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622(2024. 12. 24. 화요일).

시편 101:3-4.

찬송 22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캘빈 쿨리지(1872-1933)는 잠자다가 대통령이 된 인물로 유명한 미국의 제30대 대통인데, 그는 고향에서 휴양 중에 전임자인 하딩 대통령의 부고를 듣고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 대통령이다. 그가 남긴 명언은 어느 누구도 자신이 받은 것으로 인해 존경받지 못한다. 존경은 자신이 베푼 것에 대한 보답이다.” 그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존경이란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베풀었는가에 따라서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지위나 학식 그리고 재산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겠다.

 

2, “크고 흰 옥좌에서의 심판(20:11-15)”새 하늘과 새 땅(21:1-8)”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성경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말씀은 이사야서 66:22과 요한계시록 21:1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묘사는 성경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는데, 우리가 부르는 찬송에 많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가령 황금 길과 수정 바다와 같은 구절을 비롯해서 묘한 화초 향기와 청아한 음악 소리, 가난과 슬픔 그리고 어둠이 없는 곳 등이 그런 단어들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많은 표현들이 추가될 수 있을 것입니다만, 반드시 들어 있어야 할 말은 주님이 다스리시는 곳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가 거느리시니”(390/444-)는 가장 확실한 천국에 대한 묘사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께서 다스리시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천국이라는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비록 문제투성이는 말할 것도 없고, 불공평과 불의한 세상 한 복판을 살아가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실존이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이라고 한다면, 안심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중심 구절은 이전에 보았던 하늘과 땅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도 요한의 선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나님은 사람들과 같이 계시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같이 계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3-4)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최근 저의 주변에는 저를 비롯해서 고령으로 성인병을 앓는 분들은 물론 생후 2살도 안 된 어린 손자가 무서운 질병으로 고생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걱정과 근심에 쌓여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육신의 건강이나 물질의 축복 그리고 꼬리가 아니라 머리가 되는 것을 하나님의 은총이라고만 생각하는 분위기도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저런 시련의 강을 건너갈 때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처지와 형편이 어떠하든 주님과 동행하는 인생길이라는 믿음이 있느냐는 자각을 가지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육신이 병드는 일, 물질적인 고통 그리고 한없이 추락하는 인생길은 피할 수 없는 데, 그런 일들로 인해서 우리의 신앙이 쇠락하는 것은 가장 슬픈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시련과 역경을 맞서 싸울 수 있는 믿음, 서슬 퍼런 칼날 앞에서나 굶주린 맹수 앞에서 우리의 목숨이 경각에 놓이게 될 때도, 의연하게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떠져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문제를 대하고 시련을 마주하는 자세를 위해서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수많은 시련과 유혹의 강들을 이겨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621(2024. 12. 23. 월요일).

시편 101:1-2.

찬송 22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애드가 앨런 포우/ E. A. Poe<애너벨리>는 많은 젊은이들 가슴에 새겨진 명시일지 모른다. “달빛이 비칠 때면, 아름다운 애너벨리의 꾼이 내게 찾아들고, 별빛이 떠오르면 애너벨리의 빛나는 눈동자를 나는 느낀답니다. 그러기에 이 한 밤을 누워봅니다. 나의 사랑, 나의 생명, 나의 신부 곁에, 거기 바닷가 그녀의 무덤 속, 파도 소리 우렁찬 바닷가 임의 무덤 속에시인의 생각과 느낌 그리고 그의 경험을 유추하고 공감할 뿐, 그래서 아름다운 시가 되는지 모르겠다.

