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35(2000.11.12, 주님의 날)
성경말씀 : 요 1:19-23.    
찬송 : 405장.
제목 : 나는 누구인가?                   

1. 오늘 아침 묵상자료는 [2001년 예배와 강단] 686-691쪽에 실린 저의 설교 연구문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한국에서 일하는 목회자들을 위해서 교회력에 따른 설교 준비자료를 만드는 일에 일조 하게 되어서 기뻤는데, 어제 새 책을 받았습니다. 제가 10여 년 간 새 가정사에서 발행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라는 가정 예배서에 매년 2-3편씩 설교문을 제공해 왔는데, 이제는 목회자들을 위해서도 일할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2. “너는 누구냐?” 세례 요한이 받았던 질문입니다. 유대 공의회인 산헤드린에서 보낸 사람들이 물었던 말입니다. 세례 요한은 당시 유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주목의 대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언행이 예사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 식민지 아래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세례 요한이 자기 민족을 위해서 큰 일을 할지도 모르는 그런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예언되었던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던 시대 정황으로 보아서, 세례 요한은 그런 기대를 할만한 요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세례 요한은 단도직입적으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어떻습니까? 혹씨 여러분이 이런 질문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면, 아무래도 난감하시겠지요? 무엇이라고 여러분은 자신을 소개하시겠습니까? “저는 아무개 목사입니다.”라거나, “저는 아무개 아버지입니다.”라고 대답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앞의 대답은 직업이나 하고 있는 일로서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경우라고 할 수 있고, 뒤의 대답은 여러분의 가족 상황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경우인 듯 합니다. 그러나 이런 대답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여러분 주변을 말하고 있을 뿐, 핵심이 되는 여러분 자신을 아직 소개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계십니까? 

3.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질문을 해 봅시다. 나는 누구인가? 참으로 중요한 질문입니다. 섣부른 대답을 하기 전에 세례 요한에게서 배워봅시다. 어려운 일을 만날 때,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 엿볼 필요가 있습니다. 실수를 하더라도 조금 덜할 수 있는 방법은, 다른 사람들이 하는 모습을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아닌 것부터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메시야가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질문을 가지고 왔던 사람들의 마음을 훤히 들여보면서 하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들은 세례요한에게서 메시야인지 여부를 알고자 했습니다. 메시야란 히브리말인데, 그 뜻이 구세주라는 말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그리스도라는 헬라말로 번역해서 사용하고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세례 요한은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아주 분명합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구세주가 아닌 것을 큰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어떻습니까?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때인데, 하루에 수 천명의 군중들을 몰고 다니는 인기인이었는데, 그런 말로 추켜세우는 사람들이 결코 작은 수는 아니었을 터인데도, 그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는 구세주가 아니다.”고. 그러면 세례 요한은 거듭해서 질문을 받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냐? 엘리야냐? 선지자냐? 그 때마다 “나는 아니라.”고 하는 말 외에는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질문자들은 “그러면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하느냐?”고 묻습니다. 세례 요한은 지체하지 아니하고 “나는 광야에 외치는 소리로다.”고. 바람결에 흘러 사라져 버리고 말, 소리에 불과 하다고.
그는 뒤에 오시는 위대한 분의 길을 안내하는 소리꾼으로, 자신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마치 그 옛날 시골 관리가 행차하는 것을 연상할 때, “길을 비켜라! 원님이 납신다.”고 외치는 소리꾼을 보는 듯 합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리는 인기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소리꾼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4. 이제 여러분이 대답하실 차례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먼저 여러분이 아닌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세례 요한처럼, 우리 자신이 아닌 것에 대해서 큰 소리로 “아니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서 있어야 할 참된 제 자리에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그 다음으로는 내가 무엇을 위해서 세상에 보내어졌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서 세상에 왔습니다. 뜻없이 왔다 가는 인생이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맡겨 주셨습니다.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여러분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에 충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주님의 신들메를 풀기에도 감당치 못할 자로 자신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속담에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이 난다.”는 말처럼, 주제를 파악하지 못한 체 이리 저리 망둥이처럼 뛰어 다니기만 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고, 그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하겠습니다.

5. 우리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계시길 기도 드립니다. 오늘 주일 예배로 마크 시쇼우 전도사께서 실습을 마치고 귀국하시게 됩니다. 그 분의 앞날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함께 하시길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샬롬! 샬롬! 샬롬!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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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34(2000.11.11, 토요일)
성경말씀 : 잠언 30:5-6.   
찬송 : 411장.
제목 :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            

1.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겨울 날씨를 보이고 있습니다. 몸을 따뜻하게 하라고 어머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여러분들도 그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차가운 날씨를 잘 이기는 방법은 따뜻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을 어떻게 우리 의지로 가질 수 있느냐고요? 옳은 말씀입니다. 우리 마음을 누가 다스리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2.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매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는 사람, 이런 저런 교회 직분을 맡고 있는 사람, 세례를 받은 사람 등 등. 외적으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을 그런 조건들로 규정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이라고 규정합니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존재 양식(存在 樣式)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 모양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을 때라고 말입니다. 아무리 교회 생활이 충실하고, 중요한 직분을 맡고 있든 간에, 그 분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지 않다고 하면, 그리스도인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부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과 그리스도 밖으로 들락 달락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도 하고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않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 머문다는 말은 긴 설명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주제와 관련이 있지만, 아무래도 간단히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란 “안에”라는 전치사의 의미를 잘 이해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 말은 존재 상태를 나타내는 특별한 의미와 함께, “-를 통하여”, “-로 말미암아”와 같은 뜻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 에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우리의 실존 상태를 의미하며,” 이는 또한 “그리스도를 통하거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일을 하고자 하는 자세”를 말하기도 합니다. 

