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360(2024. 4. 6. 토요일).

시편 시 56:10-11.

찬송 36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작곡가 김연준은 환갑이 넘은 나이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곡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시작은 빠르지 않았지만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이후의 시간들 동안 완성한 3천 여곡의 작품으로 증명할 수 있지요. 차로 이동을 할 때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있는 동안에도 작곡가는 악상이 떠오를 것을 대비해서 펜을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뜻하지 않게 정치적인 사건에 연루되어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을 때도, 김연준은 음악을 통해 위안을 얻곤 했지요. 인생의 모든 세속적인 것들은 가랑잎처럼 저가도, 음악은 영원히 우리 안에 살아남을 것이라는 말을 기도문처럼 외우면서 말입니다.

    “찬란히 빛나는 해를 봐도/ 어스름 달빛에 밤이 되어도/ 한없이 그리운 그대 생각/ 끝없이 보고픈 그 모습/ 이젠 잊어버리려고 눈을 감아버렸지만/ 날이 갈수록 짙어가는 그대생각 그것 뿐/ 하염없이 떠오르는 것은/ 그대 모습 그 모습 뿐/ 그 모습 아름다워라/ 그 모습 아름다워라

    주변이 고요해 진 시각에 듣고 있으면, 아주 여러 번 반복해서 듣고 싶을 만큼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는 곡입니다. 작곡가 김연준의 가곡들은 듣기에 참 편안하지요. 그렇지만 막상 소리를 내서 따라 불러보면 그렇게 쉽지 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작곡가로써 그가 그처럼 유려한 음악을 빚어내기 위해 그가 뒤늦게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우려 왔을 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작곡가로 살아온 만년의 30여년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하는 한 인터뷰에서, 작곡가 김연준에 대한 정열과 진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가곡이야기 김병수 시 김연준 곡 <끝없는 사념>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46일 방송>

 

2. “믿음의 생활(고후 5:1-10)”을 읽었습니다. 어제 사전 투표를 하고 아파트로 올라오는 길을 걷고 있다가, 노랗게 핀 민들레 한 송이가 차도/車道 모서리에 자리 잡고 피어있었습니다. 젊은 날에는 그런 모습을 보면 제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한심하고 처량하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 모진 세상살이를 끝내고 편히 쉬렴.”하면서 사정없이 뽑아 버렸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런데 생각이 많이 바뀐 것입니다. “그래. 한번 열심히 살아보렴. 힘은 들겠지만 따뜻하고 향기로운 꽃 냄새도 맡아보고, 여름날의 폭포수 같은 소나기도 맞아보고, 휑하니 사라져가는 쓸쓸한 가을도 친구해 보면서 그렇게 살아보는 거야. 결코 헛된 삶이란 없으니까.” 이런 생각 말입니다. 아마도 나이가 주는 보너스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에 필요 없는 존재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싫어하는 모기나 바퀴벌레까지도 말입니다. 그래서 서로 서로 소중히 여겨주고 살펴주고 도와줄 거룩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은 별세한 크리스천을 위로하며 소망을 전하는 매우 적절한 말씀입니다. 특히 지상의 장막 집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대조하는 것이 그랬습니다. 우리는 부딪힌 현실이 너무 힘겨워서 하루 앞을 내다보지 못하며 그럭 저력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생각해 보면 매일의 삶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보다 더 잘 사는 일은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 이 떠오릅니다.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일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6:34).

    “오늘이 가장 젊은 날!”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면, 이 말보다 더 지혜로운 말은 없을지 모릅니다. 사도는 우리의 삶을 비관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늘 집을 갈망하며 신음하고 있다든지, “무거운 짐에 짓눌려 신음하고 있습니다.”와 같은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런 표현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장막을 벗어버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오히려 하늘 집을 덧입음으로 죽음이 생명에게 삼켜져 없어지게 되기를 갈망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 보증이 성령님이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이 든든하다.”는 말을 덧붙입니다. 그것은 육체에 머물러 있을 때는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때문이라고 합니다. 11장에서 말하듯, 믿음은 보이지 않는 실재들을 눈앞으로 당겨와서 늘 바라보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주님을 자신의 마음과 자신의 생활 속에 모셔 들이는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 2-3km 떨어진 고모 댁에 심부름을 가는데 캄캄한 그믐밤 들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정수리를 쭈삣거리게 만들지만, 찬송을 하거나 기도를 드리면 금세 두려움이 사라지고 용기와 기쁨이 솟아났던 아련한 추억이 솟아났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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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59(2024. 4. 5. 금요일).