 

2, “천년 왕국(1-6)”사탄의 패망(7-10)”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저는 요한 계시록을 특별하게 취급하지 않습니다. 계시록이 가진 상징성과 계시록의 배경을 염두에 두고 다른 일반 성경들처럼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때문입니다. 계시록은 밧모섬에서 귀양살이하던 사도 요한이 환상을 보고서 기록한 책입니다. 환상이니까 현실이 아니라 꿈속에서 만날 수 있는 그런 상징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기독교회가 박해를 받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런 배경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오늘 묵상은 첫 단락입니다. 천년 왕국설은 신약을 공부하는 신학도들에게는 흥미진진한 주제입니다. 신학교에서는 천년 왕국설을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두고,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천년 왕국이 온다고 믿는 전 천년 설/premillennialism이 있고,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천년 왕국이 올 것이라고 믿는 후천년설/postmillennialism, 그리고 전천년도, 후천년도 없다고 믿는 무천년설/amillennialism이 있습니다. 오리겐과 어거스틴, 루터와 칼뱅 그리고 호쿠마와 벌코프 등은 무천년설을 주장했고, 저스틴과 이레니우스 등은 전 천년설을 주장했으며, 로마 가톨릭교회나 뵈트너 워필드 쉐펄드 등은 후천년설을 주장합니다. 대체로 천년왕국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계시록의 상징성과 그 배경을 무시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정통신학의 계보/系譜가 그것을 말해 준다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네 차례나 천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앞의 두 번은 악마이며 사탄인 용을 잡아 천년동안 결박해 둔다는 것과, 천년동안 나라와 사람들을 현혹시키지 못하도록 봉인된 깊은 구덩이에 가둔다는 것이고, 다른 두 개의 천년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했다 해서 목이 잘린 순교자들이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동안 왕노릇한다는 것과,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천년이 끝나기까지 살아나지 못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전체적인 내용을 보면 주님께서 재림주로 오시기 전에 천년동안 왕노릇하시는 내용으로 보이는데, 이로써 전 천년 주장하기에 알맞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본문의 말씀들은 사후 세계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를 줄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성경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살필 때는 오해할 요소가 많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이른바 새로운 세계,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되고 진행되는 것에 관해서는 구약 어디에서도 그런 과정을 주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언급하는 곳이 이사야서와 요한 계시록인데, 이 두 구절 외에는 비교하거나 설명하는데 도움이 될 자료가 전무하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간밤에 보았다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얘기라는 것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곤 했는데(실제로는 늘 엄마 옆에서 졸거나 잤음), 그때 오권사님이라는 분이 기도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루도 빠짐없이 간밤에 꾼 꿈얘기를 하셨는데, 천국을 본 이야기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이야기들을 해서 귀를 쫑긋 세웠던 기억이 지금까지 있습니다. 그분은 성경을 읽지도 못하는 문맹이셨는데, 환상과 환청을 많이 듣는다 하셔서 목사님이 싫어하셨던 기억도 있습니다. 부산 목회시절에 만났던 고성에서 오셨다는 김 집사님 역시도 매일 꿈속에 파묻혀 살다고 오셨는데, 저를 얼마나 피곤하게 하였는지 모릅니다. 그 분 역시 성경을 읽지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성경에 두 곳에서 잠간 언급했던 말씀을 성경 전체적인 맥락에서 설명하기란 어렵다, 그냥 참고할 정도로 족하다 생각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620.

시편 100:4-5.

찬송 47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영국의 자연시인 W. 워즈워어스(1787-1850)<무지개>라는 시를 통해서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꿈을 꾸게 하였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마음 뛰노나니, 나 어려서 그러하였고 어른 된 지금도 그러하거늘. 나 늙어서도 그러할지어다. 아니면 이제라도 나의 목숨 거둬가소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원하노니 내 생애의 하루하루가 천생의 경건한 마음으로 이어질진저.” 평생을 꾸는 그 꿈의 끝이란 무엇일까?

 

2, 대림절 넷째 주일의 사도서간문 히 10:5-10을 본문으로 제물이 되시려 오신 주님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초림 사건은 한 가지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물이 되시려 오셨다는 것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비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질문해야 합니다. 왜 죽으러 오신 것이냐고 말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제물은 참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6-9).