3. 우리 인간만큼 외로움을 타는 존재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누군가가 응원해 주기를 항상 희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많이 듣는 말 가운데는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하는 말입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대도(代禱)라는 것이 있습니다. 대신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제도적으로 이런 응원의 색채를 띈 것들을 많이 만들어 두고 있습니다. 세례 받을 때는 대부모(代父母-god parent)를 세우는 일도 그런 예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이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큰 위로와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서 이른바 배경(background)을 중시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응원에 불과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다시 말하면 응원하는 사람이 자기 문제가 힘들거나, 피곤해질 때도 나를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해 주고, 도와줄 수 있다고 기대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응원하는 사람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란 보잘 것 없는 것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분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시편에서 우리는 아주 강하고 힘있는 구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46:1). 그렇습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과 항상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마28:20). 우리는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이런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인생을 승리하였는지를 보여줄 뿐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실패한 인생을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나 제가 안고 있는 큰 약점은 하나님이 하실 방법에 대해서 믿어워하지 않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도와주실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거기에는 우리 자신들이 기대하는 방법들이나 내용들이 항상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가져야 할 신앙은, 하나님 자신의 뜻과 방법에 전적으로 의탁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도와 주시”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시라는 자세가 참된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그 때 참된 평안과 감사가 생기고,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우리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4. 제 아우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오른 발 오금장이에 물 혹이 나 있었습니다. 그 물 혹이 너무 커서 오른 발을 오므릴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해동안 여러 차례 병원에서 그것을 고치려고 시도했지만 허사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시골 저의 모교회에서 부흥집회가 있었는데, 식구들은 다 예배드리러 가는데, 이 동생만은 집을 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교회에 나와 앉아 있는 게 아닙니까? 그 날 밤에 동생의 물 혹은 기적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가 동생에게 물으셨습니다. “너는 엄마 말 듣지 않고 교회에 나왔느냐?”, 그 때 동생은 똑똑한 말로 “다 천당에 가는데 나만 지옥에 가는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담을 뛰어 넘어 교회에 가고 싶었어요.” 그 날 밤의 기적을 저는 순수한 제 아우의 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계획이나 욕심을 따라 기도하는 것이나, 우리의 소원대로 살려고 하는 것까지도, 적절한 방법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만이 저를 아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저를 인도해 주십시오. 하나님께 의지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드릴 기도의 형식이며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는 것으로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며 축복인지를 감사하십시오. 비록 여전히 풀리지 않은 문제들이 남아 있고, 아픔과 고통이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선하신 주님께서 여러분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적절한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선하게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계시길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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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33(2000.11.10, 금요일)
성경말씀 : 잠언 29:15, 17.   
찬송 : 239장.
제목 : 바른 자녀 교육을 생각해 봅시다. 

1. 주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어제는 선한 사마리아회가 목욕봉사를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단수에다 기계 고장이 났다는 얘기를 뒤늦게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원봉사자들 6명이 봉사의 내용을 바꿔보기로 하고 충북 영동으로 시집가신 박성희집사님 사과 농장으로 가서 3시간동안 사과 꼭지를 가위로 손질하는 일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5천평이나 되는 농장과 저온 저장고 등 규모가 만만치 않았고, 요사이는 매일 10여분의 일꾼들을 불러 분주하고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시어머니와 함께 네 식구가 살고 있는데 아주 건강하고 열심히 살고 계시는 집사님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이렇게 탐스럽게 열린 사과 알처럼 신앙의 열매들도 많이 맺히기를 기도 드렸습니다. 

2.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은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래된 말,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는 우리 부모 세대들이 뼈저리게 체험하였던 아픔을 내비치는 표어입니다. 그래서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자녀 교육을 위해 분에 넘치는 투자를 했던 것입니다. 제 얘기를 가끔 드렸습니다만, 저는 아홉 남매의 셋째로 태어났는데, 가난한 살림 때문에 부모님의 힘으로 가르친 자식은 형님을 고등학교에, 누님을 중학교에 다니게 한 것 외에는 모두가 초등학교밖에는 보내질 못했습니다. 막내와 제가 대학을 나오긴 했지만, 부모님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고 주변이나 고학으로 공부한 케이스입니다. 그래서 저의 부모님은 평생 이 점을 늘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너희들에게 해 준 것이 없다.”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늘 같은 말로 대답하였습니다. “아닙니다. 부모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부모님께 배워야 할 것은 다 배웠는걸요.” 그것은 기본 교육에 대한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말하기, 습관들이기, 하나님 신뢰하기 등 등, 어쩌면 이런 것들이 제대로 배우고 익히지 않았다고 한다면, 아무리 현대적인 좋은 교육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제 구실을 할 수가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습니다.

