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5(2000.12.22, 금요일)
성경말씀 : 벧전 2:4-8.
찬송 : 372장.
제목 : 작은 제 역할을 다하는 것이 살아 있는 돌이 되는 비결입니다.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동짓날 팥죽은 잡수셨는지요?

2. 오늘의 말씀은, 우리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짓는데 꼭 필요한 산 돌이 되라.”고 하십니다. “산 돌이 되라.” 무슨 의미입니까? 아마도 ‘산낙지’란 글을 읽으셨을 때, “살아 있는 낙지를 말한다.” 혹은, “산에서 사는 낙지를 말한다.” 는 등, 둘 중에 어느 하나를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 번 언급된 “산 돌”이라는 낱말 앞에서 당황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다행히 표준 새번역 성경에서는 “살아 있는 돌”이라고 번역을 해두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원어인 헬라어는 물론 “살아있다.”는 단어 jaw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돌”이란 무슨 말입니까? “산 희망”, “산 제사”와 같이 “제 기능을 다하는 희망” 혹은, “효력이 있는 제사”를 뜻하고 있습니다. 모순이 되듯 생각될 수 있습니다만, 이 세상에는 말에만 있고 혹은 이름만 있을 뿐, 실제 삶에서는 죽은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아무 효력도 능력도 없고 제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명목상의 신자도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3.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몸에 비유한 분은 바울 사도입니다.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12:5),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7), “교회는 그의 몸이니”(엡1:23),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 등, 여러 차례 이런 상징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집인 교회는 놀랍게도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 의해서 지어져 간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마치 몸을 구성하는 백체(百體)가 있듯이 하나님의 교회에도 각기 다른 기능들을 하는 구성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 묘사한 곳이 고전 12:12-31입니다. 손과 발, 눈과 귀가 생김새로부터 기능까지 전혀 다르지만, 한 몸을 위해서 일하듯, 하나님의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도 같은 역할을 해야 마땅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신령한 하나님의 집을 만들어 가는 재목들임을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비록 연약하고 볼품없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들을 당신의 거룩한 집의 재목으로 쓰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4. 중요한 것은, 오늘 하나님께 불림 받은 우리들이 “산 돌같이” 제 역할을 다하고 있어야 한다는데 초점을 맞춰야 하겠습니다. 우선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이 흔들릴까 걱정할 때가 있습니다. “세습제가 웬말이냐”느니, “사회적 관심이 부족하다”느니, 하나님의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 때문에 실망하는 사람들이 많은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이 하나님의 집의 기초석이 누구인가를 확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퉁이의 머릿돌”로 묘사된 예수님께서 하나님 집의 기초석 구실을 하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집을 떠받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기초가 제대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것들이 조금 부실하더라도 크게 염려할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381미터의 높이에 64대의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미국 뉴욕에 있는 거대한 빌딩 엠파이어스테이트는 지난 1945년 안개가 자욱한 어느 날 B-25 전투기가 이 빌딩의 78층과 79층 사이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건을 당하였습니다. 열 네명이 사상하고 비행기는 산산조각이 났지만, 비행기와 충돌한 빌딩의 벽면은 시꺼멓게 그을린 구멍만 남았는데, 3개월 안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수리되었다고 합니다. 이 빌딩의 견고함은 기초석에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는 근본적인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산 돌”이 되지 못하는 교회 구성원들에 의한 지엽적인 것들이라는 사실입니다. 

5. 제구실을 한다는 것의 중요성은 예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손이 손 노릇하고, 발이 발 노릇 하는 것으로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제대로 못한다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교회를 근심하게 하는 사람들을 주목해 보십시오. 가장 단순한 사실, 자기 자리를 지키는 일에서부터, 자신이 맡은 작은 일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열심히 짊어지는 일에서 실망을 주는 때문입니다. 나는 내 길을 간다는 분명한 자세로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책임적인 행동이 절실하다는 말입니다. 환경운동을 하는 분들은 우리의 미래 사회가 직면한 위기 가운데 하나를 [물 부족]을 듭니다. 지금처럼 물을 사용해서는 안되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 하나가 절약한다고 무슨 변화가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나 한 사람만 잘하면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자신이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책임적인 자세로 임할 때, 세상은 비로소 꿈을 꿀 수 있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우리의 역할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하나가 일찍 교회에 와서 예배를 준비하고, 나 하나가 누군가를 섬기려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 하나가 내 본분에 알맞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교회는 날마다 새로워고 아름답게 자라날 것이라고 말입니다. 

