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31(2000.11.8, 수요일)
성경말씀 : 잠언 28:27.       
찬송 : 508장.
제목 : 어렵지만 확실한 아름답게 사는 길, 함께 살기.

1.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오늘이 서른 한 번째 묵상 만남일 입니다. 오늘 처음으로 여러분들의 출석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묵상자료를 읽으신 후 곧 바로 잘 받고 있다는 간단한 대답을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허공에다 외치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드는 것은 이런 전자 매체의 가장 큰 약점중 하나인 듯 합니다.

2. 예수님의 발에 한 옥합의 향유 나드를 부은 여인을 보면서 책망한 기록이 있습니다(막14:3-9). 5천명을 먹일 식사 값을 2백 데나리온이라고 했으니까, 3백 데나리온의 향유 값을 대강 측정할 수 있겠지요? “그 많은 돈으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 수 있을텐데” 하면서 말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어왔고 지금도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가난 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는 끝날 줄 모르는 질병에 묶인 이들, 힘겨운 짐을 짊어진 이들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바로 이런 이들을 주목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같은 하늘 아래서 숨쉬며 살고 있는 이웃이라는 사실을 좀 깊이 생각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돕는 길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약속하십니다. “궁핍하지 않으”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못 본 체 하는 사람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고 말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지금 형편이 뭔가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고 생각되신다면, 이 말씀을 진지하게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못 본 체 하는 내 이웃을 없었는가? 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저 해보는 지나가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은 생명력을 가진 말씀이며, 구속력을 가진 능력의 말씀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3. 함께 살기는 차원 높은 처세술이라고 생각들 때가 많습니다. 혼자 살기란 가장 간단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고, 내 생각과 다르고, 내 성격과 딴 판이어서 혼자 살려고 할 것입니다. 혹시 이런 생각을 자주 갖는 분이라면 용기를 내서 자신에게 타이르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혼자 살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바로 이런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어울려서 함께 살 수 밖에 없으니, 마음을 바꿔야 한다고 격려하십시오.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은 나 혼자 뿐이라는 것, 모두가 다르다는 것을 빨리 인정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들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귀찮고 두려우십니까? 가장 가깝다는 가족까지도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사는 것이 힘들 수 있지만, 생각을 바꿔보면 얼마나 흥미 있는 일인지 모릅니다. 다른 생각을 듣게 되고, 다른 모습 때문에 도전과 격려를 받게 되고, 다른 것들에 대해서 조금만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다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장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를 것입니다. 그러니 함께 살기에 마음을 굳힙시다.

4. 문제는 나 보다 낮은 사람들, 어려움이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가난과 질병을 짊어진 사람들이 있어서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권고하십니다. 그들을 구제하라고 말입니다. 못 본 체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약속하셨습니다. 돕는 이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절대로 궁핍하게 하지 않으시겠다고, 못 본 체 하는 이들에게는 저주가 많도록 하시겠다고 말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이런 말씀을 잘 듣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시는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 은총을 입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저주를 감수하시겠습니까? 힘겹지만 확실한 축복의 길을 왜 마다 하십니까?