3. 사람은 선천적인 것을 잘 개발해야 하고, 후천적인 교육으로 훨씬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해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생긴 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갓 태어난 어린아이를 보신 일이 있겠지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아이라는 것을 관찰 하셔야 합니다. 제 자신의 뜻을 제대로 표현할 줄도 모르고, 심지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스스로 먹을 것과 먹어서는 안될 것을 구별조차 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살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우리들의 첫 출발 모습입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우리들에게는 헌신적으로 사랑을 베풀어주신 부모님들을 만난 것입니다. 하루에도 수 천번씩 사랑의 눈길을 쏟아 부어 주셨고, 온갖 필요 적절한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끔 손자를 돌봐주는데, 지금 그 아이를 가르치는 내용은 해서는 안될 일밖에 없습니다. 아직은 전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때이므로, 이것은 이렇게 저것은 저렇게 하면 좋겠다고 가르칠 수 없습니다. 그보다 먼저 가르쳐야 할 일들이 산더미 같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해서는 안될 일들입니다. 아무 것이든 손에 잡히는 대로 입으로 가져갑니다. 배가 고파서거나, 먹고 싶어서가 아닌 것을 압니다. 때로는 위험하기까지 한 것들까지도 서슴없이 입에 넣곤 합니다. 지금은 “하지 말라”, “안 된다”는 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아이가 곧 말귀를 알아듣게 될 날이 오리라고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때에는 왜 하지 말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잘 하는지를 구별하도록 가르칠 것입니다. 

4. 그런데 오늘 우리 시대의 큰 걱정거리 중 하나는, 가정 교육의 부재 또는 부실 현상이 아닌가 합니다. 어쩌면 부모님들이 가정 교육을 포기한 것과 같은 생각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물론 겉모양으로 보아서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더 많은 교육적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얼마나 허깨비 교육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피아노다 속셈이나 미술이다 태권도다 영어다 해서 학원에 맡기는 것을 교육이라고 한다면 예전 우리 부모님들 보다 교육적 관심이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이런 교육은 이른바 기초 교육이 되어 있을 때, 효과를 거두는 것이지 기초 교육이 부실했을 때는 사상 누각처럼(모래 위의 집) 반드시 엄청난 실망을 가져다 줄 날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기초 교육이란, 앞서 언급했습니다만 말하기 교육과 정서적인 안정감 주기, 좋은 습관 길들이기 등등입니다. 바른 말과 틀린 말을 구별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좋은 말과 나쁜 말도 가르쳐야 하고, 밝은 말과 어두운 말의 사용법도 익히게 해야 합니다. 사실 말 하나만 제대로 가르쳐도 그 아이는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입 속에서 맴도는 말버릇을 고치지 않으면 그 아이는 지도자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분명하고 똑똑하게 말하는 훈련을 시키십시오.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갖는 것은 쉬운 교육이 아닙니다만, 매사에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서적으로 불안한 사람입니다. 정서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사물이나 사건을 대할 때 반응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우리는 일생동안 수 만가지 것들을 대해야 합니다. 그 때마다 안정감을 갖고 대할 수 있어야 하겠는데, 그렇지 못하다면 이것처럼 큰 낭패도 많지 않을 듯 합니다. 쉽게 반색하고 쉽게 낙담하는 사람들, “죽었구나”라는 말을 잘 사용하는 사람들, 모두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정신 상태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훈련으로 얼마든지 극복해 나갈 수 있습니다. 제가 잘 아는 한 분은 참 훌륭한 부모님 밑에서 자라났습니다. 그 부모님은 항상 “당황하지 말고, 차분히 들여다보면 길이 있단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분은 그 힘들다는 공학과 의학을 공부해서 존경받는 대학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 분의 부모님께서는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훈련시킨 것이지요. 학교 교육이나 사회 교육에 자녀를 맡기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하고 더 필요한 교육은 기본 교육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자녀를 가진 부모라면, 이점을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한 교육을 맡겨 주셨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5.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제 멋대로) 하게 내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오늘은 여러분이 받은 기본 교육을 점검해 보는 날로 삼아보시면 어떨까요? 그리고 이제는 그 기본 교육의 교사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교안을 만들어 보면 어때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묵상팀 중의 한 분이 제 얘기를 읽으면서 자녀 교육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을 해 오셔서, 덧붙인 제 생각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오늘도 여러분에게 평화와 기쁨을 주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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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32(2000.11.9, 목요일)
성경말씀 : 잠언 29:11.       
찬송 : 474장.
제목 : 어두운 감정이 생길 때 우선 붙들어 두십시오.

