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772(2025. 5. 23. 금요일).

시편 119:61-63.

찬송 36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프랑스의 여성 소설가 콜레트(Sidonie-Gabrielle Colette/1873.1-1954.8)는 이런 명언을 남겼다. “희망은 비용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한 중학교 교사는 한 번도 자신의 학생들에게 희망에 관한 얘기를 해 본 일이 없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교사들은 희망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가르친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2. “신념의 생활(13-23)”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사용하는 말의 의미를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중에는 신앙과 신념과 같은 용어입니다. 우선 신념이란 자신의 노력이나 경험적으로 얻은 가치와 기준에서 얻은 확신이라고 한다면, 신앙은 주로 종교적 맥락에서 하나님이나 초자연적인 존재를 믿고 신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보다 쉽게 말하면, 신앙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은혜이며, 신념은 자신의 노력과 생각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서 종종 신념이 작용할 때가 많습니다. 제가 중학생 때까지 고향 교회를 다녔는데, 가끔씩 서울에서 대학 공부를 하시는 선배님이 오셔서 수요 기도회 등에서 설교를 하셨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신념으로 말씀하시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과 관계된 내용들이 그랬습니다. 선배님은 그 당시로써는 매우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는데, “하나님이 만드신 것들은 대부분이 다 귀하고 좋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좋은 것들을 바르게 사용하지 않고 인간 중심적으로 이기적으로 비뚤어지게 사용하는데서 생기는 것들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신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념에 관한 문제들을 취급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주로 음식에 관한 내용인데, 더러운 음식(개역 개정에서는 속된 음식)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취급하는 내용은 다양하겠습니다만, 제사 음식, 제물로 올려졌다 푸줏간에 나온 소머리, 또는 제사를 지내고 잡은 생선들은 속된 것으로 먹지 말아야 한다는 현실에 대한 바울의 신념을 말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것들로 인해서 소중하게 유지하고 지켜야 할 형제간의 관계를 망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형제를 비판하고 미워하고 소원/疏遠하게 방치하는 것들 말입니다. 저 역시 주초/酒草 문제에 대해서 예민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목회자가 된 뒤에도 그것을 끊어버리지 못해서 애쓰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동료를 한심하게 생각했었으니 말입니다. 사도의 신념은 아주 분명했습니다.

    첫째는 소위 세속적인 음식에 대해서 벗어던지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비본질적인 문제로 힘들어하는 이들 역시, 주님께서 생명을 바쳐 지켜주시고 구원하신 형제자매들이라고 말입니다. 둘째 그러나 동시에 그런 세속적 음식에 대해서 자유롭지 못한 연약한 신앙의 사람들 앞에서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조심하자는 것입니다. 가령 이런 비본질적인 것들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담배도 피고 술도 마실 것입니다. 대부분의 서양 기독교인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주초/酒草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한국 크리스천들 앞에서는 신앙적 양심적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할지라도, 삼간다는 성숙한 신념을 가져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제가 개척교회를 하였던 부산에서는 신 구교 지도자들이 연합해서 <일치회>라는 것을 결성해서 연합활동을 하였습니다. 그 중심에는 독일에서 온 로마 가톨릭 선교사 하 안토니오라는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그 모임에 가면 신부님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주초를 하였고, 권하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었지만, 오래 만나다 보니까 전혀 그 같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세속 음식에 대해서 자유로운 형제를 비난하기도 쉽고, 그 문제에 민감한 다른 형제들 앞에서 주저함 없이 먹고 마시는 그런 자세도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사도는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771(2025. 5. 22. 목요일).

시편 119:58-60.