5.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려고 힘쓰는 중입니다. 함께 살기에는 몇 가지 원칙 혹은 기본이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첫째는 함께 살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해라는 말은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는 다를 수 있고, 마음에 안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해의 폭을 넓히려고만 하면 이해가 안돼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 까닭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계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경험이나 인생 연륜이 미숙한 때문일 수 있습니다. 자기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점 때문에, 우리의 이해하는 폭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통해서 그 이해의 폭이 넓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럴 수 있구나.”, “말도 안돼는 소리”라는 두 말 속에서 여러분은 어떤 느낌을 갖습니까? 전자는 새로운 경험이나 인식을 갖고자 하는 마음을 넓히는 자세인 반면에 후자는 자기의 경험이나 인식의 테두리에서 한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않으려는 닫힌 마음 자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때로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경우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십시다. 그러면 이해가 안돼는 것도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처음엔 황당한 얘기도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럴 수 있구나 하고 말입니다. 
   둘째는 함께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처지를 배려하려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처지에 서 보는 일을 말합니다. 내 입장에서가 아니라, 말하는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보려고 할 때, 참으로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심코 다른 사람 얘기를 부정적으로 잘 합니다. 심리적으로 그런 것을 자기 방어의 한 기술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비난받을까 두려워 먼저 선공을 취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그런 잘못된 시각으로 피해를 입게될 상대방의 입장에 내가 서 있게 된다고 할 때, 얼마나 억울하고 섭섭할까요? 바로 여기에서는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그저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수준인 이해의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배려입니다. 상대방을 조금은 편하게 해주고, 격려해 주고, 용기를 주는 단계입니다.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런 배려하는 마음과 말이 있게 될 때, 그 사람은 큰 위로와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적극적으로 돕는 일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도와줄 수 없을까? 이런 마음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보자는 말입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는 말씀만을 늘 외울 것이 아니라, 마음에 품은 아름다운 것들을 실제로 행동으로 옮겨보자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알고 시작할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쓰고 남은 것으로 해볼 생각을 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분야를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내가 어떤 손해를 볼 수 있는가를 계산해야 합니다. 가령 한 고아를 돕기 위해서 내가 하루 1시간 더 일할 수 있을까? 한 달에 한 번은 외식을 줄일 계산도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런 일들을 생각하지 않은 체 아름다운 삶을 시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잠시 잠깐 스쳐 지나가는 감상이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저는 [좋은 생각]이라는 스티커를 제 가방 뚜껑 밑에 붙이고 다닙니다. 저 자신과의 약속을 격려하기 위해서입니다. [좋은 생각] 통장에 작은 정성이 모이도록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봅니다. 대단한 일을 하려고 하기보다는 작은 출발을 먼저 서두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곁에 보내주신 이웃들을 주목해 보십시오. “작은 소자에게 준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10:42).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6. 함께 살기는 선택 사항이 아니고 의무 사항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함께 사는 기쁨을 맛보실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하십시오. 배려하십시오. 그리고 적극적으로 그들의 연약함을 붙잡아 주려고 해 보십시오. 그 때, 하나님이 주신 이 세상이 훨씬 더 아름답고 신선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이런 귀한 행복감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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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30(2000.11.7, 화요일)
성경말씀 : 잠언 28:20.       
찬송 : 455장.
제목 :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       

1. 오늘도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 가운데 행복한 하루가 되시길 기도 드립니다.

2. 우리 민족성처럼 굳어지고 있는 이른바 ‘빨리 빨리’ 문화에 대해서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어느 외국인이 우리 나라에서 제일 많이 듣는 말 중의 하나가 빨리 빨리 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이런 빨리 빨리의 문화를 목격할 수 있습니다. 지하철 개찰구를 나갈 때에도 줄서기를 하지 않고 새치기를 하는 사람들, 병목 현상 지역에서 어김없이 나타나는 새치기 운전자들, 식당에서 주문하기가 무섭게 ‘빨리 주세요.’를 외치는 사람들. 우리 자신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들의 현 주소입니다.
물론 ‘빨리’ 예찬자들도 없지 않습니다. 어떤 한국 주재 외교관은 한국의 급속한 경제 성정의 배경에는 빨리 문화가 있다고 극찬하는 글을 신문에 올린 적이 있었습니다. 틀림없이 맞는 말입니다. 이런 빨리 문화가 부지런함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어둠이 깔린 새벽부터 일하는 민족은 그리 흔치 않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런 흔치 않은 민족 중에 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점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3. 빠른 성공과 출세에 대한 집착은 종종 순리보다는 억지를 부리게 되고, 불법과 부정을 마다하지 않는 역반응을 보이게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깊이 생각해 보면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고 과정이 뒤따라야 합니다. “우물에서 숭늉을 구한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순서와 과정을 생략한 대표적인 빨리 문화의 한 예라 하겠습니다. 좋은 성적을 얻으려고 하면 순서와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수업시간에 충실하게 참여해서 강의를 잘 들어야 하고, 예습 복습을 매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시험 준비를 게을리 말아야 합니다. 이런 순서와 과정을 생략한 체 높은 점수를 받으려고 하니까 자연히 부정행위를 저지르게 마련입니다. 성공과 출세도 그렇습니다. 성공하려면 그만한 과정을 치러야 하는데, 많은 땀과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합니다. 거기에다 주변 여건도 많은 도움이 뒤따라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런 과정들을 생략하고서 빨리 성공하려고 합니다. 그 결과 부정과 불법을 저지르고 오히려 더 후퇴하는 인생을 살게 되곤 합니다.
4. 어느 정신과 의사가 쓴 글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어린 자식을 좀 천천히 키우라는 얘기였습니다. 빨리 걷고 뛰게 하고 빨리 말하게 하고, 빨리 노래하게 만드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될 수도 있다고 하면서, 좀 천천히 키운다는 여유를 가지라고 합니다. 요사이 잘 쓰는 말처럼 “입장을 바꿔 보라.”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 입장에서 정신적인 성장과 함께 육체적인 성장이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데, 겉으로 보이는 부분들만 성장하고 보이지 않는 정신은 여전히 어린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문제가 심각할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대가를 톡톡히 보고 있지 않습니까? 소위 졸부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 말입니다. 고생해서 번 돈이라면 한 푼 한 푼을 값있게 사용할 터인데, 갑자기 굴러들어 온 돈이기에 흥청 망청대는 모습이 우리 사회 분위기를 얼마나 흐리게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소비성향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잘 느끼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보면 비정상적인 술집이 발전한다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빨리 일을 성사시키려는 어두운 우리 현실을 반영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젠 좀 천천히 성장하도록 생각해 보십시다. 몸과 마음이 함께 움직일 수 있도록 하려면 자연히 시간이 필요하고, 땀이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5. 속도 조절을 합시다. 빨리 할 것은 빨리 합시다. 위기(危機)를 만난 사람이라면 빨리 서둘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천천해 해야 할 것은 너무 서두르지 맙시다. 예수님께서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미리 당겨서 걱정하는 사람들이 옛날에도 많았던 모양입니다. 하루하루 그 날의 걱정만으로도 벅찬 우리들의 삶인데, 거기다가 다음 날의 일까지 당겨서 걱정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내일 일은 내일 하십시오. 오늘 하는 일에 충실하면 내일 일은 훨씬 수월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조급하고 분주해 질 때, 기도하십시오. 속도 조절의 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상의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필요하면 여러분 주변의 가까운 분과 의견을 나눠보십시오. 이것도 탁월히 좋은 속도 조절용이 될 수 있습니다.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빨리 달려간다고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큰 유혹과 잘못된 덫에 걸릴지도 모릅니다. 몸과 마음이 함께 움직이는 충실한 삶, 곧 속도조절이 잘 이루어지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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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29(2000.11.6, 월요일)
성경말씀 : 고린도후서 5:1-3.
찬송 : 543장.
제목 : 하늘 시민권을 얻기 위해서.