1. 오늘도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어제 출석을 불렀는데, 여섯 분이 응답을 해 왔습니다. 오늘만 건너 뛴 경우이기를 바랍니다. 옥수동 교회 교우들은 믿는데가 있으니까, 조금은 지각도 하고 졸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큰 소리로 대답해 주신 여섯 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여러분으로 인해서 기운을 낼 수가 있습니다. 대부분 긴 여운을 남기는 대답을 해 주셔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까지는 기대를 안했는데 말입니다. 특히 멀리 미국에서 임구원목사님 사모님과 이현경선생님께서 가장 긴대답을 해 주셨는데 감사드립니다. 저는 어제 [카톨릭과 개신교]라는 일본에서 사역하고 있는 천주교회 신부님이 쓰신 책을 읽었습니다.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은 차분하게 자신이 가진 교회관을 또박또박 말씀해 내려가셨습니다. 물론 읽으면서 개신 교회 특히 루터교회의 목사로써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지만, 그 분의 말씀을 통해서 나와 우리들의 교회 이해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많은 느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제가 가장 크게 감동을 받은 것은, 자신이 가진 신앙과 교회에 대해서 분명한 자기 이해를 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우리에게서 찾을 수 있는 가장 부끄러운 면을 들킨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잘 쓰는 말, “잘 모르는데요.”라는 말 때문입니다. 모르는 것이 자랑이라도 되듯, 아무 생각 없이 말할 수 있는 우리들, 그렇습니다. 틀려도 좋으니까, “저는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데요.”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틀려도 확실하게 틀린 줄 알아야 고치든 깨닫든 희망이 보이지 않겠습니까? 서론이 길었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읽을 만한 얇은 책입니다. 

2. 사람들이 가진 감정 중에는 밝은 것도 있지만, 어두운 감정도 있습니다. 밝은 감정은 얼마든지 드러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 아름다운 마음, 용기와 희망을 나누는 마음을 통제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어두운 감정이 생겼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슬프거나 노여움에 가득한 감정, 혹은 상처난 감정이 있을 때는 정말 주의를 기우리지 않으면 심각한 낭패를 겪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어두운 감정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고, 손해를 보아 왔는지 모릅니다. 오늘 성경은 이런 감정 관리에 대해서,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를 잘 비교해 주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어두운 감정을 통제하지 않은 체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제 멋대로 내버려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지혜로운 사람은, 이런 어두운 감정이 생겼을 때는 철저하게 통제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른바 미숙아와 인격자의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누구에게나 분노와 격정이 있게 마련입니다. 자기 스스로 만드는 노여움이 있을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얻게 되는 노여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들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합니다. 이것이 마음 아픈 현실입니다. 그래도 예의를 갖출 거리감을 갖는 사람에게는 생각이나 말에 있어서 심사숙고하는 경향입니다만, 가까운 사람에게는 생각 없이 자기 기분이나 생각을 가볍게 드러내기 쉽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루에도 열 두 번씩이나 상처를 얻게 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들, 부모나 형제에게서, 그리고 친구에게서 심지어는 존경하던 스승이나 목사에게서도 이런 마음 아픔을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지체없이 되받으시겠습니까? 오늘 말씀은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까닭은 그런 감정은 너무 자주 가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피할 수 없는 흔해 빠진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루 종일 화를 내게 될 것이고, 하루 종일 전쟁터에서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런 감정을 억제하는 일을 서둘러 하라는 말씀입니다. 

5. 베델성서연구 생활편에 보면, 화난 개들의 고삐를 꽉 붙들고 있는 손 그림이 있습니다. 호전성의 감정, 복수심에 불타는 감정, 분쟁을 좋아하는 감정, 잔인한 감정, 노여움 등 등. 이런 감정이 생길 때, 그 원인이 무엇이든 자 잘못을 따지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런 감정들을 꽉 붙들고 놓아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붙잡아 놓아야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이지, 일단 놓게 되면 누구도 겉잡을 수 없는 일파 만파의 풍파를 일으키고 말 것이라는 말입니다. 어두운 감정은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있습니다. 붉게 타는 노을이나 아름다운 가을 단풍을 바라보면서도 마음의 상처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왜 날 이렇게 외롭게 만드는가 해서 말입니다. 이러한 때에 되는대로 가보자고 하시겠습니까?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두운 감정은 무조건 붙들고 놓고 보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억울하고 아무리 마음이 상해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감정이 조금도 밖으로 뛰어 나오지 못하도록 억제해야 합니다. 지혜자와 어리석은 사람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어둔 감정만 통제하면, 여러분은 훌륭한 사람으로 살아갈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저는 저 유명한 말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는 말씀을 좋아합니다. 주님께로 가면 그냥 쉼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지신 멍에를 멜 때, 비로소 마음에 평안히 온다는 말씀이 말입니다. 왤까요?  주님의 멍에는 억지로, 마지못해서 지는 멍에가 아니라 즐거움으로 짊어지는 사랑의 멍에인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괴로울 땐 주님을 바라보라는 복음가가 있습니다. 내가 겪고 있는 아픔보다 훨씬 더 큰 상처를 안고 계시는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그 주님의 얼굴에는 평화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평화의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지켜 주십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이를 위해서 기도로 응답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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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31(2000.11.8, 수요일)
성경말씀 : 잠언 28:27.       
찬송 : 508장.
제목 : 어렵지만 확실한 아름답게 사는 길, 함께 살기.

