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368.

시편 시 58:4-5.

찬송 49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벚꽃이 조금씩 피어나기 시작할 즈음에는, 언제쯤 가장 아름다울까? 언제쯤이 그 절정기일까를 무의식적으로 헤아려 보곤 했던 것 같은데요. 그렇게 아직은 절정기가 아니라고 조금씩 조금씩 미루는 동안 어느새 절정기를 지나쳐서 조금씩 벚꽃들은 질 준비를 하고 있지요. 긴 기다림에 비해 너무 짧은 절정기 때문에 해마다 매번 조금 아쉽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벚꽃을 즐기는 마음속에는 너무 빠르고 갑작스러운 이별의 여운까지가 한데 섞여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9413일 방송>

 

2. 부활절 셋째 주일의 사도서간 요일 1:1-10을 본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말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학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은 깊은 이해 없이 중요한 낱말을 가벼운 마음으로 사용합니다. 상식적인 말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낱말들은 상식적이어서도 안 되지만, 사전적이어서도 안 됩니다. 매우 중요한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성경 언어를 흉내만 내는 경우가 넘쳐나고 있습니다(1-2).

신조어를 즐겨 쓰는 예능프로에서 자주 쓰는 말 가운데는 할렐루야!’ ‘아멘!’ 같은 말은 물론, ‘거듭났다는 말이나, ‘섬김’ ‘봉사라는 말은 아주 자주 사용하는 용어들입니다. 한편으로는 반갑고 고맙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귀중한 말이 쓰레기처럼 추하고 가벼운 말이 될 때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오래 전에 실업축구 구단인 <할렐루야 축구단> 선수들 예배에서 설교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설교를 끝내고 어려운 점들을 들었는데, 프로축구에서는 볼 수 없는 추한 모습이 일상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몇 년 후배인 상대팀 선수가 가래침을 뱉으며 할렐루야, 개새끼들아!”라고 욕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이 욕설로 둔갑해서 사용된 것입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에게 맞대응하지 않고 정중하게 대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변절자 노릇을 거듭남이라고 해석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용어는 바른 의미로 사용되어야 하겠습니다(3-7).

요한서신의 저자는 복음을 선포하는 목적을 하나님과 그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와 사귀는 친교에 참여하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밝힙니다. 이를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 5:17)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서 기자는 참 포도나무인 예수께 붙어 있는 가지로써 우리 인생을 정의하였습니다(15:5).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안과 밖으로 자기 마음대로 옮겨 다닐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말해 왔습니다. 특별히 정치가들은 표를 얻겠다는 얄팍한 속임수로 교회당과 법당을 오가면서 자신들의 정치생명을 지키려는 까말레온적 신앙세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일이란 자신의 지혜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야 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빛이신 주님과 함께 빛가운데서 말하고 생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크리스천은 의로운 사람이 되었으나 아직은 죄인입니다(8-10).

한때 예수께서 모든 믿는 자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10:4)을 근거로 영지주의자들은 구약 폐기론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구원파를 따르던 저의 친척 하나는 자신은 이미 구원받았기에 더 이상 배울 것도 없고 힘쓸 일도 없다 하였습니다. 이런 주장들은 모두 잘못된 주장으로 성경의 말씀을 전체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이해하는 데서 오는 잘못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모두가 죄인에서 의인으로 새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의인입니다.’ 라고 하거나 나는 더 이상 지옥권세가 힘을 쓰지 못합니다.’ 고 떠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최후의 변론을 끝낼 때까지는 두려움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 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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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67(2024. 4. 13. 토요일).

시편 시 58:1-3.