찬송 34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이런 말을 그의 대표작 <노인과 바다>에 남겼다. "그래도 사람은 패배하기 위해 창조되지 않았다." "인간은 파멸할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 인간이 가진 가능성과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행동들에 대한 찬가. 비록 인간은 불완전하지만, 그런 인간이 가진 무한한 잠재력과 그것의 긍정적인 방향으로서의 발현을 믿는 사상이라 할 수 있겠다. 인간 비판자들은 인간의 탐욕이나 이기심, 어리석음 등을 주장하지만, 인간에게는 그것을 타개할 수 있는 긍정적인 가능성 또한 있음을 역설하는 게 고무적이다.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2. “형제를 심판하지 말라(1-12)”을 읽었습니다. 우리 한국 개신교에서는 먹고 마시는 것에 있어서 예민하다 못해 경기가 날 정도로 집착한다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내력은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현상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런 문제의 한 복판에 믿음이라는 것이 척도처럼 이해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위 믿음이 있다는 사람들은 먹고 마시는 문제에 있어서 상당히 자유로웠으나, 믿음이 적은 이들은 채소밖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제사 음식, 곧 제사를 지낸 후에 이웃 사람들 사이에 나눠먹는 풍습은 근동 아시아 지방에서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상당히 많은 크리스천들이 우상 앞에 차려 놓았던 제사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은 우상숭배와 다름없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 밖에 어떤 날들은 귀하고 다른 날들은 천하다고 하는 가르침도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이나 절기와 월삭을 중히 여기는 것에서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밖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주초문제가 여전히 교회 안에서 심각하게 취급되고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저의 형님 친구 분이 담배를 상습적으로 피울 뿐 아니라, 막걸리를 한 잔 마셨다고 해서 성찬 정지 6개월 처분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친구관계가 좁혀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35개월 복무했던 광주의 기갑학교 교육대대에서는 술 담배를 하지 않는 괴물 같은 놈이라고 해서 고참들에게 많은 바보 병신 취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문제는 성경이해에 있어서 잘못 가르친 교회 지도자들의 탓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것보다는 비본질적인 것에 너무 함몰되어 있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성경 해석의 1차적인 고려 사항인 삶의 배경을 무시했다는 점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 는 건강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든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우리나라 개신교인들 가운데서는 비본질적인 요소들, 가령 성경에서 그런 용어를 찾을 수 없다 해서 삼위일체설이나 사도신경을 사용하지 않는 일부 교파들에 대해서, 그리고 마리아 평생 동정녀설이나 성인 숭배사상 등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은 물론 이단으로 정죄시 하는 현상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이해나 해석은 각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역사적 배경이나 신학적인 견해의 차이에서 오는 것인데, 그것을 판결해 주실 분은 하나님 한분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는 이들을 향해서 이단으로 정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비본질적인 견해 차이로 본질적인 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성경 해석의 문제인데, 우리 기독교인들은 세상 한 복판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우상과 무관한 것을 다 피해야만 한다면, 우리는 모두 굶어죽거나 아무 것도 몸에 걸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우상에게 제물을 드리고 만들거나 행하는 것들인 때문입니다. 이런 소극적인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의 주인이 되시고, 창조하신 것들이라는 확고한 신앙만 있다고 하면, 모두 다 극복할 수 있는 사항들이라고 말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 심각하게 일어났던 우상의 제물을 먹어야 하느냐 여부에 대한 문제는 그 시절에는 소 한 마리를 잡으면 수 십군데 제사상에 올렸다가 푸줏간에 나왔던 것입니다. 명백한 우상의 제물입니다. 우리가 먹는 생선들은 거의 대부분 풍어제라는 제사를 드리고 잡아온 것들이고, 우리가 입는 옷감이나, 타고 다니는 자동차 등등은 모두 제사를 지내고 운행하는 것들이라는 말입니다. 다행히 주초 문제가 건강에 나쁘다고 과학적으로 증명된 이상, 인간의 삶에 백해 무익하다는 것으로, 금하라 말라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렇듯 성경의 배경이나 그 성경을 해석하는 우리 시대의 배경을 고려해서 성경의 참된 의미를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770(2025. 5. 21. 수요일).

시편 119:55-57.

찬송 36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R. A. 토레이(1865-1928) 회중 교회 목사님이 설교시간에 수년 전 미시간 호수에서 물에 빠진 23사람을 건져내 살려낸 예화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구해준 의인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렇듯 감사가 실종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널려 있습니다.