6. 저는 어제 뜻밖의 자리에 나가 뜻밖의 상을 받았습니다. 성동구청장께서 배석하신 곳이긴 하지만, 유명한 단체나 인물에게서가 아니라, 한 이름 없는 장애인 자원봉사단체(회원 100여명)가 주는 “사랑 실천” 메달이었습니다. 봉사라는 이름으로 제 자신이 상을 받기는 처음 있는 일이며, 제게는 가당치도 않는 것이어서 극구 사양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자원봉사자들이 마련한 것이라는 간곡한 청에 못이기는척 하고 말았습니다. 저와 함께 메달을 받으시는 분들은 지역을 위해서 크게 공헌하신 자타가 인정하는 분들임에 비해서, 저는 뭔가 잘못 선택된 그같은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가져달라는 100분의 장애인들 앞에서 새로운 과제가 주어져 있음을 깨우치는 시간을 가져 보았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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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4(2000.12.21, 목요일)
성경말씀 : 벧전 2:1-3.
찬송 : 239장.
제목 : 갓난 아이같은 신앙태도를.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님을 경험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먼저는 이전에 길들여져 있던 구습을 벗어 던지려는 싸움이 있어야 할 것이고, 다음으로는 새로운 그래서 낯선 삶을 살기 위해서 특별한 수고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부인할래야 할 수 없도록 우리의 생활은 악한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남을 해하려는 생각이 있고, 겉으로는 선하게 보이지만 속으로는 남을 속이려는 마음이 있으며, 겉과 속이 전혀 다르고, 남이 누리는 기쁨과 행복을 함께 기뻐하기는커녕 못마땅해하곤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남을 헐뜯는 얘기를 서슴지 않고 내뱉습니다. 이런 구습이 기독교인이 된 지금도 여전히 우리들에게 남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이런 구습은 우리가 육신아래 사는 동안은 떠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들만이 아니라, 다윗도 그랬고 바울도 그랬으니까, 그리 특별한 일이라 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구습과의 싸움을 멈춰서는 안됩니다. 매일 매일 이런 육신의 더러운 찌꺼기들과 진지하게 마주서야 합니다. 이것을 모든 십자가 군병들에게 지워진 멍에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삶을 향한 또 다른 수고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일인데,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새로운 길을 걷게 되거나,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이 우리들을 불안하게 할 수도 있고, 힘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아직 경험해 보지 않은 일들일 뿐 아니라, 낯설게 여겨지는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이 이 세상에서는 낯선 일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삶이 자연스럽고 일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특별한 것처럼 생각되는 때문입니다. 구세군의 자선냄비에 매년 빼놓지 않고 거액을 넣는 손길이 올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는 보도를 들었습니다. 주님이 세상을 살리려고 오신 넘치는 사랑을 받은 것을 감사해서, 누군가에게 그 사랑의 일부를 나누고 싶은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고 자연스러운 일인데도, 특별하게 보이는 까닭은 그런 선행이 이 세상에서는 낯선 이방인의 행위처럼 보이고 있는 때문입니다. 제 부모님을 지극히 섬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만, 실상은 불효자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제 구실을 하는 사람이 오히려 특별한 사람처럼 보이고, 상을 주어서 본을 삼아야 한다고들 야단입니다. 하물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하는 모든 몸짓이나 말씨는 저절로 혹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기를 기대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4. “갓난아이처럼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하십니다. 갓난아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어머니가 물려준 젖꼭지를 열심히 빨아댑니다. 그것 이외에 그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듯이 말입니다. 어머니의 젖줄에 그는 만족할 뿐 아니라, 그것으로 그의 모든 삶을 감사하며 평화롭게 잠이 들곤 합니다. 배가 부르기까지 그는 어머니의 젖을 사모합니다. 그 외에 그가 힘쓰는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매일 매일 그는 몰라보게 자라나는 것입니다. 본문의 저자는 이런 갓난아이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영적인 성장과 구원에로 나아가는 길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갓난아이처럼 우리 기독인들에게는 신령한 젖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상징적인 표현입니다만, 신령한 젖이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설교를 통해서, 일상의 삶을 통해서, 혹은 사건과 사고들을 통해서,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책을 통해서, 하나님은 쉬지 않고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만일 우리들이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자세로 살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거듭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하나님의 말씀인 신령한 젖은 저절로 혹은 자연발생적으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생활에서는 전혀 길들여지지 아니한 낯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 마음에 들려주시는 것들을 따라 순종해야 합니다. 

5.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요6:27).  오늘은 우리 기독교 통신강좌(C. C. C)가 인터넷으로 올려져서 누구나 손쉽게 기독교의 기초신앙을 배울 수 있도록 하였는데, 그 시연회를 연다고 합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많은 불신자들이 기독교 신앙과 만나는 축복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새로운 몸짓으로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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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3(2000.12.20, 수요일)
성경말씀 : 벧전 1:24-25.
찬송 : 205장.
제목 : 속 사람을 찾읍시다.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영원한 것이란 무엇이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시간 앞에서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것들로 변화되어 가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게 주시는 말씀은, 육체의 덧없음에 대해서 좀더 분명히 이해하고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오래 전에 세브란스 병원 직원들을 위한 예배를 인도한 일이 있습니다. 그 때 들은 얘기인데, 사람의 육체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충격적인 얘기였습니다. 작은 먼지 만한 것 하나가 호흡기를 통해서 뇌로 들어간다면, 정신 착란과 같은 엄청난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에서부터, 우리가 먹는 음식물에 따라 들어오는 온갖 독성을 간이나 쓸개와 같은 장기(臟器)들이 걸러내 주지 않는다고 하면, 하루를 살지 못할 것이라는 등의 얘기 말입니다. 결국 사람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우리의 몸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그런 위험 속에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기에 아니면 무시하기에, 우리는 지금 웃고 있는 것이며, 꿈까지도 꾸는 것이 아닐까요? 

