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51(2000.11.28, 화요일)
성경말씀 : 빌 2:5-11.     
찬송 : 507장.
제목 :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서.

1. 오늘도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길 기도 드립니다.

2.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품어야 정상이지, 어떻게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는지, 그것부터 부담스럽게 들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이런 생각 때문에 자주 걸려 넘어지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근본적으로 우리들에게 특별하게 생각하는 틀을 갖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치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따지거나, 방법상 가능한지 여부를 생각하는데 마음 쓸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과학적 혹은 논리적 방식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면에서는 가장 인간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사람은 이런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읽어서는 크게 도움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은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문제의 근원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관심을 가진 사람은 그 본질과 근원을 묻는 관심으로 성경말씀에 접근해야 합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 그 까닭은 무엇일까? 하고 말입니다. 

3.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할 까닭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바울은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한 권리를 포기하고 오히려 종의 모습으로 화육(化肉-사람의 몸을 입으심)하실 뿐 아니라, 하늘 높은 곳에서 세상 가장 낮은 자리에까지 내려가시고(섬기러 오심),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은, 예수님의 마음이 특별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이 세상을 살리는 출발점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위대한 구원의 진리가 바로 예수님의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중심 의도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마음, 그 마음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절실하다고 말입니다. 비록 예수님처럼 세상을 구하는 큰 일을 해낼 수는 없을지라도, 그런 마음이 작은 불씨가 되고, 생명의 씨앗이 될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조금씩 아름다워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4.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분들을 얘기하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모릅니다. 오는 주일에는 우리 교단이 정한 자원봉사자의 주일로 지키게 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이웃을 섬기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분들을 찾아내어 격려할 뿐 아니라, 무심하거나 잠들어 있는 사람들의 선한 마음을 흔들어 깨우기 위해서 작은 칭찬을 하려고 합니다. 이미 자원봉사상 내규를 만들어 금년에는 [자원봉사자 은상 수상 기념패]를 만들어서 드리려고 합니다. 금년에 수상자는 3분으로, 지난 7년동안 매 주일 제단의 꽃꽂이 봉사를 실천해 오신 김효은집사님과 조미숙집사님, 무의탁 노인들중 자신의 힘으로 움직일 수 없는 중증환자들을 위한 목욕봉사에 5년간 50회 참여하신 문경원권사님이십니다. 저는 이런 분들이 우리 교회 안에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기쁜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물론 기독교인으로써 선한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만, 5년 혹은 7년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그 선한 관심을 실천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분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아름다운 마음을 몸으로 실천하심으로 우리들에게 큰 격려와 소망을 보여 주셨습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분들을 찾아서 상을 주려고 합니다. 또 감사한 것은 용돈이 궁한 형편인데도 이런 값진 일에 써달라고 이성준 장로님께서 돈을 맡겨 주셨습니다. 액수보다는 그 마음이 또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들도 진심에서 축하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예수님의 마음을 여러분의 형편에 맞게 여러분이 있는 자리에서 실천하실 수 있습니다.

5. 예수님의 마음은 우리 모든 기독자들이 품고 살아야 할 마음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한 순간의 감정에 좌우되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한결같은 마음을 품고 살기 위해서는 좋은 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유혹과 어려움을 이겨내는 훈련이 몸에 길들여져야 합니다. 저는 가끔 목회를 지망하는 학생들에게 몇 가지 부탁을 하곤 합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에는 좋은 훈련을 길들이게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 한 예로 새벽기도회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시절에 어머니를 따라서 새벽 기도회에 참석하곤 했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이 좋아서도 아니고, 새벽 공기가 시원해서도 아닙니다. 어머니가 부르시면 대답했고, 교회 가자는 말씀에 거절하지 않았던 것뿐입니다. 저의 어머님은 저를 목사로 만들기로 서원하셨고, 그 목사의 길을 걸어갈 저를 위해서 훈련시키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새벽 기도회 시간에 일어나는 일이 그리 힘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새벽 시간에 하나님의 큰사랑을 많이 체험하고 있습니다. 저는 선한 일도 이런 훈련을 요구하고 있다고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 두 번 선한 일을 하는 것으로 기독자가 아닙니다. 까닭은 여러분은 예수님의 마음을 항상 지니고 살아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그 마음이 지시하는 대로 사는 것이 복된 삶이 아니겠습니까? 