찬송 6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취직을 위해서 입사 지원서를 냈습니다. 그리고 1차로 서류전형과 필기시험을 통과했지요. 이제 2차 관문만 넘어서면 됩니다. 그런데 그 2차 관문이 전문적인 심리 적성검사 같은 게 나을까요? 아니면 회사의 인사담당직원이나 임원이 직접 하는 일반 면접이 더 나을까요? 어느 쪽이 더 정확하고 또 공정할까요? 한 조사결과에 의하면, 입사시험에서의 심리검사 결과와 입사 후의 직무수행 능력 평가가, 늘 일치하지는 않았답니다. 심리검사나 적성검사 결과가 좋다고, 입사 후 직무수행 능력도 똑 같이 좋았던 건 아니었지요. 하지만 일반 면접관이 보고 평가하는 점들이 심리검사나 적성검사의 결과와 다른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일반면접관도 결국 지원자들의 행동이나 말을 관찰하고 분석하지요. 심리검사나 적성검사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보다 전문적이고 과학적인 심리검사나 적성검사가 낫다는 주장이 갈수록 커지고 있어요. 때문에 앞으로의 입사시험에서는, 일반 면접관에 의한 평가보다 심리검사 같은 것에 의한 평가와 선발이 늘어날 거라고 하지요. 그러니 앞으로 취업준비생들 사이에 면접시험 대비요령이 아니라, 심리 검사 대비 요령 같은 게 등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긴 방법이야 어떻든 면접 받을 수 있는 기회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싶은 그런 분들 많으시겠지요. 요즘. 그런 분들 모두 힘들게 오는 봄이 더 반갑듯이, 내 인생의 봄날도 좀 힘들고 더디게 올 뿐, 더 크고 반갑게 꼭 오리라는 희망과 인내, 절대 잃지 마세요<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0416일 방송>

 

2. “은총의 선물을 잘 관리하는 자(1-11)”그리스도인이 받을 고난(10-19)”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 단락입니다. 엊그제 52년 만에 만난 대학 동창의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첫 인상은 여자처럼 귀여운 외모에 말씨도 정감이 넘치는 앳된 소년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입학 후 한 두 달이 되어 학교 신문사의 기자가 된 후로는 온갖 핑계를 대고 수업을 빠져 밖으로 돌았습니다. 아마 출석은 다른 친구들이 대답을 대신해 주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학점관리조차 제대로 못해서 입대를 하게 되어 헤어졌는데, 제가 대학원에 다닐 때 복학을 했지만, 여전히 신문사 기자로 생활을 하느라 저와는 연락이 두절되었다가 50년이 훌쩍 넘어 재회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이 친구의 중학교에 다니던 여동생을 한 6개월 가르치느라, 매일 저녁은 이 친구의 집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가족들의 면면도 잘 알게 되었습니다. 부친은 한국에서 제일가는 화장품 회사의 전무이사로 자녀들에게 헌신적인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시쳇말로 부모의 후광이 자녀들에게 나약함을 길러주었다 얘기했습니다. 물론 모든 자녀들이 어디 하나 빠지는 곳은 없지만, 뚜렷한 목표의식이 없다는 것과 주어진 삶을 넉넉하고 재미있게 사는 것으로 만족하는 아주 평범한 생활을 했다 합니다. 지금도 매일 정해진 아침 시간에 수영장을 찾고, 친구는 해 오던 광고 일을, 아내는 그림을 그리며 살고 있다 했습니다. 그런데 강남에서 제일간다는 교회를 다닌 부모님 덕에 그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지만, 결혼 후에는 교회 출석을 꺼린다 했습니다. 자신이 신학대학 출신이지만, 확고한 신앙관도 정체성도 없어서 쉽게 포기한 것 같다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신앙생활에 나태해 지는 과정을 잘 소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신앙생활에서 힘든 일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삶이란 누구든 땀 흘려야 하고 인내해야 할 것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이런 일들을 매우 낯설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을 비롯해서 모든 사람들을 땀 흘려야 하고, 많은 고통을 이겨내야 합니다. 둘째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처럼 욕정을 따라 살고 싶어 한다는 점입니다. 제가 안국동 현대 본사 지하층에서 1년 동안 과장급을 대상으로 성경을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한 번도 지각도 결석도 하지 않겠다 다짐한 분들이 차츰 낙오되기 시작했습니다. 저녁 모임을 갖지 못하는데서 오는 불편함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즐겁게 살고 싶은 욕망을 이겨내지 못한 것입니다. 세 번째는 종말론적인 시대 조류를 분별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종말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육체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더욱 더 정신을 차려야 하고, 기도해야 하며,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힘들게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선을 행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는 자신이 받은 은총의 선물인 재능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일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재능을 잘 관리하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먼저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를 오해하면 교만해 지고, 잘못 관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과 영광을 돌린다는 정신으로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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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66(2024. 4. 12. 금요일).

시편 시 57:9-11.