유대교의 중심은 제사의식이 우뚝 서 있습니다. 유대인의 성전에는 제물을 준비하는 장소와 제물을 드리는 독특한 장소가 있습니다. 본래 제물이란 제사에 쓰이는 물건들인데, 소제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생명 있는 것을 바치는 제물들이었습니다. 이런 제물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는 죄악에 대한 보속/補贖으로 드리는 것들입니다. 죄가 가져올 무서운 형벌을 대신해서 미리 바치는 행위입니다. 죄의 결과는 엄청난 파멸이기 때문에, 그에 버금가는 생명 있는 제물로 하나님의 분노를 풀어드리고 용서받는 행위인 것입니다. 이런 제사에는 속건죄와 속죄제 그리고 화목제 등이 있는데, 슬프게도 이런 제사 제도는 시간과 함께 부패했고, 급기야는 제사의 근본적인 목적과 의미마저 사라진 형식적이고 거짓된 제사가 성행하였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참된 제사를 원하셨고, 그 제물로 하나님 자신을 바치는 제사를 기획하신 것입니다.

 

제사를 받으실 하나님께서 제물이 되신 것이 주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입니다(5).

다윗은 주님이 오시기 1,040년 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40:6-8). 하나님께서는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시지 않으신다 말씀하시고,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내 심중에 있나이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다윗의 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그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진정한 제사가 무엇인지를 예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사나 예물, 번제나 속죄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진정한 제사에 대해서 말입니다. 세상은 죄 가운데 깊이 빠져있고,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시고 싶은데, 제사도 전혀 마음에 들지 않으시니 달리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결단이 나타났는데, 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주님께서 친히 제물이 되시는 방법 말입니다. 이 제사는 또 다른 제사가 불필요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완전한 제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길이었습니다(10).

예수의 초림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의문을 품고 질문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아쉬워서 사람으로 사시다,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느냐?”고 말입니다. 우리 인류 앞에 던져진 최대의 미스터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서 수천 년 동안 질문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 결론은 종교들에게 주어진 과제였습니다. 기독교회는 영원한 삶을 향한 노정/路程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노정의 끝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말입니다. 존 번연은 <천로역정>이라는 걸작을 썼습니다. 우리 인간들의 삶의 여정을 실감나게 풀었습니다. 주인공 크리스천은 천국을 향한 순례의 길에 들어섭니다.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수많은 시련과 유혹을 이겨내고, 마침내 천국에 이르게 된다는 내용인데, 현실적인 심판과 하나님의 뜻에 따른 심판을 극복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만이 우리의 구세주(그리스도)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619(2024. 12. 21. 토요일).

시편 100:1-3.

찬송 45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안개>라는 시는 칼 샌드버그와 헤르만 헷세의 것이 유명합니다. “작은 고양이의 걸음으로 안개는 온다. 조용히 앉아 항구와 도시를 허리 굽혀 바라본 뒤 다시 일어나 걸음을 옮긴다.”의 샌드버그의 시는 고양이의 몸짓으로 안개를 표현하고 있다. 헤세는 이상하다. 안개 속을 거니는 것은 온갖 나무숲과 돌은 고독하다. 어떤 나무도 다른 나무를 모른다. 모두가 혼자다. 세상은 나에게 벗으로 가득 차 있다. 내 생이 아직 밝았을 때엔 그런데 이제 안개가 내리니 아무도 보이지 않는구나. <중략> 이상하다. 안개 속을 거니는 것은 인생이란 고독한 존재. 아무도 타인은 모른다. 누구나 혼자다.” 안개가 우리들 인간의 삶을 혼미케 하고 외톨이로 만드는 불청객 정도로 그리고 있다. 참 다양하고 흥미로운 시각들이다.