1. 오늘도 주님의 풍성하신 은총 가운데서 강건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2. 어제는 기쁜 주님의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우울한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학생-청년 시절에 우리 교회를 다녔던, 그러나 그 가족은 최근 이사해서 대전으로 내려가기까지는 함께 신앙생활 하였던 고 신시우집사님의 부음(訃音)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인생살이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마흔 네 살, 요새 나이로는 짧은 생애가 아닐 수 없습니다만, 할머니와 어머니, 두 동생과 아내와 어린 3남매를 두고, 새로운 삶을 향해서 서둘러 떠나버린 것입니다.

3. 오늘 묵상할 말씀은 조금은 무거운 주제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이 생과 저 생을 살펴보게 하는 흔치 않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두 나라의 시민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땅에 있는 장막집”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그 말씀입니다. 육신이 머물게 될 땅의 장막 집은 한시적이라는 특징이 있고, 하늘의 집은 영원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어떤 의미에서 땅의 시민으로서의 삶과 하늘의 시민으로서의 삶이 우리 모두 앞에 주어져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한시적인 삶과 영원한 삶의 관계는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삶의 목표며 우선 순위 등을 세워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4.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지나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편 90:10) 이 시인이 살던 시대에 비해 평균 수명이 늘어가고 있는 추세라고 하지만, 저와 여러분에게 허락된 땅의 장막집 생활은 마감할 때가 분명하다는 사실입니다. 거기에다가 이른바 한 평생이라는 말은, 시간의 길이를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데에 중심을 두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땅의 장막집 보다는 하늘의 집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실상은 그 하늘 집에 대해서는 상당히 애매 모호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이지요. 성경에서 가장 이 하늘의 집을 언급하고 있는 요한 계시록의 내용이 사실적인 표현이 아니라, 추상적인 표현이라는데도 그 까닭이 있겠습니다만,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한복음 3:12)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늘 일에 관해서는 이해하는데서나 생각하는데서도 우리들에게는 턱없이 모자라다는 한계를 먼저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땅의 일, 혹은 땅의 장막집에서 살아갈 일에 대해서 준비하고 힘쓰는 일만으로도 우리는 벅찬 게 아닐까요? 

5. 저의 신앙은 그렇습니다. 땅의 장막 집은 하늘의 영원한 처소를 위한 준비 생활이라고 말입니다. 두 나라는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라, 결코 떼어놓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관계가 있는데, 땅의 장막 집에서 좋은 훈련과 준비를 하지 않고서는 하늘의 집에 가서 살 생각은 꿈도 꿀 수 없다고 말입니다.
이 곳 장막 집에서 머무는 동안, 우리가 준비할 일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맺기가 가장 중요하고, 신뢰할 수 있는 도타운 관계를 정립한 후에, 하나님께서 받아 주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훈련,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을 여기에서 충실하게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아직 우리들의 장막집 생활이 계속되고 있다면, 아직 훈련이 더 필요한게로구나 생각하시고, 이 점을 중점적으로 염두에 두고서 힘써 살아야 하겠습니다. 물론 우리 자신의 생각과 의지만으로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주님의 도움을 받으십시오. 그것이 우리를 모든 연약함에서 강함으로, 모든 거짓과 어리석음에서 참되고 어엿함으로 변화케 하는 유일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서 있는 자리가 어쩌면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를 훈련일 수 있습니다. 주님께 받은 사랑과 섬김을 나눠보십시오. 그것이 승리하는 삶의 구체적 실증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십니다. 주님을 향해 손을 내 미십시오. 샬롬 샬롬.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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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28(2000.11.5, 주일)
성경말씀 : 잠 28:16.  
찬송 : 405장.
제목 : 거룩한 욕망. 