찬송 42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순간 우리 몸 안에는 보이지 않는 시계가 생긴 듯합니다. 굳이 시계를 보지 않더라도 밥 먹을 즈음이 되면 시장해지고 매일 비슷한 시간에 잠이 들고 일어나게 되지요. 주말만큼은 좀 더 늦은 시간까지 게으름을 피우고 싶지만, 몸 안의 시계는 마음과 달리 늘 같은 시간에 눈을 뜨게 만들곤 합니다. 그러고 보면 습관이라는 것이 참 무섭지요. 어느 순간 큰 오차 없이 주어진 시간들이 저절로 꾸려져 나가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몸 안의 시계는 이제는 이렇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새로운 한 주를 위해서 좀 더 편안하게 쉬는 시간을 가지라고 말입니다. 사람이란 누구나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늘 참인 이 명제는 대상을 아이들이나 어른으로 제한할 필요도 없지요. 주중의 일과나 다른 사람과 약속 같은 것에 구애받지 않고, 온전한 나로써 보낼 수 있는 시간. 이것을 일컬어 어떤 이는 휴식이라 부르고, 또 어떤 이는 무위의 시간이라 부르기도 하겠지요. 무엇으로 부르던 그 시간은 분명 필요합니다. 가끔씩 이러한 시간을 누릴 수 있다는 건, 내 삶의 주체가 바로 나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방법이기도 할 테니까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일이 있을 때면,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힘들고 어려워지면, 사람들 사이에서 벗어나 늘 홀로 있는 것을 택했다고 하지요. 친구는 또 하나의 자신이라고 말할 만큼, 벗들을 아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 때문에 친구들이 걱정을 하고 염려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탓이었지요. 친구에 대한 그의 마음은 속 깊고 두터운 것임엔 틀림없습니다. 그래도 혼자 견디기 쉽지 않은 일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관계는, 친구라는 울타리 이기게 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현대적인 우정이란 오히려 그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남들에게 내 보이기 힘든 곳까지 털어놓을 수 있는 그러한 신망 깊고 단단한 관계 말입니다<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412일 방송>

 

2. “정의를 위한 수난(8-22)”을 읽었습니다. 몇 년 전에 우리 사회를 강타했던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이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습니다. 정의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일반적인 정의의 개념은 윤리, 합리성, 법률, 자연법, 종교, 공정함, 혹은 균등함, 그리고 선포된 윤리의 위배에 따른 처벌 등에 바탕을 두고 내리는 도덕적인 옳음의 개념이다.’ 고 합니다. 마이클 샌들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정의론을 설명합니다. ‘(1). 사람들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이 정의라고 주장하는 공리주의, (2).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정의라고 주장하는 자유주의, (3). 정의를 행복의 합계나 자유보장으로 단순히 설명할 수 없으며, 오히려 다양한 도덕적, 종교적 가치에 대한 논의로부터 공동체 구성원의 좋은 삶과 공동선에 대한 답을 천천히 찾아보자는 공동체주의, 이 중 마이클 샌델은 세 번째 공동체주의, 미덕 추구의 입장에 서 있습니다.’ 센델은 지금까지 인류가 추구해 온 도덕에 기초한 정의 개념에서 크게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도덕적 이해는 불완전해서 계속해서 보완과 발전이 첨부되어야 하는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는 정의는 무엇입니까? 아모스는 인간의 약점을 직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의해서 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십일조와 정결한 제사와 같은 종교적인 헌신에서 환멸을 느꼈습니다. 형식과 진정성이 빠진 위선적인 종교 생활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고 역설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고후 5:17).

    이제 우리는 한 사람의 크리스천으로써 예수님께서 위임하신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과제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넓은 의미에서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하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이는 결코 공 맹자가 말하는 도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추구하는 도덕이란 이론적일 뿐 실현 불가능한 공론(空論)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인간은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우리를 향해서 그리스도 안에서살아가는 길을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간다는 말은,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키거나 도덕적인 완덕(完德)에 이르도록 힘쓰는 수행 또는 수련이 아니라, 우리의 말과 행실을 그리스도에게 정박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말할 때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듯 하고, 누군가를 섬길 때는 그리스도께서 섬기듯 하면서 말입니다. 물론 우리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빌지 아니하면 안 될 일입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 말 한마디나 행동 하나를 하기 전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여부를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역시 우리들에게 숱한 시행착오가 따를지 모릅니다. 성령이여, 우리를 도우소서! 아멘.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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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65(2024. 4. 11. 목요일).

시편 시 57:7-8.