1.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오늘이 서른 한 번째 묵상 만남일 입니다. 오늘 처음으로 여러분들의 출석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묵상자료를 읽으신 후 곧 바로 잘 받고 있다는 간단한 대답을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허공에다 외치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드는 것은 이런 전자 매체의 가장 큰 약점중 하나인 듯 합니다.

2. 예수님의 발에 한 옥합의 향유 나드를 부은 여인을 보면서 책망한 기록이 있습니다(막14:3-9). 5천명을 먹일 식사 값을 2백 데나리온이라고 했으니까, 3백 데나리온의 향유 값을 대강 측정할 수 있겠지요? “그 많은 돈으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 수 있을텐데” 하면서 말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어왔고 지금도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가난 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는 끝날 줄 모르는 질병에 묶인 이들, 힘겨운 짐을 짊어진 이들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바로 이런 이들을 주목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같은 하늘 아래서 숨쉬며 살고 있는 이웃이라는 사실을 좀 깊이 생각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돕는 길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약속하십니다. “궁핍하지 않으”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못 본 체 하는 사람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고 말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지금 형편이 뭔가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고 생각되신다면, 이 말씀을 진지하게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못 본 체 하는 내 이웃을 없었는가? 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저 해보는 지나가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은 생명력을 가진 말씀이며, 구속력을 가진 능력의 말씀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3. 함께 살기는 차원 높은 처세술이라고 생각들 때가 많습니다. 혼자 살기란 가장 간단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고, 내 생각과 다르고, 내 성격과 딴 판이어서 혼자 살려고 할 것입니다. 혹시 이런 생각을 자주 갖는 분이라면 용기를 내서 자신에게 타이르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혼자 살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바로 이런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어울려서 함께 살 수 밖에 없으니, 마음을 바꿔야 한다고 격려하십시오.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은 나 혼자 뿐이라는 것, 모두가 다르다는 것을 빨리 인정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들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귀찮고 두려우십니까? 가장 가깝다는 가족까지도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사는 것이 힘들 수 있지만, 생각을 바꿔보면 얼마나 흥미 있는 일인지 모릅니다. 다른 생각을 듣게 되고, 다른 모습 때문에 도전과 격려를 받게 되고, 다른 것들에 대해서 조금만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다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장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를 것입니다. 그러니 함께 살기에 마음을 굳힙시다.

4. 문제는 나 보다 낮은 사람들, 어려움이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가난과 질병을 짊어진 사람들이 있어서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권고하십니다. 그들을 구제하라고 말입니다. 못 본 체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약속하셨습니다. 돕는 이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절대로 궁핍하게 하지 않으시겠다고, 못 본 체 하는 이들에게는 저주가 많도록 하시겠다고 말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이런 말씀을 잘 듣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시는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 은총을 입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저주를 감수하시겠습니까? 힘겹지만 확실한 축복의 길을 왜 마다 하십니까?

5.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려고 힘쓰는 중입니다. 함께 살기에는 몇 가지 원칙 혹은 기본이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첫째는 함께 살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해라는 말은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는 다를 수 있고, 마음에 안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해의 폭을 넓히려고만 하면 이해가 안돼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 까닭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계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경험이나 인생 연륜이 미숙한 때문일 수 있습니다. 자기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점 때문에, 우리의 이해하는 폭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통해서 그 이해의 폭이 넓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럴 수 있구나.”, “말도 안돼는 소리”라는 두 말 속에서 여러분은 어떤 느낌을 갖습니까? 전자는 새로운 경험이나 인식을 갖고자 하는 마음을 넓히는 자세인 반면에 후자는 자기의 경험이나 인식의 테두리에서 한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않으려는 닫힌 마음 자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때로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경우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십시다. 그러면 이해가 안돼는 것도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처음엔 황당한 얘기도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럴 수 있구나 하고 말입니다. 
   둘째는 함께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처지를 배려하려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처지에 서 보는 일을 말합니다. 내 입장에서가 아니라, 말하는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보려고 할 때, 참으로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심코 다른 사람 얘기를 부정적으로 잘 합니다. 심리적으로 그런 것을 자기 방어의 한 기술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비난받을까 두려워 먼저 선공을 취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그런 잘못된 시각으로 피해를 입게될 상대방의 입장에 내가 서 있게 된다고 할 때, 얼마나 억울하고 섭섭할까요? 바로 여기에서는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그저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수준인 이해의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배려입니다. 상대방을 조금은 편하게 해주고, 격려해 주고, 용기를 주는 단계입니다.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런 배려하는 마음과 말이 있게 될 때, 그 사람은 큰 위로와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적극적으로 돕는 일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도와줄 수 없을까? 이런 마음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보자는 말입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는 말씀만을 늘 외울 것이 아니라, 마음에 품은 아름다운 것들을 실제로 행동으로 옮겨보자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알고 시작할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쓰고 남은 것으로 해볼 생각을 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분야를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내가 어떤 손해를 볼 수 있는가를 계산해야 합니다. 가령 한 고아를 돕기 위해서 내가 하루 1시간 더 일할 수 있을까? 한 달에 한 번은 외식을 줄일 계산도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런 일들을 생각하지 않은 체 아름다운 삶을 시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잠시 잠깐 스쳐 지나가는 감상이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저는 [좋은 생각]이라는 스티커를 제 가방 뚜껑 밑에 붙이고 다닙니다. 저 자신과의 약속을 격려하기 위해서입니다. [좋은 생각] 통장에 작은 정성이 모이도록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봅니다. 대단한 일을 하려고 하기보다는 작은 출발을 먼저 서두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곁에 보내주신 이웃들을 주목해 보십시오. “작은 소자에게 준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10:42).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6. 함께 살기는 선택 사항이 아니고 의무 사항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함께 사는 기쁨을 맛보실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하십시오. 배려하십시오. 그리고 적극적으로 그들의 연약함을 붙잡아 주려고 해 보십시오. 그 때, 하나님이 주신 이 세상이 훨씬 더 아름답고 신선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이런 귀한 행복감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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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30(2000.11.7, 화요일)
성경말씀 : 잠언 28:20.       
찬송 : 455장.
제목 :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       

