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1(2000.12.18, 월요일)
성경말씀 : 벧전 1:22.
찬송 : 411장.
제목 : 거짓 없는 사랑.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어느 음악평론가는 유행가의 70%는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다고 쓰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얼마나 사랑에 목말라하는가를 잘 알 수 있게 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유행가의 특징은
사랑에 대한 집착이 거의 병적일 만큼 깊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한 때 큰 반응을 일으켰던 [산장의 여인]이라는 가사는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오늘도 나 홀로 …” 말하고 있습니다. 상처받은 사랑에 대한 고통을 눈물로 노래하거나, 아니면 아직 그 같은 쓴맛을 보기 전의 철부지 사랑(사랑의 환상만을 좇는)이거나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3. 사람을 살게 하는 여러 가지 큰 힘 가운데 하나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혹은 누군가에게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데, 열심히 살아가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사랑을 받기 원하고 사랑을 하기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가진 원초적인 감정 가운데 하나인 사랑은 순수를 담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유나 목적이 뒤따르지 않고, 그저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그런 사랑을 나타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순수한 사랑을 나누며 살도록 이 세상에 보내진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랑은 누구나 주고받을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뉘 집 아이든 어린아이에게 사랑의 눈길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한 인간으로써 사람을 사랑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뜨거운 불길처럼 타오르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길을 물어오는 사람에게 친절히 안내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아장아장 길을 걷는 낯선 아이에게 “그 놈 잘 생겼구나.”하고 칭찬해 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불쌍한 처지에서 살고 있는 이웃을 돌보아 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자기 권리를 빼앗긴 사람을 대신해서 싸워주는 일도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입니다.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일도 크게 보면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랑으로 인해서 세상은 아름다워지고 살맛 나는 그런 곳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4.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 속에 있는 사랑이 순수하지 못하고, 거짓된 것일 때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정략적인 사랑, 계산된 사랑 같은 것인데, 이런 사랑은 대부분이 이기적인 목적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기 때문에 심각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이기적인 사랑은 슬프게도 참 사랑이 아니라 거짓 사랑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을 도구로 해서 다른 목적을 수행하려고 할 때, 그 사랑은 말할 것도 없고, 인간 사이의 관계까지도 여지없이 파괴될 수 있다는데 비극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알게 모르게 계산된 사랑을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특히 결혼관계를 맺고자 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할 주제가 이 사랑이 아닌가 합니다. 많은 경우를 보면 사랑의 순수성보다는 다른 계산된 것 때문에 결혼관계를 성립시킨다는 것입니다. 물론 결혼처럼 특별한 인간관계를 맺는 일을 뜨거운 가슴 하나만으로 결정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일생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 살아가야 할 특별한 관계 맺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잘 따져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학력, 능력, 건강, 가문, 친구관계 등등. 그러나 거기에 사랑이라는 것이 변수로 작용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계산된 결혼관계에서는 순수한 사랑을 기대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순수한 사랑 없이 어떻게 험난한 인생을 함께 나누며 살수 있겠습니까? 어렵겠지만 사랑의 씨앗을 틔우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나라의 결혼 제도는 당사자들의 자유의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부모들의 결정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랑으로 출발한 관계는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런 부실하고 메마른 사랑으로 시작된 관계였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지고 지순한 사랑을 나누며 살아간 사람들 얘기를 의외로 많이 듣게 됩니다. 성경에서도 그런 사람들의 얘기가 적지 않습니다. 저는 순수한 사랑에 많은 점수를 주는 타입입니다. 비록 당장 이익 되는 점은 부족하지만, 한 평생을 살아가는데 적어도 가끔은 이런 순수한 사랑의 추억과 그 열매가 주는 기쁨은 어떤 무엇으로도 계산할 수 없는 비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5. 고전 13장은 사랑의 대 서사시가 있습니다. 바울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무려 15가지나 우리에게 사랑의 의무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를 전체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사랑은 나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쉬운 말로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은, 받는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유하는 것에 방향이 있는 게 아니라, 베풀고 나누는데 방향을 두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과 거짓된 사랑이 쉽게 가려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끝없이 베풀기만 하는 그런 아가페적인 사랑을 지속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역시 우리들이 나눌 사랑은 주고받는 사랑입니다. 주고받는 사랑, 이런 사랑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만일 주고 베푸는 일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랑놀이를 할 수 있다면 그래도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요?  