찬송 36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곤 하는 책 중에는, 처세서 자기 개발서 혹은 심리 치유서 같은 책들을 빼놓을 수가 없지요. 그런 책들은 대개 이렇게 하면 인생을 성공적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바꾸면, 당신도 최고가 될 수 있다. 혹은 가장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사랑이나 이별을 제대로 할 수 있다. 확신에 넘쳐 조언하고 제시합니다. 그래서 책만 읽고 나면 뭔가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을 것도 같지요. 하지만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정작 책을 읽고 나면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웨인 와이턴이라는 심리학자는 나쁜 처세서일수록 당신은 당신이기 때문에 당신이어야 한다는 식의 모호하고 애매한 일명 심리적 옹알이를 많이 사용하고, 과학적인 건실함 보다는 책 판매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지나치게 쉽고도 단정적으로 삶에 대한 자기중심적인 접근을 장려한다.” 이렇게 분석했지요. 그렇기 때문에 좋은 자기 계발서를 가려서 읽으려면, 당장 당신을 바꿀 수 있다 처럼, 즉각적이고도 쉬운 변화를 너무 단호하게 약속하는 책을 피하고, 저자의 공신력이 어느 정도 검증된 책 속 주장의 근거나 자료가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된 주제가 확실한 책을 선택하라고 조언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책을 읽고 난 뒤 자신을 정말로 바꾸려는 실질적인 노력과 실천이라고 덧붙이지요. 그러고 보면 내 성공이나 자기 개발이 그 책들에 의해서 좌우된 다기 보다, 내 실제 노력과 실천에 따라서 그런 책들의 성공이 좌우된다고도 할 수 있을 텐데요. 이 봄, 괜찮은 자기 개발서 한 권쯤 만나서 좋은 실천력을 발휘하는 성공적인 봄이시길 바래봅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0413일 방송>

 

2. “하나님의 종다운 생활(2:11-17)”, “그리스도의 고난(18-25)” 그리고 아내와 남편(3:1-7)”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지난 주일에 제가 한 달에 한 번씩 설교하는 주성농인교회에서 살고 싶은 곳이 어디세요?”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요즘 제 자신에게 묻는 가장 심각한 질문 중의 하나입니다. 살고 싶은 곳이 어디세요? 어렸을 때는 하루 세끼 밥을 먹을 수 있는 집에 살고 싶었습니다. 매달 학교에 내는 월사금(月謝金-학비)을 제때에 낼 수 있는 우체국장 아들이 부러웠습니다. 목사가 되어서는 여러 명의 집사님들과 함께 봄 대심방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어리석은 소망이었는지 지금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유효기간이 찰나(刹那)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우리들에게 무엇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이며, 어떤 삶이 빛나는 삶인지를 말씀하고 있다 생각합니다. 그것은 매우 역설적이어서 제대로 받아들이거나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인으로 사는 사람은 두려운 마음으로 복종하면서 살아야 하고, 억울한 고통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이 계신 것을 생각하고 괴로움을 참으라고 하십니다. 죄를 짓고 매를 맞는 것은 아무런 영예가 없지만, 선을 행하다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께 축복을 받을 일이라 말씀하십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죄를 지으신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욕을 당하고 고통을 당했으며 오히려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다 맡기셨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말입니다. 주님께서 죄 없으신 몸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심으로 우리 모두가 예수님이 당하신 상처 때문에 우리의 상처가 낫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과 우리가 꿈꾸는 이상사회는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기독교회가 가르치는 구원과 믿음은 과연 지금처럼 살아도 무방한 것인지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 베드로의 말씀을 들으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물론 우리들 중에는 죄를 짓고 옥살이를 하거나 매를 맞았거나 힘든 일을 겪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선을 행하였다고 고통을 당해본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삶에서 뭔가 빠진 것이 있지 않나 하는 강한 생각은 들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지금 심각하게 우리의 삶을 이 말씀에 비춰볼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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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64(2024. 4. 10. 수요일).

시편 시 57:6.