1. 오늘도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 가운데 행복한 하루가 되시길 기도 드립니다.

2. 우리 민족성처럼 굳어지고 있는 이른바 ‘빨리 빨리’ 문화에 대해서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어느 외국인이 우리 나라에서 제일 많이 듣는 말 중의 하나가 빨리 빨리 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이런 빨리 빨리의 문화를 목격할 수 있습니다. 지하철 개찰구를 나갈 때에도 줄서기를 하지 않고 새치기를 하는 사람들, 병목 현상 지역에서 어김없이 나타나는 새치기 운전자들, 식당에서 주문하기가 무섭게 ‘빨리 주세요.’를 외치는 사람들. 우리 자신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들의 현 주소입니다.
물론 ‘빨리’ 예찬자들도 없지 않습니다. 어떤 한국 주재 외교관은 한국의 급속한 경제 성정의 배경에는 빨리 문화가 있다고 극찬하는 글을 신문에 올린 적이 있었습니다. 틀림없이 맞는 말입니다. 이런 빨리 문화가 부지런함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어둠이 깔린 새벽부터 일하는 민족은 그리 흔치 않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런 흔치 않은 민족 중에 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점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3. 빠른 성공과 출세에 대한 집착은 종종 순리보다는 억지를 부리게 되고, 불법과 부정을 마다하지 않는 역반응을 보이게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깊이 생각해 보면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고 과정이 뒤따라야 합니다. “우물에서 숭늉을 구한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순서와 과정을 생략한 대표적인 빨리 문화의 한 예라 하겠습니다. 좋은 성적을 얻으려고 하면 순서와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수업시간에 충실하게 참여해서 강의를 잘 들어야 하고, 예습 복습을 매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시험 준비를 게을리 말아야 합니다. 이런 순서와 과정을 생략한 체 높은 점수를 받으려고 하니까 자연히 부정행위를 저지르게 마련입니다. 성공과 출세도 그렇습니다. 성공하려면 그만한 과정을 치러야 하는데, 많은 땀과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합니다. 거기에다 주변 여건도 많은 도움이 뒤따라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런 과정들을 생략하고서 빨리 성공하려고 합니다. 그 결과 부정과 불법을 저지르고 오히려 더 후퇴하는 인생을 살게 되곤 합니다.
4. 어느 정신과 의사가 쓴 글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어린 자식을 좀 천천히 키우라는 얘기였습니다. 빨리 걷고 뛰게 하고 빨리 말하게 하고, 빨리 노래하게 만드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될 수도 있다고 하면서, 좀 천천히 키운다는 여유를 가지라고 합니다. 요사이 잘 쓰는 말처럼 “입장을 바꿔 보라.”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 입장에서 정신적인 성장과 함께 육체적인 성장이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데, 겉으로 보이는 부분들만 성장하고 보이지 않는 정신은 여전히 어린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문제가 심각할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대가를 톡톡히 보고 있지 않습니까? 소위 졸부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 말입니다. 고생해서 번 돈이라면 한 푼 한 푼을 값있게 사용할 터인데, 갑자기 굴러들어 온 돈이기에 흥청 망청대는 모습이 우리 사회 분위기를 얼마나 흐리게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소비성향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잘 느끼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보면 비정상적인 술집이 발전한다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빨리 일을 성사시키려는 어두운 우리 현실을 반영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젠 좀 천천히 성장하도록 생각해 보십시다. 몸과 마음이 함께 움직일 수 있도록 하려면 자연히 시간이 필요하고, 땀이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5. 속도 조절을 합시다. 빨리 할 것은 빨리 합시다. 위기(危機)를 만난 사람이라면 빨리 서둘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천천해 해야 할 것은 너무 서두르지 맙시다. 예수님께서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미리 당겨서 걱정하는 사람들이 옛날에도 많았던 모양입니다. 하루하루 그 날의 걱정만으로도 벅찬 우리들의 삶인데, 거기다가 다음 날의 일까지 당겨서 걱정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내일 일은 내일 하십시오. 오늘 하는 일에 충실하면 내일 일은 훨씬 수월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조급하고 분주해 질 때, 기도하십시오. 속도 조절의 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상의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필요하면 여러분 주변의 가까운 분과 의견을 나눠보십시오. 이것도 탁월히 좋은 속도 조절용이 될 수 있습니다.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빨리 달려간다고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큰 유혹과 잘못된 덫에 걸릴지도 모릅니다. 몸과 마음이 함께 움직이는 충실한 삶, 곧 속도조절이 잘 이루어지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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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29(2000.11.6, 월요일)
성경말씀 : 고린도후서 5:1-3.
찬송 : 543장.
제목 : 하늘 시민권을 얻기 위해서.