6. 오늘도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바로 곁에 있는 여러분의 이웃과 나누는 특별한 기쁨이 있기를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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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0(2000.12.17, 주님의 날)
성경말씀 : 벧전 1:17-21.
찬송 : 202장.
제목 :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우리들 인간이 소망하고 있는 두 가지 명제는 평행선을 긋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유함의 세상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평등함의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자유함과 평등함이 공존하는 그런 세상이 이상적인 세상이라고 소망합니다. 자유함은 개성을 강조하게 되었고, 평등함은 인간의 권리를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자유함은 민주주의 세계에서 터를 닦았고, 평등함은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세계에서 환영을 받았습니다. 자유함이 책임과 의무를 요구하고 있는 것에 반해서, 평등함은 윤리와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향(理想鄕-유토피아)은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말에서 왔다고 하니
까(헬라어 우 토포스), 어쩌면 인간의 자유함과 평등함을 존중해 주는 세상이란 이 땅에서는 영원히 기대할 수 없는 곳인데도 헛된 꿈을 키우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3. 오늘 본문은 사람이 제 값을 하며 살 수 있게 된 것, 다시 말하면 개성을 가진 자유인으로 자신의 권리를 누리는 평등인으로 살게 된 것이란, 금이나 은으로 값을 계산한 때문이 아니라,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 양 같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계산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는 자유함도 평등함도 없는 노예나 짐승 같은 강요된 삶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밑으로부터의 혁명, 풀뿌리 민주주의며, 인도주의 정신에 기초한 엄청난 사건들이 있고 난 다음에서야 비로소 자유함과 평등함이 조금씩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여전히 우리 인간들이 족쇄에 묶여 살던 그 어두웠던 시절에 전해졌던 말씀이라는데 주목한다면,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해방이며 자유를 말함인가를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죄와 죽음의 사슬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문제의 심각성은 죄와 죽음의 사슬은 주인이나 노예 모두를 묶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죄와 죽음의 사슬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을 뿐 아니라, 그 고통은 불안과 두려움의 원인이었기 때문에 그 파장은 심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조금씩 다른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의식적으로 무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죄와 죽음의 사슬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 인간을 자유하지 못하게 하는 최후의 문제로써 죄와 죽음의 사슬 앞에서 절망감과 무력감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4. 금과 은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많을 있을 것입니다. 학력도 명예도 권세도 심지어 거짓을 진실로 바꾸는 일이나, 다른 이들이 부러워하는 결혼 상대자까지도 금과 은으로 살수 있는 그런 시대입니다. 실제로 2,3천년 전에는 사람의 목숨이나 자유를 금과 은으로 계산했었습니다. 성경은 그런 배경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죄와 죽음에서 자유함을 얻기 위해서만은 금이나 은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의 값은 죽음인 때문입니다. 이처럼 죄와 죽음에서 자유하는 길이 너무도 좁고 험하다는 말씀을 드리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모릅니다. 성경은 단 하나의 길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그것은 어린양의 보혈입니다. 구약에서는 실제로 죄의 값으로 치르던 제사에서 실행하던 것입니다. 죄의 크기와 성격에 따라서 제물은 달랐습니다. 그런데 그 대표적인 죄의 값으로 어린양이 등장합니다. 죄인은 따로 있는데, 그를 대신해서 죽는 것은 어린양이었습니다. 이것은 죄의 가공성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죄는 생명을 해치는 무서운 암덩어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마침내 어린양의 실체가 등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은 자신의 피를 온 세상 사람들의 죄의 값으로 내놓으신 것입니다. 

5. 오늘 우리의 자유함은 거져얻은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수님의 보혈을 주고 산 값비싼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항상 기뻐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는 그 기초는 바로 이런 값비싼 은혜를 받은 데서 연유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취약한 것중 하나가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진심으로 덧입고 살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감사합니다.”는 말이나 마음을 품지 못하고 오히려 “왜 납니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너무 하십니다.”고 하나님께 탄원하는 까닭이, 바로 주님이 주신 보혈의 공로를 값싸게 이해하는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주님의 보혈의 공로를 기억합시다. 그것이 십자 성호를 긋는 가장 큰 목적입니다. “주님은 날 위해 보혈을 흘려주셨습니다. 나는 그 보혈로 자유함과 평등함을 누리는 축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고 고백하며 살도록 도와주는 십자 성호입니다. 

6.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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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69(2000.12.16, 토요일)
성경말씀 : 벧전 1:13-16.
찬송 : 508장.
제목 : 성도의 구별된 생활.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주제는 우리들이 계속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삶의 목표는 그 과정이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기자는 몇 가지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얘기들을 요약하면 “거룩한 자가 되라.”입니다. 거룩한 사람이란 말은, 높은 도덕성과 인격을 갖춘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구별된 사람이라는 뜻이 훨씬 성경적입니다. 보통 사람 혹은 세상 사람과
는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몸짓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3.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실 은혜만을 사모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금 모습과 구별된 성도의 모습과를 비교해 보십시다. 우리가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몸을 삼가서 오직 한 가지만을 구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대부분의 기독인들이 이 땅의 축복을 달라고 매달리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사업이 잘되고, 자식이 잘 크고, 몸이 건강해지며 등등 말입니다. 그러나 정말 구별된 사람은 주님께서 훗날 가져다 주실 은혜만을 사모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어찌보면 이런 구별된 사람들은 이 세상과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땅의 것을 구하지 않을 만큼 몸과 마음이 여유롭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그들은 작은 것 보다는 큰 것을 언제나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땅의 축복에 대해서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더 큰 것인 영원한 축복을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의 언어생활에 새로운 습관을 길러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런 말을 자신과 이웃을 향해서 항상 사용하는 우리들 자신이 되도록 말입니다.

4. 그 다음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을 사욕을 좇던 옛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에 순종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이나 욕망을 버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이라는 말은, 자기 자신의 의지나 뜻을 죽이는 것과 다를바 없는 가장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합니다.”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나 그 말의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순종이란 자기 포기라는 말과 동의어 이며 희생을 요구하는 말을 뜻합니다. 이것이 성도로 구별되게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우리 기독인의 삶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살피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비교적 잘 훈련된 새벽기도인입니다. 그래도 종종 피곤한 느낌 때문에 일어나기 싫고 지금처럼 감기로 고생할 즈음에는, 많은 충고의 말들에 솔깃해 합니다. “감기는 새벽기도가 문제다.”는 등. 그러나 순종하기 위해서 내 자신의 합리적인 생각이나 유혹을 과감히 내버려야 합니다. 억울한 생각으로 기도회에 나간다고요? 그게 은혜스러울 수 있을까요? 질문이 쏟아질 수 있습니다. 결론은 이렇듯 나 자신을 포기하고 순종의 제물이 되었다고 생각될 때처럼 더 행복한 순간이 없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십시다.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애쓰는 삶인가? 고 말입니다.