찬송 24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잘 들어주세요. 한 변의 길이가 초등학생 키만 한 주사위에 물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주사위 바닥에는 1초에 100리터씩의 물이 빠져나가는 구멍이 나 있지요. 그럴 경우 주사위의 물이 텅 빌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얼마일까요? 구체적으로 계산하지 마시고 그냥 막연히 추측만 해보세요. 아래쪽에 구멍이 나 있으니 몇 분이나 며칠 길어야 한 두 달이면 다 빠져나가지 않을까 싶지 않으세요? 실제로 조사해 보면 그렇게 대답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고 해요. 하지만 정답은 자그마치 317년이라고 하네요. 그런데도 사람들이 아무리 길어도 한 두 달일 거라고 가늠하는 건, 흐르는 물에 대한 막연한 선입견으로 잘못된 추측 계산을 하는 때문이지요. 그렇게 우리 주위에서 잘못된 추측 계산을 하는 대표적인 사례 중의 하나가 복권이라고 합니다. 가령 복권을 살 때, 사람들은 그 복권에 1등에 당첨될 확률이 1,400, 1,500만분의 1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요. 엄청나게 힘든 당첨 확률이라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도 막상 사람들은 그 숫자 1에 대해서 어쨌든 한 사람은 뽑히는 것 아니냐? 이런 완벽한 가능성의 선입견을 갖고, 그 한 사람이 바로 나일 수도 있다는 막연한 추축 계산을 하지요. 그런가 하면 그 계산의 대상이 어떤 심각한 병일 때는, 또 병에 걸릴 확률이 1,000분의 1 상당히 높은 확률임에도 불구하고 그 일이 하필 나일 리는 없을 거야. 이런 정반대 막연한 추측 계산을 하기도 하고요. 월요일 아침 등굣길이나 출근길이 유난히 괴롭게 느껴질 때면, 그야말로 복권이라고 당첨됐으면 하는 식으로, 희망과 허황이, 당위와 바람이, 추측과 실제가 뒤 섞일 때가 적지 않지요. 그럴수록 그 양쪽 사이의 거리 계산에 보다 지혜롭게 할 수 있도록, 마음을 좀 더 분명하고도 단단하게 긴장시켜야 하지 않을까 싶은 월요일 아침입니다<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0412일 방송>

 

2. “산돌과 거룩한 백성(1-10)”을 읽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산돌이신 주님께 나아오라고 초청합니다. 주님을 산 돌이라고 비유하신 것입니다. 영어 성경(R. S. V)에서는 living stone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있는 우리를 거룩한 백성으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산돌이신 주님은 사람들에게는 버림받았지만, 하나님께는 선택받은 귀한 돌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신령한 집을 짓는데 쓰일 산돌이 되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니까 산돌이신 주님은 우리들의 모델이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집을 짓는 일에 있어서 말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몇 마디 중심 단어가 나옵니다. 산돌, 거룩한 백성, 신령한 집이 그것들입니다. 그러니 이 세 낱말은 서로 무엇인가 중요한 연관성이 있다는 게 분명합니다. 거룩한 백성인 우리들에게 있어서 신령한 집을 짓는 것은 삶의 의미이며 목적처럼 느껴집니다. 우리가 힘써야 하고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목표는 신령한 집 곧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의 집을 짓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는 집이란 우리 모든 만물이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사랑할 하나님을 모시는 자리를 의미합니다. 야곱이 부모를 속인 죄로 집에서 쫓겨나 멀고 먼 하란 땅을 찾아갈 때, 땅거미가 지는 어두워진 빈들에서, 팔을 베고 자던 야곱을 찾으신 것을 기념해서 길가에 버려진 돌들을 몇 개 세우고 <벧엘>이라 이름을 붙였던 오래전 역사를 기억했을 것입니다(28:18-22). 신령한 집이란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이며, 고단한 삶을 쉴 시은소였던 것입니다.

    구약 이사야 선지자는 이 신령한 집에 대해서 일찍이 예언했던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귀중한 돌 하나를 골라(산돌) 머릿돌로써 시온에 두었다. 그를 믿는 사람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28:16). 머릿돌이란 어떤 것을 의미합니까? 기둥을 떠받들어 주는 기초석을 말합니다. 훗날 성경을 읽고 배운 사람들은 집을 지을 때마다 그 집의 기초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정해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집의 중심을 가장 잘 나타내는 기초석에게 특별한 이름을 붙여두었습니다. 머릿돌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우리 크리스천들은 그 기초석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입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지은 소위 서양식 건물에는 이 기초석을 정초(定礎)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평생에 걸쳐 힘쓰고 땀 흘려 지어야 할 신령한 집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릿돌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우리의 삶을 제물로 드리는 자리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런 삶을 가능하게 할 자격을 부여하는데,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이며, 거룩한 겨레이며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은총은 하나님의 능력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3. 소중한 참정권을 행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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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63(2024. 4. 9. 화요일).