시편 시 56:7-9.

찬송 34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과학자 뉴턴은, 두 마리의 고양이를 길렀데요. 고양이들이 드나들 때마다 일일이 문을 열어주어야 하는 것이 성가셔서, 나중에는 아예 문에 구멍을 뚫어서 마음대로 다니게 했답니다. 그런데 덩치가 큰 고양이를 위해서는 큰 구멍을, 작은 고양이를 위해서는 작은 구멍을 이렇게 두 개의 구멍을 뚫어서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답니다. 큰 구멍 하나만 뚫어주면 그곳으로 두 마리다 문제없이 드나들 텐데 그 뻔 한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니 믿기지 않을 정도지요. 실수 효과라는 말도 있지요. 그렇게 뛰어난 사람에게 그렇게 허술한 구석이 있었다고 하니까,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느껴져요. 휴일은 그렇게 허술한 모습을 보여도 괜찮은 날, 좀 풀어진 모습이 더 매력적인 날이 아닐까 싶은 데요. 편안한 휴일 시작해 보시기 바랍니다<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945일 방송>

 

2. “육체의 부활2(51-58)”을 읽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종교를 통해서 영원한 삶을 살고자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영원한 삶에 이르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죽음이라는 큰 강을 건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궁금해 합니다. 죽음 후에 어떻게 되는가하고 질문을 합니다. 같은 크리스천이라고 해도 각양각색의 대답을 합니다. 이런 현상은 고린도 교회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궁금증을 가진 교우들에게 바울 사도가 들려준 대답이었습니다. 사도는 첫 대답으로 우리는 죽지 않고 변화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51). 무슨 말입니까? 우리 주님은 베다니의 나사로를 찾아왔을 때는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어 있으니 이제 내가 가서 깨워야 하겠다.”(11:11). 모든 사람들은 죽었다고 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은 잠들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우리말에도 죽음을 잠으로 표현하곤 합니다. 그 말이 영면(永眠)입니다. 둘째 대답은 나팔 소리가 들릴 텐데 눈 깜짝할 사이도 없이 불멸의 몸으로 살아나고 변화할 것이라 말씀합니다(52). 죽음은 깊고 깊은 잠에 빠지는 것 같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눈뜨고 생활하던 모든 것을 일순간에 멈추고 편한 잠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불멸의 몸으로(썩을 몸과 대조적임) 깨어난다는 말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부활의 과정이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임을 알게 됩니다. 아무리 수백 수천 년 전에 죽었다 하더라도, 그 당사자에게 있어서의 새로운 삶(부활)의 시작은 찰나와 같은 시간일 것이라고 말입니다. 세 번째 대답은 변화된 몸으로 부활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53). 썩을 몸이 불멸의 옷을 입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조금 아쉬운 것은 고린도 교회 교우들이 더 많은 궁금증을 가졌더라면 사도는 그 궁금증에 대해서도 말씀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과학적으로 수학적으로 신앙이나 부활을 설명하려고 힘쓴 이들이 있습니다. 프랑스 사람 파스칼이나 브엥칼레 같은 사람들입니다.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에게 수학공식이나 논리적인 설명이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이해가 필요한 영역이 아니라, 믿음이 필요한 영역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4세기의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그는 인간은 이성의 영역에서 사고하는 존재이나 하나님은 믿음의 영역에서만 파악된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대표작 <고백록>에서 신앙이 이성에 앞선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알기 위해 믿는다'고 고백했습니다. 아주 훗날인 13세기에 아퀴나스는 믿기 위해 이해한다.’고 말함으로 이성의 영역을 보완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의 신비를 말하면서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버렸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25:8, 13:14/70인역). 우리에게 지혜를 주신이도 하나님이시며,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이도 하나님이십니다.

 

3. 묵상자료가 늦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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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58(2024. 4. 4. 목요일).

시편 시 56:4-6.