6. 오늘도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당신이 품으셨던 마음을 가지기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오늘부터 예수님의 마음(겸손한 종의 마음)으로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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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50(2000.11.27, 월요일)
성경말씀 : 빌 2:1-4.      
찬송 : 522장.
제목 : 성도의 관계.

1. 오늘도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길 기도 드립니다.

2.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성도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특별한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성도(聖徒)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일컫는 말인데, 그 의미는 ‘구별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일반적인 세상들과 구별된 사람들이 우리들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중국 사람들은 서로 도와서 함께 잘 살려고 한다고 하지요? 그런 얘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을 해보지 못했습니다만, 사실이라면 참으로 부러운 얘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관계도 이런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3. 사람은 관계를 맺고 살수밖에 없는 사회적인 존재임에 분명합니다. 그런 면에서 성도들 역시 어떤 모양이든 관계를 정립해야 할 사이입니다. 바울 사도는 두 모습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성도들이 보여 주어야 할 모습입니다.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은 어리석은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 특징은 다투는 관계이거나 허세를 부리는 관계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들은 쉽게 떠올 수 있을 것입니다. 항상 싸우는 사람처럼 목에 핏대를 올리거나 비아냥거리기를 잘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확실히 마음이 꼬여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거기다가 기회만 있으면 허세를 부립니다. 너무도 그 처지와 형편을 잘 알고 있는 대도 불구하고 속일 사람이 따로 있지, 격에 어울리지 않는 거짓말과 허풍을 떨어댑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경우를 피해망상증이거나 불안공포증의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혹시 손해를 보지 않을까? 혹은 자존심이 상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심리가 자신도 모르게 공격적이 되거나 허세 쪽으로 급선회한 경우입니다. 이런 관계에서는 그 우정이나 신뢰가 오래 지속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사람에게 기만당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극도로 불쾌감을 가지게 되며, 이런 경우를 당할 때 더 이상 속마음을 내주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방어하려는 의식이 생긴다고 합니다. 

4. 그런데 또 다른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자기 보다 낫게(질이나 수준이 높다고 매김) 여기는 성도들의 모습이 그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일을 충실히 하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일까지도 관심 있게 돌보아 주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겸손한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도 큰 행운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사람 곁에서는 사는 즐거움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칭찬하고 격려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남을 기쁘게 하는 언행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로 인해서 삶에 대한 전혀 새로운 용기와 희망이 솟아나게 됩니다. 갑자기 우리 자신이 무명에서 유명으로 바뀐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성도들이 보여주어야 할 참된 모습이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4년전의 기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제가 한 학기 연구여행을 떠난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가르치는 예배학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는데, 거기엔 훌륭한 교수님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Dr. Carl Volz교수님은 우리 교회에서도 설교를 하신 일이 있는 분으로, 그 대학에서는 제가 알고 있는 유일한 분이기도 하였습니다. 하루는 저에게 교수회의에 와서 인사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40여분의 교수들이 모인 정례회의였는데, 저를 소개하는데 정말 몸둘 바를 모를 만큼 저를 칭찬하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제가 준비했던 인사말도 미국 교회와 신학에 대해서 배우려고 왔다는 겸손한 내용이었기에 어느 정도 궁합이 맞는 대답이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지금까지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는 추억입니다. 제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미국 학자들은 상당히 교만하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분은 그런 저의 인식을 송두리체 깨트리고도 남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은 말씀으로만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으로 저를 높여주셨고 도와 주셨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말았습니다. 

