쏟아 부어야 할 과제가 있다면, 이런 속사람을 강건하게 만드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희망을 여기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겉 사람은 날로 쇠하여 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노화를 막아보겠다고 분칠을 하고 수술을 해도 그 결과는 시간 앞에서 포기하는 길 외에 없습니다. 속 사람을 말씀 위에 세우는 일, 이 일보다 더 중요하고 값진 수고는 없다고 확신합니다.

5. 어제 저녁에 우리 시온 성가대 지휘자가 되실 분(김광남선생님)을 만났습니다. 키가 훌쩍 크고 잘 생긴 얼굴도 호감을 주었지만, 성품도 서글서글하고 얘기도 진솔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 분을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오는 주일 교회에서 만나게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지휘봉은 마지막 주일 예배후 신년 첫 주일 예배 찬양을 위한 연습을 위해서 잡게 되실 것입니다. 금년 7월에 육군에서 전역하였고, 성악을 전공하고 있으며 오는 3월에 복학할 예정입니다. 사령부 교회에서 지휘자로 봉사한 경험이 전부이지만, 열심히 기도하면서 일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도 기도로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로, 연약한 육체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말씀을 의지하며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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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2(2000.12.19, 화요일)
성경말씀 : 벧전 1:23.
찬송 : 203장.
제목 : 거듭난 생활.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유대인의 관원(산헤드린 의회 의원)이었던 니고데모와 예수님과의 만남은 어떤 면에서는 충격이었습니다. 산헤드린 의회는 훗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결정하였던, 유대인의 종교생활과 전통에 대해서 가장 권위 있는 해석기관이며 재판소였습니다. 몇 되지 않은 이곳의 의원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영생에 관해서 질문하였기 때문입니다. 우선 인간적인 면에서 니고데모가 나이로 보나 세상 경험이나 지위로 볼 때 예수님보다 위에 있었음에 분명하지만, 그는 삭게오처럼 자신에게 솔직한 자세로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 본받을 만한 일입니다.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하는 것 때문에 고통받으면서도 아는 체하며 살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다음으로 그는 진리에 대해서 적극적인 구도자의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 거듭남(Be born again)은 논리적인 용어가 아닙니다. 이것처럼 신앙적인 용어는 그리 흔치 않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잘 들어보십시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  그렇습니다. 사람의 이성, 혹은 합리적 사고의 틀 안에서는 성령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어린아이의 생각은 어른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의 생각의 틀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성해서 아들 딸 낳고 인생의 맛을 조금 본 후에는 부모님의 사랑을 이해하게 될지 모릅니다. 철부지 학생이 어찌 그의 장래를 염려하며 초달하는 스승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사람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듭남의 진리는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라는 것, 거듭남의 진리는 오직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의 말을 믿는 것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요3:9-13). 

4. 사람들은 현재보다 새로운 삶을 희망합니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합니다. 어리석고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불만스럽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성도인 우리들에게서도 예외가 아닙니다.그러나 새로운 삶이란 어떤 결단이나 각오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에 의하면, 성도가 새롭게 살기를 원한다면 옛 사람을 버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데, 그것은 주안에서 살아가는 일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고후5:17). 너무도 많은 기독인들이 변화되지 않은 자기 모습 때문에 실망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들은 항상 자신의 마음 중심을 보려고 하지 않고, 바깥 모습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기본이 제대로 되어야 합니다. 말해 버린 후에 후회하는 것보다는, 말하기 전에 자신을 살피는 것(한마디하기 전에 세 번 생각함) 같은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 기독인들 중에는 변화된 결과만 관심할 뿐, 변화의 삶을 구체적으로 돕고 있는 진행과정에 대해서는 진지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먼저 “주님,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 뜻이겠습니까?”라고 기도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도움을 진심으로 청해야 할 것입니다. 새로워진 모습을 증명이라도 하고싶어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구나 품을 만한 욕심입니다. 그렇다면 더욱 나를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당장 눈앞에 펼쳐질 결과가 아닙니다. 제가 기도원타입의 신앙인을 곱쟎게 보는 가장 큰 문제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결과에 대한 갈증으로 가득찬 기도생활을 하는 때문입니다. 너무도 갈급해서며 심각해서입니까? 여전히 시종여일하게 제 뜻대로 살겠다고 고집하는 것이 마음을 아프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가 만나는 시련과 역경 또는 문제들은 신앙적인 면에서 볼 때, 얼마나 좋은 기회인지 모릅니다. 문자 그대로 시련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실패할 것 없는 자리에 서게 되었으니, 이제라도 제대로 된 기도를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해서 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입니까? 아버지께서 제게 요구하시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제게 들려주십시오. 깨우쳐 주십시오. 주님께 맡깁니다. 주님의 뜻대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드리지 않는 한, 우리의 심령엔 평화가 찾아올 리 없을 것이며, 새로운 삶의 시작은 요원할 것입니다.

5. 거듭남의 삶은 어느 한 순간에 생각이나 목표가 완전히 뒤집어엎어지는 그런 현상이 아닙니다. 그렇게 신앙의 길을 걸어간 사람은 성경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세를 보세요. 바울을 보세요. 베드로를 보세요. 그들 역시 언제든지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위태위태한 신앙의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시시 때때로 신앙과 불 신앙 사이에서 수 만가지 갈등을 겪으면서 고통을 당했지만, 그들이 예전 사람과 다르게 살았던 한 가지는,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앙이며, 하나님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다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거듭남은 어느 순간부터 동일하게 지속되는 종교현상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 머물고자 할 때만 나타나는 축복의 원리입니다. 부모님에 대해서, 장래에 대해서, 심지어 신앙에 대해서까지도 주님께 의탁하는 순간 순간만이, 거듭남의 삶을 경험하는 시간인 셈입니다. 그 밖의 모든 시간은 여전히 옛 사람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루터는 십자 성호 긋기를 강조했습니다. 그 상징을 사용함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머무르도록 도와주기 때문이었습니다. 거듭남은 성령의 주권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그 순간뿐임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마다 때마다 성령께서 우리를 주장하시도록 기회를 드리는 신앙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화살 기도라는 것을 가르친 일이 있습니다. 전도하러 나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기도만이 아닙니다. 일마다 때마다 “주님 어떻게 할까요?” 이런 기도로 나아가는 것, 그 때 여러분은 거듭난 새 사람으로 분명 향기 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6. 지난 여름 우리 교회를 위해서 수고해 준 두 분이 계셨습니다. 교회는 그 분들에게 작은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었는데, 한 분은 극구 사양하셨습니다. 내민 손을 다시 거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새삼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 사양하셨던 분이 한 자원봉사단체를 소개해 주셨고, 그 분들에게 제 손을 내밀었습니다. 어제 전화를 통해서, “지난 여름 뜨거운 복날 오후에 장애자 30명에게 제대로 차린 삼계탕을 대접할 수 있었는데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았습니다. 그 분들은 매 주 한 차례 밑반찬을 준비, 재택(집안에서 꼼짝 않고 있는) 노인 장애자들을 방문합니다. 말벗도 되어 드리고 청소도 해 드리며, 필요할 때는 바깥 나들이도 도와주는 선한 사마리아인들입니다. 우리 동네에 이런 젊은 부인들이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기쁘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년에는 우리 교회도 이 분들을 힘껏 돕고 싶은 생각입니다. 마리아회나 루디아회 그리고 바울회도 관심을 가져 주시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열매맺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합니다. 신앙 때문에 아름다운 삶의 열매들이 맺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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