5. 마지막으로 구별된 성도의 모습은, 행실에서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교인들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는 구절을 찾을 수 있습니다(행11:26).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 혹은 작은 그리스도들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입으로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행실로도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동양적인 사고에서도 이런 유사한 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성도를 신자라는 말로 사용하는데, 信者란 그가 하는 말이 행실에서 모순되지 않고 진실되게 나타나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를 관찰할 차례입니다. 엊그제 삼계탕집에서의 일화를 말씀드렸습니다만, 여전히 한국에서 기독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여러 가지 제약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낮부터 술잔을 기우리지 않는 것이, 어찌보면 한국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는 요소일지언정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소주를 맥주병에 마시면서 목사님의 설교를 얘기하는 것은 아직은 구별된 성도의 모습은 아니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보편적인 사회적 공감대를 역행하는 모습인 때문입니다. 물론 소극적인 구별된 모습보다는 적극적인 모습을 더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오른 손이 하는 선행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던지, 절제되고 향기나는 삶을 위해 부단히 땀 흘리는 모습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기쁘게 해야 할 것입니다. 

6. 성도로 세상에서 사는 일은 마치 미운 오리 새끼처럼 살아가는 일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성도의 삶은 불신의 바다위에 홀로 떠 있는 작은 나뭇닢같다고 하겠습니다. 시셋말로 톡톡 튀는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평범하게 묻혀서 살아가는 것을 거부해야 할 것입니다. 떼지어 물결처럼 함께 흘러가지 않고 오히려 그 거대한 물결을 홀로 거슬러 오르는 고통과 희생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래야 합니다. 몇 일전 결혼식장에서 많은 동창들을 만났습니다. 첫 눈에도 성공했다는 사람들과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애써서 그것을 감추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놀랍게도 제게 보내주는 인사는 따뜻했습니다. 그들 눈에 비친 내 모습은 성공과 실패와는 거리가 먼 낯선 이방인인 때문이었습니다. 나에게는 매월 만나는 동창회 모임 얘기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회비를 내야 한다느니 하며 돈을 거두면서도 내게는 한 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장로가 된 사람, 큰 교회 회계가 되었다는 사람, 나름대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었지만, 차려진 음식을 놓고 고개를 숙여 기도하는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맥주잔을 돌리는데는 얼마나 익숙한지 알 수 있었습니다. 겉 모습이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보일만한 속 사람은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까? “너는 목사니까 술 안하지?” 이렇게 물어오는 친구에게 “아냐, 가끔 한 잔씩 한다.”고 대답했다고 하십시다. “너 가짜아냐?” 금방 그런 핀잔이 나올 것입니다. 속과 겉은 다를 수 없는 하나여야 합니다. 진짜는 진짜의 겉모습과 진짜의 속모습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보여주려고 해도 속 마음은 보일 수도 보여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선 겉 모습에서 속 마음을 읽을 수 있도록 하는 일을 게을리 말아야 하겠습니다. 속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신뢰감을 주지 못했다고 한다면 더 이상 할말이 없는 일이 아닙니까? 

7. 제가 졸업한 거창고등학교 후배인 여학생들이 큰 일을 해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금년도 육사와 해사 입시에서 여자부 수석을 각 각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관학교 합격생들에게 축하를 드립니다. 일신의 영달에 앞서, 나라와 민족의 안위를 위해 살신성인하는 방패들이 되어주기를 부탁드립니다. 
주 안에서 오늘도 평안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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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68(2000.12.15, 금요일)
성경말씀 : 벧전 1:10-12.
찬송 : 175장.
제목 : 성령의 도우심을 기도하자.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길을 예언해 주었던, 선지자들 혹은 예언자들의 역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의 신앙은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형성되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부모님에게서 영향을 받기도 하고, 친구나 문서를 통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다 더 근본적인 면에서 도움을 준 분들이 계십니다. 그들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직 간접으로 참여하고 있는 선지자들 또는 예언자들입니다. 그들 역시 구원의 길을 추구하며 연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서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실 구원의 전 과정에 대해서 예언하였는데, 이런 일을 가능케 한 것을 그들 속에 계신 성령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령께서 그들을 움직이셨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고, 증거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런 저런 사람들에 의해서 선포되었지만, 그 배후에서 그들을 움직이신 성령님의 도우심 때문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요한복음서 기자는 이것을 분명하게 설명하였습니다(요한복음 20:31). 

3. 예언자들 역시 세상을 살아갔던 인간이었습니다.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안고서 삶의 무게를 느끼던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 그들 역시 자신을 위해서 구원의 길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부지런히 구원의 길을 연구하고 살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그들은 자신들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 그런 공적 인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12절 상반절). 자신의 구원도 소중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구원 역시 소중하다는 깨달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초점의 변화, 나에서 다른 사람으로, 이것은 천지개벽과 맞먹는 엄청난 변화입니다. 이런 변화 때문에 그들은 예언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가능케 한 것은 그들 자신의 성품이나 인격에서가 아니라, 그들 중심에 계셨던 성령님의 활동이었습니다. 성령님을 모신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특징입니다. 