3.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우리의 몸이 한 여름을 살다가 시들어버리고 마는 풀과 같다고 말씀할 뿐 아니라, 우리 인간이 자랑하는 모든 영광들이란 그 풀잎에 매달렸다가 떨어지는 꽃에 불과하다고 말씀합니다. 천하보다도 더 귀하고 위대하다는 인간이 풀에 비유되는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데 화가 나십니까? 어떤 분은 질그릇처럼 빚어진 존재라는 말씀(롬9:21-23)을 듣고, 인간 자신에 대해서 분노를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들 육체의 실상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도 또 외면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들 인생이 얼마나 무기력하고 절망적인 존재라는 것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한 시라도 헛된 꿈에서 분명한 현실로 깨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실상에 대해서 절망만 할 것이 아니라는, 또 다른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 질그릇처럼 언제든지 산산조각이 날 견고한 존재가 아니지만, 이런 질그릇 안에 너무도 엄청난 보배를 담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질그릇 같은 우리가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복음을 간직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역설적인 말인지 모릅니다. 인간은 질그릇 같이 보잘 것 없으나, 그 안에 위대한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의 복음을 소유하게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4.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의 한 지체로 생각할 때는, 풀잎이건 미물이건 다를 바 없는 피조물에 불과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피조물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입혀주실 뿐 아니라, 당신의 창조와 구원역사에 참여할 수 있게 하셨고, 당신과 교제할 수 있는 특권까지도 부여해 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인간의 참 모습을 찾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겉모습을 보아서는 풀잎에 불과하지만, 인간의 속 모습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대상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a), 할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4:16)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가치는 그 겉 사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 사람에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될 이유가 그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지금부터라도 많은 시간과 정열을 쏟아 부어야 할 과제가 있다면, 이런 속사람을 강건하게 만드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희망을 여기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겉 사람은 날로 쇠하여 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노화를 막아보겠다고 분칠을 하고 수술을 해도 그 결과는 시간 앞에서 포기하는 길 외에 없습니다. 속 사람을 말씀 위에 세우는 일, 이 일보다 더 중요하고 값진 수고는 없다고 확신합니다.

5. 어제 저녁에 우리 시온 성가대 지휘자가 되실 분(김광남선생님)을 만났습니다. 키가 훌쩍 크고 잘 생긴 얼굴도 호감을 주었지만, 성품도 서글서글하고 얘기도 진솔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 분을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오는 주일 교회에서 만나게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지휘봉은 마지막 주일 예배후 신년 첫 주일 예배 찬양을 위한 연습을 위해서 잡게 되실 것입니다. 금년 7월에 육군에서 전역하였고, 성악을 전공하고 있으며 오는 3월에 복학할 예정입니다. 사령부 교회에서 지휘자로 봉사한 경험이 전부이지만, 열심히 기도하면서 일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도 기도로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로, 연약한 육체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말씀을 의지하며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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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2(2000.12.19, 화요일)
성경말씀 : 벧전 1:23.
찬송 : 203장.
제목 : 거듭난 생활.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유대인의 관원(산헤드린 의회 의원)이었던 니고데모와 예수님과의 만남은 어떤 면에서는 충격이었습니다. 산헤드린 의회는 훗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결정하였던, 유대인의 종교생활과 전통에 대해서 가장 권위 있는 해석기관이며 재판소였습니다. 몇 되지 않은 이곳의 의원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영생에 관해서 질문하였기 때문입니다. 우선 인간적인 면에서 니고데모가 나이로 보나 세상 경험이나 지위로 볼 때 예수님보다 위에 있었음에 분명하지만, 그는 삭게오처럼 자신에게 솔직한 자세로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 본받을 만한 일입니다.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하는 것 때문에 고통받으면서도 아는 체하며 살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다음으로 그는 진리에 대해서 적극적인 구도자의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 거듭남(Be born again)은 논리적인 용어가 아닙니다. 이것처럼 신앙적인 용어는 그리 흔치 않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잘 들어보십시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  그렇습니다. 사람의 이성, 혹은 합리적 사고의 틀 안에서는 성령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어린아이의 생각은 어른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의 생각의 틀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성해서 아들 딸 낳고 인생의 맛을 조금 본 후에는 부모님의 사랑을 이해하게 될지 모릅니다. 철부지 학생이 어찌 그의 장래를 염려하며 초달하는 스승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사람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듭남의 진리는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라는 것, 거듭남의 진리는 오직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의 말을 믿는 것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요3:9-13). 