 

2, “경고와 교훈(17-25)”을 읽었습니다. 유다서는 머리말에서 밝힌 대로 주님의 형제 야고보의 동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들은 사도들은 아니었으나, 주님이 부활하신 후 예수를 믿게 되었으리라 추론되는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초대교회에 만연한 비도덕적인 이단자들, 특히 영지주의 자들에 대해서 교회를 보호할 책임의식을 가진 점을 대변하고 있다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런 이단들에 대해서 경고와 함께 흔들리는 교회에 교훈을 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영지주의는 헬라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상의 하나로, 기본적으로 이원론이 대표적인 주장입니다. 그러니까 영과 육은 도저히 절충도 화합도 할 수 없는 것으로, 영은 선하나 육은 악하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비록 도적적으로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이미 영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은 그 모든 것을 상쇄할 정도로 능력이 있어서, 구원받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식의 해석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영지/靈知를 획득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하도록 권장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타락한 교회 지도자들이 이런 영지주의의 주장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러나 모든 종교는 기본적으로 도덕과 윤리를 바탕으로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면, 반드시 배격당해야 할 주장이지만,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이런 주장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유다는 이런 이단자들에 대해서 교회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할 것을 생각하며 그들의 잘못을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며, 둘째 자신들의 욕정을 따라 사는 자들이며, 셋째 성령을 따라 살지 않는 자들로, 넷째 교회를 분열시키는 자들이라고 진단합니다.

    그래서 이런 이단으로부터 자신과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권고합니다. 첫째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터 위에 굳게 설 것과, 둘째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힘써 기도할 것, 셋째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며, 넷째 의심을 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다섯째 죄악의 불구덩이에 빠진 자들을 구해내고, 여섯째 본능적인 욕정에 빠진 사람들을 미워해야 하지만, 그들에게도 자비를 베풀라고 말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주시고 영광스러운 날에 흠없는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전형적인 말세지 말의 교훈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흔들리는 이유는 여러 가지 원인을 들 수 있겠습니다만, 그 첫째는 신앙의 근본인 예수가 우리의 구주가 되신다는 진리를 분명히 붙잡지 못하는 점이고, 둘째는 이런 신앙은 우리 인간 자신의 지혜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이며, 셋째는 우리가 힘쓰고 끝까지 바라볼 신앙의 대상은 인간의 간교한 술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이런 신앙을 붙잡고 살아가게 하는 힘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게 하는 것임을 알고 간구하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618(2024. 12. 20. 금요일).

시편 99:8-9.

찬송 27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시인이며 하버드 대학에서 18년을 가르친 롱펠로우/H. W. Longfellow(1807-1887)은 미국 시인으로써는 가장 국민적 사랑과 존경을 받았는데, 그런 그 역시도 힘들고 쓸쓸한 삶은 피해 갈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의 시 <비 오는 날>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날은 춥고 어둡고 쓸쓸도 하다. 비 내리고 바람은 쉬지도 않고 넝쿨은 아직 무너져 가는 벽에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건만, 모진 바람 불 때마다 죽은 잎새 떨어지며 날은 어둡고 쓸쓸도 하다. <중략> 조용하거라 슬픈 마음들이여! 그리고 한탄일랑 말지어다. 구름 뒤에 태양은 아직 비치고, 그대 운명은 뭇 사람의 운명이려니. 누구에게나 반드시 얼마간의 비는 내리고, 어둡고 쓸쓸한 날 있는 법이니.”

 