1. 오늘도 주님의 풍성하신 은총 가운데서 강건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2. 어제는 기쁜 주님의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우울한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학생-청년 시절에 우리 교회를 다녔던, 그러나 그 가족은 최근 이사해서 대전으로 내려가기까지는 함께 신앙생활 하였던 고 신시우집사님의 부음(訃音)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인생살이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마흔 네 살, 요새 나이로는 짧은 생애가 아닐 수 없습니다만, 할머니와 어머니, 두 동생과 아내와 어린 3남매를 두고, 새로운 삶을 향해서 서둘러 떠나버린 것입니다.

3. 오늘 묵상할 말씀은 조금은 무거운 주제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이 생과 저 생을 살펴보게 하는 흔치 않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두 나라의 시민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땅에 있는 장막집”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그 말씀입니다. 육신이 머물게 될 땅의 장막 집은 한시적이라는 특징이 있고, 하늘의 집은 영원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어떤 의미에서 땅의 시민으로서의 삶과 하늘의 시민으로서의 삶이 우리 모두 앞에 주어져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한시적인 삶과 영원한 삶의 관계는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삶의 목표며 우선 순위 등을 세워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4.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지나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편 90:10) 이 시인이 살던 시대에 비해 평균 수명이 늘어가고 있는 추세라고 하지만, 저와 여러분에게 허락된 땅의 장막집 생활은 마감할 때가 분명하다는 사실입니다. 거기에다가 이른바 한 평생이라는 말은, 시간의 길이를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데에 중심을 두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땅의 장막집 보다는 하늘의 집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실상은 그 하늘 집에 대해서는 상당히 애매 모호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이지요. 성경에서 가장 이 하늘의 집을 언급하고 있는 요한 계시록의 내용이 사실적인 표현이 아니라, 추상적인 표현이라는데도 그 까닭이 있겠습니다만,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한복음 3:12)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늘 일에 관해서는 이해하는데서나 생각하는데서도 우리들에게는 턱없이 모자라다는 한계를 먼저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땅의 일, 혹은 땅의 장막집에서 살아갈 일에 대해서 준비하고 힘쓰는 일만으로도 우리는 벅찬 게 아닐까요? 

5. 저의 신앙은 그렇습니다. 땅의 장막 집은 하늘의 영원한 처소를 위한 준비 생활이라고 말입니다. 두 나라는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라, 결코 떼어놓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관계가 있는데, 땅의 장막 집에서 좋은 훈련과 준비를 하지 않고서는 하늘의 집에 가서 살 생각은 꿈도 꿀 수 없다고 말입니다.
이 곳 장막 집에서 머무는 동안, 우리가 준비할 일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맺기가 가장 중요하고, 신뢰할 수 있는 도타운 관계를 정립한 후에, 하나님께서 받아 주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훈련,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을 여기에서 충실하게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아직 우리들의 장막집 생활이 계속되고 있다면, 아직 훈련이 더 필요한게로구나 생각하시고, 이 점을 중점적으로 염두에 두고서 힘써 살아야 하겠습니다. 물론 우리 자신의 생각과 의지만으로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주님의 도움을 받으십시오. 그것이 우리를 모든 연약함에서 강함으로, 모든 거짓과 어리석음에서 참되고 어엿함으로 변화케 하는 유일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서 있는 자리가 어쩌면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를 훈련일 수 있습니다. 주님께 받은 사랑과 섬김을 나눠보십시오. 그것이 승리하는 삶의 구체적 실증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십니다. 주님을 향해 손을 내 미십시오. 샬롬 샬롬.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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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28(2000.11.5, 주일)
성경말씀 : 잠 28:16.  
찬송 : 405장.
제목 : 거룩한 욕망. 