 

2. “권위에 대한 복종(1-7)”, “사랑은 율법의 완성(8-10)” 그리고 단정한 처신(11-14)”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마침 대선을 며칠 앞에 두고 있어서 시기적으로 적당한 주제가 아닐까 싶어서 선택한 것입니다. 아마도 1972년에 유신이 발표되고 기독교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총리였던 김종필 씨가 의례적으로 롬 13:1-7을 꺼내서 세속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성경의 근본정신인양 설법(?)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 교회 안에서도 이 주제가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어떤 주제에 대한 것이든 올바른 해석을 위해서는 그렇게 말하는 상황 혹은 배경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체적인 맥락에서 해석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말입니다. 본문에는 두 종류의 권위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권위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위임받은 권위입니다. 이것이 맥락적 이해에서 놓쳐서는 안 될 중심점입니다. 그리고 공통의 용어 권위라는 말에 대한 해석입니다. 헬라어로는 εξουσια/ 엑수시아를 사용하고 있는데, 본문에서 그 정확한 의미는 인간 세계의 당국자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세 가지 분명한 key word가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를 가장 분명히 밝히는 대목이 세속 권위의 대표 격은 통치자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라는 점입니다(4). 그러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그에 따라 권위를 행사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세상의 질서를 위해서 이런 심부름꾼들에게 권세를 위임한다는 점입니다. 그 심부름꾼들은 칼을 가지고서 백성들에게 벌을 줄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벌을 대신 행사하며, 다만 양심을 따라야 하고,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세상 통치자들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다는 점입니다. 국세나 관세와 같은 세금을 내는 일, 그리고 통치자들을 두려워하고 존경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다만, 그것은 억지로가 아니라, 충분히 그럴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을 때입니다.

    실제로 법과 법의 집행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가령 흑룡강성은 중국의 23개의 성/중의 하나인데, 흑룡강성의 오지/奧地에 있는 지역에는 새로운 법령이 내렸음에도 50년 동안 옛 법령이 그대로 시행되고 있다 했습니다. 그러니 정규 시간표를 가진 국가가 운영하는 열차도 공식적인 정류장인 아닌 곳 아무 곳에서나 그 지역 유력 유지가 세울 수 있는 초법적인 권세를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지역에서는 사법권을 가진 관리의 힘은 무소불위라 할 수 있없습니다. 우리는 1세기의 근동 아시아의 세계를 염두에 두고서 이 본문을 읽어야 합니다. 법치주의를 최고의 통치개념으로 내 세우는 로마 당국에 맞설 수 있는 세력은 그 누구도 없던 시절 말입니다. 이제 막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예수교는 무작정 세속 권위에 대항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세속 권력에 대해서 유약한 자세를 취했던 것입니다. 그 막강한 힘을 인정해 주면서, 동시에 기독교적인 목적과 가치를 말미에 덧붙이는 식으로 말입니다. 세속 권세자들을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라는 표현이나, 세속 권세자에게 복종하라고 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임명을 받은 자들이라면서 말입니다. 이런 편지는 감시가 따르는 내부적 편지였다는 점을 십이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유신 시절을 겪었던 대한민국의 상황이나, 노예제도에 버금가는 남미의 상황에서는 신앙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제한된 현실을 민중 신학이나 해방신학이라는 도구로 외칠 수 밖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따른 박해는 각오해야 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769(2025. 5. 20. 화요일).

시편 119:52-54.