5. 성도로써 우리는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지를 살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서로 겸손하게 서로를 높여 주고, 서로에게 자신의 본분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짐이 되는 것은 서로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안겨주는지 모릅니다. 그런 다음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는 그런 모습을 우리 자신에게서 찾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도들인 우리에게 주님은 그런 모습을 기대하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6. 오늘은 서영우집사님을 위로하는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어제 밤 서집사님의 모친께서 소천하셨습니다. 아마도 내일 출상하게 될 것 같습니다. 고인은 천주교회를 출석하셨다고 합니다. 교회에서는 오전에 연락을 취하고 오후 1시에 문상하기 위해 출발하려고 합니다. 동참하실 분들은 저에게 연락을 주시면 동행하실 수 있겠습니다. 다시 한번 나그네인 우리 인생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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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49(2000.11.26, 주 일)
성경말씀 : 계 1:4-8.      
찬송 : 438장.
제목 : 새로운 시작을 위한 마지막 시간입니다.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오늘은 [왕이신 그리스도의 날 주일]입니다. 교회력으로 마지막 주일입니다. 신앙적으로 한 해를 마감하는 주일입니다. 시간을 셈하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지혜로운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어제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오늘인데도 ‘마지막 날’이라는 시간의 의미가 붙게될 때, 전혀 특별한 날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마지막’은 우리들에게 뒤를 돌아보게 만들고, 많은 깨우침을 줍니다. ‘좀 더 잘 할 수 있었고, 좀 더 잘 살수 있었는데’하는 마음을 들게 하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간의 의미를 진지하게 묵상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2. 오늘 본문은 [왕이신 그리스도의 날 주일]의 사도서간문 말씀입니다. 다니엘서 7:13-14과도 비슷한 내용의 말씀인데, 하나님은 시간의 처음이시며 끝이 되신다는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시며 동시에 심판자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이해 혹은 선언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들 인간은 저마다 시간의 시작과 끝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문제를 안고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사는 것인지를, 어떻게 살아야 바른지를 알지 못한 채 시간의 한 복판에 서 있다는 말입니다. 삶의 시작을 모르기 때문에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세우지 못했던 것입니다. 방향을 모르기에 얼마나 방황하는 헛수고를 했는지 모르며, 뜻을 똑바로 세우지 못했기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역시 그런 연장선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3. 하나님은 알파(헬라어 첫글자)이시며 오메가(헬라어 마지막 글자)이십니다. 시작이 되시는 하나님을 생각해 봅시다. 알파이신 하나님은 우리들 삶의 근거가 되십니다. 우리 인생들이 엮어 가는 삶의 실타래를 푸는 첫 순간에 계셨던 유일한 분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모태에 있을 때 계셨고(시71:6),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삼상16:7) 분이십니다. 놀랍게도 우리 자신을 가장 잘 알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인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솔직하고 지혜롭다면, 우리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상의할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당신만이 저를 아시나이다. 저의 앉고 일어섬, 마음의 방향, 그리고 언제든지 튀어나올지 모르는 비굴함과 연약함까지 주님은 너무도 잘 알고 계시나이다. 당신만이 이런 저를 도우실 수 있나이다.”고 말입니다.

4. 오메가이신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마침이 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우리는 뜻을 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엮어 가는 삶의 모양새를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할 것인지를 말입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먹고 입고 사는 것”이 삶의 전부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마6:31-33) 위해서 살 의무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기를 쓰고 발버둥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되고 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가 불안과 두려움의 불확실함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로 진행될 희망찬 것이라는 믿음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5. 알파요 오메가이신 하나님 앞에서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서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느 편에 더 가까운지 확인해 보십시다. 한 사람은 여전히 자신의 뜻과 생각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는 한 시도 쉬지 않고 “주십시오.” “이렇게 저렇게 되어야 합니다. 믿습니다.”를 연발합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아버지의 선하신 뜻대로 하십시오.” “저는 아버지께 맡기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분명 한 사람은 하나님을 피곤케 할 뿐 아니라, 제 멋대로 인생을 살수 있는 양 야단법석을 떨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좁은 생각을 다 내놓고 하나님 아버지의 넓고 깊은 뜻에 의탁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모습은 누구와 닮아 보입니까?