4. 사람들은 현재보다 새로운 삶을 희망합니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합니다. 어리석고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불만스럽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성도인 우리들에게서도 예외가 아닙니다.그러나 새로운 삶이란 어떤 결단이나 각오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에 의하면, 성도가 새롭게 살기를 원한다면 옛 사람을 버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데, 그것은 주안에서 살아가는 일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고후5:17). 너무도 많은 기독인들이 변화되지 않은 자기 모습 때문에 실망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들은 항상 자신의 마음 중심을 보려고 하지 않고, 바깥 모습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기본이 제대로 되어야 합니다. 말해 버린 후에 후회하는 것보다는, 말하기 전에 자신을 살피는 것(한마디하기 전에 세 번 생각함) 같은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 기독인들 중에는 변화된 결과만 관심할 뿐, 변화의 삶을 구체적으로 돕고 있는 진행과정에 대해서는 진지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먼저 “주님,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 뜻이겠습니까?”라고 기도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도움을 진심으로 청해야 할 것입니다. 새로워진 모습을 증명이라도 하고싶어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구나 품을 만한 욕심입니다. 그렇다면 더욱 나를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당장 눈앞에 펼쳐질 결과가 아닙니다. 제가 기도원타입의 신앙인을 곱쟎게 보는 가장 큰 문제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결과에 대한 갈증으로 가득찬 기도생활을 하는 때문입니다. 너무도 갈급해서며 심각해서입니까? 여전히 시종여일하게 제 뜻대로 살겠다고 고집하는 것이 마음을 아프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가 만나는 시련과 역경 또는 문제들은 신앙적인 면에서 볼 때, 얼마나 좋은 기회인지 모릅니다. 문자 그대로 시련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실패할 것 없는 자리에 서게 되었으니, 이제라도 제대로 된 기도를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해서 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입니까? 아버지께서 제게 요구하시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제게 들려주십시오. 깨우쳐 주십시오. 주님께 맡깁니다. 주님의 뜻대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드리지 않는 한, 우리의 심령엔 평화가 찾아올 리 없을 것이며, 새로운 삶의 시작은 요원할 것입니다.

5. 거듭남의 삶은 어느 한 순간에 생각이나 목표가 완전히 뒤집어엎어지는 그런 현상이 아닙니다. 그렇게 신앙의 길을 걸어간 사람은 성경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세를 보세요. 바울을 보세요. 베드로를 보세요. 그들 역시 언제든지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위태위태한 신앙의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시시 때때로 신앙과 불 신앙 사이에서 수 만가지 갈등을 겪으면서 고통을 당했지만, 그들이 예전 사람과 다르게 살았던 한 가지는,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앙이며, 하나님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다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거듭남은 어느 순간부터 동일하게 지속되는 종교현상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 머물고자 할 때만 나타나는 축복의 원리입니다. 부모님에 대해서, 장래에 대해서, 심지어 신앙에 대해서까지도 주님께 의탁하는 순간 순간만이, 거듭남의 삶을 경험하는 시간인 셈입니다. 그 밖의 모든 시간은 여전히 옛 사람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루터는 십자 성호 긋기를 강조했습니다. 그 상징을 사용함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머무르도록 도와주기 때문이었습니다. 거듭남은 성령의 주권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그 순간뿐임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마다 때마다 성령께서 우리를 주장하시도록 기회를 드리는 신앙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화살 기도라는 것을 가르친 일이 있습니다. 전도하러 나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기도만이 아닙니다. 일마다 때마다 “주님 어떻게 할까요?” 이런 기도로 나아가는 것, 그 때 여러분은 거듭난 새 사람으로 분명 향기 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6. 지난 여름 우리 교회를 위해서 수고해 준 두 분이 계셨습니다. 교회는 그 분들에게 작은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었는데, 한 분은 극구 사양하셨습니다. 내민 손을 다시 거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새삼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 사양하셨던 분이 한 자원봉사단체를 소개해 주셨고, 그 분들에게 제 손을 내밀었습니다. 어제 전화를 통해서, “지난 여름 뜨거운 복날 오후에 장애자 30명에게 제대로 차린 삼계탕을 대접할 수 있었는데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았습니다. 그 분들은 매 주 한 차례 밑반찬을 준비, 재택(집안에서 꼼짝 않고 있는) 노인 장애자들을 방문합니다. 말벗도 되어 드리고 청소도 해 드리며, 필요할 때는 바깥 나들이도 도와주는 선한 사마리아인들입니다. 우리 동네에 이런 젊은 부인들이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기쁘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년에는 우리 교회도 이 분들을 힘껏 돕고 싶은 생각입니다. 마리아회나 루디아회 그리고 바울회도 관심을 가져 주시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열매맺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합니다. 신앙 때문에 아름다운 삶의 열매들이 맺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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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1(2000.12.18, 월요일)
성경말씀 : 벧전 1:22.
찬송 : 411장.
제목 : 거짓 없는 사랑.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어느 음악평론가는 유행가의 70%는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다고 쓰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얼마나 사랑에 목말라하는가를 잘 알 수 있게 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유행가의 특징은
사랑에 대한 집착이 거의 병적일 만큼 깊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한 때 큰 반응을 일으켰던 [산장의 여인]이라는 가사는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오늘도 나 홀로 …” 말하고 있습니다. 상처받은 사랑에 대한 고통을 눈물로 노래하거나, 아니면 아직 그 같은 쓴맛을 보기 전의 철부지 사랑(사랑의 환상만을 좇는)이거나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3. 사람을 살게 하는 여러 가지 큰 힘 가운데 하나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혹은 누군가에게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데, 열심히 살아가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사랑을 받기 원하고 사랑을 하기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가진 원초적인 감정 가운데 하나인 사랑은 순수를 담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유나 목적이 뒤따르지 않고, 그저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그런 사랑을 나타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순수한 사랑을 나누며 살도록 이 세상에 보내진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랑은 누구나 주고받을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뉘 집 아이든 어린아이에게 사랑의 눈길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한 인간으로써 사람을 사랑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뜨거운 불길처럼 타오르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길을 물어오는 사람에게 친절히 안내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아장아장 길을 걷는 낯선 아이에게 “그 놈 잘 생겼구나.”하고 칭찬해 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불쌍한 처지에서 살고 있는 이웃을 돌보아 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자기 권리를 빼앗긴 사람을 대신해서 싸워주는 일도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입니다.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일도 크게 보면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랑으로 인해서 세상은 아름다워지고 살맛 나는 그런 곳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4.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 속에 있는 사랑이 순수하지 못하고, 거짓된 것일 때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정략적인 사랑, 계산된 사랑 같은 것인데, 이런 사랑은 대부분이 이기적인 목적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기 때문에 심각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이기적인 사랑은 슬프게도 참 사랑이 아니라 거짓 사랑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을 도구로 해서 다른 목적을 수행하려고 할 때, 그 사랑은 말할 것도 없고, 인간 사이의 관계까지도 여지없이 파괴될 수 있다는데 비극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알게 모르게 계산된 사랑을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특히 결혼관계를 맺고자 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할 주제가 이 사랑이 아닌가 합니다. 많은 경우를 보면 사랑의 순수성보다는 다른 계산된 것 때문에 결혼관계를 성립시킨다는 것입니다. 물론 결혼처럼 특별한 인간관계를 맺는 일을 뜨거운 가슴 하나만으로 결정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일생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 살아가야 할 특별한 관계 맺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잘 따져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학력, 능력, 건강, 가문, 친구관계 등등. 그러나 거기에 사랑이라는 것이 변수로 작용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계산된 결혼관계에서는 순수한 사랑을 기대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순수한 사랑 없이 어떻게 험난한 인생을 함께 나누며 살수 있겠습니까? 어렵겠지만 사랑의 씨앗을 틔우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나라의 결혼 제도는 당사자들의 자유의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부모들의 결정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랑으로 출발한 관계는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런 부실하고 메마른 사랑으로 시작된 관계였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지고 지순한 사랑을 나누며 살아간 사람들 얘기를 의외로 많이 듣게 됩니다. 성경에서도 그런 사람들의 얘기가 적지 않습니다. 저는 순수한 사랑에 많은 점수를 주는 타입입니다. 비록 당장 이익 되는 점은 부족하지만, 한 평생을 살아가는데 적어도 가끔은 이런 순수한 사랑의 추억과 그 열매가 주는 기쁨은 어떤 무엇으로도 계산할 수 없는 비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5. 고전 13장은 사랑의 대 서사시가 있습니다. 바울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무려 15가지나 우리에게 사랑의 의무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를 전체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사랑은 나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쉬운 말로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은, 받는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유하는 것에 방향이 있는 게 아니라, 베풀고 나누는데 방향을 두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과 거짓된 사랑이 쉽게 가려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끝없이 베풀기만 하는 그런 아가페적인 사랑을 지속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역시 우리들이 나눌 사랑은 주고받는 사랑입니다. 주고받는 사랑, 이런 사랑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만일 주고 베푸는 일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랑놀이를 할 수 있다면 그래도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요?  