찬송 54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발을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며 고운노래 귓전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노을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1950년대 부산에서 박화목 작사 윤용하 작곡으로 출생했으나, 1971년도에 문정선 노래로 유명세를 탔습니다. 1974년 전임 전도사가 되어 중구청 뒤 예관동 인쇄골목에 위치한 교회에 부임을 했을 때 유치원 교사들께 배운 노래였는데, 윤용하선생(1922.3-1965,7)의 요절로 더욱 애절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당시의 제 처지와 너무 닮았기 때문에, 아마 몇 달을 그 가사와 가락에 취했던 것 같습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활(1-21)”을 읽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현주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을 말한다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허공에 떠다니는 뜬 구름 잡는 그런 모호한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삶을 가르쳐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크리스천이란 그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살아있는 제물이어야 한다고 역설/力說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예배라고 말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크리스천의 삶은 그들의 삶 자체를 하나님께 드릴 제물이며, 그런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1-2). 그렇다면 바울이 강조하는 제물이 되는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첫째는 믿음의 정도에 맞게 분수에 따르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현주소가 어디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이 분수에 맞는지 여부를 통해서 가늠할 수 있습니다(3-8). 사도는 매우 흥미로운 현실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크리스천들은 제각기 다른 선물을 받았는데, 가령 예언하는 사람이 있는데, 믿음의 정도를 넘어서는 이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과장이 지나쳐서 허황에 가깝기까지 하였습니다. 봉사하는 은총을 받은 이가 있는데, 봉사에 전력해야 하는데, 그것을 딴 일에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가르치는 은총을 받은 이는 가르치는 일에 힘써야 하고, 격려하는 은총을 받은 이는 격려하는 일에 힘써야 하고, 남을 돕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은 순수한 마음으로 해야 하고,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경험에 의하면 선한 일에 나섰다가 힘들어 지치게 되면, 안 하느니 못하게 되기도 합니다.

    두 번째로 삶으로 제물이 되는 크리스천의 삶이란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그것은 건강한 모습을 발휘하는 것입니다(9-18). 곧 꾸준히 선한 일을 힘쓰는 일이며, 서로 남을 존경하고, 부지런히 주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희망을 품고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참고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딱한 형제를 모른 체 하지 않으며, 미워하는 사람들을 저주하지 말고 오히려 복을 빌어주는 일입니다. 천하다고 하는 사람들과 사귀고, 잘난 체하지 않으며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일에 힘쓰는 삶입니다.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란 없습니다. 세 번째 살아있는 제물이 되는 삶이란 크리스천다운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복수 대신에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는 일이며, 원수가 배고파하고 목말라할 때,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일, 곧 악에게 굴복하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일입니다. 어느 성도가 했다는 말인데, “순교보다도 더 힘든 것은 끝까지 살아서 주님을 따르는 삶이다.”는 말인데, 한 순간에 죽음으로 끝낼 수 있는 것이, 끝까지 참고 견디며 크리스천의 향기를 드러내기는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이런 희망과 용기를 가지는 것은, 우리들의 연약한 몸과 정신을 단련함으로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서 끝까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도우심을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날마다 유혹에 넘어지고 연약함으로 쓰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이것이 우리가 가진 신앙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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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68(2025. 5. 19. 월요일).

시편 119:49-51.

찬송 21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깊이가 있다는 것은 많은 것을 품고 있다는 것이며, 큰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며, 거친 물결과 험한 파도까지 다 겪은 뒤 여유를 잃지 않고 넉넉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완성된 채로 태어나는 인간은 없다. 날마다 조금씩 인격과 지성을 완성시켜 나아가라. 그래야만 훌륭하게 제 역할을 해 낼 수 있다. 그대는 깊이 있는 사람이 되어라.”

윤문원, 지혜와 평정, pp.146-147.

 