4.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 성령님에 대한 이해처럼 복잡한 것이 없을지 모릅니다. 그 때마다 왜 초대 교회 이래로 기독교회가 가장 많은 연구와 노력을 기우린 것이 삼위일체 교리였는가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창조주시며 세상을 주관하시는 성부 하나님, 사람으로 세상에 오셔서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성자 예수님,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 감화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교리 말입니다. 우리는 세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삼위이신 하나님을 각 위별로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이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당신의 뜻과 의지대로 주관하시는 성부 하나님을 따로 떼어놓고 구세주 예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구세주 예수님을 떼어놓고 우리 안에서 우리를 움직이시는 성령님을 만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삼위이시며 일체이신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영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균형 잡힌 하나님 이해를 바탕으로 한 신앙생활이 현실적으로는 상당히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때 한국의 어느 장로교회는 성부 하나님만을 강조한 일이 있었습니다. 또 어떤 교파에서는 성자 예수님만을 더 많이 강조하기도 하였고, 마찬가지로 또 어떤 이들은 성령 하나님만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성부 하나님을 말할 때에도 거기엔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이 함께 하심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성령님을 고백할 때에도 거기엔 성부와 성자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5. 그러므로 우리들을 위해 예언하였던 예언자들 속에서 도우셨던 성령님은 삼위 일체이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성령님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우리들을 돕기를 원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말씀입니다(요16:13, 롬8:26, 빌1:19). 그러나 문제는 성령님이 무관심이나 멀리 계심이 아니라,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기를 원하시는 성령님을 우리들이 반갑게 모셔들이지 않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우리를 권고하고 격려할 기회조차도 드리지 않고 있는데 문제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우리를 돕기 위해 찾아오신 성령님을 우리 안에 모셔들이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렇게도 어려운 일은 성령님을 모셔들이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비우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 가득차 있는 잡동사니들, 수많은 꿈과 계획과 야망과 생각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송두리체 쓸어내어 버리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여전히 신앙심을 가지고는 있지만, 자신의 의지와 뜻을 우선적으로 내세우고 있는지 모릅니다. 특이하게도 성령께서는 잡동사니로 가득찬 복잡한 마음속에는 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릴 기도 제목은 “성령님을 내 마음에 모실 수 있도록 나를 겸손케 하소서!”가 어떨는지요? 성령님만이 여러분을 아름답고 따뜻한 삶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6. 고어 후보가 승복하였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다시는 번복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말도 덧 붙였습니다. 33만 7천 여표를 앞서고도 지는 우리에게는 희한한 선거인단 제도를 가진 미국 대선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사이비 정당이 들어설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 각 주가 크기와 힘에 상관없이 동등하게 중앙 정부로부터 관심을 갖고 협력하도록 하기 위해서 선거인단 제도가 필요했다는 설명을 읽으면서, 민주주의는 다수결이 지배하는 것만이 아니구나 하는 새로운 생각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천사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시겠지요?  주안에서 유익한 하루가 되시길 기도 드립니다. 



김호경 선생님께.

찬미 예수 !

보내 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주님을 우리 안에 모셔들이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다 비우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인 때문입니다. 신앙을 고백을 하고, 찬송을 부르고, 열심히 기도하지만, 여전히 내 안에 주인은 내 자신이기에 말입니다. 어떤 분이 절간의 객사에서 몇 일을 묵고 나서 그 때의 느낌을 글로 쓴 것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소개해 준 방에 들어 갔는데, 옷을 걸어둘 못 하나가 벽에 박혀있을 뿐 아무 것도 없는 빈 방이었다고 했습니다. 처음엔 너무 쓸쓸하고 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자신의 마음에 가득차오는 기쁨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속세에서 그를 애태우고 걱정하게 하였던 얽히고 섥힌 생각들이 다 빠져나간 뒤의 기쁨이었는지, 아니면 더 이상 아무 것도 가질 필요가 없는 단순한 삶이 그가 진심으로 바래왔던 삶이었다는 깨달음에서 온 기쁨이었는지는 모릅니다. 

여전히 우리는 우리가 가진 생각이나 꿈을 최고의 것으로 붙잡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서 뺏기는 것은 아닐까해서 잠시 잠간 동안에도 놓지지 않으려고 단단히 붙들고 가슴졸이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물론 주님을 마음에 모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 생각대로 사는 것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 신앙인들은 이런 생각을 하는 것과 결심이라는 차원에 머무는 것으로 만족하는 경향성이 많은게 사실입니다. 가령 은혜로운 예배를 드린 것 자체로 만족하는 경우이며, 기도원에서 받은 충만한 은혜 자체로 만족하는 경우가 그것들이라 하겠습니다. 다행히도 김선생은 생각한대로 살지 못하는 안타까운 경우에 대해서 지금 묻고 있습니다. 아무리 다짐을 하고 최선을 다해 보아도 되돌아 보는 삶은 후회로 가득 채워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바로 여기에 육신을 가진 우리들의 한계점이 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고 싶지만, 동행하지 않은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의 어리석음이 여기에 있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모순되고 절망적인 우리입니까? 바울 사도를 예로 들면, 그 분 역시 우리가 느끼는 그런 갈등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로마서 7-8장에서 그런 모습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점은, 우리의 변화된 생활이나 행실에서 희망의 요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가진 믿음에서 희망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7:24-25a).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7-39). 이 구절들은 바울 사도의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이제 해답을 찾아 봅시다. 첫째, “이만하면 나는 괜챦게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나를 찾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둘째, “나는 어쩌면 이렇게 어리석고 바보같이 살아갈까? 그러나 주님 안에서 더 나아질 희망은 없을까?”고 말하고 있는 내가 되었는지를 찾아 볼 것. 셋째, “나는 순간 순간 주님께 나를 의탁할 때만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다.”고 자신을 격려하는 나를 만들어 갈 것.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께서 온전히 왕노릇하시지 못할까를 염려합니다. 신앙의 선진들이 기도시간을 많이 가졌던 까닭이나, 교회를 중심으로 열심히 말씀을 배우려고 했던 이유를 알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그런 노력만이라도 해야 위안이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처럼 남보다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서도 버림을 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죄인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아픈 마음이 행복한 마음이고, 죄인임을 고백할 때만이 의로워지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설교 준비에 들어가야 합니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샬롬.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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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67(2000.12.14, 목요일)
성경말씀 : 벧전 1:7-9.  
찬송 : 395장.
제목 : 불로 연단 된 믿음이 필요하다.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습니다. 영육간에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2. 오늘 묵상할 말씀은 표준 새번역이 훨씬 의미가 분명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연단을 받아서 순수하게 되면, 불로 연단하여도 마침내는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이 칭찬과 영광과 명예를 차지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연단을 받는 두 가지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금입니다. 믿음과 금이 공통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믿음도 금도 연단을 받아야만 이 제 값을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순도가 높은 금을 얻기 위해서 뜨거운 풀무를 통과해야 한다는데 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믿음 역시 그런 뜨거운 풀무를 거쳐가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외인 것처럼 생각할 분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나,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고 할 때, 그것은 어떤 특권을 가진 사람처럼 여겨질 수 있는데 말입니다. 불신의 바다에서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이나, 세상의 주인 되심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가상하기 짝이 없는 칭찬 들어 마땅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뜨거운 풀무 불에 연단까지 필요하느냐고 말입니다. 