찬송 15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연인에게 꽃다발을 선물하듯이, 바닷속의 고래들도 자신의 짝이 될 상대에게 구애를 할 때는, 진흙이나 수초 혹은 나뭇가지 같은 걸 선사한데요. 영국의 학자들은 열대 우림 지역의 돌고래 수천마리를 3년 동안 계속 관찰해 봤답니다. 그랬더니 그런 선물을 한 고래가, 실제로 상대의 선택을 받은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까지 확인했다는데요. 고래도 그렇게 실용적인 먹잇감이 아니라, 나뭇가지 같은 상징적인 물건을 선물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연인에게 꽃다발 선물하는 경우와 다를 게 없다는 사실, 참 재미나고 흥미롭지요. 대체 언제부터 우리가 맘에 드는 이성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꽃을 선물하기 시작했을까? 또 고래들은 또 언제부터 그런 식으로 구애를 하게 됐을까? 알 순 없지만, 상대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은, 그만큼 실용적인 가치로만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즐거운 주말 이예요. 누군가의 마음을 얻고 싶다면, 이런 사실 꼭 기억해 두세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944일 방송>

 

2. “육체의 부활(35-50)”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천진난만했던 어릴 시절을 가끔 그리워합니다. 실제로는 어리석기까지 한 철부지 시절을 말입니다. 요즘 같은 봄날이 오면 제가 태어났던 초가집 넓은 마루에 누워서 이리저리 뒹굴면서 철부지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나는 어디서 왔지? 하는 물음을 한 후에는,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게 분명하고 그 위로는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또 윗 할아버지, 그리고 윗윗 할아버지 등등을 말입니다.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윗 할아버지를 거쳐서 주일학교에서 배운 아담 할아버지까지 말입니다. 그렇게 어느 봄 낮 하루를 생각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나는 왜 살지? 하는 물음도 하게 되었고, 아버지 어머니가 하시는 힘든 농사일에 대해서, 동네 어른들이 하시는 이런 저런 일들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세상이 얼마나 넓고 큰지를 알게 되었고, 멀고 먼 나라에서 오셨다는 키가 큰 선교사님들도 생각했습니다. 훗날 나이가 들어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그리고 목적에 대해서 고민하는 시간들을 가질 때 이런 생각들이 도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사람이 죽은 후에 어떤 모습으로 부활하는가에 대해서 질문이 많았으며, 어떤 이들은 몸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인간의 육체가 연약할 뿐 아니라 수많은 문제투성이라는 것을 알게 된 때문입니다. 늙고 병들고 죽어야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부활 후의 인간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이 필요하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 첫째는 몸의 부활입니다. 이 말씀의 근거는 최초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몸으로 부활하신 때문입니다. 육체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이라는 것을 근거로 다른 거룩한 육체의 부활을 가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주님과 같이 육체로 부활할 것을 믿어야 합니다(42). 둘째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43). 어떤 화학 선생님은 인간의 육체를 구성하는 원소는 금속원소로 34가지(칼슘, 칼륨, 나트륨, 마그네슘, 아연, , , 구리, 주석, 스트론튬, 알루미늄, 망가니즈, 루비듐, 카드뮴, 코발트, 니켈, 바나듐 등)이며, 비금속원소로(산소, 탄소, 수소, 질소, 인 등)이나, 이중 비금속원소인 산소와 수소로 구성된 물이 무려 70%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값으로 환산하면 10만원도 되지 않는다 합니다. 셋째는 강한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44). 여기에서 말하는 강함이란 철재나 석재와 같은 강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넷째는 영적인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44). 부활 후의 인간은 더 이상 육체적인 모든 연약함과는 달리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영적존재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은 사도는 물론 저 역시도 제대로 알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유추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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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57(2024. 4. 3. 수요일).

시편 시 56:1-3.