2. “새 생활의 인간관계(18-4:6)”작별인사(7-18)”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어느 사회에서나 피할 수 없는 것이면서 또 부담스러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관계 맺기라고 하겠습니다. 지금은 이사를 가고 없는 분이긴 합니다만, 저의 옆집에 아주 활달한 부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부인과 저의 앞집 부인 간에 고성이 오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칠 기미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뭐라고 훈수도 놓을 수 없고 힘들었는데, 다행히 앞집 부인이 제게 상담을 청해 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완곡하게 부탁을 드렸습니다. 좋은 관계를 맺으라고 말입니다. 그때 제가 사용한 방법은 제삼자인 옆집 부인의 장점과 단점을 느끼고 경험한대로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경우가 바른 점, 일하러 온 정원사나 지붕공사 인부들에게 하는 정중한 태도는 나무랄 게 하나도 없었다고 말입니다. 다만 버럭 하며 화를 내는 성질머리 외에는 좋은 분이라고 말입니다. 누구나 성질머리는 고칠 수 없으니, 서로 조심하는 경계선을 긋고 우선 휴전을 부탁하였습니다. 그렇게 조심조심하며 한 2년을 살다가 옆집 부인이 인천으로 이사를 가셔서 다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도, 유지하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제가 배운 것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큰 문제는 이웃에 대해서 부정적인 얘기를 많이 하는 경우입니다. 오히려 남들 앞에서 이웃의 좋은 점을 칭찬하는 것은 큰 점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매우 가까운 사이에서 가질 관계 맺기의 중요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부부관계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며,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둘째는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로, 자녀는 부모께 순종하는 일이며, 부모는 자녀들을 힘들게 하지 말고 잘 돌봐주라고 합니다. 셋째는 주인과 종과의 관계인데, 피차 질서를 지켜 정당하고 공정하게 대우하자고 말입니다. 우리에게도 영원한 주인이신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삶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분쟁이나 문제들은 그리 쉽게 타협이 되거나 조정이 되질 않습니다. 고집을 부릴 수 있고, 끝까지 힘자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두 가지를 권고하는데, 첫째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항상 깨어 있을 것과 기도할 것을 부탁합니다. 우리가 상투적으로 자주 사용하는 기도하시오.”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잠잠 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뜻을 말씀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주님!” 하고 운을 떼기만 해도 마음에 평화가 옵니다. 그 다음으로 기도는 지혜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맡기는 행위라는 점에서 큰 힘이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입장에 서 보는 일입니다. 두 번째 권고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대할 때로, 친절하게 유익한 말을 하며 적절한 대답을 하라고 권합니다. 낯선 사람들에게는 우선 친절하고 유익하다는 이미지를 주는 것이 중요하고, 최선을 다한 자세로, 대답할 수 있는 것과 대답할 수 없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입니다. 특히 신앙의 내용은 몇 마디 말로 간단히 해결할 수 없음을 솔직히 대답할 때, 오히려 진정성과 공감대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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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67.

시편 119:46-48.

찬송 23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불행한 사람은 갖지 못한 것을 사모하고, 행복한 사람은 갖고 있는 것을 사랑하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 교수 하워드 가드너의 명언이다. 많이 가져도 마음이 여유롭지 못한 사람과, 적게 가져도 마음이 여유로운 사람, 누가 행복한 사람인지, 그리고 누가 불행한 사람인지, 그걸 깨닫고 알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2. 부활절 다섯째 주일의 사도서간 요한 계시록 21:1-7을 본문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저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새롭게 살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원한 새로운 나라에서 살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떤 나라를 말하며, 또 그 나라는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요?

 

우리 시대 현대인들이 갈망하는 세상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라 합니다.

선거철이면 그 시대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삶의 기대치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한 때 우리나라는 3만 불 시대를 꿈의 목표로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서는 매우 소박한 구호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잘 먹고 잘 살게 하겠다.”는 아주 평범하지만 원론적인 구호가 그것입니다. 70년대 새마을 구호에서 들렸습니다. 동국대에 양주동박사가 있었는데, 그 분의 주례사에는 잘 먹고 잘 살아라.”는 말이 꼭 들어가 있었다 합니다. 그런데 덕담처럼 들리는데 사람들은 크게 웃었는데, 까닭은 제 욕심만 부리는 사람에게 하는 욕설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잘 사는 기준 중의 하나가 잘 먹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너무 많이 먹지 말고 적당히, 너무 맵지도 짜지도 않으며, 아무 것이나 덥석덥석 먹지 말고, 이렇게 제대로 잘 먹기만 해도 행복한 세상을 살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생긴 말이 밥이 보약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사람들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세상이었습니다(1-4).

성경에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한 순간도 예외 없이 세상을 섭리하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살피시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온갖 문제들로 고통이 가득합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악마/사탄이 침투했다 말씀하십니다(3:1-21). 물론 악마의 기원에 대해서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다만 악마가 하는 일, 인간을 유혹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동을 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문제를 더 많이 일어나게 하는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일인데, 곧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신 사랑과 자비는 풍성하지만,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일만 남아 있다는 것이 유대교의 쉐마가 가르치는 중심점입니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세상이었습니다(5-7).