시편 시 57:4-5.

찬송 35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혹시 뒷센 스마일, 뒷센 미소라는 말 들어보셨어요?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의 폴 에크만 교수는, 사람의 웃는 표정 얼굴 표현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학자입니다. 그 연구에서 에크만 교수는 사람들의 미소를 열여덟 개 서로 다른 유형으로 분류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열여덟 개 중에서, 오직 단 하나의 미소만이 완벽하게 순수한 즐거움이나 재미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지요. 그 미소에 19세기 프랑스 해부학자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 바로 뒤센 스마일 뒷센 표정 이예요. 그러니까 뒷센 미소 뒷센 표정이라고 하면, 완벽하게 순수하고 또 기뻤을 때 재미있어 할 때, 저절로 짓게 되는 미소를 뜻하는 것이지요. 그런 뒷센 미소의 형태는 눈 주위의 근육이 수축되면서, 눈 바깥쪽으로 살짝 주름이 잡히는 형태라고요. 흔히 눈웃음친다고 할 때의 표정과 비슷하답니다. 사실 눈 주위 근육 둘레 근육은 어떤 경우에도 잘 달라지지 않는 근육이래요. 오직 단 한 가지 경우에만, 그러니까 즐거움이나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서 저절로 웃을 때만, 그렇게 움직여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뒷센 미소의 빈도로 진짜 기뻐하는 건지 그저 기뻐하는 척 하는 건지, 행복감과 만족감을 보다 정확한 지수를 밝히기도 하지요. 행동 심리학자들은 그 점을 아예 거꾸로 활용하기도 해요. 가령 억지로 뒷센 미소를 짓게 노력해서, 눈 둘레 근육을 인위적으로 움직이게 하고요. 그 덕분에 마음이나 기분이 기뻐지도록 바꾸는 거지요. 그러니 내 얼굴 어디엔가 숨어 있는 뒷센 표정을 찾아내고 만들어 보고 따라해 보는 것, 억지로라도 뒷센 미소를 자꾸 지어보는 것, 행복해 질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일 텐데요. 그러기 위해선 물론 내가 언제 어떻게 정말 사심 없이 순수하게 웃고 미소 지었는지, 그 상황을 잘 기억해 보는 것도 물론 중요할 것 같습니다<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048일 방송>

 

2. “거룩한 생활(13-25)”을 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민족 이스라엘, 하나님께 불려나온 사람들 크리스천, 여러분들은 이런 사람들을 거룩한 사람이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 명령하셨는데, 빛과 소금은 고사하고, 세상에 악취를 풍기고 해악을 끼치는 집단이 된다면 이는 매우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제(8) 국민일보는 지난 3일 오전 수도권 지하철 1호선에서 전도활동 불편 민원이 접수돼 열차출발이 지연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열차 안에서 전도 활동하는 분은 얼른 내리라는 방송이 나온 뒤에도 피민원인이 하차하지 않자 기관사는 내리지 않으면 출발하지 않겠다고 대응했습니다.” 란 기사를 올렸습니다. 노방전도자가 출근길의 시민들의 발을 멈추게 했다는 내용입니다. 그 열차 안에는 전도할 대상자라고 생각한 불신자는 물론 전도 대상자가 아닌 크리스천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전도자는 우리가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란 피켓을 들었습니다. 이런 분들을 만날 때는 크리스천들 까지도 불쾌할 뿐 아니라 반감까지 갖는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거룩한 생활을 권고하는 사도의 설교입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고, 거룩한 행실을 보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는 성스럽고 위대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사전에서는 순수하고 완전하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거룩에 대한 해석은 구별되다. 두려워하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의 나실인이 거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확연하게 구별된 그 무엇을 보여주었습니다. 나실인으로 서원을 할 때, 독주를 마시지 않고,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으며, 사체(死體)를 만지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6:1-8).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거룩한 생활이란 나그네로 살아가는 것이라 비유하고 있습니다. 나그네의 생활은 두려움의 연속이라고 했습니다. 낯선 이방인으로 주목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 한마디 행동 한 거지가 온 마을을 들썩이게 만들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제가 독일의 한 시골 마을에 있는 신학교에서 3개월간 세미나에 참석한 일이 있었습니다. 오후 5시면 음식점을 제외하고는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아서 학교 도서관이외에는 갈만한 곳이 없었는데, 마침 그곳에 큰 교회당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당을 둘러보고 나오는데, 한 어린 사내아이가 지나가고 있어서 그 아이를 불러 얘기를 나누려고 했는데, 한 아주머니가 소리를 지르며 뛰어나오는 것입니다. 왜 아이를 부르느냐면서 제게 따지듯 소리쳤습니다. 그래서 이곳 신학교에서 열리는 국제 세미나에 참석하는 한국에서 온 목사라고 자신을 소개하자, 그 아주머니는 그 교회의 사모라며 오해가 풀렸던 추억이 있습니다. 그때 나그네인 자신을 십이분 깨닫는 기회였습니다. 두려움으로 살 나그네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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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62(2024. 4. 8. 월요일).