6. 오늘도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바로 곁에 있는 여러분의 이웃과 나누는 특별한 기쁨이 있기를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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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0(2000.12.17, 주님의 날)
성경말씀 : 벧전 1:17-21.
찬송 : 202장.
제목 :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우리들 인간이 소망하고 있는 두 가지 명제는 평행선을 긋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유함의 세상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평등함의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자유함과 평등함이 공존하는 그런 세상이 이상적인 세상이라고 소망합니다. 자유함은 개성을 강조하게 되었고, 평등함은 인간의 권리를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자유함은 민주주의 세계에서 터를 닦았고, 평등함은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세계에서 환영을 받았습니다. 자유함이 책임과 의무를 요구하고 있는 것에 반해서, 평등함은 윤리와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향(理想鄕-유토피아)은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말에서 왔다고 하니
까(헬라어 우 토포스), 어쩌면 인간의 자유함과 평등함을 존중해 주는 세상이란 이 땅에서는 영원히 기대할 수 없는 곳인데도 헛된 꿈을 키우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3. 오늘 본문은 사람이 제 값을 하며 살 수 있게 된 것, 다시 말하면 개성을 가진 자유인으로 자신의 권리를 누리는 평등인으로 살게 된 것이란, 금이나 은으로 값을 계산한 때문이 아니라,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 양 같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계산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는 자유함도 평등함도 없는 노예나 짐승 같은 강요된 삶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밑으로부터의 혁명, 풀뿌리 민주주의며, 인도주의 정신에 기초한 엄청난 사건들이 있고 난 다음에서야 비로소 자유함과 평등함이 조금씩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여전히 우리 인간들이 족쇄에 묶여 살던 그 어두웠던 시절에 전해졌던 말씀이라는데 주목한다면,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해방이며 자유를 말함인가를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죄와 죽음의 사슬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문제의 심각성은 죄와 죽음의 사슬은 주인이나 노예 모두를 묶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죄와 죽음의 사슬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을 뿐 아니라, 그 고통은 불안과 두려움의 원인이었기 때문에 그 파장은 심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조금씩 다른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의식적으로 무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죄와 죽음의 사슬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 인간을 자유하지 못하게 하는 최후의 문제로써 죄와 죽음의 사슬 앞에서 절망감과 무력감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4. 금과 은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많을 있을 것입니다. 학력도 명예도 권세도 심지어 거짓을 진실로 바꾸는 일이나, 다른 이들이 부러워하는 결혼 상대자까지도 금과 은으로 살수 있는 그런 시대입니다. 실제로 2,3천년 전에는 사람의 목숨이나 자유를 금과 은으로 계산했었습니다. 성경은 그런 배경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죄와 죽음에서 자유함을 얻기 위해서만은 금이나 은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의 값은 죽음인 때문입니다. 이처럼 죄와 죽음에서 자유하는 길이 너무도 좁고 험하다는 말씀을 드리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모릅니다. 성경은 단 하나의 길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그것은 어린양의 보혈입니다. 구약에서는 실제로 죄의 값으로 치르던 제사에서 실행하던 것입니다. 죄의 크기와 성격에 따라서 제물은 달랐습니다. 그런데 그 대표적인 죄의 값으로 어린양이 등장합니다. 죄인은 따로 있는데, 그를 대신해서 죽는 것은 어린양이었습니다. 이것은 죄의 가공성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죄는 생명을 해치는 무서운 암덩어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마침내 어린양의 실체가 등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은 자신의 피를 온 세상 사람들의 죄의 값으로 내놓으신 것입니다. 