6.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십니까? 이제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에게 부탁하신 말씀을 받아들일 시간입니다.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마28:20)는 약속은 지금도 그리고 영원토록 유효합니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는 명령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오늘은 여러분에게 의미 있는 반성과 출발의 시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항상 여러분과 함께 계시길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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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48(2000.11.25, 토요일)
성경말씀 : 빌 1:25-30.    
찬송 : 520장.
제목 : 기대된 삶.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2. “황당하다”는 표현은 전혀 기대 밖의 일이 발생하고 있다는 그리 반가운 얘기가 아닌 경우에 사용하는 말입니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가까운 이웃에게서 이런 황당한 경우를 맛보게 될 때, 어째 이런 일이? 라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게 됩니다. 40년을 한 직장 한 교단에서 생활하던 분이, 이해관계에 얽혀서 갑작스럽게 황당한 경우를 만들고 떠나간 일이 있었습니다. 전혀 기대 밖의 사건을 만들어 버린 셈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에서 황당한 일들이 자주 벌어질 때, 우리는 분명 불안정한 삶의 한 복판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처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고 있다던 지, 기대된 짐을 짊어지고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보다 더 든든하고 도타운 삶은 없다고 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지금 황당한 일들을 자주 만나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아니면 기대된 삶을 사는 이웃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새삼스럽게 생각해 보게 하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3. 본문은 바울 사도가 빌립보 교인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다는 점을 솔직하게 말하면서 자신의 속마음을 열어 보이는 내용입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인하여 협력하는 것과,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vv.27-28a) 복음의 합당한 삶을 기대하는데, 두 가지 분명한 구체적인 내용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는,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적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의 신앙이란 거짓 신앙이 아니라, 살아있는 신앙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기독교 신앙은 항상 도전을 받아왔고 공격을 받아왔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점을 항상 염두에 두고서 신앙지도를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율법적 신앙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행동”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회만 있으면 “인간 중심, 혹은 인간의 능력과 의지에 전적으로 매달리는 사상”이 “하나님 중심, 하나님의 주도권에 모든 것을 위탁하는 신앙”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복음적이라는 말과 율법적이라는 말을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복음적이라는 말은 성경에 근거를 둔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만물의 창조주로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모든 일을 하셨고 지금도 일하고 계시다고 믿는 일입니다. 그러나 율법적이라는 말은 사람의 지식과 힘에 근거를 둔 신앙으로, 사람이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무엇인가 일해야 하고 일할 수 있다고 믿는 일을 말합니다. 복음적인 신앙에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일하실 수 있다는 것에 반해서, 율법적 신앙은 인간도 크든 작든 자신과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반드시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보다는 후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기독교 신앙을 흔들리게 만드는 문제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우리가 살 수 있지만, 그래도 우리들 역시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이 있고, 반드시 우리 자신의 몫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는 생각하는데, 바로 이것을 율법적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복음적 신앙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을 고백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로마서 5:8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중심의 구원역사를 약화시키는 그 어떤 사상이나 가르침을 통칭해서 율법적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율법적인 신앙은 기독교 정통 신앙을 가장 위협하는 거짓 가르침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이 이런 복음적 신앙을 위해서 한 마음으로 협력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신앙을 위협하는 대적자들에게 대항해서 싸울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4. 우리가 가진 신앙은 단순히 정신활동만이 아님을 29-30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난도 받”기를 기대하고 있으며, 필요하다면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다고 구체적인 행동하는 신앙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이런 위대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후견인이 되셔서 도우시기 때문입니다(대상22:13).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붙드십시오. 우리 인간은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이지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역할이 귀하면 귀할수록 주인 되시는 하나님은 뜻과 계획은 더욱 소중함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시길 기도 드립니다.  샬롬. 샬롬,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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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47(2000.11.24, 금요일)
성경말씀 : 빌 1:19-24.    
찬송 : 508장.
제목 : 기독교인의 사생관(死生觀).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길 기도 드립니다. 어제 저는 참 귀한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윤정숙권사님이신데 올해 93살이 되십니다. 허리가 아프다고 호소하셨지만, 그래도 거동이 양호한 분들이 거하시는 6호실에 계신다고 자신을 소개하시는 분이었습니다. 1929년에 세브란스 대학 간호학과를 졸업, 평생 간호사로 환자들을 돌보는 삶을 사신 분입니다. 3년전까지만 해도 연세대학에서 초청, 후배들과의 만남을 가졌지만 아흔이 넘으면서부터는 소식이 끊겼다고 섭섭해 하셨습니다. 30여년전에 남편을 사별하고, 하나 뿐이던 아들도 전쟁 중에 이별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친구요 안식처였다고 했습니다. 살아가는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또렷이 대답하셨습니다.  