1.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처럼 신비한 것이 또 있을까요? 오늘 제가 제목으로 삼은 욕망이라는 말에 대해서 우리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사용해 오곤 하지 않았습니까? 차라리 욕심 없는 마음이 좋은 말처럼 생각해 왔었지요. 그런데 앞에다 ‘거룩한’이란 수식어를 붙이니까, 어때요? 말의 빛깔이 고와지고, 향기가 풍기는 것 같지 않으세요? 요사이 묵상하면서 제 주변 얘기를 많이 드렸는데, 혹시 그런 얘기가 마음에 부담이 되셨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하루 이틀 얘기할 내용이 아닌데 말예요. 그러나 제겐 속셈이 있었어요. 자칫 무미건조한 설교조(?)로 색칠할 수도 있는 때문에, 저의 사람 냄새가 이런 문제를 예방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2. 러시아의 사상가였던 베르쟈예프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욕망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본능적인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적인 욕망이라고 했습니다. 본능적 혹은 생래적 욕망은 단순하면서도 분명한 내용입니다. 목이 타면 물을 마시고 싶고, 배고 고프면 밥을 먹고 싶어합니다. 청년이 되면 이성이 그리워집니다. 이런 욕망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본능적이어서 일단 들어주지 않으면 빗나갈 수 있는 성질이 있습니다. 빅톨 위고의 역작 [레미제라불]에 나오는 주인공 짠발짱은 배가 너무 고파서 빵집 진열장의 빵을 훔쳐먹었습니다. 이런 불행한 일들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소위 지도자들은 관심을 기우려야 할 것입니다. 절대 빈곤한 사람들이 생기면 그들을 사회가 책임지고 돌봐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폭동이 일어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창녀를 범죄시 하면서도 허용하는 쪽으로 예외 규정을 두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가정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입니다. 이를 전면적으로 규제한다면, 건강한 가정들이 큰 위험을 감수해야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능적인 욕망은 무리하게 통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회가 제도적으로 이를 잘 교육하고 이해시키면서 소위 공동의 선을 바탕에 깔고 감싸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윤리적인 욕망이란 것에 대해서 진지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윤리적인 욕망이란, 힘에 겨워하는 노인이나 임산부를 보면 자리를 양보해 주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가난한 이웃을 돕고 싶다는 마음이며, 전혀 가진 것이 부족한 사람과 나눠 사용해야 한다는 의무감이며, 함께 살아야 한다는 의식을 말합니다. 오늘 저는 미국 재단(American Fund)이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마을이나 교회 혹은 학교에 많은 돈을 기부해서 의미 있게 사용해 달라고 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1998년 통계로, 이런 일을 하는 재단이 46,832개나 되고 그 총 자산만 3,850억 5천만 달러가 된다고 합니다. 장래가 밝은 젊은이를 가르쳐 주도록, 돈이 없어 질병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을 살려내도록,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쌍한 환경의 사람들을 돌보도록, 기꺼이 돈을 희사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너무도 낯선 얘기가 세상 저쪽에서는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한 대학교수께서 주례를 부탁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통장 번호를 알려주면서, 주례 사례금으로 일금 100,000원을 입금시키라고 하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돈이 모이면, 가난한 농어촌 후배들의 등록금으로 도와주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좋은 생각]이라는 통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눈먼 돈(?)이 생기면 거기에 넣어, 매달 두 곳을 정기적으로 돕던 일이 그리 힘들지 않게 되었고, 남편을 잃고 두 딸과 병든 시모와 시누이를 돌보는 가정을 돕는 일이 훨씬 쉬워졌습니다. 지금은 그 통장을 볼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즐거운지 모릅니다. 누군가를 돕고 싶다는 마음, 그것이 윤리적인 욕망입니다. 이런 욕망이 우리의 삶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든든히 자리잡고 있을 때, 우리의 삶은 풍성해 지고 아름다워진다고 믿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욕망을 가지도록 격려하고 후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가 앞장서서 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모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윤리적인 욕망을 실천할 수 있어야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3. 거룩한 욕망, 그것은 윤리적인 욕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시대에, 자신보다 더 힘겹게 살고 있는 이웃을 생각한다는 것이야말로, 꼭 필요한 욕망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저마다 힘들다고 원망 불평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신앙인으로 얼마나 좋은 말씀들을 많이 들어 왔습니까? 그러나 정작 들은 대로 실천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닙니까? 듣고도 행치 아니하는 신앙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헛수고와 같은데 말입니다. 제가 방문했던 어떤 미국인 가정에는 거실에 항아리들이 몇 개 놓여 있었습니다. 그 항아리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고아를 위한 헌금’, ‘한국 교회를 위한 헌금’, ‘부모님을 위한 헌금’ 이라고 말입니다. 그 분들이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항아리에 사랑의 마음을 채워 넣고 있었습니다. 한 순간의 기분으로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생활 속에서 사랑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나보다 더 연약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어떤 어려운 형편에서도 낙심치 않을 사람입니다. 그는 그 자신의 마음 안에서 피어나고 있는 아름답고 향기 나는 꽃 때문에, 모든 절망과 슬픔까지도 다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의 마음속에 끊임없는 사랑을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욕망이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에 가득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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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27(2000.11.4, 토요일)
성경말씀 : 잠 28:1-4.  
찬송 : 327장.
제목 : 죄에서 떠나라. 