2,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지도자들3(17-22)”을 읽었습니다.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를 감상할 때 늘 느끼며 아쉬운 현상 중 하나는 대부분이 도덕적인 결말을 보는 것 뿐 아니라, 너무 간단히 종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악인은 죽거나 처벌을 받으며, 고생 고생하던 선인은 웃고 만다는 것입니다. 지루할 정도로 길고 긴 투쟁의 과정들이 전체 내용을 이루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들 인생도 그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들이 누릴 행복한 순간이나 악인이 받게 될 형벌은 너무 짧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허망하다는 생각마저 들게 됩니다. 어쩌면 그래서일지 모르겠습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시련과 고통을 겪고 마침내 이룬 행복이 천년만년 누릴 수 있도록 행복의 이야기들을 늘어트리고 싶은 마음 말입니다. 가령 천국의 삶을 성경에서 길게 다루지 않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갖는 것 말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살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지도자들이 어떻게 최후를 맞이할 것인지를 밝히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동안 힘들게 신앙생활을 지켜온 사람들이나, 심지어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볼 내용들 말입니다. 베드로 후서 기자는 이런 자들은 물 없는 샘이며, 폭풍에 밀려가는 안개라고 규정하고, 그들을 위해 준비된 것은 깊은 암흑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형벌의 원인으로, 온갖 수모와 고통을 견뎌내고 가까스로 빠져나온 사람들을 육체의 방탕한 정욕으로 유혹하였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말로는 자유를 외치나, 자신들은 불의와 죄악의 노예가 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애석하고 서글픈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세상의 추한 삶에서 떠나 살던 사람들이, 다시금 그리스도를 알기 전의 세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일들이라고 고발합니다. 그것은 처음보다 더 나빠진 상태가 되었다고 말입니다. 유명한 깡패 두목이 회개하고 신학교를 들어가 목사까지 되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 후에 다시 깡패 두목으로 다시 나타난 경우입니다. 이를 두고 개가 자신이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에 비유하였고, 돼지가 몸을 씻고 다시 오물진창에 뒹구는 것과 같다 비유합니다. 그러니까 거짓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들, 거짓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 그들은 아무리 변신을 꾀한다 한들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개들이나, 깨끗이 씻은 몸을 다시 진창에 뒹구는 돼지들과 같은 길을 걸어갈 뿐이라고 말입니다.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거짓 선지자나 지도자들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들은 신학적인 이론을 앞세우기도 하고, 아무나 말할 수 없는 성경의 고전어를 앞세우는 사람들에게서, 참과 거짓을 분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아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일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하는 일인가 하는 기준 말입니다. 이른바 지도자들의 삶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617(2024. 12. 19. 목요일).

시편 99:6-7.

찬송 48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졌지만 낮은 단 하나뿐. 그러나 밝은 세상의 빛은 사라진다. 저무는 태양과 함께.

마음은 천 개의 눈을 가졌지만 가슴은 단 하나뿐. 그러나 한평생의 빛은 사라진다. 사랑이 다할 때면.”

프랜시스 윌리엄 버어딜런의 <밤은 천개의 눈을>이라는 시이다. 천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단 하나의 태양이 저물면 어둠에 묻히고 말 것이다. 마음엔 천개의 눈이 있다지만, 사랑이 다하면 한 평생의 빛은 사라진다. 몽골에서는 지금도 쏟아질 듯한 별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많은 별 빛 속에서도 기쁨과 희망은 묻혀 있던 추억이 있을 뿐이다.

 

2,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교사들2(10b-16)”을 읽었습니다. 베드로 전 후서는 어느 특정 지역 교회를 대상으로 하는 편지가 아니라, 초대 기독교회를 대상으로 하는 일반 서신으로, 특히 베드로 후서에는 알다.” 혹은 지식이라는 단어가 16번이나 나오는 등, 이를 두고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배워서 알게 된 지식이 아니라, 영적이며 그리스도에게 자라가며 얻게 된 경험적인 지식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3:18). 여전히 초대교회를 흔들고 있었던 문제는 이단적인 주장을 하는 거짓 지도자들로, 그들은 누구도 제어하지 못하는 거친 말투에 자신들이 어떤 특권이라도 가지고 있는 양, 독설을 퍼붓는 일에 이력이 난 사람들로, “본래 잡혀 죽기 위해 태어난 이성 없는 짐승같다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이런 독설가가 광화문 광장을 주름잡고 있는데 그들의 모습에서 기시감/旣視感, Déjà vu을 주고 있습니다. 반드시 그들은 자기들의 불의의 값으로 벌을 받을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13). 우리 한국 교회는 자정 능력을 상실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축재와 온갖 거짓말과 방탕한 삶을 사는 지도자들에 대해서 교회가 이를 책벌하지 못하고, 마침내 세속 권력에 교회의 시시비비를 맡기는 형국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심지어는 세속 재판의 판결에 맡기고서도 자신들의 뜻에 맞지 않으면, 반발하고 엉터리 신앙을 내세우며 자리를 보전하고 재물을 마음대로 처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안에서도 이런 현상은 일찍부터 비일비재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당시의 문제점을 몇 가지로 그 죄상을 밝히고 있는 데, 첫째는 무위도식/無爲徒食 하는 것을 낙으로 생각하는 것과 둘째는 방탕한 짓을 즐기고 흠과 티를 남기는 자들이며, 셋째는 음욕이 가득한 눈으로 끊임없이 죄를 짓고 허황된 사람들을 유혹하며 넷째는 탐욕에 깊이 빠진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기에 알맞은 사람들이라고 규정합니다. 바른 길을 버리고 그릇된 길로 간 자들이라며, 그 옛날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서 발락 왕에게 고용된 점술가 발람이 하나님의 명령, 저주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축복하도록 하자, 처음에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 없었다고 하였으나, 나중에는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발락에게로 나아갔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치시려 하자, 그를 태운 나귀가 천사의 칼을 보고 피하자, 발람이 나귀를 세 번씩이나 채찍으로 저주의 길을 가도록 하였던 고사를 인용하며(22-24), 미친 거짓 예언자들을 막아섰던 것입니다. 이처럼 거짓 선지자나 거짓 지도자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과 파멸의 길로 인도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큰 문제 중 하나는 쓴 소리를 하는 어른들이 점점 사라지고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616(2024. 12. 18. 수요일).