찬송 23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악당 브루터스를 한방에 날려버리던 정의의 사나이 뽀빠이 기억하시지요? 여주인공 올리브가 뽀빠이, 살려줘요.” 이렇게 외칠 때마다 변함없이 시금치 통조림 먹고 달려오던 그 뽀빠이가, 어느 새 여든을 넘겼다고 하더군요. 미국의 한 신문 만화로 처음 실렸던 게 1929, 80년이라는 시간이 벌써 흘렀군요. 어린 시절에 뽀빠이를 보고 자란 분들은 다 아실 거예요. 뽀빠이는 악당 부르터스보다 덩치가 훨씬 작았고요, 연인인 올리브보다도 키가 작은 남자였지요. 하지만 무척 강하고 늘 유쾌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우린 큰 키에 작은 얼굴을 유난히 선호하는 편이지만, 전문가들은 이렇게 충고하고 있기도 하지요. 키가 작으면 균형 감각이 뛰어날 뿐 아니라, 지능지수도 높고 장수할 확률도 더 높다고요. 토마스 사마라스라는 미국의 학자도 그렇게 얘기하고 있던데요. 여든을 넘은 나이지만 어디선가 여전히 두툼한 팔뚝을 자랑하고 잇을 뽀빠이 아저씨 모습을 떠올리면, 한주에 쌓인 피로도 슬쩍 물러서 버린 것 같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943일 방송>

 

2. “우리의 부활2(29-34)”을 읽었습니다. 유교에서는 인간을 학생이라고 얘기하곤 합니다. 그래서 묘비명 전면(前面)에는 대체로 학생 박공 아무개 지묘라고 새기곤 합니다. 인간은 평생을 배우며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뜻일 것입니다. 이런 이해는 기독교 신앙을 배우고 훈련하는데 있어서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공지영의 산문집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는 성지순례기라고 말해도 좋을 우리 크리스천에게는 유익한 읽거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년 초에 구입해서 완독하였는데, 성경만 알고 있는 제게는 성경의 배경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역사적인 일화들을 채울 수 있다는 점에서 즐겁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 본문에는 고린도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낯선 일들을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흥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29절에 보면, “죽은 이들을 대신해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왜 그런 일을 하는 것입니까?” 하고 묻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초대 교회 시절에는 영유아가 일찍 죽거나, 아직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가족들이 있을 때, 가족 중 누군가가 그 망자를 위해서 대신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세례를 받지 못하고 별세하는 가족의 미래에 대해서 많이 걱정할 것입니다. 서울로 목회지를 옮기고 얼마 되지 않을 즈음에 외출에서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 나무랐습니다. 부산에서 제가 목회할 때 가끔 손자를 업고 교회로 마실을 왔던 할머니 한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서울로 이사한 아들 집에 와 계셨는데, 임종하는 것 같아서 제게 연락을 했던 모양입니다. 제게 세례를 받도록 가족들이 원했다고 말입니다. 두어 번 전화를 했다가 그냥 포기하고 병원으로 옮기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뒤로는 신학교에서 장례예배를 가르칠 때는 반드시 그런 비상시에는 목회자가 없다면 집사 등 평신도 직분자도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줄 수 있다 가르쳤습니다.

    대신 세례를 받아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요즘은 목사를 대신해서 아무나 결혼식 주례를 해도 무방한 것으로 생각하는 일들이 생겨서 걱정을 합니다만, 서양에서는 결혼 증명서를 위해서 결혼식 주례자는 법률로 정하고 있습니다. 주례자격을 가진 목사나 시장이 주례를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결혼의 법적 효력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우리는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가 무서운 질병이나 전쟁으로 세상을 떠나갈 때, 많은 질문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 아이가 하나님 품에 안길 수 있을까 하는 등의 물음말입니다. 그래서 유아세례를 받도록 하였는데, 그렇지 못할 때 슬픔은 배가 되었을 것입니다. 사도는 대신 세례 받는 것을 무방한 듯 선처해 주거나 무마하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세례를 받는 것처럼 억지로 세례를 받는 일을 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왜 그렇게 하는지 그 심리적인 현상을 통해서 세례의 가치와 세례의 축복을 말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 교파에서는 자신의 신앙을 충분히 이해하고 고백하는 경우에만 세례를 줄 수 있다하여 성인세례만을 고집하는데, 이 또한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모릅니다. 세례와 성찬을 받는 것, 말씀을 듣고 아멘하며 응답하는 것, 모두가 성령님의 도우심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사후의 모든 문제들, 구원의 여부와 천국에 이르렀는지 등은 주님의 은총에 맡기면 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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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56(2024. 4. 2. 화요일).