1. 오늘도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2. “어둠 속에 떨지 말고, 자수하여 광명 찾자.” 해 묵은 선전 글귀가 아직도 그대로 붙어 있는 시골을 다녀왔습니다. 아무도 보는 이 없는데도 불안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모습 때문에 죄인을 찾아내는 지도 모릅니다. 저 역시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육군에 복무하다 1967년 여름 첫 휴가를 나왔고, 꿈꾸는 대학을 구경하고 싶어서 서울을 방문하였습니다. 마음속에 꿈을 담아 넣어 두기만이라도 한다면 시험공부를 하는데 큰 힘이 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기왕 온 김에 중앙청이며 이런 저런 구경도 좀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세종로를 따라 안국동을 향해 돌아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2,30미터 전방에 헌병이 서 있지 않습니까? 헌병을 보기가 무섭게 저는 뒤로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오던 길을 거슬러 내려가고 있었지요. 내가 왜 이러지? 그럴 필요 없는데. 마음속으로는 그런 말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그저 헌병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그런 행동을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그 이후에 어떻게 됐겠습니까? 헌병은 곧바로 저를 불러 세웠고, 헌병 초소로 끌려들어 갔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질문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아무 문제가 없는 정당한 휴가병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왜 자기를 피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당시 어머니에게서 받은 쌈짓돈 300원을 기부하고서야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심리 상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분명한 것은 겉으로 보아선 잘못한 일이 없었습니다만, 마음으로는 제가 헌병을 미워했고, 싫어했던 것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제 악한 감정이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 셈이지요. 그리고 그 헌병 역시 그 점을 알아냈던 것입니다. 마음을 들킨 행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3. 죄라는 말을 우리 기독교인들은 많이 사용합니다. 이 말은 성경에서 가장 많은 낱말일지도 모릅니다. 죄를 안고서는 마음이 편안할 수도 없고, 하는 일도 즐거울 수 없으며, 일의 결과도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가 무엇이기에 우리들 인생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것입니까? 성경은 죄를 “표적을 일탈한 화살과 같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뜻을 가진 낱말을 죄라고 합니다. 목표를 빗나간 화살, 제구실하지 못하는 일들, 할 일을 다하지 못하는 것, 등 등.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죄와 무관하십니까? 저는 어제 고향을 다녀왔습니다. 추석에도 내려가지 못했던 고향, 아버지 어머니가 함께 누워 계신 산소도 둘러보고 싶고, 저희 아홉 형제 자매의 맏이 되는 형님이 낼모레 장로로 장립하게 되셨고, 제 바로 밑 제부가 권사님이 되셔서 축하도 드려야 겠기에 겸사 겸사한 오랜만의 시골 방문이었습니다. 고향 길을 걸으면서, 부모님의 묘지에서, 그리고 형제들을 만나면서 저는 ‘내가 죄인이구나.’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도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신 부모님을, 세상을 떠났다고 해서 그 은혜까지 깡그리 잊어버린 체 살아왔음을 깨달았기 때문이고, 힘들게 살고 있는 누이가 있는데, 나 살기 바쁘고 힘들다고 모른 체 살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제 구실을 하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해 아래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부정하면 할수록 죄인입니다. 죄는 연쇄적으로 죄를 만들어 내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죄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게 분명합니다. 불가(佛家)에서는 마음속에 있는 더러운 생각들을 다 씻어낼 수 있는 듯 가르칩니다. 이른바 좌선(坐禪)을 통해서 108번뇌를 다 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귀신 하나를 내 쫓아내고 나니 일곱 귀신을 더 데리고 들어오게 된다(눅11:24-26)고 말씀합니다. 죄악을 물로 씻어 버릴 수도 불로 태워 버릴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성경의 말씀입니다.

