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114호(2020. 11. 7 토요일).
시편 시 112:4-7.
찬송 330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미안하다, 친구야> 그렇잖아도 네가 조금 냉랭한 목소리로 그만 이야기하고 싶다면서 전화 끊었을 때, 정말 내 발등을 찍고 싶더라, 아니 죄 없는 발등 대신에 부랴부랴 전화를 한 내 손가락과 부주의한 말을 마구 내 뱉었던 입을 때려줘야겠지. 변명조차도 듣고 싶지 않겠지만, 그래도 몇 마디만 할게. 아마 마음이 너무 급했던 것 같애. 이러저러한 일 때문에, 어쩌면 너의 식구들이 집 내놓고 부모님 집으로 들어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들려와서 밀이야. 그래서 사실 그날 그 모임 끝까지 앉아 잇지도 못해서. 그래 네 말대로 소화기집어 들어서 그 소문의 불을 확 꺼버려야 했는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러지는 못했어. 그냥 남의 이야기라고, 남의 불행이라고, 겉으로는 걱정하는 척하면서도, 재미나게 포식하는 눈치가 보이 길래, 불편해져서 그 자리를 피하기만 했지. 그런데 그 순간, 너의 얘기들이 완전한 헛소문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 뭐니. 우선은 언젠가부터 네 연락이 뚝 끊겨 버리기도 했고, 전화해도 받지도 않고 그랬잖아. 아마 그래서 다급한 마음에 확인부터 하고 싶었던 것 같애. 그런데 내 생각이 조금 짧았어. 결론적으로는 네가 들어봐야 하나도 영양가 없는 소문만 전해 준 꼴이 돼 버렸으니까. 네 말대로 최선을 다해서 해결해 나가고 있는 중에, 그런 소문이 떠돌고 있다는 거, 알아봐야 마음만 더 상했을 거야. 그런데 가장 가깝다는 나까지 나서서 이런 말이 떠돌고 있던데, 사실이냐고 묻든 꼴이 됐으니, 정말 할 말이 없구나. 백 마디의 말이 단 한 번의 손길을 이길 수 없다는 거, 알면서도 매번 잊어버린다니까. 힘들게 버텨나가는 너의 등의 짐 하나도 덜어주지는 못하고, 소문이라는 짐 하나를 더 얹어 줘서 널 무너트린 것 정말 미안해. 그리고 반성하는 의미에서, 이 자리에서 꼼짝도 안 하고 널 기다릴게. 꼭 다시 내 이름을 불러줘. 부탁이야.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년 11월 5일 방송> b.
2. “이스라엘은 다시 꽃 피리라(1-9절)”을 읽었습니다. “사람은 백번 달라진다.” 어릴 때 어른들에게 자주 듣던 말씀인데, 그 출처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사람의 일생이란 변화무쌍하다는 뜻일 수 있고, 아무리 못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전혀 다른 새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함부로 속단하고 평가해서는 안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예는 성경에도 더러 나옵니다. 십자가상의 한 강도가 그랬고, 아브라함 품에 안겼던 거지 나사로도 그런 사람입니다. 문제는 그런 변화된 삶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느냐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돌이킴 회개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특정인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라, 누구든지 회개하는 사람이 되기만 하면 변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변화된 삶이란 삶의 방향, 그리고 생각의 방향을 바꾸기만 하면 가능한 일입니다. “나는 안 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 “나도 할 수 있어.”라고 말과 습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저는 학창시절에 내촌감삼 선생이 쓰신 <一日三省>이라는 책을 틈날 때마다 읽곤 했습니다. 공자의 제자 증자(曾子)의 말로 “나는 날마다 세 가지 일로 나 자신을 반성하니, 남을 위하여 일을 하면서 진심을 다하지 않았는가, 벗과 사귀면서 진실하지 않았는가, 배운 것을 익히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입니다. 일일삼성, 하루에 세 가지 일을 반성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회개의 삶을 살아야 사람노릇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은 물론 크리스천인 우리들 역시 회개의 삶이 요청됩니다. 그것을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께로 삶의 방향을 돌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방향 전환을 한 후 계속 그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가끔 한눈을 팔다가 채찍을 맞고 돌아서는 짐승처럼 될지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채찍을 맞는 특권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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