시편 시 55:21-23.

찬송 32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침 방송국에 오는데, 꽃을 한 가득 싣고 가는 작은 트럭을 봤어요. 새벽 꽃 도매시장에 가서 일찌감치 꽃 사가지고, 동네 꽃 가게로 싣고 가는 모양이던데요. 그런데 요즘에는 꽃향기가 예전처럼 진하지 않다고 하잖아요. 미국 버지니아 대 연구팀에 따르면, 대기 중의 꽃향기는 150여 년 전에 비해서 무려 90%나 감소했다고 합니다. 꽃향기가 그렇게 급격하게 줄어들게 된 데는 자동차 배기가스도 한몫 톡톡히 했다고 하지요. 대기가스의 산화질소가 꽃향기 분절을 파괴하는 역할을 하면서 향을 잃게 됐다는 건데요. 그래서 19세기 중반에는 평균 1km 이상 날아가던 꽃향기가, 요즘 도시에서는 2, 300m 밖에 날아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요즘처럼 꽃 선물이 좋을 때도 없을 거예요. 그 향기를 가까이서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셈이니까 말이지요. 아침 일찍부터 차에 실려 가던 꽃향기가 그 많은 꽃향기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고루고루 나눠지기를 바라면서 오늘 출발하겠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941일 방송>

 

2. “우리의 부활(12-28)”을 읽었습니다. 성경이 예수님의 부활을 말씀하는 중요한 이유는, 우리들 인간에게 부활이 있다는 진리를 말씀하는데 있습니다. 유구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영웅들과 기라성 같은 위인들이 등장했지만, 그들의 생애가 부활과는 무관한 한낱 육신의 삶으로 끝이었다고 한다면, 부활 이야기는 시간 낭비에 불과한 헛된 꿈 얘기일 뿐 일 것입니다. 실제로 유대교 안에서는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두개인이었습니다. 그들은 부활 뿐 아니라, 영혼불멸사상도 영적인 세계도 부정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12:18, 20:27, 23:8). 기독교의 신앙을 오로지 이성적인 진리에 한정시킨 합리주의 신학(이신론 Deism)도 있는데,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를 인정하면서도, 신에 의한 계시나 기적이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고등학교 때 주일학교 교사들을 지도하셨던 선생님 한 분은, 손목에 찬 시계를 풀면서 이 시계가 자신을 만든 시계 기술자를 알아보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모순이냐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가 하면 영웅호걸들의 부활은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인정하면서도, 정작 보잘 것 없는 자기 자신의 부활은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그랬습니다. 그들 중에서는 죽은 후에 모든 초라한 자신이 죽어서 거룩한 새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몸의 부활을 믿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살아온 이력이 너무도 어리석고 추한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가정법 만일이라는 명사를 대입하면서 부활신앙이 없을 때를 말해주려고 하였습니다. “만일 죽은 자가 부활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실 리가 없고”, “만일 <생략>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을 리가 없고”,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아직도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이 세상에만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장 가련한 사람일 것이라고 말입니다. 부활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는 다른 아무런 희망도 기쁨도 없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사람이 되심으로 모든 죽은 자들도 그 분으로 인해 부활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주님의 부활이나 훗날 우리들에게 임할 부활의 은총을 설명하거나 이해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으로서 그 사실을 증언함으로 믿게 하고 받아들이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부활 신앙을 받아들이거나 믿는 것은 우리의 권세나 지혜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증거할 뿐, 그것을 수용하는 것은 성령께서 그 심령을 움직이실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지만,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을 송두리째 우리가 수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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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55(2024. 4. 1. 월요일).

시편 시 55:18-20.

찬송 15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봄날이라는 말이 주는 느낌은 참 온화하고 부드럽지요. 더불어 떠오르는 이미지도 눅눅하거나 음습하지 않고 밝고 쾌청합니다. 꿈도 꾸지 않고 잘 자고 일어난 아침에, 몽롱하면서도 기분 좋은 나른함, 봄날이라는 말 안에는 그러한 모습들이 빼곡히 담겨 있는 듯합니다. 작곡가 국 현은 그러한 봄날의 느낌을 곡으로 옮겨내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작곡가의 뜻대로 봄날의 이미지를 닮아서 밝고 따뜻한 곡을 작곡가는 가곡으로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4월의 첫날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은 그러한 곡들 가운데 하나로 말입니다.