4. 방법은 있습니다. 악을 내 몰아내는 방법이 아니라, 주님을 우리 마음에 모셔들이는 전향적인 방법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청소하려는 자세를 소극적이라고 한다면, 주님을 모셔들이는 일은 적극적인 방법입니다. 물론 이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마음에 주님을 모셔다 놓는다 함은, 주님께 모든 주도권(initiative)을 양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 새벽기도회에서 부른 찬송 327장은 너무도 적절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도 함께 불러 보시길 바랍니다. “죄 짐을 지고서 곤하거든, 네 맘속에 주영접하며, 새 사람 되기를 원하거든 네 구주를 영접하라.” 그렇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마땅히 할 일을 즐거움으로 짊어지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여러분 자신의 발버둥치는 노력이 아니라,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는 일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일이고, 주님의 생각을 겸손히 듣는 일입니다. 매 순간마다 그런 자세를 가져 보십시다. 얼마나 감사할 일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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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26(2000.11.3, 금요일)
성경말씀 : 잠 27:23-27.
찬송 : 376장.
제목 : 삶의 기쁨과 보람은 가까이에 있다.          


1. 주님의 은총이 오늘도 여러분 위에 내리심을 감사하는 하루가 되시길 기도 드립니다.

2. 어제 저는 참으로 뜻있는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신갈에서 용인으로 가는 고갯길 오른 편에 위치한 도립병원 노인 전문병원이란 곳에서 1주년 기념 행사를 가졌는데, 그 행사를 주관하는 사람들이 제가 가르치고 있는 루터신학대학교 학생들 40여명이었습니다. 그들 중 8명은 매 주일 두 차례씩 그 곳에 입원하고 있는 치매 노인들을 위해 목욕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 선한 사마리아 회를 여러 차례 소개해 주었는데, 그것도 그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제가 설교를 하였고, 학생들이 준비해 간 노래와 율동 그리고 연극으로 한 때나마 그들을 위로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거기 계시는 분들은 대부분이 사랑하는 가족들에게서 버림을 받은 무연고 노인들이었습니다. 일 평생 기르고 가르치는데 사랑을 다 쏟았던 자녀들이, 미국으로 훌쩍 떠나버리고 말았다던 지, 자신들의 주소지를 옮겨버림으로 세상에 홀로 떨어진 듯한 배신감을 품고 세상을 살고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이런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껍데기만 남은 노인들과 함께 손을 잡고 노래부르면서 마음속으로부터 한없이 서러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의지할 데 없는 이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베풀고 있는 젊은이들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또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는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자식을 아낌없이 내놓을 만큼 우리들을 사랑하고 계신다고 전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사랑 가운데서 창조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의 불쌍한 모습을 눈뜨고는 바라보실 수가 없으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을 느끼고 용기와 희망을 갖고 우리 서로 사랑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장은하 집사님이 60개의 사탕봉지를 예쁘게 포장해 주어서 그것이라도 드릴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릅니다. 감사드립니다. 