3. 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로 믿을 때 구원받는다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대해서, 우리 기독교 안팎으로 오해가 많은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 기독교인들은 아무런 고생도, 노력도, 업적도, 공로도 없이 그저 믿는 마음 하나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하면 기독인 자신들도 믿음이란 육신적인 활동과는 무관한 마음의 한 상태 정도로 이해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식에 대해 갖는 기대와 믿음처럼 막연하지만 의지하는 마음 정도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필요할 때는 주여, 주여 하다가도, 어떤 때는 그 주님에 대해서 얼마나 무관심한지 모릅니다. 거기다가 그저 주일에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그 믿음이 살아있는 것처럼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은 그런 값싸고 무책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이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위해서 행하신 일들과 말씀들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일을 의미합니다. 가령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을 인도하라.” 모세는 불붙는 가시떨기 나무의 놀라운 장면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당시에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인 이집트의 바로와 맞서도록 명령하십니다. 자칭 신이라고 생각하는 권력자에게 한 젊은 살인자 모세가 나서서 겨룬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권능과 그 말씀의 신실함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태산같아 보이는 바로의 권위에 도전하게 됩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할 때만,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시며 도우시고 지키시는 것을 믿었습니다. 언뜻 보아서 이런 믿음은 사람들의 눈에는 상식을 벗어난 무모한 짓이며, 목숨을 내놓을 수도 있는 어리석은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아침저녁으로 바꿀 수 있는 변덕스런 인간의 마음 상태도 아니고, 한 순간에도 이리 저리 흔들릴 수 있는 감정은 더욱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라면 손해를 감수하고, 필요하다면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던질 수 있는, 우리 인간이 가진 가장 위대한 결단이며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우리는 다니엘이라는 소년을 기억합니다. 그의 친구 3명과 함께 불 속에 던져진 사람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과 땅의 왕의 명령에 따르는 것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택함으로, 불 속으로 던져졌습니다. 믿음은 불로 연단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믿음이 산을 옮기는 능력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은 사람의 결단이나 각오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들의 삶에 모셔들이는 가장 지혜로운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믿음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저는 이 히브리서 11장 1절을 실제로 삶에서 분명히 경험하였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공부만 10년을 했었다는 말씀을 기억하고 계신지요?  26살에 대학엘 들어갔으니까요. 그 동안 저는 오직 대학 이외에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수 차례의 시험을 차례로 낙방하였습니다. 그 당시 저의 신앙은 분명하였습니다. 바로 이 구절 때문이었지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 제 나름대로 이 말씀을 해석하기를 “믿음의 눈으로 나의 앞날의 내 모습을 바로 내 눈앞에 당겨다 놓고 사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청색 대학생 교복과 대학 모자를 쓰고 주일학생들 앞에서 가르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적극적인 사고방식(Positive thinking)에서 이미 잘 설명하고 있는 평범한 해석입니다만, 이런 믿음은 하나의 마음상태만은 아니라, 행동을 구체화하게 하는 힘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지금은 훨씬 더 신학적인 뒷받침이 생겼습니다. 우리게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래를 생생하게 내다볼수록 허락하고 계신다는 것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의 사람에게는 믿음이란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아니라, 이루어질 꿈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승리의 삶을 저 멀리 바라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승리의 삶의 끝자락에 서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5.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초라한 자기 자신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배후에 있는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의 팔에 붙잡혀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는 말을 사용할 때에는, “나는 세상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나의 후견인입니다.”는 뜻을 마음에 담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이 이 믿음을 가장 자랑스럽게 여겨야 하고, 이 믿음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고와 고통도 기쁨으로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잠깐동안의 묵상시간에 기독교 믿음을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가진 믿음이 어떤 것인지는 분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주일학교 교사 직분을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좋은 남편감을 허락하신다고 믿는다.” 이 말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기독교 믿음이 아니고, 일반 종교인들이 갖고 있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신앙인에게 있어서 이 말은 신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신념과 하나님의 의지나 뜻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좋은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의 계획이나 의지 꿈 등을 다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의 선하신 처분에만 맡기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기드온처럼 말입니다. 적과 싸우기 위해서 자원한 젊은이가 3만 명이었는데, 그 중에서 1만 명을 추리게 했고, 마침내 300명의 군사만으로 미디안의 12만 명과 싸우라고 하실 때, 믿음의 사람 기드온은 “예, 제가 그리하겠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6. 오늘도 믿음의 사람으로 연단 되시길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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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66(2000.12.13, 수요일)
성경말씀 : 벧전 1:3-6.  
찬송 : 300장.
제목 : 하나님을 찬송하라.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조용할 땐 말씀 읽고, 힘겨울 땐 기도하고, 즐거울 땐 찬송하라.” 어디서 들어본 말씀이지요? 우리 성도들의 삶은 어느 때든지 의미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순경이든 역경이든 그런 삶의 형편이나 조건들이, 우리가 가는 신앙의 길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들어 주는 보조자료가 될 뿐, 더 이상 다른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제는 한 학생이 찾아왔습니다. 최근 그의 신상에는 엄청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몸 안에서 암덩어리가 발견되었고, 수술을 하였습니다. 얼마 살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가지고, 마지막 공부가 될지도 모르는 학기를 보내겠다고 다짐하던 것이 지난 8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머리털이 성큼 성큼 빠지지도 않았고, 어제 검사에서는 지극히 좋은 상태라는 의사선생님의 진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전에도 상당히 차분한 성품이었는데, 수술 후에는 더욱 인생과 삶 그리고 하나님을 생각하는 그의 자세가 근본적인 면에서 많이 달라졌다고 했습니다. 삶의 길이보다는 삶의 내용과 질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고, 나의 소망에 대해서보다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소망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가진다고 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제가 가르치는 바울 신학에서 여러 가지 주제들을 주마가편 식으로 배울 수 밖이었습니다만, 특별히 그에게 도움이 되는 신앙적인 격려가 바울의 고백 속에서 담담하지만, 분명하게 각인될 수 있었다고 느껴집니다. 

