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627.

시편 102:8-11.

찬송 49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 1812~1889)은 영국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극작가인데, 그의 시 <피파의 노래>는 불후의 명작이다. “때는 봄, 아침 7, 언덕엔 이슬방울 진주되어 빛나고, 종달샌 높이 나는데, 달팽인 가시나무 위에 도사렸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니, 온 누리가 평화롭도다.” <피파의 노래>는 매우 평범한 우리의 일상이 소개되고 있다. 모두 다 힘겹게 자신의 삶을 짊어지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생각나자 세상은 일순간에 달라졌다.

 

2, 성탄 후 첫째주일의 구약 말씀 출 13:1-3, 11-15을 본문으로 전통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규칙적인 생활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마침내 전통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일어나고 잠자는 것은 물론, 식사 나 아침 산책 등을 규칙적으로 하는 동안에 습관이 생기고, 그 습관은 그 사람과 가족의 전통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역시 좋은 습관이 생기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입니다(1-2).

19703월 어느 신학교 교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교수님은 서른 명 남짓한 학생들을 상대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은 어제 교회에 갔지요? 어떻게 갔습니까?” 한 학생이 머리를 긁적이며 저는 주일학교 부장인데요. 설교를 해야 했습니다.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교회로 향했어요. 당연히 습관처럼 말입니다.” “습관처럼 이라....” 신앙생활을 습관처럼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교수님은 진지하게 토론을 이끌어 가셨습니다. 습관의 중요성에 대해서. 특히 삶에서 중요한 것일수록 습관적인 것이 중요하다면서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양치기 모세가 광야를 지나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갔다는 기록을 읽었습니다. 호렙산은 많은 산들 중의 하나의 산이 아니었습니다. 그 호렙산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산이었습니다. 훗날 모세는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뿐 아니라, 하나님을 찾아 습관처럼 호렙산을 찾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감격을 약속하셨습니다(11-12).

430년이란 길고 긴 세월동안 이스라엘은 이집트 왕 바로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우리는 고작 35년 동안 나라를 빼앗겼던 동안에, 이름을 빼앗기고, 말을 빼앗기고, 모든 땅과 권리를 다 빼앗겼습니다. 그렇다면 430년 동안 노예로 살았던 이스라엘사람들은 어떠했을지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많은 빼앗긴 것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빼앗겼던 것을 뼈저리게 슬퍼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배의 회복과 그 감격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예배가 무엇인지, 예배를 왜 드려야 하는지,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올바른 지, 우리의 예배는 그 정신을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찬송과 기도에서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찬양이 아닙니다. 예배자들이 자신의 감성을 만족시키려는 표현이며, 기도 역시 기도자 중심적입니다. 예배의 정신이 실종되었습니다.

 

예배는 선조들이 습관처럼 모셨던 야훼 하나님이 그 주인이십니다(13-15).

요즘 우리 사회는 법조문이 아니라, 법의 정신을 살피는 일에 초미의 관심을 갖는 것 같습니다. 까닭은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비극을 가져올 수 있는가를 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 때문입니다. 제가 영등포 공고에서 교생 실습을 하고 있을 때, 제 친구 한 사람이 계엄사로 끌려가서 모진 고초를 겪었습니다. 평상시에 할 수 있는 한 마디 말이 유신 시절에는 통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한 없이 무섭기만 하거나, 반대로 한없이 자비한 분만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실 정도로 깊고 넓은 은총의 사랑을 가지신 분으로,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동행하실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수백 년 수천 년을 예배해온 조상들의 하나님을 섬길 것을 다짐하고 맹세했던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흘러도 가나안의 우상들과는 다른 야훼 하나님을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626(2024. 12. 28. 토요일).

시편 102:4-7.

찬송 30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영아 살해(infanticide)는 의도적으로 가족이 젖먹이를 죽이는 것이다. 옛 사회에서 일부 영아 살해가 허용되었었으나 지금은 비도덕적이며 범죄 행위의 하나로 간주된다. 하지만 영아 살해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대체적으로 서구 사회에서는 부모의 정신과 질환이나 폭행 등에 의해서 나타나는 반면, 후진국에서는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에 의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남아 선호 사상 때문에 여아 살해의 비율이 남아 살해의 그것보다 높게 나타난다.

 

2, 오늘은 우리 모두가 짧은 시간이나마 그 옛날 아기 예수를 대신해서 죽임을 당한 많은 베들레헴의 영아들을 위해 슬픔을 품어보아야 할 것을 제안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별을 따라 유대나라 왕의 탄생을 축하하러 온 동방의 박사들이 헤롯왕에게 어린 유대 왕자를 만난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헤롯왕은 화근/禍根을 없애버린다는 생각에 베들레헴 주변의 두 살 미만의 사내 영아/嬰兒들을 살해하라 명한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인류사에 이보다 잔악한 살인사건은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또래라는 것이 죽임을 당한 이유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동방박사 이야기가 주는 장엄한 서사/敍事에 매몰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동방의 어느 문명사회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찬양하고 축하하기 위해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라는 당시로써는 가장 귀한 선물을 들고 찾아와 경배를 드렸다는 것에 취해 버렸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화려하고 극적인 장면 뒤에 숨겨져 있었던 수많은 영아들이 무참히 죽어야 했고, 그 어미들의 애끓는 통곡을 귀 막고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역설/逆說인가 하는 점을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있어서 이 영아들의 희생과 그 부모들의 아픔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가끔 예수님의 십자가를 잠깐이긴 하지만 대신 짊어져 주었던 구레네 사람 시몬을 생각합니다. 그는 북 아프리카 리비아란 나라에서 예루살렘을 찾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의 피가 흘러서 명절을 지키러 왔는지, 아니면 돈벌이를 찾아서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가족들도 성경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 보통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내와 아들까지 훌륭한 크리스천이 되어, 훗날 바울은 시몬의 아들 루포를 자신의 친구라고 했고, 그의 어머니를 내 어머니라고 기억해 주었습니다(15:21, 16:13). 우리의 신앙이란 기억에 많이 의존합니다. 그리고 그런 기억이 희망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테제의 노래 가운데, “Jesus remember me. when you come into your kingdom.”라는 게 있는데,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혔던 우편에 달린 강도가 한 부탁이었습니다(23:42).

    이 영아 살해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서 기자는 그 모친들의 울부짖음을 라헬이 베냐민을 출산하면서 숨을 거두면서 흘린 눈물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여인은 라헬로 그녀는 오랫동안 자식을 낳지 못하다가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 아들 요셉은 아버지 집 라반의 집에서 출산하였으나, 둘째 아들 베냐민은 야곱이 자기 집으로 돌아온 후에 출산하였는데 그곳이 벧엘에서 24km 떨어진 에브랏이었습니다(35:18). 훗날 예레미야는 라헬이 자식을 두고 죽는 어미의 마음을 바벨론으로 끌려간 자식을 생각하며 우는 어미들의 마음으로 표현한 것입니다(31:13-20). 몽골에 가면 지금도 마을 뒷산 작은 봉오리에 돌무더기들이 있는데, 어린아이들의 무덤이라고 합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어린 아이들의 무덤은 땅에 묻지 않고 항아리나 돌무더기를 쌓아 두었다는 얘기를 들었고 보기도 했습니다. 이 또한 그를 사랑했던 어미들이 찾아와 어루만져주도록 배려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영아 살해 사건은 우리들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 철부지 생명들이 철든 어른들을 위해서 제물이 된 사건으로도 해석되고, 순백의 천진난만한 생명들이, 온갖 죄악으로 점철된 죄인들을 대신한 산 제물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동안 그들을 잊고 살았던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르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