5. 오늘 우리의 자유함은 거져얻은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수님의 보혈을 주고 산 값비싼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항상 기뻐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는 그 기초는 바로 이런 값비싼 은혜를 받은 데서 연유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취약한 것중 하나가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진심으로 덧입고 살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감사합니다.”는 말이나 마음을 품지 못하고 오히려 “왜 납니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너무 하십니다.”고 하나님께 탄원하는 까닭이, 바로 주님이 주신 보혈의 공로를 값싸게 이해하는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주님의 보혈의 공로를 기억합시다. 그것이 십자 성호를 긋는 가장 큰 목적입니다. “주님은 날 위해 보혈을 흘려주셨습니다. 나는 그 보혈로 자유함과 평등함을 누리는 축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고 고백하며 살도록 도와주는 십자 성호입니다. 

6.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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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69(2000.12.16, 토요일)
성경말씀 : 벧전 1:13-16.
찬송 : 508장.
제목 : 성도의 구별된 생활.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주제는 우리들이 계속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삶의 목표는 그 과정이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기자는 몇 가지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얘기들을 요약하면 “거룩한 자가 되라.”입니다. 거룩한 사람이란 말은, 높은 도덕성과 인격을 갖춘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구별된 사람이라는 뜻이 훨씬 성경적입니다. 보통 사람 혹은 세상 사람과
는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몸짓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3.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실 은혜만을 사모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금 모습과 구별된 성도의 모습과를 비교해 보십시다. 우리가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몸을 삼가서 오직 한 가지만을 구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대부분의 기독인들이 이 땅의 축복을 달라고 매달리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사업이 잘되고, 자식이 잘 크고, 몸이 건강해지며 등등 말입니다. 그러나 정말 구별된 사람은 주님께서 훗날 가져다 주실 은혜만을 사모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어찌보면 이런 구별된 사람들은 이 세상과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땅의 것을 구하지 않을 만큼 몸과 마음이 여유롭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그들은 작은 것 보다는 큰 것을 언제나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땅의 축복에 대해서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더 큰 것인 영원한 축복을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의 언어생활에 새로운 습관을 길러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런 말을 자신과 이웃을 향해서 항상 사용하는 우리들 자신이 되도록 말입니다.

4. 그 다음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을 사욕을 좇던 옛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에 순종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이나 욕망을 버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이라는 말은, 자기 자신의 의지나 뜻을 죽이는 것과 다를바 없는 가장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합니다.”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나 그 말의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순종이란 자기 포기라는 말과 동의어 이며 희생을 요구하는 말을 뜻합니다. 이것이 성도로 구별되게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우리 기독인의 삶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살피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비교적 잘 훈련된 새벽기도인입니다. 그래도 종종 피곤한 느낌 때문에 일어나기 싫고 지금처럼 감기로 고생할 즈음에는, 많은 충고의 말들에 솔깃해 합니다. “감기는 새벽기도가 문제다.”는 등. 그러나 순종하기 위해서 내 자신의 합리적인 생각이나 유혹을 과감히 내버려야 합니다. 억울한 생각으로 기도회에 나간다고요? 그게 은혜스러울 수 있을까요? 질문이 쏟아질 수 있습니다. 결론은 이렇듯 나 자신을 포기하고 순종의 제물이 되었다고 생각될 때처럼 더 행복한 순간이 없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십시다.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애쓰는 삶인가? 고 말입니다.

5. 마지막으로 구별된 성도의 모습은, 행실에서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교인들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는 구절을 찾을 수 있습니다(행11:26).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 혹은 작은 그리스도들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입으로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행실로도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동양적인 사고에서도 이런 유사한 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성도를 신자라는 말로 사용하는데, 信者란 그가 하는 말이 행실에서 모순되지 않고 진실되게 나타나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를 관찰할 차례입니다. 엊그제 삼계탕집에서의 일화를 말씀드렸습니다만, 여전히 한국에서 기독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여러 가지 제약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낮부터 술잔을 기우리지 않는 것이, 어찌보면 한국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는 요소일지언정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소주를 맥주병에 마시면서 목사님의 설교를 얘기하는 것은 아직은 구별된 성도의 모습은 아니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보편적인 사회적 공감대를 역행하는 모습인 때문입니다. 물론 소극적인 구별된 모습보다는 적극적인 모습을 더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오른 손이 하는 선행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던지, 절제되고 향기나는 삶을 위해 부단히 땀 흘리는 모습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기쁘게 해야 할 것입니다. 