3. 만일 우리들의 삶에 기쁨이나 즐거움이 없다고 한다면, 상대적인 비교를 할 때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가능한 일이지만, 어쩌면 우린 평생 찬송할 기회를 가지지 못할 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 즐거워하는 것입니까? 오래 잊고 있었던 친구가 불쑥 얼굴을 내밀 때, 기쁨이 생깁니다. 별로 잘 쓰지도 못한 글인데도 많은 격려와 용기 있는 찬사를 받을 때도 그렇고, 아무튼 즐거움이란 우리 자신을 만족시키거나 고무시키는 원인이 제공될 때라고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실험해 볼 수 있습니다. 매일 출근하는 직장 동료들과 이런 약속을 한번하고 실천해 보십시오. 매일 첫 번 째 대면하게 될 때, 서로가 상대방에 대해서 적절한 칭찬을 하도록 하는 일입니다. 가령 “이 선생님, 오늘 넥타이는 정말 센스가 있으시군요. 누가 고르신 겁니까?” 한더던지, “김 선생, 밝은 얼굴을 보니까 생기가 돕니다. 당신은 참 좋은 인상을 풍긴답니다.” 이런 저런 칭찬의 말은 찾아보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여러분의 마음은 잔잔한 기쁨으로 흔들릴 것이고, 어쩌면 전철에서 내내 괴로워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쉽게 풀릴 것 같은 그런 힘이 솟는 것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듯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런 기쁨의 원인 제공을 받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누구 하나 나를 만족시키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분명 낙심하고 말 것입니다. 

4. 베드로전서의 기자는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기쁨의 원인 제공이 원천이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나 밖으로부터 오는 어떤 외적인 자극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원인 제공자로 적극적으로 나서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분명 훈련이 필요합니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닙니다. 유대인의 얘기를 하나 꺼내겠습니다. 유대인 중에서도 지혜로운 사람은 무화과 광주리에 담긴 무화과들 중에서 항상 제일 좋은 것부터 집어들고 먹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말하기를, “나는 제일 좋은 무화과를 먹고 있다.”고 말을 합니다. 거기다가 그는 자신에게 칭찬을 할 수 있습니다. “너는 얼마나 행운아인지 알아야 돼, 지금 사람들은 보리밥도 먹기 힘든 시절을 보내는데, 후식으로 무화과까지 먹고 있지 않아!” 등 등 말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9남매의 형제자매들 가운데서 자라났습니다. 그런데 같은 피를 전해 받은 형제 자매들인데도, 생각하는 스타일이 얼마나 다른지 모릅니다. 항상 자신의 삶과 미래를 부모의 가난과 무성의 탓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래서 어두운 그림자가 깔려 있었지만, 또 다른 형제는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항상 신앙적인 낙관론으로 힘을 주신 부모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사람이 있더라는 말입니다. 꼭 같은 부모에 대해서 한 쪽은 원망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에 반해, 다른 쪽은 너무도 큰 감사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더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 두 가지 사람 가운데서, 어느 쪽이 즐거움과 기쁨으로 살아가리라 생각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향해서 많은 자료를 제공해 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힘든 시간이며 처지라고 하더라도, 감사할 많은 것들을 생각하는 사람이나, 자신에 대해서 잠재력과 가능성을 늘 일깨우는 긍정적인 사고의 사람은, 그런 처지에서도 기뻐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어릴 때 배웠던 노래가 생각납니다. “나는 기쁘다. 나는 기쁘다. 나는 기쁘다. 항상 기쁘다.” 어떻게 항상 기쁠 수 있습니까만, 그것이 가능한 일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가족들, 나를 격려하는 동지들, 그리고 나를 늘 붙들고 계시는 든든한 하나님의 손길을 잊어버리지 않고, 내 자신에게 그 사실을 끊임없이 제공하는 사람은 가능한 일입니다. 