2. 삶에 대해서 질문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꺼리는 경향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생각하는 것보다 더 적극적인 삶의 자세는 없”는 지 모릅니다. 사는 것은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며, 동시에 죽음에 대한 생각은 삶을 충실하게 채워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죽는 것과 사는 것에 대한 분명한 이해, 지금 우리들에게 이것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는 일이며,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고백합니다. 삶과 죽음에 대해서 이처럼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부럽고 멋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3. 여러분은 어떤 사생관을 가지고 계십니까? 혹시 누군가에게 자신의 사생관에 대해서 얘기를 나눠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자신의 죽음에 대한 얘기를, 혹은 글을 남겨본 적이 있으십니까? 이번에 적극적으로 이 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요? 물론 어두운 느낌이 잠깐 스쳐지나가게 될 것이나, 결코 부정적인 얘기로 끝나지 않음을 곧 아실 것입니다. 오히려 훨씬 더 긍정적이고 건강한 삶을 만들어 가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람은 죽음을 앞둘 때 가장 순수해지고 가장 아름다워진다고 합니다. 비록 언제일지 알 수 없는 장래 일이긴 하지만, 미리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실존에 대해서 진지하게 살필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만들어 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사생관을 가짐으로 해서, 그의 삶이 훨씬 더 간결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심 목표가 세워진 삶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며, 우선 순위가 명확한 생활이 될 수 있었다고 보여 집니다. 우리들 역시 사생관이 필요합니다. 잘 살기 위해서며, 동시에 잘 죽기 위해서입니다. 

4. 우리는 눈앞에 있는 일들에 너무 많은 노력과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것들이 소홀히 할 수 없는 것들일 것입니다만, 그래도 좀 더 멀리 내다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훨씬 마음이 여유로워질 것입니다. 매일 100미터 달리기를 할 수도, 해서도 안되지 않겠습니까?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열심히 살긴 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너무 눈앞의 일에 골몰하거나 숨가쁘게 몰아쳐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루하루가 모아져서 만들어 가게될 삶(인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매일의 삶이 엮어질 우리의 인생이 어떤 것이 될 것인가에 더 깊은 관심과 애정을 쏟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느 부잣집에 가정교사로 입주해서 1년을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말이 가정교사이지, 그 집안의 크고 작은 허드렛일도 도와야 했습니다. 만일 그 때 저의 인생의 어떤 형태를 분명히 내다보지 못하고, 그저 하루하루만 열심히 산다고 했다면 숨이 막혀서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살아야 할 삶과는 너무 동떨어진 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생관이란 자신의 삶을 하나의 완성된 그림이나 조각처럼 머리 속에 만들어 두고서, 그것을 향해서 기운차게 살아가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는 바울이 아니기에 바울과 같은 사생관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사생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윤정숙 권사님은 하나님과 함께 살 영원한 삶을 바라보면서, 매일 감사와 사랑으로 살고 계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오늘 아침엔 너무 무거운 주제가 될지 모릅니다만, 우리에게 꼭 필요한 묵상자료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오늘도 여러분과 함께 계시길 기도 드립니다. 승리하십시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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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46(2000.11.23, 목요일)
성경말씀 : 빌 1:12-18.    
찬송 : 444장.
제목 : 긍정적인 삶의 해석.           