시편 99:4-5.

찬송 41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독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즐거운 봄>이라는 시에서 즐거운 봄이 찾아와 온갖 꽃들이 피어날 때에, 그때 내 가슴속에는 사랑의 싹이 움트기 시작하였네. 즐거운 봄이 찾아와 온갖 새들이 노래할 때에, 그리운 사람의 손목을 잡고 불타는 이 심정을 호소했음네.” 봄이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싹틀 때, 세상이 달라진 것이었습니다. 밖이 아니라 안에서.

 

2,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1-10a)”을 읽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거짓 혹은 가짜라는 말이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잘 분간치 못하고 있습니다. 1968년 김민기가 작사 작곡한 <친구>라는 노래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오? 그 깊은 바다 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하늘과 물이 구별되지 않고, 삶과 죽음이 구별되지 않는 세상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혼돈의 시대, 혼란의 시대를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류사를 보면, 이런 혼돈과 혼란의 모습은 계속 되풀이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삶이란, 참과 거짓의 싸움이 인생의 본질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혼돈은 교회 밖의 문제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 후서를 쓴 기자는 이런 거짓 예언자들이 하게 될 일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첫째는 이단을 몰래 끌어들일 것이며, 둘째는 주님을 부인하고 셋째는 방종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며, 넷째는 탐욕을 채우려고 성도들을 속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런 자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처벌하셨는지를 열거합니다. 죄지은 천사들을 물 없는 웅덩이에 던져 넣어 심판 때까지 가두시고, 노아 때는 홍수로 가차 없이 벌하시고, 하나님을 배반한 소돔과 고모라를 단죄하여 잿더미로 만드셨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정의를 부르짖고 하나님께 순종한 노아의 여덟 가족을 살리신 일이며, 착한 롯을 구해내신 일들을 회상케 해 주셨습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친구들의 모임에 나가보면, 건강 다음으로 많이 얘기하는 것은 경제적인 어려움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팔십 줄에 들어서면서도 아프지만 않으면 일하고 싶다는 의지를 밝히곤 하였습니다. 젊은 날에는 교사나 목사다 하면서 물질을 우습게 생각하며 호기롭게 살던 이들도, 어린 손주들에게 아직 살아있다는 기개를 보이려면 수중에 돈이 있어야 한다는 절박함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일지 모르겠습니다. 유명 대학의 총장을 역임했던 분이 물질 앞에서 초라하고 비굴한 모습을 보일 때, 너무 참담한 인생무상을 느꼈다고 말입니다. 평생을 대학에서 가르쳐 왔으니 연금도 많을 텐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오늘 베드로후서 기자는 그것을 탐욕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나친 욕심을 말합니다. 은퇴를 한 주변인들의 말들을 종합하면, 은퇴한 순간에 여러 가지가 단절되는데, 첫 번째는 전화가 현저하게 줄어든다고 했고, 둘째는 이웃들이 자신의 말을 무시한다 했습니다. 셋째는 가족들도 예전과는 달리 소원하다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저런 원인들이 물질적 힘이 떨어진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모든 현상들이 다 현실이고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문제의 제일 원인은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함으로 진단합니다. 전화가 끊기고 무시를 당하고 가족들의 시선이 차가운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자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현상을 선 순환하도록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첫째는 책을 읽는 좋은 기회로 삼자고 제안합니다. 요즘 저는 몇 권의 책을 여기 저기 눈에 잘 띄는 곳에 두고 읽는데 재미가 쏠쏠합니다. 둘째는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일입니다. 거들떠보지 않았던 조카들의 사는 얘기며, 힘들게 살아가는 지인들의 얘기에 마음을 기우리는 것입니다. 꼭 물질적인 관심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615(2024. 12. 17. 화요일).