새로운 세상을 말씀하시는 성경은, 재창조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스갯소리로 천국 문 앞에서 한국 여인들 때문에 긴 줄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얼굴을 대조/對照하는 천사들이 한국 여인들이 공사/工事를 너무 많이 해서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새로운 세상은 완전히 다른 창조나 재창조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은 세상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목마른 사람이 없는 세상이고, 병든 사람이 없는 세상입니다. 압제자가 없는 세상이고 기우러진 운동장이 없다는 말입니다. 맹수들이 어린 사슴과 토끼와 어울리는 나라가 되도록 고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제자리를 잡는 작업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들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이 땅위에서의 노력은 불완전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평화와 감사 그리고 기쁨으로 가득 찬 예상 가능한 나라를 꿈꿀 수 있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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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66(2025. 5. 17. 토요일).

시편 119:46-48.

찬송 7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인가 하고 싶은 사람은 방법을 찾아내고, 아무 것도 하기 싫은 사람은 구실을 찾아낸다.” 아랍 격언이라고 한다나는 지금 방법을 찾고 있는가? 아니면 회피할 구실을 찾고 있는가? 출발점은 비슷하나, 종착점은 엄청 크게 다르다.

 

2. “그리스도인의 생활 원칙2(12-17)”을 읽었습니다. 흔히들 유대인을 자칭 타칭 선민/選民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여러 민족 가운데서 뽑아 주신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12:1-4). 이에 대하여 크리스천들 역시 자칭 타칭 자신들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백성이라고 부릅니다(5:32, 3:1). 그래서 이런 사람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불렀습니다(교회/ Εκκλησια - εκ καλεω). 그러므로 선민이라는 말과 부르심이라는 말은 공통점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 낱말은 하나님이라는 절대자가 주체가 되셔서 중심을 잡고 행동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선민이라는 말과 부르심을 받은 교회라는 말은, 다른 용어의 같은 뜻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크리스천들은 몇 가지 실천해야 할 덕목이 있는데, 첫째는 서로 돕고 서로 용서하는 일이라 권고합니다(12-13). 서로 돕는다는 말은 서로의 연약함을 붙잡아 주고, 허물은 감싸 안아 주라는 뜻입니다. 둘째는 사랑을 실천할 것을 권고합니다(14). 사랑의 힘은 부족한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보다 완전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라고 권고합니다(15). 때로는 혼자 사는 것이 가장 편하고 좋을 것으로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곧 바로 외로움의 슬픔을 깨우칠 것입니다.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하는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서로 감사하는 일입니다. 함께 있어서 감사하고 나눌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말입니다. 넷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풍성한 삶을 살기를 권고합니다(16-17). 어느 연로한 논객에게 힘들고 어려울 때 가장 도움을 받는 게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분은 어떤 사회학자의 책을 소개하며 그걸 읽고 평점심을 찾고 지혜를 얻는다 했습니다. 우리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큰 위로와 용기 그리고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어느 마을이나 길냥이와 떠돌이 개로 인해서 골치를 앓고 있습니다. 저의 마을에도 떠돌이 개 한 마리가 언제부터 돌아다니고 있는데 씻지를 못해서 더럽고 비쩍 말라 있어서 불쌍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을 주려고 내 밀면 멀리 도망을 갑니다. 엊그제는 차를 타고 가다가 만났는데, 마침 토스트 빵을 두어개 던져 주었는데, 먹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강아지들이 잘 먹는 먹이를 그릇에 담아 대문 앞에 두었는데, 깨끗이 비운 것을 보았습니다. 데려다 키울 형편이 아니어서 물과 음식을 나눌 생각입니다. 우리 인간들 뿐 아니라, 짐승들도 세상을 살아가기가 힘든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사람이건 짐승이건, 서로 돕고 사랑하고 서로 감사하고 서로 풍성한 삶을 위해 지혜를 나눌 수 있다면, 지금보다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텐데, 그걸 모를 리 없는 우리 인간들이 행동하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음이 강퍅해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욕심이 가득차서도 아닐 것입니다. 마음에 여유로움이 없는 것이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 생각, 내 목표, 내 삶으로 가득 차 있어서 마음이 분주하고 번거로워진 것입니다. 가끔 하늘을 올려다 보라시던 어느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가끔은 저 멀리 산도 보고, 나무도 보고 새들도 바라봐야 하겠습니다. 그것 역시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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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65(2025. 5. 16. 금요일).