1.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2. 우리가 짊어진 삶은 생각보다 더 고단하고 힘겹다는 생각을 하실 때가 더러 있을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런 생각은 더 진하게 다가옵니다. 어느 어머니처럼 “왜 내게 이런 일이?” 하다가도 “내가 하나님을 너무도 멀리 떠나 있었어요.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고난임을 깨닫습니다.”는 고백에서는, 까닭 모를 시련이란 없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하지만, 기껏 의로운 일에 많은 희생의 값을 치른 일인데도 앞이 캄캄해 질 때는 정말이지 모든 것을 다 팽개쳐 버리고 싶은 마음까지도 들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심정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 사도의 마음일지 모르겠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바울의 자리는 너무 커서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까지도 조심스러웠을텐데, 이게 웬 날벼락입니까? 감옥에 갇혀버렸으니 말입니다. 실정법을 어긴 것이건, 미풍 양속을 헤쳤건, 아니면 남의 이해관계에 손해를 끼쳤건 간에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는 것은 부덕한 일임에는 틀림없다고 하겠습니다. 옥에 갇힌 바울 사도, 무슨 할 말이 남아 있겠습니까?

3. 어제 목표(Goal)이란 특별한 홈페이지를 방문했습니다. 거기에서 한 위대한 미국 시민,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한국계 미국 시민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미국 상원의원이 된 Phall H. Shin이란 분이었습니다. 그 분은 미국에 입양되어 좋은 양부모님 밑에서 자랐고, 미국의 유수한 대학에서 오랫동안 교수로 일하다가 마침내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미국에 보은하기 위해서 정치가로써 섬길 각오를 가지고 정치에 입문한 분이었습니다. 그의 미국 생활은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그를 가장 힘들게 하였던 것은 차별이었습니다. 이미 자신의 얼굴에 동양인이라는 것, 그리고 한국 출신이라는 것이 쓰여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인 전용 식당에서 쫓겨나는가 하면, 일본에서는 독일산 셰퍼드를 풀어 허벅다리를 물리게 된 설움도 맛봐야 했습니다. 그 때마다 그는 “나는 누구인가?” 하는 자기 정체성에 대해서 묻곤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일게 아니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자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어려운 결심이며, 상식을 뛰어넘는 역설입니까?  그러나 바로 문제를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대처하는 자세야말로 오늘 우리들이 배우고 익혀야 할 삶의 자세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점을 바울 사도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4. “나의 당한 일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오히려 어떤 기독교인들은 바울 사도가 감옥에 잡혀 들어가기가 무섭게 “겁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무슨 방도로 하든지 ……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바울 사도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는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구주가 되십니다. 당신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당신은 이 예수님 안에서 참 평안과 소망이 있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당신은 믿어야 합니다.” 이런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밥을 먹는 것이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일생을 살았던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가 감옥 안에 있던, 감옥밖에 있던 그의 삶의 내용은 하나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자신의 삶의 현실은 명백하게 해석할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참으로 성공한 전도자입니다. 그가 얻은 결실의 크기와는 아무 관계없이 그런 삶의 해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5. 여러분도 자신의 삶을 해석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어진 그대로 마음에 들면 드는 대로 안 들면 안드는대로,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실 수 있습니까? 어떤 경우이건 저는 여러분에게 바울 사도의 삶의 해석, 긍정적인 해석, 을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실상에 대해서 마음에 들건 들지 않건, 확고한 목표에 따라서 긍정적인 해석을 내려보시라고 말입니다. “나는 지금 힘들지만, 하나님은 이 어두운 통로를 통해서 더 밝은 세상을 보여주려고 하신다.” 어떻습니까? 왠지 희망이 생기지 않습니까?  긍정적인 해석은 조금은 아니 못내 아쉬움을 담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계속 그런 해석을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보다 훨씬 더 밝아진 마음과 몸으로 활발하게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6. 주님께서 오늘도 여러분과 함께 계시길 기도 드립니다. 오늘은 용미리 무의탁 노인들에게 목욕 봉사하는 날입니다. 추수감사절이기도 해서,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을 그 분들과 나누려고 합니다. 노인들이 좋아하실 사탕 120봉지와(장은하집사님이 손수 포장한), 귤 3상자와 사과 3상자를 준비했습니다. 여러분도 기도하시는 가운데 따뜻한 마음으로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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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45(2000.11.22, 수요일)
성경말씀 : 빌 1:3-11.     
찬송 : 412장.
제목 : 아름다운 기도.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길 기도 드립니다. 