3.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자신의 삶에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맡은 일을 주목해 보고 관심을 가져보면, 거기엔 생각보다도 훨씬 더 큰 기쁨과 보람이 있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속담을 실제 생활에서 무의식중에 적용하곤 합니다. 내가 하는 일보다는 남이 하는 일이 더 근사해 보이고, 내가 사는 가정보다는 남의 가정이 더 행복해 보인다는 식으로 생각할 때가 많다는 말입니다. 물론 객관적인 시각에서 이런 비교가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의 삶은 객관화할 수가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는 말도 있고, “위대한 삶은 좋은 조건에서보다는 나쁜 조건에서 시작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행복은 극히 주관적인 것이 아닙니까?  남보다 좋은 조건인데도 늘 불행한 사람이 있습니다만, 반대로 자랑할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삶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때문입니다. 고기 반찬을 먹으면서도 불행할 수 있고, 나물 반찬을 먹고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삶을 이해하고 느끼는 사람의 정신에 전적으로 달려있는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은 좀 실제적인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맡은 직분에 대해서 주목하고 관심을 기우려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감사할 것과 보람된 것을 많이 찾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털은 네 옷이 되며, 염소는 밭은 사는 값이 되며, 염소의 젖은 넉넉하여 너와 네 집사람의 식물이 되며, 네 여종의 먹을 것이 되느니라.” 그렇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남의 떡만을 부러워하느라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 너무도 소홀히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맡겨 주신 일들의 소중함을 아직도 느끼지도 깨닫지도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저의 모친이 살아 계실 때, 늘 들려주시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다. 가난했지만 행복하게 살았다.”고 하셨습니다. 네 살배기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남편이 곁을 떠나갔습니다. 아홉 남매 중 위로 아들과 딸 둘만 결혼시켰을 뿐 아직 일곱이나 줄줄이 남겨두고 말입니다. 어린 아들을 들쳐 없고 논으로 밭으로 심방대원으로 쉬지 않고 달음질 하셨습니다. 당신은 항상 감사의 기도를 드렸고, 자식들이 한결같이 신앙의 가정을 잘 이루어 사는 것으로 행복해 하셨습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성가대 지휘자, 성가대원, 등등으로 교회를 섬기는 모습을 늘 흐뭇해 하셨습니다. 일생동안 숱한 어려움을 겪으셨지만, 모든 염려와 걱정을 주님께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4. 행복은 가까이에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한 복판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그 행복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숨바꼭질을 해 보셨지요? 보물찾기도 해 보셨지요?  오늘 그 즐거웠던 시절을 생각하면서 꼭꼭 숨어 있는 우리의 행복을 찾아보시면 어때요?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전해 주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기쁨과 즐거움을 넘어서서 위로와 평안 그리고 소망과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한다면, 여러분은 참 귀한 분이십니다. 여러분은 참 행복한 분이십니다. 이런 느낌으로 오늘을 짊어져 주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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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25(2000.11.2, 목요일)
성경말씀 : 잠 27:21.
찬송 : 330장.
제목 : 칭찬은 열심과 용기를 주는 좋은 자극제이다.

1. 오늘도 주님과 함께 하시는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2. 우리는 칭찬하는 일에 있어서 참으로 인색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부모된 입장이라면, 여러분의 자녀들에 대해서 칭찬을 아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물론 마음에 차지 않는 부분들이 더러 눈에 띌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그럴수록 칭찬이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칭찬할 꺼리가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마음을 조금만 열면 무한정한 꺼리(?)들을 찾아낼 테니까요. 밥을 잘 먹는 것도 고마운 일입니다. 칭찬하십시오. 학교에 꼬박 꼬박 다니는 것도 고마운 일입니다. 칭찬해야 합니다. 용돈이 적을텐데도 크게 불만스러워하지 않고 지내는 것도 고마운 일입니다. 반드시 칭찬해야 합니다. 성질 나쁜 친구들을 멀리하고 그런 대로 좋은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 또한 칭찬 깜입니다. 노랑머리로 물들이지 않은 것도, 말씨가 부드러운 것도, 교회에 잘 나가는 것도, 심지어 손톱을 입으로 물어뜯지 않는 것도 감사한 일이고 칭찬 받을 일입니다. 

3.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서 자신이 하는 일에서 인정을 받고 싶어한다고 합니다. 그런 때에 자신에 대해서 자신감(自信感)을 가질 수 있고, 보람을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제 얘기를 해서 부끄럽습니다만, 저 역시 부모님에게서 많은 칭찬을 듣고 자라났습니다. “너는 말이 분명해서 좋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입속에서 어물거리지 않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 좋다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현상이 저에게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제가 말을 하려고 하면 무의식적으로 ‘말은 분명히 해야 하는 건데’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너는 거짓말을 안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제 안에서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그런 노력을 하게 되더라는 말입니다. 칭찬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연약해 질 수 있는 우리를 강하게 떠 받쳐주는 버팀목 역할도 하더라는 말씀입니다. 

4. 우리 주변에는 칭찬을 잘 하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 분들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모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에게 가면 자신감을 얻을 수 있고, 사는 일이 즐거워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험담을 잘 하는 사람들 곁에는 언제나 싸늘한 냉기만 감돌게 마련입니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 하느니라.” 그렇습니다. 뜨거운 도가니에서 제대로 된 은을 얻을 수 있고, 풀무로 달굼질한 금이 순도가 높아 제 값을 받게 되듯, 칭찬을 듣는 삶이 계속될 때 그 삶은 더욱 아름답고 자랑스런 모습으로 만들어져 갈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서 칭찬할 꺼리를 늘 찾으셨던 것 같습니다. 특히 자신을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세리장 삭게오에게서, 겸손한 회당장에게서, 혹은 이방인 백부장에게서 말입니다. 