시편 119:43-45.

찬송 34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올해 91세가 된 셜리 맥클레인은 미국인 배우로, “나는 기적의 힘을 사랑한다. 그리고 어려움에 놓였을 때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한다.”는 명언을 하였다. 기적은 생각보다 많이 일어난다. 기적을 경험하려면 기적의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어떤 위험이라도 감수할 자신만 있다면, 기적은 언제든지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

희망씨, 가슴에 새기는 한 줄 명언, p.73.

 

2. “그리스도인의 생활 원칙(1-11)”을 읽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질문을 하기도 하고 받기도 합니다. 요즘 눈에 많이 띄는 글들은 특히 나이든 분들의 주장은, 누구도 의지하지 말고 특히 자식도 의지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라고 말합니다. 나이 들어 보니까 서러운 것도 많고 배신감도 많이 든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젊은 날에는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살았다고 하면, 노년에는 자신을 돌보면서 살라고 합니다. 부모를 홀대하는 자식들의 얘기가 지천에 깔려 있습니다. 참 못된 사람들이다 싶으면서도, 그들의 진심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 살아가는 것도 힘겨운데, 부모님이 무거운 짐처럼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부모님이 어떻게 살아오셨는지를 잘 알고 있는데 어떻게 홀대하고 구박할 수 있느냐고 할 수 있습니다. 엊그제 신문에서도 좋은데 놀러가자고 모셔간 홀어머니를 공항에 버린 아들 얘기가 있는가하면, 아들 며느리가 짜고 요양원에 버린 얘기도 들려옵니다. 비정한 세상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도 효도하는 아들과 며느리를 칭찬해 온 것은 그 시절에도 비슷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더 나빠진 것은 아닐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시대는 달라도 부모 마음과 자식 마음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한 부모는 열 자식을 돌봐도, 열 자식은 한 부모를 돌볼 수 없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찌하겠습니까? 내리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부모에게는 소홀해도 제 자식에게는 끔찍한 것으로 고맙게 생각해야 하겠지요. 오늘 본문에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몸은 땅에 살고 있지만 마음은 하늘에 두고 살라 하십니다. 참 어려운 일로, 이 세상에서는 이미 죽은 것과 진배없다는 말씀입니다(1-4). 둘째는 세속적인 욕망을 죽이라 하십니다(5-8). 많이 가지려고도, 높이 오르려고도 말라는 뜻입니다. 아귀다툼이 벌어지는 까닭입니다. 셋째는 거짓말로 서로 속이지 말라 하십니다(9-11). 거짓말은 자기 부정입니다. 자신의 선함과 진실함이 거짓말과 함께 사라져버리니 말입니다.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면서, 세상 사람과는 다르게 살라고 하니, 이런 사람이야말로 미친 얘기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제 스스로는 똑똑하다 하는데, 바보 멍청이가 따로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살이와 절연하고 깊은 산속으로나 아무도 찾지 않는 사막으로 떠나 살게 된 은둔자가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도 아니면 세상살이의 일반적인 루틴을 부정하고, 수도자가 되거나 독신자 또는 결혼을 포기하는 성직자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찌 생각해 보면, 이런 세속 한 복판에서 독신자로 살아가는 것이, 높은 바위 위에서 혹은 사막 한 가운데서 은둔자로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쉬운 삶일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으로 그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매일 전쟁터를 불사하는 시끄럽고 울고불고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평범한 필부필부/匹夫匹婦의 삶이, 그러니까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재의 삶이 가장 힘겨운 고행일지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저의 집 울타리에는 빨간 색 크레졸 병을 여러 개 매달아 두었습니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뱀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볼까 해서입니다. 어쩔 수 없이 공존해야 한다면, 피차 경계를 정하고 평화협정을 해야 할 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도는 주 성령님께서 우리의 삶을 지켜주시기를 구하는 것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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