2. 오늘 주시는 말씀은 중보적인 기도에 대해 귀감이 되는 내용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봉사는 없다.”는 말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중보의 기도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일 때, 그 기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이며 축복이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여러 차례 자신의 마음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생각할 때마다”, “간구할 때마다”,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증인이시라.” 짧은 구절 안에서 이처럼 바울은 그들을 생각하는 자신의 속마음을 주저 없이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중보의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새롭게 배우게 될 뿐 아니라, 이렇게 기도할 대상을 가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 사람일까를 생각합니다. 기도의 대상이 되는 것도, 기도의 대상을 가진 것도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하는” 그런 대상이 내게 있을까를 확인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2. 이 아름다운 기도에는 분명 눈물겨운 배경이 있었던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 사도가 유럽에 개척한 첫 번째 교회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럽고 감사한 것은 바울 사도가 헬라 문화권에서 자라났다는 것과, 당시 로마 제국은 헬라 문명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말이나 생활 습관에서 크게 어려움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하나님께서 디아스포라(흩어진 유대인)들을 통해서 곳곳에 유대인의 회당(會堂)을 지어 놓았기에 이곳을 선교의 장(場)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6:11-40에 단편적이나마 빌립보 선교기록(宣敎記錄)을 엿볼 수 있습니다. 미친 여자를 만나 그 처지가 너무 마음 아파서 고쳐준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미친 여자를 점쟁이로 부려먹고 있었던 부자가 관리에게 고소해서 뭇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선을 행하다” 당하는 고난을 하나님께 감사와 찬미로 돌렸을 때, 옥문이 열리고 옥을 지키던 간수가 감동되어 그 가족이 다 세례를 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튿날 옥에서 무혐의로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전도하다가 이런 봉변을 당하였다고 한다면 어떤 심정이겠습니까? 이 후에 빌립보 교회는 여러 가지로 어려움 속에서도 착실하게 성장하게 되었고, 바울 사도의 든든한 후견자로 뒤를 받쳐주기까지 하였습니다. 필요할 때마다 제 몫을 다한 교회였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울 사도가 옥에 갇혀 있을 때, 에바브라디도를 병간인으로 보내서 지극한 정성으로 돌보아 드린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랑스러운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3. 바울은 결코 감상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중보기도는 세 가지 목표를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이 지식과 총명으로 풍성”해 질 것입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사랑이 풍성해져야 하겠는데,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라 지식과 총명이 있는 사랑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허물없이 끝까지 살아가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분별치 못하게 될 경우가 생기지 않도록, 거짓과 진실이 구별되는 분명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까닭은 그들의 삶에서 많은 의의 열매가 맺혔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의의 열매란, 사람에 의해서 맺으려고 하는 율법적인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맺게 되는 성령의 열매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서 너무 단순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반성하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의 영적으로 풍성한 삶을 위해서 목표를 세우고서 기도할 필요를 깨닫게 됩니다.

4. 어제는 존 메퀘리의 [영성의 길]이란 책을 다시 읽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언젠가 영성에 관한 얘기를 나눌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말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여러분의 삶속에 함께 계심을 믿고,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5. 최근 <중보기도>라는 용어가 보편화되어 있습니다만, 오해하기 쉬운 용어입니다. <중보>란 기독교 차원에서는 하나님과 사람들 중간에 서 있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중보자가 되십니다. 성인 숭배나 마리아 숭배가 거부되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중보자의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보라는 표현보다는 중보적이라는 말이 훨씬 더 적합하겠습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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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44(2000.11.21, 화요일)
성경말씀 : 빌 1:1-2.      
찬송 : 405장.
제목 : 기독교인의 존재 양식(存在 樣式).