6. 성도로 세상에서 사는 일은 마치 미운 오리 새끼처럼 살아가는 일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성도의 삶은 불신의 바다위에 홀로 떠 있는 작은 나뭇닢같다고 하겠습니다. 시셋말로 톡톡 튀는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평범하게 묻혀서 살아가는 것을 거부해야 할 것입니다. 떼지어 물결처럼 함께 흘러가지 않고 오히려 그 거대한 물결을 홀로 거슬러 오르는 고통과 희생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래야 합니다. 몇 일전 결혼식장에서 많은 동창들을 만났습니다. 첫 눈에도 성공했다는 사람들과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애써서 그것을 감추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놀랍게도 제게 보내주는 인사는 따뜻했습니다. 그들 눈에 비친 내 모습은 성공과 실패와는 거리가 먼 낯선 이방인인 때문이었습니다. 나에게는 매월 만나는 동창회 모임 얘기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회비를 내야 한다느니 하며 돈을 거두면서도 내게는 한 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장로가 된 사람, 큰 교회 회계가 되었다는 사람, 나름대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었지만, 차려진 음식을 놓고 고개를 숙여 기도하는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맥주잔을 돌리는데는 얼마나 익숙한지 알 수 있었습니다. 겉 모습이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보일만한 속 사람은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까? “너는 목사니까 술 안하지?” 이렇게 물어오는 친구에게 “아냐, 가끔 한 잔씩 한다.”고 대답했다고 하십시다. “너 가짜아냐?” 금방 그런 핀잔이 나올 것입니다. 속과 겉은 다를 수 없는 하나여야 합니다. 진짜는 진짜의 겉모습과 진짜의 속모습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보여주려고 해도 속 마음은 보일 수도 보여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선 겉 모습에서 속 마음을 읽을 수 있도록 하는 일을 게을리 말아야 하겠습니다. 속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신뢰감을 주지 못했다고 한다면 더 이상 할말이 없는 일이 아닙니까? 

7. 제가 졸업한 거창고등학교 후배인 여학생들이 큰 일을 해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금년도 육사와 해사 입시에서 여자부 수석을 각 각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관학교 합격생들에게 축하를 드립니다. 일신의 영달에 앞서, 나라와 민족의 안위를 위해 살신성인하는 방패들이 되어주기를 부탁드립니다. 
주 안에서 오늘도 평안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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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68(2000.12.15, 금요일)
성경말씀 : 벧전 1:10-12.
찬송 : 175장.
제목 : 성령의 도우심을 기도하자.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길을 예언해 주었던, 선지자들 혹은 예언자들의 역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의 신앙은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형성되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부모님에게서 영향을 받기도 하고, 친구나 문서를 통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다 더 근본적인 면에서 도움을 준 분들이 계십니다. 그들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직 간접으로 참여하고 있는 선지자들 또는 예언자들입니다. 그들 역시 구원의 길을 추구하며 연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서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실 구원의 전 과정에 대해서 예언하였는데, 이런 일을 가능케 한 것을 그들 속에 계신 성령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령께서 그들을 움직이셨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고, 증거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런 저런 사람들에 의해서 선포되었지만, 그 배후에서 그들을 움직이신 성령님의 도우심 때문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요한복음서 기자는 이것을 분명하게 설명하였습니다(요한복음 20:31). 

3. 예언자들 역시 세상을 살아갔던 인간이었습니다.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안고서 삶의 무게를 느끼던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 그들 역시 자신을 위해서 구원의 길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부지런히 구원의 길을 연구하고 살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그들은 자신들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 그런 공적 인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12절 상반절). 자신의 구원도 소중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구원 역시 소중하다는 깨달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초점의 변화, 나에서 다른 사람으로, 이것은 천지개벽과 맞먹는 엄청난 변화입니다. 이런 변화 때문에 그들은 예언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가능케 한 것은 그들 자신의 성품이나 인격에서가 아니라, 그들 중심에 계셨던 성령님의 활동이었습니다. 성령님을 모신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특징입니다. 