5. 한 두 번 실패했다고 인생이 망하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절망할 일도 아닙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우유부단하던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전서의 기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으나,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시고, 살아 있는 소망을 갖게 하신 것과, 썩지 않을 천국의 기업을 잇게 해 주신 것을 기억나도록 하고 있습니다. 분명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읽을 때, 여러분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고 싶어하시는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즐겁고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십니다. 여러분의 입술이 주님을 찬양하는 입술로 변화되기를 기도합니다.
기도의 제목을 삼으십시오. 그리고 실천하십시오. “주여, 평화 주옵소서. 주여, 평화 주옵소서. 주여, 평화 주옵소서.” 오늘도 여러분을 지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을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진심으로 감사하십시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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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65(2000.12.12, 화요일)
성경말씀 : 벧전 1:1-2.  
찬송 : 504장.
제목 : 손해와 죽음이 예약된 길을 걸으며.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베드로전서는 흔히 ‘소망의 서신’이라고 부릅니다. 칠흑처럼 앞을 분간할 수 없는 그런 시련과 역경에서도 소망을 가지도록 권고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저녁 뉴스에 초코렡 16,000원어치를 훔치다가 붙잡힌 전직 국회의원 보좌관의 얘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그 분은 미국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엘리트로, 큰 꿈을 갖고 귀국하여 정치인의 보좌관으로 꿈이 영글어 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지난 총선에서 자신이 보좌하던 국회의원이 낙선하는 바람에, 실업자가 되었고 거의 노숙자에 가까운 생활을 하던 중 이런 절도까지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으면 …….” 이런 이야기는 안타까움을 넘어서, 화가 치밀어 오르게 합니다. 그분이 장학금을 받고 유학생활을 했던, 아니면 자비로 했던 7-8년 동안이나 외국에서 고생하며 겨우 얻어낸 학위를 채 꽃피우지 못하고 말게 되었다면, 한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큰 낭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박사 학위가 직업과 연결되는 좋은 수단이기 때문에 선호하는 경향이지만, 미국에서는 학위를 가지고도 실업자가 된 사람들이 적지 않은 듯 합니다. 아무튼 그 분이 선진국가에서 시행되는 정치원리를, 가장 낙후한 것이 정치계라는 오명을 안고 있는 우리 나라 정치 발전에 기여할 수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절도자가 되기 전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지,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3. 말못할 마음 아픈 사정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어쩌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사람들은 저마다가 겪는 절망감 앞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 듯 어리석은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부모나 가족들의 무관심에 대한 항변으로 가출을 한다던지, 빚에 쪼들리던 가장이 자살을 한다던지 하는, 이런 극단적인 행동에는 자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힘겨운 짙은 절망감이 깔려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 역시 이런 경우를 한 두 번쯤은 만났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베드로전서는 이와 같은 보편적인 시련과 역경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베드로전서의 저자가 말하는 절망 얘기는, 어찌 보면 ‘사서 고생하듯’ 고생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예수쟁이가 되지 않는다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고생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목숨을 잃을 위험한 선택이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로마 교외 카타콤베에 가면 대리석으로된 한 여인의 모로 누운 조각상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한 때 그녀는 황제와 귀족들 앞에서 사랑을 받던 유명 가수 세실리아입니다. 그녀는 불행하게도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고나서 그녀는 새로운 삶에 눈을 떴습니다. 화려한 옷과 기름진 음식과 즐거운 노래와 춤 그리고 웃음이 가장 멋진 인생의 길처럼 알고 살아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나서는 그런 일들이 너무도 부질없고 어리석은 일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는데, 바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그 다음은 정해진 수순이었습니다. 로마 군병에게 붙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너무도 당연한 과정이었습니다. 화가 치밀었던 황제는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녀의 미모와 재능을 안타까워하며 살리려고 힘썼습니다. 그녀의 입에서 “예수를 믿지 않겠다.”는 한 마디 말로 용서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그 한마디 말을 하지 않았고, 마침내 목이 잘려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배가 고파서도 아니고, 자칫 실수로 생긴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신의 분명한 의지로 죽음의 길을 선택했던 사람들에게 생길 수 밖에 없던 이야기였습니다. 어처구니없게도 “예수를 믿습니다.”는 단 한가지 이유로 말입니다. 

4. 우리는 참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목숨이 위태롭지 않다는 얘기일 뿐, 어쩌면 지금이 신앙적인 차원에서는 훨씬 더 위태로운 시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영 분별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라는 식으로 편리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내놓을 수도 있다든지, 손해를 좀 보자든지, 땀 조금 흘려보자고 해도 시큰둥 하는 그런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의 배경이었던 시절에는, 신앙한다는 것은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체 내맡기는 것이었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항상 위태로운 선택이었습니다. 제가 시내에 나갈 때면 가끔 들리는 반계탕집이 있습니다. 값도 싸고 맛도 일품인 정통 삼계탕 집인데, 오늘 점심도 많이 걸어서 그곳에 들렸습니다. 제 옆자리에는 성경 얘기를 주로 하는 장로님 같아 보이는 두 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소주를 맥주 컵으로 마시고 있었습니다. 주량이 얼만지는 몰라도 70이 넘어 보이는 분들인데 걱정도 되고, 기독교인이 저래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목숨을 걸어야 했던 시절이, 훨씬 더 축복이 아니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비록 육신은 멀쩡하게 살아 남아 있지만, 마음과 정신은 이미 다 병들어 있다면 정말 소망이 없는 것 아니겠는가 해서 말입니다. 