1.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처럼 신비한 것이 또 있을까요? 오늘 제가 제목으로 삼은 욕망이라는 말에 대해서 우리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사용해 오곤 하지 않았습니까? 차라리 욕심 없는 마음이 좋은 말처럼 생각해 왔었지요. 그런데 앞에다 ‘거룩한’이란 수식어를 붙이니까, 어때요? 말의 빛깔이 고와지고, 향기가 풍기는 것 같지 않으세요? 요사이 묵상하면서 제 주변 얘기를 많이 드렸는데, 혹시 그런 얘기가 마음에 부담이 되셨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하루 이틀 얘기할 내용이 아닌데 말예요. 그러나 제겐 속셈이 있었어요. 자칫 무미건조한 설교조(?)로 색칠할 수도 있는 때문에, 저의 사람 냄새가 이런 문제를 예방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2. 러시아의 사상가였던 베르쟈예프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욕망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본능적인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적인 욕망이라고 했습니다. 본능적 혹은 생래적 욕망은 단순하면서도 분명한 내용입니다. 목이 타면 물을 마시고 싶고, 배고 고프면 밥을 먹고 싶어합니다. 청년이 되면 이성이 그리워집니다. 이런 욕망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본능적이어서 일단 들어주지 않으면 빗나갈 수 있는 성질이 있습니다. 빅톨 위고의 역작 [레미제라불]에 나오는 주인공 짠발짱은 배가 너무 고파서 빵집 진열장의 빵을 훔쳐먹었습니다. 이런 불행한 일들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소위 지도자들은 관심을 기우려야 할 것입니다. 절대 빈곤한 사람들이 생기면 그들을 사회가 책임지고 돌봐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폭동이 일어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창녀를 범죄시 하면서도 허용하는 쪽으로 예외 규정을 두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가정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입니다. 이를 전면적으로 규제한다면, 건강한 가정들이 큰 위험을 감수해야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능적인 욕망은 무리하게 통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회가 제도적으로 이를 잘 교육하고 이해시키면서 소위 공동의 선을 바탕에 깔고 감싸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윤리적인 욕망이란 것에 대해서 진지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윤리적인 욕망이란, 힘에 겨워하는 노인이나 임산부를 보면 자리를 양보해 주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가난한 이웃을 돕고 싶다는 마음이며, 전혀 가진 것이 부족한 사람과 나눠 사용해야 한다는 의무감이며, 함께 살아야 한다는 의식을 말합니다. 오늘 저는 미국 재단(American Fund)이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마을이나 교회 혹은 학교에 많은 돈을 기부해서 의미 있게 사용해 달라고 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1998년 통계로, 이런 일을 하는 재단이 46,832개나 되고 그 총 자산만 3,850억 5천만 달러가 된다고 합니다. 장래가 밝은 젊은이를 가르쳐 주도록, 돈이 없어 질병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을 살려내도록,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쌍한 환경의 사람들을 돌보도록, 기꺼이 돈을 희사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너무도 낯선 얘기가 세상 저쪽에서는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한 대학교수께서 주례를 부탁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통장 번호를 알려주면서, 주례 사례금으로 일금 100,000원을 입금시키라고 하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돈이 모이면, 가난한 농어촌 후배들의 등록금으로 도와주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좋은 생각]이라는 통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눈먼 돈(?)이 생기면 거기에 넣어, 매달 두 곳을 정기적으로 돕던 일이 그리 힘들지 않게 되었고, 남편을 잃고 두 딸과 병든 시모와 시누이를 돌보는 가정을 돕는 일이 훨씬 쉬워졌습니다. 지금은 그 통장을 볼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즐거운지 모릅니다. 누군가를 돕고 싶다는 마음, 그것이 윤리적인 욕망입니다. 이런 욕망이 우리의 삶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든든히 자리잡고 있을 때, 우리의 삶은 풍성해 지고 아름다워진다고 믿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욕망을 가지도록 격려하고 후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가 앞장서서 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모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윤리적인 욕망을 실천할 수 있어야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3. 거룩한 욕망, 그것은 윤리적인 욕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시대에, 자신보다 더 힘겹게 살고 있는 이웃을 생각한다는 것이야말로, 꼭 필요한 욕망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저마다 힘들다고 원망 불평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신앙인으로 얼마나 좋은 말씀들을 많이 들어 왔습니까? 그러나 정작 들은 대로 실천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닙니까? 듣고도 행치 아니하는 신앙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헛수고와 같은데 말입니다. 제가 방문했던 어떤 미국인 가정에는 거실에 항아리들이 몇 개 놓여 있었습니다. 그 항아리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고아를 위한 헌금’, ‘한국 교회를 위한 헌금’, ‘부모님을 위한 헌금’ 이라고 말입니다. 그 분들이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항아리에 사랑의 마음을 채워 넣고 있었습니다. 한 순간의 기분으로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생활 속에서 사랑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나보다 더 연약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어떤 어려운 형편에서도 낙심치 않을 사람입니다. 그는 그 자신의 마음 안에서 피어나고 있는 아름답고 향기 나는 꽃 때문에, 모든 절망과 슬픔까지도 다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의 마음속에 끊임없는 사랑을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욕망이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에 가득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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