시편 99:1-3.

찬송 34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프랑스 노르망디의 명문가 레미 드 구르몽(1858-1915)의 대표적인 시는 <낙엽>인데,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 낙엽은 버림받고 땅 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해질 무렵 낙엽 모양은 쓸쓸하다. 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상냥히 외친다.” 사랑하는 가족에게서 버림받은 낙엽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 하다.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이 쓸쓸하기 때문이리라.

 

2, “그리스도의 영광과 예언의 말씀(16-21)”을 읽었습니다. 초대 기독교회의 지도자들을 제외하고 일반 성도들은 예수를 그리스도(구세주)로 믿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를 할 수 있었다고 할지라도 부활사건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허황되고 신화처럼 들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지도자들은 이 점에 대해서 매우 진솔한 설명과 확신을 갖게 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목회 초년 기에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학생 신우회의 초청을 받고 3일 동안 신앙 강좌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게 주어진 주제는 확신이었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그렇게 진땀을 흘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 신우회를 지도하는 지도목사님이 저를 강권해서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개회 예배를 드릴 때 기도하는 학생이 이번 집회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확신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때부터 저는 시쳇말로 졸아들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 확신이라는 것은 말로는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한 말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확신은 고사하고, 겨자씨만 한 믿음까지도 그것을 가지고 있다 말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는 먼저 성경의 말씀이 어떤 내용인지 그것부터 알아보자고 했습니다. 결국 믿음이란 ~~~~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저는 베델성서연구 라는 프로그램을 지도하고 있어서, 성경을 전체적으로 요약하는 내용이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은 성경을 꿰뚫고 있는 통전적인/integrity 의미를 구속사/救贖史라고 정리하였습니다. 까닭은 창 3장 인류의 타락이래로, 인간은 더욱 더 깊은 죄의 수렁에서 헤어 나올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속죄의 제물이 되셔서,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길로 받아주신다고 말입니다.

    여기 까지는 우리가 교회에서 흔하게 들어오던 얘기로 들렸을 것입니다. 저는 믿음이든 확신이든 그것은 객관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주관적인 것임을 소개하고는, 그래서 다양한 종교와 신앙이 생길 수 있는 것을 그 예시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는데, 믿음은 사람의 지혜나 의지로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2:8)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부활하고 천국에 들어가기까지는 계속 그 믿음은 흔들릴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더 단단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성령님께 도움을 청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 유명한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수학자인 파스칼의 도박(Pascal’s gambling)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래도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는 얻을 수 있는 것은 +무한대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먼저 예수의 얘기들은 꾸며낸 신화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그 증거로는 자신이 예수님의 영광스럽고 위대함을 두 눈으로 목격한 사건을 들었습니다. 바로 변모산의 경험이었습니다(17:1-13).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님을 당신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 말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예언하는 말씀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까닭은 믿고 구원에 이르기 위함입니다(20:30-31). 성령의 도우심으로 어떤 이들은 믿음을 갖기도 하고, 확신에 찰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