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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4.12 과연 정의란 무엇인가? / 벧전 3:8-22.

묵상자료 8366(2024. 4. 12. 금요일).

시편 시 57:9-11.

찬송 42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순간 우리 몸 안에는 보이지 않는 시계가 생긴 듯합니다. 굳이 시계를 보지 않더라도 밥 먹을 즈음이 되면 시장해지고 매일 비슷한 시간에 잠이 들고 일어나게 되지요. 주말만큼은 좀 더 늦은 시간까지 게으름을 피우고 싶지만, 몸 안의 시계는 마음과 달리 늘 같은 시간에 눈을 뜨게 만들곤 합니다. 그러고 보면 습관이라는 것이 참 무섭지요. 어느 순간 큰 오차 없이 주어진 시간들이 저절로 꾸려져 나가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몸 안의 시계는 이제는 이렇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새로운 한 주를 위해서 좀 더 편안하게 쉬는 시간을 가지라고 말입니다. 사람이란 누구나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늘 참인 이 명제는 대상을 아이들이나 어른으로 제한할 필요도 없지요. 주중의 일과나 다른 사람과 약속 같은 것에 구애받지 않고, 온전한 나로써 보낼 수 있는 시간. 이것을 일컬어 어떤 이는 휴식이라 부르고, 또 어떤 이는 무위의 시간이라 부르기도 하겠지요. 무엇으로 부르던 그 시간은 분명 필요합니다. 가끔씩 이러한 시간을 누릴 수 있다는 건, 내 삶의 주체가 바로 나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방법이기도 할 테니까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일이 있을 때면,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힘들고 어려워지면, 사람들 사이에서 벗어나 늘 홀로 있는 것을 택했다고 하지요. 친구는 또 하나의 자신이라고 말할 만큼, 벗들을 아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 때문에 친구들이 걱정을 하고 염려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탓이었지요. 친구에 대한 그의 마음은 속 깊고 두터운 것임엔 틀림없습니다. 그래도 혼자 견디기 쉽지 않은 일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관계는, 친구라는 울타리 이기게 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현대적인 우정이란 오히려 그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남들에게 내 보이기 힘든 곳까지 털어놓을 수 있는 그러한 신망 깊고 단단한 관계 말입니다<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412일 방송>

 

2. “정의를 위한 수난(8-22)”을 읽었습니다. 몇 년 전에 우리 사회를 강타했던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이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습니다. 정의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일반적인 정의의 개념은 윤리, 합리성, 법률, 자연법, 종교, 공정함, 혹은 균등함, 그리고 선포된 윤리의 위배에 따른 처벌 등에 바탕을 두고 내리는 도덕적인 옳음의 개념이다.’ 고 합니다. 마이클 샌들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정의론을 설명합니다. ‘(1). 사람들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이 정의라고 주장하는 공리주의, (2).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정의라고 주장하는 자유주의, (3). 정의를 행복의 합계나 자유보장으로 단순히 설명할 수 없으며, 오히려 다양한 도덕적, 종교적 가치에 대한 논의로부터 공동체 구성원의 좋은 삶과 공동선에 대한 답을 천천히 찾아보자는 공동체주의, 이 중 마이클 샌델은 세 번째 공동체주의, 미덕 추구의 입장에 서 있습니다.’ 센델은 지금까지 인류가 추구해 온 도덕에 기초한 정의 개념에서 크게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도덕적 이해는 불완전해서 계속해서 보완과 발전이 첨부되어야 하는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는 정의는 무엇입니까? 아모스는 인간의 약점을 직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의해서 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십일조와 정결한 제사와 같은 종교적인 헌신에서 환멸을 느꼈습니다. 형식과 진정성이 빠진 위선적인 종교 생활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고 역설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고후 5:17).

    이제 우리는 한 사람의 크리스천으로써 예수님께서 위임하신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과제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넓은 의미에서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하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이는 결코 공 맹자가 말하는 도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추구하는 도덕이란 이론적일 뿐 실현 불가능한 공론(空論)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인간은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우리를 향해서 그리스도 안에서살아가는 길을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간다는 말은,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키거나 도덕적인 완덕(完德)에 이르도록 힘쓰는 수행 또는 수련이 아니라, 우리의 말과 행실을 그리스도에게 정박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말할 때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듯 하고, 누군가를 섬길 때는 그리스도께서 섬기듯 하면서 말입니다. 물론 우리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빌지 아니하면 안 될 일입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 말 한마디나 행동 하나를 하기 전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여부를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역시 우리들에게 숱한 시행착오가 따를지 모릅니다. 성령이여, 우리를 도우소서! 아멘.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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