4.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 성령님에 대한 이해처럼 복잡한 것이 없을지 모릅니다. 그 때마다 왜 초대 교회 이래로 기독교회가 가장 많은 연구와 노력을 기우린 것이 삼위일체 교리였는가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창조주시며 세상을 주관하시는 성부 하나님, 사람으로 세상에 오셔서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성자 예수님,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 감화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교리 말입니다. 우리는 세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삼위이신 하나님을 각 위별로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이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당신의 뜻과 의지대로 주관하시는 성부 하나님을 따로 떼어놓고 구세주 예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구세주 예수님을 떼어놓고 우리 안에서 우리를 움직이시는 성령님을 만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삼위이시며 일체이신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영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균형 잡힌 하나님 이해를 바탕으로 한 신앙생활이 현실적으로는 상당히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때 한국의 어느 장로교회는 성부 하나님만을 강조한 일이 있었습니다. 또 어떤 교파에서는 성자 예수님만을 더 많이 강조하기도 하였고, 마찬가지로 또 어떤 이들은 성령 하나님만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성부 하나님을 말할 때에도 거기엔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이 함께 하심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성령님을 고백할 때에도 거기엔 성부와 성자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5. 그러므로 우리들을 위해 예언하였던 예언자들 속에서 도우셨던 성령님은 삼위 일체이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성령님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우리들을 돕기를 원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말씀입니다(요16:13, 롬8:26, 빌1:19). 그러나 문제는 성령님이 무관심이나 멀리 계심이 아니라,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기를 원하시는 성령님을 우리들이 반갑게 모셔들이지 않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우리를 권고하고 격려할 기회조차도 드리지 않고 있는데 문제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우리를 돕기 위해 찾아오신 성령님을 우리 안에 모셔들이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렇게도 어려운 일은 성령님을 모셔들이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비우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 가득차 있는 잡동사니들, 수많은 꿈과 계획과 야망과 생각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송두리체 쓸어내어 버리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여전히 신앙심을 가지고는 있지만, 자신의 의지와 뜻을 우선적으로 내세우고 있는지 모릅니다. 특이하게도 성령께서는 잡동사니로 가득찬 복잡한 마음속에는 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릴 기도 제목은 “성령님을 내 마음에 모실 수 있도록 나를 겸손케 하소서!”가 어떨는지요? 성령님만이 여러분을 아름답고 따뜻한 삶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6. 고어 후보가 승복하였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다시는 번복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말도 덧 붙였습니다. 33만 7천 여표를 앞서고도 지는 우리에게는 희한한 선거인단 제도를 가진 미국 대선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사이비 정당이 들어설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 각 주가 크기와 힘에 상관없이 동등하게 중앙 정부로부터 관심을 갖고 협력하도록 하기 위해서 선거인단 제도가 필요했다는 설명을 읽으면서, 민주주의는 다수결이 지배하는 것만이 아니구나 하는 새로운 생각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천사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시겠지요?  주안에서 유익한 하루가 되시길 기도 드립니다. 



김호경 선생님께.

찬미 예수 !

보내 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주님을 우리 안에 모셔들이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다 비우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인 때문입니다. 신앙을 고백을 하고, 찬송을 부르고, 열심히 기도하지만, 여전히 내 안에 주인은 내 자신이기에 말입니다. 어떤 분이 절간의 객사에서 몇 일을 묵고 나서 그 때의 느낌을 글로 쓴 것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소개해 준 방에 들어 갔는데, 옷을 걸어둘 못 하나가 벽에 박혀있을 뿐 아무 것도 없는 빈 방이었다고 했습니다. 처음엔 너무 쓸쓸하고 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자신의 마음에 가득차오는 기쁨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속세에서 그를 애태우고 걱정하게 하였던 얽히고 섥힌 생각들이 다 빠져나간 뒤의 기쁨이었는지, 아니면 더 이상 아무 것도 가질 필요가 없는 단순한 삶이 그가 진심으로 바래왔던 삶이었다는 깨달음에서 온 기쁨이었는지는 모릅니다. 

여전히 우리는 우리가 가진 생각이나 꿈을 최고의 것으로 붙잡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서 뺏기는 것은 아닐까해서 잠시 잠간 동안에도 놓지지 않으려고 단단히 붙들고 가슴졸이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물론 주님을 마음에 모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 생각대로 사는 것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 신앙인들은 이런 생각을 하는 것과 결심이라는 차원에 머무는 것으로 만족하는 경향성이 많은게 사실입니다. 가령 은혜로운 예배를 드린 것 자체로 만족하는 경우이며, 기도원에서 받은 충만한 은혜 자체로 만족하는 경우가 그것들이라 하겠습니다. 다행히도 김선생은 생각한대로 살지 못하는 안타까운 경우에 대해서 지금 묻고 있습니다. 아무리 다짐을 하고 최선을 다해 보아도 되돌아 보는 삶은 후회로 가득 채워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바로 여기에 육신을 가진 우리들의 한계점이 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고 싶지만, 동행하지 않은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의 어리석음이 여기에 있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모순되고 절망적인 우리입니까? 바울 사도를 예로 들면, 그 분 역시 우리가 느끼는 그런 갈등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로마서 7-8장에서 그런 모습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점은, 우리의 변화된 생활이나 행실에서 희망의 요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가진 믿음에서 희망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7:24-25a).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7-39). 이 구절들은 바울 사도의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이제 해답을 찾아 봅시다. 첫째, “이만하면 나는 괜챦게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나를 찾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둘째, “나는 어쩌면 이렇게 어리석고 바보같이 살아갈까? 그러나 주님 안에서 더 나아질 희망은 없을까?”고 말하고 있는 내가 되었는지를 찾아 볼 것. 셋째, “나는 순간 순간 주님께 나를 의탁할 때만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다.”고 자신을 격려하는 나를 만들어 갈 것.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께서 온전히 왕노릇하시지 못할까를 염려합니다. 신앙의 선진들이 기도시간을 많이 가졌던 까닭이나, 교회를 중심으로 열심히 말씀을 배우려고 했던 이유를 알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그런 노력만이라도 해야 위안이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처럼 남보다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서도 버림을 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죄인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아픈 마음이 행복한 마음이고, 죄인임을 고백할 때만이 의로워지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설교 준비에 들어가야 합니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샬롬.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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