시편 시 57:1-3.

찬송 53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분 좋은 일이 생기면 콧노래가 저절로 나오지요. 잠을 잘 자고 나서 몸과 마음이 가벼울 때도 그렇고요. 우리가 입으로 내는 소리나 노래하는 것들은, 그렇게 우리 몸이나 마음 상태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애요. 퇴계 이황 선생은 봄날의 하는 소리는 눈을 밝아지게 하고, 여름의 소리는 심화를 가라앉히고, 가을의 소리는 간 기능을 좋게 하고, 겨울날의 소리는 평안해 지게 해 준다고 말씀하셨답니다. 우리가 입으로 소리를 내면 그것이 기 순화는 촉진시켜 주어서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다스려주는데, 계절마다 약해지기 쉬운 부분은 다르기 때문에, 거기에 걸맞는 소리를 많이 내 주는 게 좋다는 말씀이셨다는데요. 대 유학자인줄로만 알았는데 이런 것도 연구하셨다니까 참 흥미로워요. 일명 퇴계 사계절 건강 노래라고도하는 그 건강 노래 덕분인지, 그 분은 70세까지 당시로써는 장수하셨답니다. 봄의 좋다는 소리 휴 지금 한번 길게 소리 내 보시면서 건강한 하루 시작해 보세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948일 방송>

 

2. “살아있는 희망(1-12)”을 읽었습니다. 직업을 자주 바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의 특징은 꿈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학생들 중에도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저의 동생이 꿈이 너무 많아서 직업을 여러 가지 것을 옮겨 다녔습니다. 제가 가르친 학생들 가운데서도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서 고민이라는 상담을 받은 일도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게 여유롭지 못한데도 불구하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는 그 황금보다 귀중한 시간을 낭비해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희망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 희망을 살아 있는 희망이라고 말입니다. 이를 반대로 생각하면 죽은 희망,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희망을 버리라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말씀하는 죽은 희망이란, 썩을 것들에 꿈을 꾸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더러운 희망이라고 했습니다. 시들어 버리는 희망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과연 이런 희망을 우리가 품어본 적이 있었는지 곰곰이 성찰해 봐야 하겠습니다. 어떤 희망을 품고 있는지도 일기장에 한번 써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사도 베드로가 말하는 살아 있는 희망이란 어떤 것들입니까? 첫째는 시련으로 담금질 한 황금 같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어린 시절 저의 집 대문 옆에는 대장간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람을 불어넣어 쇠를 달구는 풀무가 있었는데, 작은 불씨만 있어도 몇 번 풀무질을 하면 새빨간 숯불이 되고 그 속에 쇠를 집어넣으면 벌겋게 쇠가 달구어집니다. 그러면 대장장이는 큰 메를 높이 들어 달구어진 쇳덩이를 펴기도 하고 오므라뜨리기도 해서, 필요한 농기구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뜨거운 풀무 불에 달구어지고 두드려진 농기구는 제 모양을 가지고 오래 버틸 수 있습니다. 우리 믿음도 담금질하지 않으면 제 구실을 할 수가 없고 그 순수성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기대하는 살아 있는 희망이란 영혼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구원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세속적인 이해와 성경적인 이해가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구원이란 개념을 사전적으로 의미로는 위험과 죽음에서 구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은 우리 인간의 근원과 다시 연결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근원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생명의 원형이 되시는 하나님과 연결하는 것이고 연합하는 일입니다. 대표적인 말씀이 요 15:1-2의 말씀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들과의 관계 회복이 곧 구원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가령 아무리 좋은 품종의 포도나무라고 하더라도 가지들이 나무에 연결되어 있지 아니하면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마침내 죽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나무 원둥치에 잘 연결된 가지들은 싹을 틔우고 잎이 나서 자라 마침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력이 넘치는 희망이란 것이 있습니까? 시련으로 담금질한 믿음이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연결된 구원의 삶을 살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61.