    “저 넓은 드높은 산 흐르는 냇물/ 어여쁜 꽃 떠오르는 햇빛 안고 줄지어 노래하네/ 숲 속의 새 풀벌레들/ 나의 빛깔을 간지러주네/ 우리들 한 목소리로 기쁜 노래 부르네/ 하얀 꽃씨 흩날리는 따스한 봄바람 한 잎/ 아지랑이 멀리 피고 기차소리 들리네/ 연못 속에 하얗게 핀 목련꽃 잎의 훤한 그림자/ 그 안에 파란하늘 엷게 드리워지네/ 겨우내 밀려있던 가지가지 마디엔/ 따뜻한 봄의 새 향기 들려오네/ 하얀 나비춤을 추는 따스한 4월 한 봄날에/ 우리는 한 목소리로 기쁜 노래 불렀네/ 새 생명을 기다리는 따스한 사랑 한 봄날에/ 우리들 한 목소리로 기쁜 노래 부르네

    작곡가는 재능이 많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의사인 동시에 작곡가로도 좋은 활동을 보여주고 있지요. 방금 들으신 이 곡 <4월 한 봄 날>에 노랫말을 직접 쓰기도 했습니다. 이 곡을 2005년 성탄절에 완성했다고 합니다.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던 중에 조카들이 피아노 곁에 둘러 앉아 합창하는 모습에서, 아이들이 불러도 좋을 만한 곡을 하나 쓰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집으로 작곡가는 길옆에 차를 잠시 세우고 본래 성가 곡으로 완성하고 싶었던 마음을 돌려서,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는 우리 가곡으로 만들었지요. 봄날이 지난 포근하고 따뜻한 심상을 무척 잘 담아낸 곡입니다. 국 현 작사 작곡 <4월 한 날>에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41일 방송>

 

2. “그리스도의 부활(1-11)”을 읽었습니다. 유행가 가수 임 희숙의 <잊혀진 여인>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긴 잠에서 깨어보니 세상이 온통 낯설고/ 아무도 내 이름을 불러주는 이 없어/ 나도 내가 아닌듯해라은퇴 후의 삶을 조용히 살면서 자신을 성찰하며 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자동차 소리로부터 몸을 부대끼며 사는 도시를 피해 조용한 시골에 집을 구했습니다. 처음 얼마동안은 낙원이 따로 없다 생각했습니다. 작은 텃밭과 과일 나무를 돌보면서 하루 한 편의 묵상자료를 준비하고 배달하는 것으로도 벅찰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전화 벨소리마저 뚝 끊겼을 때, 세상이 달라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마을 일에 훈수를 들기 시작했고, 마을 촌장이 되자 새로운 형태의 목회를 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전과 다른 것은 안티 크리스천들이 많이 늘어났다는 것과, 막말 수준의 카톡들이 마을 단톡방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을 방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제도권의 교회 지도자들에게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선후배라는 개념도 오래 전에 사라졌고, 심지어 사제지간조차도 안중에 없는 파렴치한들이 넘쳐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옛 스승들이 낙향하여 말수를 줄이고 조용히 살았던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도는 복음의 가치와 그 위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복음은 우리의 믿음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제대로 믿고 굳게 지킨다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이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으나, 성경의 말씀대로 사흘 만에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제자들 그 다음에 50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셋째로 이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된 것이니,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할 책임과 과제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자주 잊어버리는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복음에 대한 왜곡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씀하시는 복음이 아니라, 세상이 추구하는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가르치시는 복음,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바르게 깨닫고 그 증언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와 목표에 함몰되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요즘 총선을 눈앞에 두고, 소위 나라의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유혹하는 말은, 건강한 육신으로 장수하며 살도록 해 주겠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종교 지도자들까지 박수치며 따라다니고 있는 실정입니다. 죄로부터의 자유, 지구촌의 이웃들로써 평화를 누리며 함께 살아가는 가치에 눈뜰 수 있기를 기도할 때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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