5. 오늘 우리도 누군가를 칭찬할 수 있습니다. 우선 여러분의 가족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마십시오. 자들에게 실험해 보십시오. 고쳐야겠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이 있다면 비난하고 나무라기 전에 칭찬할 구석을 열심히 찾아서 해 준 후에 나쁜 부분들은 수위를 낮게 조절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이런 관심을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의 주변들이 차츰 차츰 바뀌어 갈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확신을 가지고 계속 밀고 나가신다면, 틀림없이 기쁨의 단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물론 자기 자신에게도 칭찬하십시오. 저도 제 자신에게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큰 힘을 얻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너무 과장해서는 하지 마십시오. 약이 아니라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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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24(2000.11.1, 수요일)
성경말씀 : 잠 27:1.
찬송 : 453장.
제목 : 우리에게 내일은 있는가?

1. 주님의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2.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사건들은 하루도 멈출 수가 없는가 봅니다. 신용금고 불법 대출 사건의 핵심에 있다고 생각되던 장래찬씨가 자살을 했다고 전합니다. 그는 금융감독위원회 비은행 검사1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신용금고쪽의 불법 거래를 감독하던 분이었다고 하는데, 그 자신이 불법 거래를 눈감아 주면서 검은 돈을 거래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평소에 직원들 앞에서, “자신은 평생 먹고 살 돈을 준비해 두었기 때문에, 돈의 유혹에 흔들릴 사람이 아니라”고 입버릇처럼 자신의 청렴을 과시해 왔다고 합니다. 아무튼 52살의 나이에 제 손으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우리를 슬프게 하고, 이런 어리석은 일들을 언제까지 보아야 할 찌가 안탑깝습니다.

3. 우리에게 내일은 있는가? 심각하게 생각해 볼 주제입니다. 토풀러란 미래학자의 말이 새삼스럽게 떠오르리라 생각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규정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삶의 기반이 취약한 것들로 구성된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을만한 것이 무엇입니까?
앞서 언급했던 한 공무원의 허풍 섞인 말에는 아마도 먹고살기에 충분한 돈만 있으면, 우리의 미래가 보장을 받고 있는 듯이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를 자기 스스로 입증이라도 하듯 유명을 달리하지 않았습니까? 3대 건설회사 중 하나인 동아 건설이 퇴출되었다고 보도하고 있고, 또 하나인 현대 건설이 어제 1차 부도가 났으나 간신히 메워서 한숨을 쉬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미래가 있습니까? 

4. 우리는 우리 인간의 정신 속에 물질적인 비중이 너무 크게 자리를 잡고 있는 것에 대해서 주목해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물질에 대한 과대한 기대 역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물질이란 삶의 내용도 아니고 더군다나 목적은 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물질은 삶의 내용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가 물질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은 그런 삶으로 지향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방향성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넉넉한 물질이 우리의 삶을 편하고 윤택하게 만들어 주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역시 어느 한계에서만 그렇다는 것이지 전부가 그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 정신을 맑게 하고, 인간의 순수한 성품을 끌어내려고 한다면, 이런 물질로부터 오히려 탈출하지 않으면 안될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요사이 현대인들의 눈으로는, 사람 그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재력을 먼저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사람이 가진 성품이나 인격보다는 그 사람의 옷이나 향수에서 풍기는 돈 냄새에 관심을 기우리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껍데기만을 바라보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이라는 말입니다.

5. 우리의 미래는 어둡습니다. 적어도 물질 지향적인 가치관이 지배하는 한은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고 말입니다. 내일 일 보다는 오늘 해야 할 일에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우리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내일 가서 해도 늦지 않을 염려를 미리 끌어 당겨서 할 필요까지 없지 않느냐고도 들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무게는 매일 매일 힘겹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과, 그래도 그 힘겨운 삶을 짊어지고 나갈 수밖에 없는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미래는 항상 어두움 속에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담 이래로 한 번도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이며, 죄 아래 있는 삶의 현실입니다. 

6. 그러나 우리에게 미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미래입니다. 이른바 기독인의 존재 방식이라고 불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음은, 비록 어둠의 시간을 살아가지만,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감사로 채워갈 시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제 한 젊은 신학생을 만났습니다. 한 주간에 두 차례나 시간을 만들어서 치매 노인들을 찾아가서 목욕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요사이 이런 젊은이가 있을까? 정말 새삼스럽게 그의 얼굴을 주목해 보았습니다. 우리에게 미래가 있습니다. 어둠 가운데 살고 있지만 그 어둠을 사랑으로 보듬어 주는 맑고 아름다운 인간이 숨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은 그 젊은이들이 매 주일 만나는 노인들을 찾아가기로 약속했습니다. 소망의 말씀 사랑의 말씀 그리고 믿음의 말씀을 준비해서 말입니다. 우리에게 미래가 있는가? 저는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선한 사마리아인들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미래가 있습니다.”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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