시편 시 56:122-13.

찬송 37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요즘은 남의 말을 하는 것이 너무나 쉬워서, 내일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하는 것도 듣는 것도 농담처럼 가볍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느 하루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 경우도 있지요. 세상의 이야기가 담긴 도서관도 대부분 월요일에 쉬는 것처럼, 우리도 오늘 만큼은 남의 이야기를 쉬고, 오직 나만의 이야기로 가득 채워서 보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씨앗같이 가장 단위에서부터 아름다운 꽃이 피는 것처럼, 가장 가까이 있는 자신의 이야기에서부터, 보다 나은 내일이 시작될 테니까요. <KBS FM 1, 가정음악, 200946일 방송>

 

2. 부활절 둘째 주일의 행 4:32-35의 말씀으로 이상사회/理想社會의 모습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부활절 기간의 주일 성경본문은 구약을 대신해서 사도행전을 읽습니다. 이유는 구약성경에는 부활절 주간에 적절한 말씀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은 우리들 모두가 꿈꾸는 이상사회란 어떤 곳일까에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초대 기독교 공동체는 이상사회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32).

요즘 선거철이어서 더욱 더 행복한 삶이랄지, 잘 사는 것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요즘은 행복지수라든지 대학평가라든지를 할 때 데이터로 비교 가능한 평가방법을 시도하곤 합니다. 여기에는 주로 두 가지 데이터를 요구하는데, 하나는 양적/量的인 객관성, 성취도, 시험점수 등을 따지는 정량평가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질적/質的인 주관성, 인성, 적합성, 가능성 등의 정성평가라는 게 있습니다. 초대 기독교는 개인보다는 공동체적인 삶을 강조함으로 마음과 뜻을 하나로 묶을 뿐 아니라, 소유에 있어서도 서로 나누고 협력하는 공동체적인 삶을 지향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문동환의 <새벽의 집>이나, 원경선의 <풀무원 공동체>가 그 모델이 되었는데, 10년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당시에 풀무원 공동체에는 욕심 뽑기라는 작은 벽보가 기둥마다 붙여있었습니다. 인간의 치명적인 약점이 바로 욕심이었던 것입니다.

 

재물과 재능은 모두 내 것이 아니라는 정신이 중심에 있었습니다(33-35).

천국의 모형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들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10:25-37) 들려주셨습니다. 이 비유는 영생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팔을 안으로 굽히는 이기적인 사람과 팔을 밖으로 뻗는 이타적인 사람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세계 10대 부자 중의 한 사람인 워렌 버핏(94)이 있습니다. 그는 투자의 귀재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재산의 85%370억불을 5개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세 명의 자식은 대학도 졸업하지 못했다 합니다. 그는 55년 전에 구입한 집에서 살고 있고, 20년 이상 차를 타다가 최근에는 중고차를 구입했다 합니다. 재능이나 재물은 필요한 사람에게 써져야 합니다. 영원한 삶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비유는 함께 사는 세상이었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 온갖 욕심으로 추하게 살다가 천국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기자는 구부로의 레위 사람 바나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36-37).

우리들 역사에는 빛나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지중해 가운데 있는 섬 구부로의 레위 사람 요셉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레위 혈통을 받은 사람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별칭이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인 바나바가 되었습니다. 그는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 곁에서 손을 잡아주고, 눈물을 같이 흘려주고, 음식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자신의 밭을 팔아 사도들이 잘 사용하도록 그들 앞에 내어놓았습니다. 1980년대 풀무원 공동체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을 때, 부산 YWCA에 세워놓았던 시각장인인 자원봉사클럽 <등불회>가 봉사자들이 줄어들어 문들 닿게 생겼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4년의 각고 끝에 대구대학에서 공부하는 10명의 시각장애우들을 돕고 있었습니다. 저는 무심코 자원봉사자 교육비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한 노인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3. 오늘 저는 주성농인교회(우슬초 목사 시무)에서 설교를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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