1. 찬미 예수!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이 두 구절은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진 기독교회의 인사말이며 유산입니다. 예수님을 찬양하는 것은 우리가 받은 사랑에 대한 작은 응답이며,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간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인사는 없지 않습니까? 그 동안 보내 드렸던 묵상 자료에 대해서 몇 분이 의견을 보내 왔습니다. 물론 저를 격려하는 내용들이었지만, 그래서 저도 처음부터 빨리 훑어보니까, 내용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길이가 자꾸 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묵상을 도와 드리는 것이 아니라 방해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경을 써서 줄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 “한 달에 한 번씩은 빌립보서를 읽어라.” 제가 신학도들에게 가끔씩 전하는 말입니다. 이곳을 다시금 묵상할 수 있게 되어서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여러분들께도 같은 말씀을 드립니다. 삶이 고단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삶이 즐거울 때에도 빌립보서를 자주 읽으시기를 권면합니다. 분명 여러분의 삶에 청량제처럼 신선한 기쁨을 더해 줄 것입니다.

3. 기독교인의 존재 양식에 대해서 바울 사도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울 서신의 진정성(저자가 바울인지 여부를 검증하는 신학 작업)을 얘기할 때마다, 반드시 검토하게 되는 문구가 바로 오늘 우리들이 읽은 서두 인사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하나의 양식(포맷)으로 규정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바울”이라고 말입니다. 그가 누구이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때에만 그리스도 인이라고 우리들에게 외치고 계십니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인으로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게 아니라는 점을 구별해야 하겠습니다. 구원파들이 이런 점을 혼돈했습니다. 그들은 구원의 증표를 여러 가지로 만들었습니다. 대체로 어떤 체험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나 말씀을 들을 때, 혹은 기도할 때 그들이 받은 뜨거운 성령의 임재를 구원의 증표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 날자와 시간과 장소 등을 기억하게 합니다. 그리고 입으로 시인하라고 가르칩니다. 자신들은 언제 어디에서 구원받았다고 증거 합니다. 구원받은 백성이다 는 확신 속에서 살고 있다고 얘기합니다. 저의 가까운 가족 한 사람이 여기에 빠졌다가 나오는데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그는 구원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별로 할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나가는 것도 시들해지고, 기도하는 것도 봉사하는 일도, 기독교인답게 사는 일도 별 관심이 없어졌습니다. 구원받기 전에나 할 일들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삶에 대해서 무책임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죄책감조차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잘못된 신앙입니까? 이런 신앙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저주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4. 기독교인의 正位置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 밖에 머물어 있다면, 그는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아무리 목사 안수를 받고 매 주일 명설교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의 삶의 중심을 두고 있지 않다면,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참된 기독교인일 수가 있느냐고 반문하실 것입니다. 하루 24시간을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되돌아보십시다. 우리는 어떤 때는 제법 근사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힘든 이웃의 손을 따뜻이 잡아 줄 수 있습니다. 빗나가는 젊은이의 등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타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영 아닌 모습으로 살기도 합니다. 가까운 이웃을 속이고, 새치기하고, 터무니없는 욕심에 불을 붙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 안을 들락거리는 모습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때는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그리스도 밖으로 나가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밖으로 나갈 때는 놀랍게도 마귀 안으로 들어가 있는 상태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주님과 마귀 사이에 중립지대란 없다고 믿습니다. 오직 주님의 종이 되든지, 마귀의 종이 되든지 양단간에 어느 하나에 속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런 자신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기도의 제목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자신을 머물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그리스도 밖으로 나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도 시시 때때로 그런 유혹을 받았고, 실제로 넘어갔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결코 완전 무결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자신을 묶어 두기를 소원했다고 하는 점을 우리는 발견해야 합니다. 

5.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서만 희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아침 우리의 기도 제목이어야 합니다. “주님, 저를 주님 안에 머물러 있게 해 주십시오. 주님 안에서 말하게 하시고, 주님 안에서 일하게 해 주시옵소서. 주님 안에서 이웃을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주님 안에서만 참 기쁨과 평화가 있나이다.”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이 기독교인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존재하는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입니다. 저도 여러분들을 위해서 같은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 안에 머무르도록 당신의 종들을 축복해 주시옵소서.” 주님의 평강이 여러분을 지켜 주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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