5. 베드로전서의 기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기 위해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그들이 보장받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밖에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비록 고난의 길을 걸어 갈 수 밖에 없지만, 반드시 주님께서 함께 동행하실 것이라고 격려합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주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불 속에서도, 물 속에서도 주님은 언제나 그들 곁에 계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엄청난 출세의 약속을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모든 일이 만사 형통하리라는 보장 때문도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는 것은 손해볼 것이 예약되어 있고, 우리가 귀하고 중요하게 여기던 것들 가운데 상당수를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것은, 영원한 하나님 아버지 나라의 삶을 위한 것이기에 축복이 됩니다. 이것 하나를 소망하면서 우리는 이 고난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도들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개념이 엷어져 있는 것이 확연합니다.  오히려 현실적 축복, 눈앞의 이해관계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무엇인가 빗나간 신앙처럼 생각됩니다. 

6. 오늘도 주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동행하시기를 기도합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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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64(2000.12.11, 월요일)
성경말씀 : 빌 4:21-23.    
찬송 : 491장.
제목 : 기쁨과 희망을 주는 말.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아침 국민일보에는 우리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는 기사로 가득 차 있었고, 기자회견장에는 영부인 이희호여사와 나란히 앉아 있는 스탈셑박사의 사진이 실려있었습니다. 2년전 우리 교회에 와서 아침 예배를 드리고, 예배후 교인들에게 인사말을 했으며, 당회실에서 한참동안 앉아 얘기를 나눴던 노벨 평화상 심사위원 중의 한 분이라던, 스탈셑박사님을 다시 보게 되니 어찌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에서 예배드린 이튿날 청와대 오찬에 초청 받았다는 얘기는 그 뒤에 들었습니다. 노르웨이 루터교회의 감독으로 오슬로 대학 총장을 역임하였고, 한 정당의 총재로도 일한바가 있는 거물급 인사라고 소개받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말입니다.

2.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 사이에 따뜻한 인사를 나누도록 권고하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관계는 얼마나 오랫동안 알고 있었느냐 하는 것도 영향을 끼칠 수 있지만, 얼마나 질적으로 깊은 교제가 있느냐에 따라서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매일 얼굴을 바라보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담긴 한 마디 말도 나누지 않는 관계보다는, 비록 한 달에 한번밖에 만나지 못하지만, 진심에서 나누는 말상대라고 한다면, 어떤 관계가 더 소중한지를 알 수있을 것입니다. 우리 기독인들은 비교적 적극적인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삶에 대한 분명한 자세가 정리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대인관계에 있어서 기독인은 서로에게서 남다른 친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제가 미국 미네소타 주의 북쪽 도시인 힝클리라는 작은 마을을 찾은 일이 있습니다. 눈이 많이 내려서 인상적이었는데, 주일 아침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한 할머니가 제게 다가 오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오신다는 말씀을 목사님에게 들었습니다. 나의 오빠가 한국 전쟁에 참전 사망했답니다. 오빠의 죽음이 헛되지 않아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이것은 당신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 그 할머니가 내민 선물은 십자가인데, 구멍난 십자가 비닐 판에 털실로 엮은 것으로 흰 단추를 중간 중간에 매달아 놓은 초라한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그 선물은 지금도 주방 벽에 매달려 있습니다. 사실 저는 처음 만나는 낯선 얼굴들을 많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그 분들에게서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처음 보는 낯선 이방인을 오랜 지기(知己)처럼 받아줄 수 있는 기적 같은 일은, 아마도 기독인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3. 말은 마음속을 열어 보이는 가장 손쉽고 귀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도 있지만, 마음속에 담긴 생각을 말로 들어내기만 하면, 우리들 사람 사이는 훨씬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말을 할 때 신중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말은 바로 사용할 때와 잘못 사용할 때에 큰 차이가 생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상대방에게 주는 상처가 너무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부주의한 말, 사려 깊지 않은 충동적인 말이 그런 결과를 빚곤 합니다. 가령, 여러분들이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서, “당신을 만난 것은 내 생애에서 가장 큰 행운이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합시다. 아마도 삶의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나의 가장 큰 실수는 당신을 알게 된 일이다.”고 할 때, 아마도 더 이상 살고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희망과 기쁨을 주는 말보다는, 가슴을 후벼 파내는 비수를 꽂는 말을 잘 사용합니다. 그리곤 후회합니다. 깊은 생각 없이 하는 말은 이런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야고보서는 말의 실수가 없는 사람을 온전한 사람이라고 칭찬하고 있습니다(약3:2). 특히 성도간에서는 더욱 그래야 합니다. 

4. 오늘도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에게 줄 따뜻하고 사랑스런 말 한 마디를 준비하십시오. “당신은 섬세한 성품을 가지셨습니다. 마음속에 떠오르는 얘기를 글로 써 보세요.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것 같은데요.” 이 한 마디 말이 어쩌면 한 시인을 탄생시킬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시인들이 그렇게 해서 탄생하곤 한답니다. 잊을 수 없는 선생님을 추억하는 한 연예인은, “너는 감성이 풍부해서 연극배우가 되면 좋을 것 같구나.”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자신의 평생 진로를 결정하게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 말이 희망이 되고, 기쁨이 됩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인사나 얘기가 우리 성도들 사이에서 나눠지기를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름다운 삶에 초대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힘들어 보이고, 어려워 보이는 삶도, 사실은 당신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짊어질 때는, 얼마나 즐겁고 보람있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는지를, 꼭 발견하실 수 있을 겝니다. 오늘도 주안에서 힘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주님께 맡기고 일의 순서를 따라서 감사함으로 시작해 보세요.  주님께서 능력의 오른 팔로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샬롬.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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